2026-04-05 부활주일설교
거룩한 사람은 썩지 않습니다
시편 16:8~11
세상에는 힘든 문제가 많습니다. 사람이 몸이 아파도 힘들고, 돈이 없어도 힘들지만, 몸이 건강해도 마음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내가 하지 않은 일로 누명을 쓰고 욕을 먹을 때 가슴을 열어서 보여 주고 싶지만, 가슴을 연다고 진실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죽을 것같이 억울할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고, 박윤선 박사의 어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억울하면 억울한 채로 죽어라.”
억울해서 죽을 지경인데 그것을 밝히려 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그냥 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또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오늘 그 비결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우연히 동영상을 하나 봤는데 중국 드라마였습니다. 그 후에 알고리즘이 비슷한 영상을 추천해 줘서 몇 번 더 보았습니다. 제가 본 중국 드라마의 특징은 신분 속이기와 남의 신분 인정하지 않기입니다. 엄청난 부자가 청소부나 거지로 위장하고 등장하자 사람들이 거지로 취급하면서 진행되는 유치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유치한 이야기에서 저는 한 가지 교훈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이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무시와 누명도 웃으면서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것을 가진 사람은 어떤 누명과 무시와 억울한 일도 견딜 수 있다는 이 사실은 우리 예수님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감사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폭도들에게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식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재판은 바로 예수님이 받으신 빌라도의 재판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죽일 죄가 없다고 세 번이나 말하고 사형을 선고했거든요. 죄가 없 없이 사형당하는 것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빈정거리고 모욕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는 로마 병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마 27:27~31)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님이 못 박힌 장소는 높은 곳이었고 그 앞에는 큰 길이 있어서 행인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마 27:39~40)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유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 심지어 옆에 못 박힌 진짜 죄인도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마 27:41~43)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기 직전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유대인이라면 다 아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시편 22편 구절 그대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일부러 엘리야를 부르는 말이라고 조롱하며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 주는지 보자고 빈정거렸습니다.
(마 27:46~49)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다고 세 번이나 선언한 빌라도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데 로마 병사, 유대인 지도자, 지나가는 행인, 십자가에 처형된 강도까지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고 비난하니 예수님은 그 억울함과 원통함을 도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오늘 그 비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그 고통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옆에 있는 강도가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 달라고 했을 때 진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참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죽어야 그 강도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예언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억울해서 안 되겠다 싶어서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1000년 전에 메시아의 부활이 예언되었다는데 그 예언의 성취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시되 예언대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입니다.
메시아가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은 시편 16편입니다. 10절에서 메시아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신다고 예언합니다. 동의 대구법(같은 말 반복)으로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기서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무덤에 두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개역 성경은 “썩게 하지 않으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부활 예언이고 여기에 예수님이 억울함을 참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재판과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며 온갖 비난과 조롱과 욕설을 들으셨지만, 예수님은 무능해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틀 후면 부활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사탄이 기절초풍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막으려고 구원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사탄의 종이 되어 사탄과 한패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해결하는 죽음입니다. 게다가 그가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까지 깨뜨렸습니다.
사탄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으나 여인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대가리를 밟아 뭉개어 버렸습니다. 사탄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이 모든 과정을 미리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그 고통과 억울함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시편 16:10의 첫 단어는 ‘이는(כִּי 왜냐하면)’인데 9절에서 마음이 기쁘고 영이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10절에서 말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11절에서 한 번 더 말합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실 것이기에 주님 앞에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9~10절, 그리고 11절을 요약하면 곧 부활하실 것이기에 그 고통과 그 억울한 누명을 견딜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2000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까마득한 과거에 발생한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미국인이 획기적인 암 치료약이 개발해는데 그 약이 감기약처럼 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 세계 사람에게 복음입니다. 앞으로 1000년이 지나도 그것은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이 지났고 앞으로 또 2000년이 지나더라도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입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의 시이면서 메시아 예언 시입니다. 다윗은 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않는다.
여기서 내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내 오른손으로 붙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는 말은 오른손으로 붙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람들 때문에 외롭고 괴롭습니다.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그래서 그는 1절에서 “나를 보호하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다윗은 2절에서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3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모든 즐거움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밤마다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결정적으로 9절, 그의 마음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 비결은 8절에서 여호와를 항상 모시고 그의 오른손으로 붙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8절에 중요한 단어 하나가 나오는데 “항상”입니다. ‘항상’은 히브리어로 타미드(תָּמִיד)인데 성전에서 매일 오전과 오후에 드린 상번제가 히브리어로 타미드입니다. 타미드(תָּמִיד)는 연속, 계속, 영속 등의 뜻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모시고 오른손으로 붙드는 것은 계속해서,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메시아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아서 썩지 않게 하신다는 말이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시는 다윗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메시아 예언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인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부활은 다윗에게도 해당하고 저와 여러분에게도 해당하는 약속입니다. 10절에서 메시아나 예수님을 썩지 않게 한다고 하지 않고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주의 거룩한 자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공로로 거룩하게 된 모든 신자도 성도입니다. (성도=거룩한 사람들)
고린도전서 1:2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우리 모든 신자는 거룩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거룩한 자는 무덤 속에서 썩도록 두지 않는다고 한 이 예언은 예수님에게도 해당하고 또한 저와 여러분에게 해당하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증거로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할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억울한 재판과 고통스러운 처형, 그 억울함 모든 조롱을 능히 견뎠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싶었고, 그런 능력도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참고 견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더라도 주님이 재림할 때는 모두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부활은 최후 승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기절초풍한 사탄이 우리 모든 성도가 부활할 때는 어떻게 될까요? 부활은 사탄을 향한 가장 확실한 복수입니다.
우리가 억울하고 원통하다고 화를 내면 무슨 소용입니까? 마지막 부활로 사탄과 악한 세상을 향해 보란 듯이 복수합시다. 이 믿음과 소망이 있으면 박윤선 박사가 말했듯이 억울해도 억울한 채 죽을 수 있습니다.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하나님을 오른손에 붙들고 우리 성도는 그 어떤 죄와 고통, 질병, 죽음까지도 넉넉히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