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것
2024. 4. 7(주일낮예배) 다니엘 6:25-27
여러분은 지켜야 할 것이 있는가?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다 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사람의 눈은 중요하다. 허영만이 쓴 꼴 이라는 만화를 보면 관상적으로 볼 때 눈꼬리가 올라가 있으면 그 사람은 사나워보이고, 또 눈꼬리가 내려가 있으면 그 사람은 순하여 보인다. 눈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주는 첫인상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눈은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장기이다. 우리 몸은 입력기관과 출력기관이 있다. 예를들면 코는 입력기관으로 공기를 우리 몸으로 넣는다. 그래서 폐를 통하여 심장을 움직이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눈과 귀도 입력기관으로 우리 뇌에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뇌는 눈과 귀의 정보를 통하여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눈이 잘못보고 뇌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면 뇌는 잘못된 명령을 내려서 몸을 잘못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눈을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은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눈썹을 가지고 있고, 또 손눈썹과 눈꺼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3단계로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눈에 이물질이 들어오면 눈은 눈물샘을 터뜨려서 눈의 각막이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한다. 눈은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호하고, 또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은 무엇을 소중히 여겨서 보호하고 있는가? 다니엘 1장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와 지식이 풍성한 소년을 데리고 와서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에게 왕의 진미를 먹였는데, 그들 가운데 다니엘과 3명의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환관장은 다니엘과 3명의 이름을 개명을 시킨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 때 창씨개명이라는 이름으로 이름을 바꾼 것처럼 환관장은 다니엘과 3명의 친구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바꾸어 버렸다.
환관장이 어떻게 그들의 이름을 바꾸었는지 다니엘 1장 7절을 읽기 바란다.
(단 1: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환관장은 다니엘과 3명의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이름을 이렇게 바꾼다.
다니엘(하나님이 심판하신다) 벨드사살(벨이 사랑하는 자)
하나냐(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사드락(태양인에게서 빛을 받았다)
미사엘(하나님은 누구신가?) 메삭(누가 사크 여신과 같으랴?)
아사랴(여호와가 도우셨다) 아벳느고(불의 신 느고의 신실한 종)
자막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니엘과 3명의 친구는 모두 이름에 하나님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환관장은 그들의 이름에서 하나님을 빼고 당시 그들이 섬겼던 벨, 태양, 샤크, 불의 신 느고를 넣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이 믿는 신의 아들로 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의 이름은 한 번도 벨드사살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이겠는가?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을 때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한다. 그런데 다니엘이 해석하였을 때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단 2: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꾼 꿈의 내용과 해석이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들에게 꿈과 해몽을 말하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난 느부갓네살은 모든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들을 다 죽이려 군대장관 아리옥에게 명령한다. 그런데 다니엘이 그 꿈과 해몽을 하였을 때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하나님은 모든 신들 중에 참된 신이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신으로 다니엘을 변화시키려 하였는데, 오히려 자신이 변화시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다니엘 6장에서도 또 나온다. 다니엘 6장을 보면 메데 왕국의 마지막 왕 다리오 때에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이유로 사자굴에 들어간다. 그렇게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을 이튿날 아침에 찾아가서 다니엘아 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니엘이 살아있는 것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이시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단 6:26-27) 라고 고백한다.
정말 놀랍지 않는가?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난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다니엘은 바벨론의 그 문화와 억압 속에서 자신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그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그 답을 알고 싶은 분은 다니엘 6장 23절을 읽기 바란다.
(단 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유다의 멸망으로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다. 그래서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야 했고, 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름도 바꾸어야 했다. 아니 다니엘은 기도에 대한 제한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이 믿음을 지키며 살았더니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계심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중히 여겨서 지키고 있는가? 4월 13일(토) 결혼하는 주남이는 출석하는 교회에서 결혼예비학교에 참석하였다. 그때 목사님이 주남이에게 집뜨리를 할 때 친구가 침대에 누워도 되냐?고 물으면 어떻게 할 건지?를 물었다. 그때 아무 생각없는 주남이는 침대에 한번 누워보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될까? 하는 생각에 괜찮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주남이의 대답에 얼굴이 어두워진 목사님을 보면서 침대를 더럽힐 수 있어서 안된다고 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 담임목사님은 며느리 될 아이에게 소영자매 주남 형제와 결혼하면 많이 힘들겠어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왜 목사님이 제 며느리에게 힘들겠다고 말했겠는가? 주남이가 집에 와서 저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 질문에 저는 단번에 안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침대는 소영이와 나 단둘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누울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제 대답이 정답이 아닌가? 결혼하기 전에 주남이는 친구가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친구와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결혼하면 소영이가 제일 중요해서 소영이만 단둘이 공유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결혼을 했는데, 여전히 친구가 제일 중요하고, 또 자기 생활 패턴이 중요해서 그것을 강요하면 부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혼은 소중한 것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돈이 제일 중요하고, 자기개발, 여가생활이 제일 중요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면 예수님이 제일 중요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예수님을 믿은 후 중요한 것이 바뀌었는가? 어느 목사님은 설교 중에서 빌립보서를 설교하면서 허영(3절)과 비움(8절)에 대한 비교를 해 주었다. 허영(케노독시아)은 케노스(텅비다)와 독사(영광)의 합성어로 헛된 영광이라는 뜻이다. 쉽게 설명하면 텅비어서 영광이 없다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 위하여 땀흘려 일하고, 또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런데 내 삶에 영광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8절) 라고 할 때 그 비워가 허영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었다. 그런데 자기를 비우고 이 땅에 오셔서 40일 금식하여서 배고픔을 느끼고, 또 땀방울을 피방울같이 흘릴만큼 고뇌의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당신의 영광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일에만 집중하신 것이다.
그러한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신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한다.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케노스에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과 헌신을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는 허영과 예수님이 가지는 비움의 차이는 무엇인가? 허영과 비움은 모두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허영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는 수고와 헌신인 것이다. 이러한 수고와 헌신에는 영광이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그 비움에는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허영된 삶을 사는가? 비움의 삶을 사는가? 주남이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혼주로서 인사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주례를 해 주기로 한 주남이 교회 담임목사님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2개월 동안 출타하면서 제가 주례를 서게 되었다. 그래서 제가 주례를 서게 되면서 혼주 인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혼주 인사를 여러분들께는 꼭 들려주고 싶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혼주인사를 처음으로 기록해 보았다.
그 혼주 인사를 지금 읽어도 되겠는가?
바쁘신 가운데 오셔서 축하해 주신 하객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1993년 7월 5일 신랑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32년(1만5백1십1일)이 지난 지금 제가 섰던 자리에는 주남이가 서고, 저는 혼주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제가 저 자리에서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살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 주남이도 30년이 지난 어느날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남이도 오늘 아비가 고백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는 가정을 세워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오셔서 축하해 주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가 왜 이렇게 인사를 하려 하였겠는가? 제가 주남이 결혼을 앞두고 주남이를 낳고 키우던 날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빠가 경제적으로 참 힘들 때 주남이는 태어났다. 그리고 주남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서울에 있는 교회로 사역지를 옮겼기 때문에 학교에 입학해서 친구는 한 명도 없고 사투리를 써서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주남이가 중학교 입학할 때 자여교회 부임을 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좀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해서 학교를 다닐 때 좋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중학교 입학을 했는데, 학원을 다 끊었는데, 왠 선생님이 찾아와서 주남이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다. 아니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학원선생님이 무료로 가르쳐 주겠다고 하여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배워야 할 때 주남이는 다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남이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은혜를 받고 사는 우리 삶에 무엇이 가장 소중한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