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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2023년 시사사작품상 특집_ 대담
시의 크레바스 / 이담하 · 김영찬
낮잠은 밀린 잠의 이자
자꾸 잠의 빚을 진다
떨어지지도 달아나지도 않는 잠
매일 갚아도 원금보다 늘어나는 이자
잠이 들어서도 중얼거리며 갚는 중이다
― 「낮잠」, 『다음 달부터 웃을 수 있어요』 전문
김영찬 : 이담하 시인님, 안녕하세요. 어떤 필연으로 우리는 문우로서 알게 된 것일까요. 이담하 시인의 시집 『다음 달부터 웃을 수 있어요』를 주의 깊게 읽어보니 2019년 가을에 엮은 책입니다. 계간 <시사사>의 주선으로 우리가 만나게 된 계절도 코비드 팬데믹이 막바지에 이른 2023년 10월의 일이고요. 시월 상달의 첫 주말에 우리는 인사동의 한 카페 <아지오>에서 만나 서양 음식으로 점저를 먹었습니다. 그 카페 이름이 하필이면 ‘Agio’ 환전소라는 생뚱맞은 뜻의 스페인어입니다. 낯선 나라 낯선 문화에 접근하자면 그 나라 화폐부터 확보해 둬야하겠지요. 입국할 나라의 화폐로 바꾸기 위해 외지인이 모여드는 장소, 카사 아지오Casa Agio는 환전소라는 뜻이랍니다.
“사막을 건너는 바람과 다듬는 바람/ 나침반 자침이 바람의 방향을 가리키자/ 안식각을 이루는 해상도 높은 바르한”
― 「속수무책으로 부는 바람」 『다음 달부터 웃을 수 있어요』 부분
새로운 환경,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어휘로부터 출발하는 것일까요. 낯선 낱말이란 낯선 문명을 개방하는 열쇠, 게이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모르는 나라의 말, 낯선 언어관습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편입니다. 시인님의 시집을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쳤을 때 내 코앞에 바짝 다가선 어휘가 ‘안식각安息角 angle of repose’이라는 낱말과 ‘바르한barchan/barkhan’이라는 외국어였습니다. 나는 왜 이 두 단어를 모르고 있었을까요. 생경한 두 단어가 나에게 펼쳐 보인 충격은 횡사구, 듄dune과 같은 신비로움이었습니다. 그것은 데뻬이즈망 효과처럼 나를 설레게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모든 개념을 넘어 거기에는 하나의 뜰이 있을 뿐이다.
―잘랄 알 딘 알 루미Jalal al Din al Rumi
그런데 우리에게 시詩란 무엇일까요. 사막의 횡사구이거나 하나의 독립된 뜰? 잘 모르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막연한 질문일까요. 깊은 흐느낌의 주술일까요, 환희에 찬 탄성일까요. 아니면 일그러진 저주? 그것도 아니라면 곡진한 기도여야 할까요, 다만 묵언의 묵상(quiet time, QT )이어야 한다고 입을 닫는 이도 있겠지요.
이담하 : 김영찬 선생님, 처음 뵙습니다. 선생님 존함은 지면에서, 그리고 어떤 문학 행사에서도 뵈었지만 이렇게 처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시란 무엇일까, 나와는 얼마만큼의 거리일까라는 물음을 저에게 던진 적이 많습니다. 물론 물음에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해서 지금도 던지고 구하는 중입니다. 저는 시가 깊은 수렁 즉 ‘시의 크레바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의 균열에 빠지고 갇혔다가를 반복하는 무음의 제스처 같기도 하고. 가까이하려면 멀어지고 멀어졌다가도 다시 가까워지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고 봅니다.
김영찬 : 멋진 표현입니다. 많은 경우 시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간극, 크레바스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지요. 그 심연에 무언으로 다가 오는 시. 시를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전위적, 전투적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지요. 미술가는 눈을 크게 뜨게 하는 색채로, 음악가는 귀를 정화하는 멜로디로, 시인은 뉘앙스를 담은 짜릿한 언어로 차원 높은 공간을 구성합니다. 예술가는 대중을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려 의도하지요. 새로운 예술세계로의 입문이란 결국 새로운 언어로 환치되는 형상(eidos)이 아닐 수 없습니다.제 경우, 새로운 세계에 오감이 닿을 때 그것은 나를 전율케 합니다. 그래서 시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경우, 글쓰기의 비극이 발생한다는 생각입니다.
루나, 미안해요
당신의 뒤가 궁금해서 거꾸로 가는 날짜를 수집했죠
6구역 가가린 5구역 쥘 베른
중얼거리다 다다른 2구역 모스크바의 바다
― 「모스크바의 바다」, 『다음 달부터 웃을 수 있어요』 부분
여기에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쓰이는 건 당연하지요. 시는 필연적으로 전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담하 시인의 문학에서 아방가르드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이담하 : 선생님, 조금씩 어려워지는군요. 저 역시 진부한 예술의 관념과 형식을 부정합니다. 저의 좁은 안목으로 보면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예술작품을 보면 어떤 시대라도 아방가르드 지향성으로 왔다고 봅니다. 저는 시라는 장르는 맞춤이 아니니까 어떤 운동, 어떤 주의, 어떤 사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면 당연히 아방가르드의 혁신적 의미를 잊으면 안 되겠지만, 지나치게 아방가르드에 몰입하는 것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보면 낡은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선생님 질문에 합당한 답은 아니겠지만 아방가르드 의미를 법고창신의 정신적 필요성이라고 봅니다. 아방가르드의 의미에 너무 치우치면 버스 정류장에서 놓쳐버린 버스의 의미만 부여잡는 건 아닐까요.
김영찬 : 맞아요. 오늘의 아방가르드가 내일의 클리셰로 전락할 수 있다는 데에 아방가르드의 모순성이 있습니다. 이미 진부해져서 상투적인 아비투스로 변질된 문장을 그대로 밀고 나가지 않는 것이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가 되겠지요. 시는, 시라는 존재는 테라 눌리우스Terra Ullius, 무주지에 뿌려져 자유로울 때 존재감이 커집니다. 어떤 시는 스스로 절망할 용기까지 갖는답니다. 시는, 그 존재 자체로서 불편해질 권리조차 보장되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을 때 시는 비로소 시는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좋든 싫든 제가 내놓은 시가,
'어설픈 독자에게 어설프게 이해돼 엉뚱한 환대를 받기보다는 차라리 철저하게 오해돼 무시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스타일 그대로 과감하게 밀고 나가 한 편의 시가 온전히 독립된 자립 국가로 존재해야 한다.' 라고 적습니다.
어쭙잖은 독자에게 ‘어설픈 이해’를 구하느니 차라리 저주를 퍼붓겠다는 오기를 부린 시인이 샤를 보들레르였지요, 애독자가 없는 시를 써서 독자는 물론 평자에게 외면당할 각오, 외로움을 견뎌낼 의지와 용기, 고집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을 어떻게 감수할 생각인가요? 만일 독자와 평자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게 된다면?
이담하 : 시인은 원래 외면당한 사람 아닌가요. 시인이 시인이 아닌 사람과 같은 시를 쓴다면 그건 시인도 시도 아니겠지요. 요즘 시가 너무 어려워서 시집이 팔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좀 안 팔리면 어떤가요. 시집을 팔아 돈이 많이 들어오면 좋겠지만 기왕에 안 팔릴 시집이라면 내 무주지無主地에서 던지고, 따지고. 말하고, 욕하고, 화내고 싶은 시를 쓰려고 합니다. 저는 곱고 예쁜 시 보다는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시를 좋아해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씁니다. 저는 시가 외국어와 같다고 봅니다. 특정 나라의 언어를 모르면 어렵고 재미없듯이 독자와 평자도 시를 보는 눈이 없다면 시가 어렵다는 느낌이 들겠지요. 선생님께서 위에서 하신 말씀이 귀에 쏙 들어와 다시 옮겨 봅니다. 무주지에 뿌려져 자유로울 때 존재감이 커지는 시,
'어설픈 독자에게 어설프게 이해돼 엉뚱한 환대를 받기보다는 차라리 철저하게 오해돼 무시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스타일 그대로 과감하게 밀고 나가 한 편의 시가 온전히 독립된 자립 국가로 존재해야 한다.'
시인이 독자나 평자의 눈높이에 맞춰 쓴다면 그건 맞춤옷이 아닐까요. 저는 앞으로도 저의 무주지에서 저만의 글을 쓰려고 합니다.
김영찬 : 그래요 시인이란, 예술가란 원래 외면당한 사람 외면당할 운명을 감내해야 할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더구나 전위적인 예술에 목표를 둔 예술가는 더욱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방가르드라는 말 그 말 자체가 이제는 너무 낡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전투적 전위인지 한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귀를 번쩍 뜨이게 새로운 발상이나 이색적인 표현에 맞부딪치면 그 순간 번개 치는 짜릿한 전율이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것은 감각적 공습, 이것은 문학의 전투적 폭발 장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담하 시인의 대부분의 시는 마일드한 전위성을 기조로 진행되는 작품이어서 매우 신선하게 읽힙니다. 즉 과격한 아방가르드 쪽에 편입되지 않고 매우 절제된 전위적 표현이 행간 곳곳에 아포리아의 그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느껴지는 일종의 엑조티슴exotisme의 발현이라 할 멋진 표현들, 아방가르드와 깊이 연결된 기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은 충분히 전위적이고도 엑조티슴의 기초 위에 실현된 아포리즘의 보석들이지요.
빨간 모자가 돌아다니는 집집 조용히 방문을 닫는 집집…// 착한 사람만 선물을 받는다면// 한꺼번에 웃는 사람/ 한꺼번에 우는 사람
–「선물에 대한 오해」 부분
오줌을 누면서 눈과 귀를 떼어 놓는다
– 「조용히 하라는 쉬」 부분
진지하게 만들어져 진지하게 버려진 사물// 낑낑거리는 개처럼/벨 소리를 울리고 조용해졌다
– 「반려사물」 부분
공중에 매달린 나무 물고기가 소리를 내는 것은 물 밖의 일이고 물 밖의 소리다
그야말로 물 밖의 소리를 위해 몸과 내장을 빌려주는 안쪽의 소리,
비린내 나는 이명이 많았다
…(중략)…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는 말, 물고기가 물 밖에서 내는 소리
어쩌면 저렇게 물 밖의 소리를 낼 수 있나
물 밖의 소리를 내기 위해
척삭(脊索)과 근절(筋節)을 빼버린 뱃속에서 나오는 저 소리들
내 몫이 없는 숟가락 소리 같다
…(중략)…
낙엽 휩쓸리는 소리가 물소리처럼 들리는 화암사 우화루,
나무 물고기가 물 밖의 소리로 어고(魚鼓) 어고(魚鼓) 울었다
문득, 몸 뒤쪽에서 아가미가 생길 것 같은 저녁
― 「 아가미가 생길 것 같은 저녁 」 부분
아이고 아이고가 아니라 어고어고魚鼓魚鼓로 우는 시. 여기서 저는 이담하 시인의 마일드한 아방가르드 혹은 엑조티즘을 담보로 한 특유의 발성법에 매료됩니다. 주제를 바꿔서, 시시콜콜 싱거운 대담으로 들어갈까요, 시시콜콜, 때로는 시답잖게 뻥치는 이야기가 긴장을 풀어주지요. 시에서 pun이라는 것. 조악한 언어 휴희가 아니라 그냥 아무 말이나 서로 내뱉고 서로 부담 없이 들어주는 기쁨, 수다스러운 농담 짓거리가 때로는 우리를 무장해제, 해방해 줍니다. 시인님의 취미는 무엇인가요. 시 쓰기?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어떤 사람이 돼 있을까요?
이담하 : 생각나는 대로 시를 적다 보니 저의 ‘사과’에 대한 시를 읽어보고 어떤 분도 펀pun의 일종이라고 하더군요. 때로는 의외인 시를 쓸 때도 있습니다. 저는 버리는 것도 잘하지만, 스크랩하는 걸 좋아합니다. 거창하고 특별한 취미는 아니지만 시집박물관을 차릴 1차 목표로 시집 10만 권을 목표로 모으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거창한 국립이나 시립박물관을 떠올리고 그렇게 하는 줄 알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시집박물관이란 시집의 집을 지어준다는 의미로 작게 준비했던 것이지요. 시집, 동시집, 시조집, 외국 시집이 7천 권이 넘어섰을 때 김포의 어느 허름한 창고에 보관해 두고 몇 달에 한 번 찾아가다 보니 주위에 있는 고깃집에서 불 피울 때 쓰는 불쏘시개로 써서 나머지만 집으로 갖고 왔습니다. 집에 있는 시집은 겨우 2천 권 정도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상합니다. 15년 전 부천 경인 서점에서 시집을 400만 원이 넘게 산 적이 있지만 지금은 제 마음에 꽂히는 시집만 구입합니다. 결국 시는 쓰는 사람이 쓰고 쓰는 사람이 시집도 사는 거라고 봅니다. 또 다른 취미는 코카콜라 이미지 상품 모으기와 코인 수집입니다. 대한민국 동전 1원, 5원, 10원, 50원, 100원, 500원을 모두 합하면 666원입니다. 코인 앨범에다 동전들을 연도별로 끼워 넣다 보니 동전만 보면 발행 연도를 보게 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특히 코카콜라 캔의 빨간색은 제가 일곱 살 때 홍천강에서 처음 보왔던 강렬한 색으로써 태양 다음으로 뜨겁다고 봅니다.
김영찬 : 7천 여권에 달하는 시집을 소장했었다니 대단합니다. 그만큼 다독, 많은 시를 읽었군요. 언어를 다루는 탄탄한 실력과 시상을 밀고 나가는 저력이 그래서 시집 곳곳에 돋보이는 이유로군요. 독서의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어난 원적지가 홍천이라고 했지요. ‘코카콜라 캔 빨간색은 시인님이 일곱 살 때 홍천강에서 처음 보았던 강렬한 색으로써 태양 다음으로 뜨거운 느낌’이었다고요? 홍천은 대체 어떤 곳인가요. 홍천에 대하여 말해줘요. 거기 침묵의 강이 붉은색 핑크빛 홍조를 띠고 수줍게 얼굴 붉혀 말없음표를 달고 소용돌이치는 토포필리아에 대해. 아니면 시인이 설정하는 아토포스가 따로 있을까요. 굽이쳐 흐를 것만 같은 은하수 건너 헤테로토피아로 존재하는 홍천에 대해서 더 말해줘요. 시인을 낳아준 그곳에 대해, 그 하늘에 대한 바람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이담하 : 저는 좋지도 나쁘지 않은 고향에 대해 애향심이 적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다른 집보다는 땅과 산도 소유하고 부지런하며 이재에 밝으신 아버지 덕으로 밥 먹고 살기는 어렵지 않게 살았습니다. 형제들이 어려서 천연두 마마나 홍역으로 여섯 명이나 죽고 넷만 살아나 부모님이 노심초사로, 남아선호 편애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집안 고부갈등이 부부 갈등으로 번져 부모님의 부부 싸움을 보고 겪으며(부모님은 이혼도 못 하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싸우고 산 전형적인 부부) 유년 시절을 보낸 저의 고향은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홍천강의 강물은 지금도 말없음표로 흐르고 있지요. 저는 고향을 떠난 지 46년 정도 되어 갑니다. 어렸을 때 사방이 산인 시골에서 홍천강은 저의 놀이터이자 친구이며 분노이며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입을 열게 해준 나의 강이라고 할까요. 저를 20년 동안(홍천을 떠난 후) 수영으로 이끌었던 홍천강, 저를 숨겨주고 저를 드러나게 했던 아지트였다고 봅니다.
김영찬 : 홍천을 떠나온 지 46년, 오래됐군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화가 어디쯤 도달했나요. 시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겠죠. 한 가지 더, 이담하 시인님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 알고 싶군요. 청춘의 날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아무리 난삽한 문장이라 하더라도 거기엔 시인의 체취가 묻어나는 법이니까요. 이것은 시의 배후를 캐묻는 질문이 되겠습니다(흐흣~).
이담하 : 요즘 세대와 비교하면 저는 결혼을 일찍 해서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배후’란 말은 참 따뜻한 말 같아요. 시인은 별것도 아닌 것을 별것으로 보는 사람이 아닐까요. 제가 쓰는 시는 언제나 고백하지 못한 말이라서 가장 약한 부분이지요. 어쩌면 분노, 모순에 항거하는 영역에서, 의뢰인 없이 혼자 하는 굿이라서 위안의 영역이라고 봅니다.
김영찬 : “의뢰인 없이 혼자 하는 굿이라서 위안의 영역”이라니 멋진 발상입니다. 이담하 시인님은 포에트리 슬램poetry slam에 대하여 어떤 생각인가요. 종이와 글자를 떠나있는 시적 활동, 말하자면 글자로 쓰는 대신 시적 행위로 표현된 일종의 행위예술이거나 백남준이 즐겨 했던 플럭서스 운동 같은 것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참고로 저는 종이에 시를 쓰는 시 쓰기 대신에 행동으로 나를 표현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이담하 : 누군가 ‘요동치는 심장을 갖은 사람이 시인이다’ 라고 한 말을 기억합니다. 백남준 아티스트 작품을 2011년 여름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보았습니다. 상식적, 상투적 관념에서 벗어난 경지에 이른 작품을 보면서 표현의 다양성, 구성의 특이성이 경이로웠습니다. 시도 표현 수단이라서 상투적, 상식적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면 오늘의 시는 어제와 달라야 하고 내일의 시는 오늘 쓴 시와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작가마다 작품마다 표현과 방식이 다른 생산자일 때 슬램이나 플럭서스에 접근하는 게 아닐까요, 선생님.
김영찬 : ‘요동치는 심장을 갖은 사람이 시인이다’ 라는 말. 당연한 얘기지만 되새겨 듣게 됩니다. 그밖에 질문들, 저한테 역으로 질문하거나 질문할 문지를 제안해주시겠어요? 역질문이라는 것. 질문>역질문>반론> 방식의 대담도 좋을 테니까요.
이담하 : 선생님의 현문우답賢問愚答에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선생님의 시집을 읽고 눈길이 머물렀던 시가 있습니다. 「모자란 모자」, 「르네 마그리트 전」, 「오후 세 시에 부는 바람」,
「캡틴 캡, 모자 모자 모자」. 모두 모자가 들어가서 친숙했습니다. 제가 모자를 좋아해서 120개가 넘었는데 다 버리고 60개 정도 남아 있습니다. 모자가 들어간 시를 쓰신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요.
낙타는 길을 떠나야 자유롭다
ㅡ 「낙타」 부분
내가 쓴 시가 북두칠성 밥주걱에 걸려 국물 든든한 똥빼 채워줄 확률은
ㅡ 「실없는 확률론」 부분
선생님의 시를 읽다 보면 선생님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독특한 구조와 구성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시류나 시풍을 찾을 수 없는 시를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강물이라는 스크린에 돌을 던지면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 있는 무정형의 시, 느낌은 오는데 이해가 잘 안 가는 그림 같습니다.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의식에서, 정형에서 인위적으로 멀어지려고 하시는 건지, 시를 쓰시는 선생님만의 방식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의 시집을 읽고 보헤미안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아침이 오려고 합니다. 여기까지 이메일을 보냅니다.
김영찬 : 졸작시를 읽고 과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만의 문체를 갖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는 그 자체로서 자유로운 영혼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시를 쓰면서 제 시에게 이래라저래라 주문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의미의 짐을 가볍게 유도하는 편입니다. 옥타비오 빠스가 말하는 "시가 시를 쓰도록" 놔두는 편이지요. 저를 찾아온 시, 시상이 맘대로 풀려나가도록 방목상태로 풀어줍니다. 그러면 시는 가벼운 부력을 받아 의미는 산화되고 이미지만 남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이지요.
시에서 의미를 찾거나 의미를 붙이는 건 독자의 몫. 작품을 스치듯 느낌만으로 읽어도 충분히 심오한 감상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탈고합니다. 그래서 제 시가 난해하다고 할 수 있으나 저는, 학습되지 않은 어설픈 독자가 어쭙잖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느니 차라리 소통이 안 되는 불통의 미를 갖춘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대화가 시론 쪽으로 기울었네요. 이담하 시인께 영향을 준 시인은 누구일까요.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이나 사사하고 싶었던 시인 좀 소개해 주시면 다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데 도움 될 것 같습니다.
이담하 :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열세 명이나 되는 대가족 속에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국민전과, 〈표준전과,〈수련장〉 등이 있었습니다. 숙제로 내준 짧은 글짓기를 친구들은 전과를 보고하는데 저는 수십 개씩 해서 친구들에게 주고, 위문편지 인사말 역시 몇 개씩 써서 친구들에게 준 적이 있지요. 학교에서 교과서적인 심심한 시를 보다가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아요) 박남철 시인의 시 『독자놈들 길들이기』(『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를 읽고 통쾌, 상쾌, 후련, 시원한 느낌을 받았죠. 「꼴찌를 위한 즉흥곡」(좋아하지만 외우지는 못해요) 또한 저를 사로잡았다 할까요. 시인은 아니지만 『저지대』,『숨그네』를 쓴 헤르타 뮐러 작가와 그의 작품을 너무 좋아합니다.
김영찬 : 어린 나이에 박남철의 시집 『독자놈들 길들이기』에 감동했다니 대단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박남철의 그 시집을 파격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시(본인의 작품 포함)나 애송하는 시 좀 소개해 주시겠어요? 그러면 저는 이담하 시인님의 역작들, 이번 <시사사 작품상> 수상작품의 일부를 호명하겠습니다.
이담하 : 제 시를 제가 고르기가 좀 쑥스럽습니다. 꼭 한 편을 고르라고 하신다면 작품상 후보작으로 응모한 시가 되겠지요.
다른 시간이 더듬었던 갈라가 전부였고
갈라의 죽음이 불행이었다면
오빠가 전부였고 오빠의 죽음이 불행이었던 나에게
가방도 주고 가면 더 좋았을 오빠
시계만 주고 가면 어떡해요
시간을 데리고 노는 오빠
비너스를 사랑해서 아무 때나 열어보려고 서랍을 달았군요
낮이면 열어보다가 밤이면 만져볼 때
뽀얀 젖이 나와 갈증을 해소하던 오빠
시간을 걸어 놓은 광인(狂人)이었던 최고의 오빠
가끔 오빠의 아이를 잉태해요
도마뱀을 잉태하고 새를 낳았다는 가십으로
태어나자마자 츄파춥스를 물고 저항의 극점으로 날아가죠
오빠에겐 갈라가 있고
광수 오빠에겐 사라가 있어서
러시아에서 온 쿠쉬 오빠를 만나고 왔어요
오빠가 주고 간 시계는 사랑할 때 빼고는 멈추지 않으니까
백야의 갈라가 될지 몰라요
오빠를 부러워하는 오빠들이 득실거려서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고 ‘수염’을 시작하겠어요
ㅡ 「달리 옵빠」 전문
김영찬 : 달리의 그림 ‘시간의 연속’ 등을 대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풀어낸 시입니다.
“(살바도르 달리) 오빠에겐 갈라(달리의 아내가 된 10년 연상의 여인. 달리의 친구인 뽈 엘뤼아르의 아내였다)
광수(고故 마광수)오빠에겐 사라(마광수 소설 『즐거운 사라』가 있어서
(그리고) 러시아에서 온 쿠쉬 오빠(러시아의 초현실주의 화가, 블라디미르 쿠쉬)를 만나고 왔어요”
두 명의 슈르레알리스트 화가와 한 명의 소설가(음란물이라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뒤 세상을 떠난 미광수)를 등장시킨 서사가 엉뚱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로군요. 이담하 시인 특유의 활달한 엔딩변환이 돋보이는 작품, “(살바도르 달리)오빠가 주고 간 시계는 사랑할 때 빼고는 멈추지 않”는 다는 표현 등 아포리즘의 압권입니다.
“백야의 갈라가 되어 달리나 쿠쉬의 아내 역할을 하고 싶다”라고 쓸 정도로 초현실주의에 매료된 화자가 풀어낸 포스트모던한 서술방식으로 미루어 시인님이 앞으로 나아갈 전도를 가늠케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담하 시인님의 시사사 작품상 수상을 축하해야겠습니다. 계간 『시사사』에서 이담하 시인님을 작품상 수상자로 확정했다는 낭보가 방금 저한테 날아들었습니다. 이담하 시인을 아끼는 한 선배 시인이 일갈했듯이 작품의 우수성에 비해 그동안 너무 과소평가된 이담하 시인께 이번 작품상 수상은 이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될 계기가 될 것입니다. 2023년 『시사사』 가을호 〈시사사 포커스〉 발표작 중에는,
코비드19로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춰 입었던 얼굴 팬티/ 요즘은 입은 사람보다 안 입은 사람들이 많아요/ 남들은 다 벗는데 나만 입고 있을 수 없어서 벗었죠/ 이젠 남들보다 먼저 벗을 때가 많아요/ 몇 번 벗다 보니 입지 못할 것 같아요.
― 「얼굴 팬티」 부분
위의 시 「얼굴 팬티」 에서 보듯이 동시대에 우리가 처한 역경(팬데믹 상황)을 앙가쥬망의 자세로예리하게 성찰하는 빼어난 작품도 돋보이는군요. 제가 뽑는 이담하 시인의 대표작은 「토마토 공방」입니다. 진정한 비평은 〈평자의 편견조차 무시될 수 없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저는 「토마토 공방」을 이담하 시인의 대표작으로 추천합니다. 제목부터 인상적인 토마토는 공작소 즉 공방에 와 있습니다. 도대체 이 시인은 토마토를 그냥 토마토로 놔두질 않는군요. 이담하 시인에게 토마토란, “소녀들은 토마토를 자르며 초경을 시작”하는 원초적인 질서로 부여하게 되는 존재이며, 그것은 “당신도 아시다시피 손끝에서 붉은 피가 쏟아지”고 그 붉은 피는 다시 "태양으로 폭발"하고 급기야는 “뿔로 자라고 양의 피로 녹슨 철로 붉은색을 다 쓰면 바람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바람은 무늬가 되고 매듭이 되"고 급기야 “칼”이 되어 소녀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칼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밤이 계속되면 토마토를 잘라” 버리게 되는 신화적 스토리로 환치됩니다.
앞으로 「토마토 공방」에 비견할 만큼 빼어난 작품으로 우리 문단에 우뚝 서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2023년도 시사사 작품상 수상을 거듭 축하합니다.
밤이 되면 토마토를 잘라요 당신도 알겠지만 토마토에는 천 개의 태양이 있죠 토마토가 일제히 폭발하죠 우샤크 지방에서는 토마토를 정확하게 반으로 자르는 소녀가 아름다운 신부가 된다는 전설이 있는데요 토마토에는 힘줄처럼 숨어있는 뿔이 있고 양의 피로 녹슨 철로 잘 쪄진 담뱃잎으로 꽃과 이불과 아름다운 혼례품을 만드는 소녀들은 토마토를 자르며 초경을 시작하죠 당신도 아시다시피 손끝에서 붉은 피가 쏟아지죠 붉은 피는 다시 태양으로 폭발하고 뿔로 자라고 양의 피로 녹슨 철로 붉은색을 다 쓰면 바람이 남아요 바람은 무늬가 되고 매듭이 되고 칼이 되죠 소녀들은 칼에 익숙하죠 밤이 계속되면 토마토를 잘라요 당신도 알겠지만 토마토에는 천 일의 태양이 있고 소녀들이 일제히 밖을 내다보고
ㅡ 「토마토 공방」전문
김영찬|시인 2002년 「문학마당」과 2003년 「정신과 표현」에 작품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제9회 시사사 작품상 수상소감 / 이담하
안녕하십니까.
저는 9회 시사사 작품상 수상자인 이담하 입니다.
저는 제 시도 못 외우니까 수상 소감을 보고 읽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먼저 이 자리를 열어주신 백석대학교 관계자분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현대시와 시사사 발행인이신 원구식 선생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우리 시사사 선후배님들과 이 자리를 위해 참석하신 분들께도 감사 인사드리고 큐브 동인과 동행하신 분에게도 감사 인사드립니다.
제가 2011년 시사로 등단해서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한 시간이 적었는데 큰 상을 주셔서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시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