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재 / 목사(덕천교회), 철학박사, '그 열매, 진주보다 더 아름다운...'으로 제11회 활천문학상 최우수상 수상(단편소설 부문)
단편소설 : ‘슬픈 우정’
1.
서울 종로3가 탑골공원 주위는 생각한 것보다는 많이 변해 있지 않았다. 그래도 생소한 구석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길을 찾는 데 변수가 되지 못했다. 전철을 내리기 전 다시 한번 위치 문자를 확인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지하철1호선 종로3가역에 내릴 것. 1번 출구로 나와서 탑골공원 방향으로 100m쯤 오다가 오른 쪽으로 큰 길이 나옴. 그 길 따라 50m 정면에 1층 '삼포가(三浦街)' 음식점 보임"
반창회 회장을 맡고 있는 태훈이가 일시와 장소를 처음 보내 준 것을 보면 이 모임 장소도 그가 정했을 것이다. 음식점을 찾아 가는 짧은 시간 중에도 두 가지를 생각했다.
'삼포가'란 이 상호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가 그 하나이고, 또 이런 장소를 정하는 데 오랜만에 나타나는 나를 배려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 두 번째이다.
‘삼포가’는 한자로 석 삼(三)에 개 포(浦), 거리 가(街)를 사용할 텐데, ‘삼포’라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국적 지명도가 있는 이름은 아니다. 그렇다면 혹시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
다리가 불편한 나는 먼 거리를 걷는 데에 어려움이 따른다.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 내 생활은 모든 게 단층으로 통한다. 평지 중심이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회장이 전철역에서 가까운 거리 그것도 1층으로 모임 장소를 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고마움이 일었다.
금요일 오후 6시부터 저녁 식사를 하면서 대화의 장을 펼치기로 했다. 학교 동기나 친구들의 모임은 약속 시간 전후로 들쭉날쭉 도착하는 게 상례다. '내가 그렇게 늦은 편은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삼포가 문을 들어선 시각이 오후 6시 15분이다. 약속한 시각보다 15분 늦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참석하기로 한 사람들 중 내가 마지막이었으니. 10 명의 친구들이 붙인 테이블을 닥지닥지 채우고 있었다. 서울 온 김에 한 가지 일을 보고 오느라고 좀 늦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친구들은 불편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해 와 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기꺼워들 했다.
악수를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신묘하다. 나까지 포함해 11명이 자리를 함께했는데,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이름들이 정확히 떠오르는 것이다. 이 중5명은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친구들이다. 반세기만의 해후라고 할 수 있는데도 이름과 얼굴이 함께 기억되다니...
요 몇 년 사이만 해도 변한 것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작년 반창회 모임에 참석했던 웅길이는 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얼마 전 우리와 영별의 관계가 되고 말았다. 또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2명의 고교 동기가 최근 유명을 달리해 우리를 슬프게 했다.
고희(古稀)가 채 안 된 나이들이다. 우리 나이가 예전 같으면 상노인에 속했을 것이지만 100세 인생 운운하는 지금은 빠른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태 전만 해도 동기 단톡방 알림 부고 문자에 부모상이 대부분이었다. 한데 지금은 친구 본인 상 부고가 종종 날아든다.
젊었을 적 친구들과의 이런 저녁 식사 테이블 위엔 소주 등 술병이 즐비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음주 끽연을 절제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건강에 대한 주제의 대화가 길어진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때다.
예외 없이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들 소식이 등장한다. 지금 살아 있는 분들과 돌아가신 분들이 교착해서 전달되어 온다. 이럴 때 선생님들은 이름보다는 별명이 더 자연스럽다. 손탈로찌(지리), 개미(영어), 오리(고전), 독사(국사), 007(국어)...
이 중 몇 분은 대학교수로 일하다가 오래 전 정년퇴직하셨고, 또 어떤 선생님은 사업가로 변신, 크게 성공하셨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독어를 담당하셨던 선생님은 3년 전까지만 해도 동기 모임에 참석해서 어른의 면모를 보여주셨다. 지금은 거동이 많이 불편하시다고 한 친구가 전했다.
이어서 친구들 소식이 등장한다. 대학교수로 있던 친구는 은퇴하고 봉사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한 친구는 지금 도보로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 있다는 소식, 주먹 써클 멤버로 사고를 쳐 졸업을 못한 한 친구는 방송 자재 제조 사업으로 성공해 떵떵거리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2.
나의 학창 시절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는 상호가 나와 눈을 맞추면서 물었다. 상호는 2, 3학년 같은 반이었다. 고교 생활 2/3를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셈이다. 그 아이(이재학)만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져 온다. 착하고 예의 바르고 공부도 잘했던 친구였다.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재학이는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네. 자네와 단짝이었잖아. 다리가 불편한 친구를 곁에서 도와야 된다면서 짝을 자청하기도 했던 걸로 알고 있고... 고학 생활로 점심을 챙기지 못하는 자네를 위해 도시락을 두 개씩 싸 와서 정겹게 먹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도 따뜻하게 보였었지."
상호가 꺼낸 ‘재학’이란 이름에 잠깐 울컥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나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는 어렵게 졸업했지만 중학교 진학할 꿈을 접어야 했다. 한 날 밤 부산역에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무조건 상경을 했다. 중국집 심부름 일을 하다가 연분(緣分)을 맺은 것이 청량리 대왕코너 구두 닦기 형을 돕는 일이었다. 나에겐 두 번째 일터였던 셈이다.
그때 사글셋방을 얻어 나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이 동대문구 답십리였다. 번화한 청량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방값이 쌌다. 당시만 해도 논밭이 즐비한 서울 안의 농촌으로 인식되던 곳이었다. 50여호 모여 사는 마을이었지만 중학교 다니지 못하는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또래 아이들 교복 입고 등하교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선입견이겠지만 아이들이 나를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는 듯했다. 부모도 없는 고아 주제에, 거기에다 학교도 다니지 않는 장애인인 주제에... 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란 말로 위안 삼았다. 하지만 스스로의 위로에 머무는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낮에는 슈션보이(shoeshine boy, 구두닦이), 밤에는 공부하는 아이(?), 이런 스스로의 자리매김이 없었다면 소년기의 내 삶은 참으로 공허했을 것이다.
3.
고입 검정고시 발표 날이다. 난 발표장을 가지 않으려 했다. 합격 가능성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량리 주먹을 꽉 잡고 있던 판길이 형이 마침 슈션보이센터(구두닦이 통을 두고 있는 곳을 이렇게 불렀다. 그 동네에선 ‘구두닦이’란 단어를 몹시 싫어한다.)에 들렸다. 이곳의 실질적인 소유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가끔 들려 수금을 해 간다. 이런 곳을 몇 군데 갖고 있는 형의 수입이 짭짤하다는 뒷말이 돌았다.
전혀 예기치 못했다. '의리의 판길이 형'이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나와의 관계에서 그것을 확인하게 되다니! 그는 천원 권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버스 요금 30원 할 때이다.
"'연재야, 시험은 1%의 합격 가능성이 있어도 가 봐야 하는 거다. 1%가 100%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시험이야. 장애인의 몸으로 '구두 일'하는 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짠했다. 네가 말이야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면 이 일 하는 동네에서 최고 학력이야. 알았지?"
감동받을 일이 드문 팍팍한 생활에서 오는 모처럼의 진한 울림이었다. 합격 여부도 여부지만 두세 시간 일에서 자유롭게 되는 게 우선 좋았다. 동대문교육청은 거리에 비해 더 멀게 느껴졌다. 합격 가능성이 옅은 것이 반영된 이유가 클 것이다. 동대문교육청 정문을 지나 왼쪽으로 200여 m쯤 돌아가니 큼직한 게시판이 있었다.
'1973년 고입 검정고시 합격자 명단'이란 청색 매직 글씨 밑에 수험번호와 이름이 깨알 같이 적혀 있었다. '청색'은 희망을 상징하는 색깔이라지. 1%의 가능성이 합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길 형의 말이 립서비스라는 것을 잘 안다. 보나마나한 결과치를 갖고 이곳에 온 자체가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냥 돌아갈까? 아니, 기왕 왔으니...’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수험번호 1004 김연재'다른 합격자의 번호와 이름은 하얗게 변해서 보이지 않고 내 이름만 대문짝만하게 확대되어 눈에 와 꽂히는 것이다. 나는 기절할 뻔했다. 1%의 가능성이 정말 합격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오, 감사합니다.
4.
입학식이 있던 날 또 당혹스러운 일을 겪어야 했다. 고학생의 삶에서 누누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당시 100년 전통을 이어온 명문 사학이다. 서울 중심지 종로구 안국동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나의 자취방에서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거쳐야 했다.
답십리 집에서 도보로 2km를 걸어가면 53번 대신운수 버스 종점이 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종로2가까지 간다. 거기서 학교까지 또 1.5km 정도를 걸어서 가야 했다. 이런 등교 경로를 소개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입학식 날 학교 가면서 일어난 당혹스러운 사건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었다. 버스 타는 '차비'가 없어서 입학식 참석이 어렵게 되었다. 아, 고학하는 홀 학생의 서러움이여! 궁즉통(窮即通)이라 했던가. 차고 있던 오리엔트 시계에 눈이 미쳤다. 외로운 홀로의 내 삶에 좋은 친구인 손목시계였다.
버스 종점 근처에 있는 전당포로 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당시엔 서민에게 꼭 필요한 곳이었다. 금붙이 시계 라디오 등 귀중품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곳이었다. 오리엔트 손목시계를 전당(典當)잡히고 200원을 빌렸다. 이렇게 해서 입학식에 어렵사리 참석할 수 있었고, 나도 어엿한 고등학생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고난과 시련 그리고 외로움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중학교를 다니지 못한 탓에 입학생 중 아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친구를 빨리 사귈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럭저럭 일주일째 학교를 다닐 때, 버스 간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재학이었다.
재학이는 한 마을에 살던 친구였다. 친구가 간절한 내 입장에서 볼 때 친구이지 그는 안면 트고 지내던 같은 또래의 '아이' 정도로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와 나는 삶의 상황이 달랐다. 고학하는 나와는 달리 재학이는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구청 간부로 일하는 분이었다. 즉 고급 공무원이었다.
재학이의 어머니도 전통적인 자모상(慈母像)의 후덕한 여인이었다. 동네에서도 인정 많은 '아주머니'로 통했다. 베푸는 삶에 넉넉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 부모 밑의 외동아들과 부모 없는 고학생이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일방적인 생각일지라도 그런 재학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 사이라는 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나는 재학이를 생각할 때마다 봉사와 섬김도 유전이 아닐까 생각했다. 교회와 무관한 삶을 살아 잘 몰랐지만 재학이의 아버지는 장로의 직분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는 권사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렇다면 불쌍한 사람을 생각하는 긍휼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약속을 한 것이 아니어서 매일 만나지는 않았지만 사는 동네와 다니는 학교가 같았기 때문에 등하교 때 버스 간에서 자주 만났다. 등하교 때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등교 때라고 하는 게 맞다. 학교 마치고 그는 학원으로, 나는 청량리 일터로 가서 ‘슈션보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등굣길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재학이는 나를 많이 도왔다. 다리가 불편한 나를 부축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나의 책가방을 대신 들고 버스 승하차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연약한 내 다리의 일부가 되어 주어 든든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나를 친구로 생각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난 아침을 굶을 때가 많았다. 저녁을 건너뛸 때 가끔 일어나 배를 채우는 것도 대부분 라면이었다. 한 날 아침 버스를 타러 가면서 재학이네 집을 들렀다. 같이 학교 가자는 의도였다. 봄이라고 해도 아침저녁의 공기는 차가웠다. 마침 재학이는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밥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장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하얀 쌀밥에는 기름기가 찰찰 흘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몇 가지 반찬이 상에 올려졌는데, 그 중 구운 꽁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재학이 어머니도 나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이나마 듣고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릇 가득 담은 밥과 수저를 상에 올리며 아들의 밥 친구가 되어 달라고 했다. 고학생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으려고 한 말이라는 것을 잘 안다. 재학이보다 늦게 든 수저를 먼저 놓고 말았다. 그만큼 배고픔이 컸던 것이다. 그날은 점심을 먹지 못해도 배가 든든했다. 나에겐 흔치 않을 일이다.
종종 재학이네 집에서 아침을 얻어먹었다. 배가 몹시 고플 때에는 집 대문 앞에서 "재학아, 학교 가자!"라며 일부러 큰 소리로 불렀다. 이 부름은 '재학아, 밥 좀 다오!' 하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나도 그랬고, 누구보다도 재학이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고봉밥 그릇이 하나 더 상에 올라왔다.
2학년 때는 그와 같은 반이 되었다. 한 마을에 살고 등교를 같이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 선생님의 배려였을 것이다. 더욱 고마운 것은 재학이와 나를 한 책상을 쓰는 짝으로 맺어 주셨다. 재학이가 나와 짝 되기를 바라서 선생님께 부탁한 결과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재학이는 나를 가까이서 챙기는 명실상부한 보호자가 되었다. 이런 마당에 나도 그의 눈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짝이 되고 당장 달라진 게 있었다. 점심을 굶다시피 하는 나를 위해 도시락을 두 개 싸 왔다. 재학이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이 작용한 배려였겠지만 재학이가 싫어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 배고픔을 덜 당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재학이 덕분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도 눈에 거슬리는 것은 재학이의 식전 기도였다. 부모님과 같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대충 보고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식사 전 기도는 믿지 않는 내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는 교회가 없던 두메산골 출신이고, 또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유교 풍습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도회지 나와서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등의 적극적인 전도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교회에 긍정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나에게 친구의 식전 기도가 무언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교회 나오라고 권하면 어떡하지?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그해 늦가을이었다. 교회 절기 행사(지금 생각하니 추수감사절인 듯)를 기해 친구 초청 잔치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3대째 기독교 집안이고, 장로 아버님과 권사 어머님을 둔 친구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친구 초청 잔치에 함께 가자니! 이 일을 어떡한담?
즉답을 미루고 나는 여러 가지를 교착(交錯)시키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재학이와의 우정에 금이 가서는 안 된다, 교회 가는 것은 친구 초청 잔치 딱 한 번이다, 학교 마치고 일을 해야 하는 나는 교회 다니고 싶어도 시간을 낼 수 없다... 등등의 이유를 마음에 새기고 재학이에게 말했다. "이번 초청 잔치 딱 한 번만이야!"
재학이는 나의 대답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날 친구 초청 잔치도 나에게 좋은 상으론 자리하지 못했다. 남녀 학생들이 격의 없이 어울리며 웃음꽃을 피우는데도 나는 주변인을 벗어나지 못했다. 장애인 특유의 내성적 성격 탓도 없지 않았지만 남녀학생들이 서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이 무척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재학이를 비롯해 몇몇 남녀 학생들이 나의 손을 끌었지만 차마 응해지지가 않았다.
정말 그 한 번이었다. 재학이는 더 이상 교회에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도시락은 계속 두 개를 준비해 점심시간 나에게 주었고, 등교 버스를 탈 때 나의 가방을 대신 들어 주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땐 반이 갈렸다. 나는 1반 그는 2반으로 나뉘었지만 점심 도시락은 여전히 나에게 전달되었다.
그와의 마지막은 졸업식 때였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축하객들로 들뜬 분위기 속에 교정이 몹시 붐볐다. 축하객이 없는 아이들은 나를 비롯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재학이도 아버님은 근무로 오지 못하고 어머니 혼자 오셨다. 후약이 있다면서 재학이에게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어 주셨다. "'연재 등 혼자인 친구들과 함께 자장면이라도 사 먹으렴."
5.
이게 마지막이다. 나는 대학 근처에 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여유가 있었다면 재학이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을 것이다. 이것이 도움받은 은혜에 값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난 도리를 하지 못했다. 늘 마음의 짐으로만 남아 있었다. 재학이도 대학 휴학을 하고 군대 갔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했다.
대학 4학년 때 교생 실습을 나가야 했다. 공교롭게도 실습할 중학교가 내가 고등학교 때 자취하던 동네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재학이네도 이사하지 않았다면 그 동네에 그대로 살고 있을 것이다. 실습 학교가 거기로 정해지고 난 뒤 이번 기회에 재학이 집을 꼭 방문해야겠다고 내심 작정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교생 실습을 나가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마침 하루의 교생 실습을 마무리하는 미팅도 없는 날이어서 재학이네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동네 가게에서 음료수 세트를 하나 샀다. 받은 사랑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지만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나의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았다.
헤어지고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마을이 몹시 낯설었다. 예전 그대로인 세탁소와 전파상 그리고 연탄집과 점방(店房)이 낯선 것을 많이 상쇄해 주었다. 도로의 폭과 길이도 여전한 것일 텐데 줄어든 느낌이었다. 도로를 꺾어 우측으로 200m쯤 올라가면 바로 나의 친구 재학이네 집이다.
재학이네 집은 양옥 슬라브 주택으로, 내가 거기 살던 때만 해도 제법 큰 집에 속했다. 하지만 주위에 더 큰 집들이 들어서서 상대적으로 작게 보였다. 나무 대문도 그대로였고 대문에 딸린 작은 문은 예전처럼 열려 있었다. 이상하게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대문을 지나 현관 앞에서 재학이를 불렀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불렀다. 어렵게 띤 걸음을 헛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러갈 기미 없이 한참을 부르자 재학이네 집 문간방에서 젊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게 보이지도 않은, 씻지 않고 빗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아 덥수룩한 남성이 나왔다. 하늘색에 아래로 흰 줄이 쳐진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성의 모습에선 병색이 완연했다. 눈만 형형히 살아 있어 낯선 방문객을 주시했다.
"안녕하세요? 재학이 친군데요, 재학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요. 지나가던 길에 들렸습니다."
나의 물음에 그는 쳐다보던 눈을 아래로 깔았다.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 처음엔 병약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작용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주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재학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 무슨 말씀이죠! 설마 죽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위암으로 고생하다가 그만... 1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설명하는 그의 말소리가 몹시 떨렸다. 서 있기조차 버거운 듯했다. 그는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가 문을 닫고 들어갔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날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에 없다. 저녁 식사도 챙겨 먹지 않고 잠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아니, 사실이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재학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6.
재학이네 집을 다녀온 지 보름쯤 흘렀다. 교생 실습을 같이 나간 동학 10여 명이 시내 한 음식점에서 회식을 했다. 실습 중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이야기 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돌아가면서 말했다. 어떤 예비 교사는 졸업과 동시에 한 사립학교 교사로 나가게 되었다며 앞으로의 각오를 말했다. 나는 왠지 말할 기분이 아니어서 건너뛰고 말았다. 재학이와의 추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착 가라앉은 기분에 기진맥진 녹초가 되어 씻지도 않고 잠에 떨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꿈에 재학이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씩씩하면서도 따스한 얼굴이었다. 늘 몇 살 위의 형처럼 든든한 모습이었다. 모습뿐 아니라 말소리도 너무나 분명하고 생생해서 꿈 속이 아닌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연재야, 반갑다.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너 얼마 전 우리 집 갔었지? 문간방 형을 만난 것 같더구나. 그 형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그러던? 죽었다고 그랬지? 그 형이 거짓말한 거야. 그 형은 폐병에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 그럴듯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자주 놀라게 해. 내가 왜 죽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너무 생생한 꿈이어서 재학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 이후 재학이는 자주 꿈에 나타나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강변했다. 내 생각도 재학이가 죽지 않았다는 쪽으로 옮겨 갔다. 그래, 착한 나의 친구 재학이가 그렇게 쉽게 세상을 뜰 리가 없지!
7.
교생 실습 때 재학이네 집을 방문하고 싶었던 숨은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던 내가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믿음 좋은 친구 재학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교 때 한 신실한 크리스천 여학생을 만났다. 고등학교 때 재학이가 나의 보호자였던 것처럼 대학생 땐 이 여학생이 나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여러 모로 도와주었다. 고학하는 학생이 대학이라고 형편이 나아질 리 없었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을 갖고 있던 이 여학생도 아버지가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었다. 아버지는 내로라하는 사람으로 이름을 대면 웬만한 사람은 알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인 지위도 갖고 있는 분이었다. 이 여학생은 대학 기독교 동아리 임원이었다. 그의 섬김은 가식이 없었고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좋은 후배였다.
어느 날 그의 손에 이끌려 학교 기독교 동아리 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끄는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한 곳에 묶이기를 싫어하는 성격 탓에 이 기독 동아리도 몇 번 참석하고 그만둘 참이었다. 몇 번이 나에게 선의를 베푸는 그 여학생에게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는 청년은 법학과 학생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친구로 나와 나이가 같았다. 그가 한 말 한마디가 내 발을 붙들고 말았다. ‘회장이 첫날 나에게 한 말은 이런 내용이다.
"하나님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형(나를 형으로 지칭)을 좋아하십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빚어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리가 불편하면 어떻습니까. 가진 게 없으면 또 어떻습니까. 지금 형의 상황은 하나님 보시기에 신앙 생활하시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함께 하면 정말 좋겠습니다."
회장뿐 아니라 나를 기독 동아리로 이끈 여학생 그리고 동아리 회원 전체가 진정으로 대해 주었다. 후에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여학생 가족이 출석하는 교회에 등록을 했다. 30여 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였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용솟음쳤을까. 가족 같은 분위기도 외로운 나를 붙잡았다.
시키는 것도 아닌데 나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의문 이는 것은 목사님을 비롯한 교회 식구들에게 물어보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신앙이 부쩍부쩍 성장하는 것 같았다. 교회 식구들과 함께 전도도 나갔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예수 믿으시라는 전도지를 받고 보란 듯이 가까운 휴지통에 내던지던 내가 아니었던가.
8.
재학이가 다시 떠올랐다. 나를 친구 초청 잔치에 데리고 가서 생애 처음 교회 문지방을 넘게 한 친구, 그때 그가 한 말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하나님은 교회 문지방을 한 번이라도 넘은 사람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분이셔. 그리고 그 영혼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늘 사랑으로 지켜 보고 계셔..." 그 말에 콧방귀를 뀌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 변한 걸 보면 재학이가 나에게 한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친구 초청 잔치 초대 후 교회 가자는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은 재학이. 하지만 그는 묵묵히 지켜보면서 나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이었다. 영하15도의 날씨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며 매스컴이 호들갑을 떨었다. 수요일 오후 3시, 혹한으로 하루 쉬어가자는 권사님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시내로 나왔다. 나를 동아리로 이끈 그 자매가 전도지를 갖고 따라나섰다.
전도의 열기는 추위도 식히지 못한다. "댁에서 가까운 교회 나가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 영접하고 천국 가세요" 장갑도 끼지 않고 열심히 전도지를 나눠 주었다.감사한 것은 행인들이 피하지 않고 전도지를 받아 호주머니나 가방에 넣는 것이었다. 함께 나간 자매가 자기 장갑 한 짝을 나에게 끼워 주었다. 따뜻했다.
전도 중에 자매의 삐삐(무선호출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빠가 무슨 일로? 급한 일이 생기셨나? 자매는 급히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장로님(아빠)이 추운 날 고생한다며 마치고 저녁 사 먹으라시네. 비싼 걸로. 저녁 예배 때 아빠가 식사 값 주시겠대요. 이런 좋은 일이... 호호호"
30분 정도 더 전도지를 나눠주고 작업을 마칠 심산이었다. 장로님의 응원 전화가 큰 힘이 되었다. 지나가는 한 청년에게 전도지를 전달하려 했다. 받으려고 하는데 손이 엇갈려 전달하지 못했다. 이 청년은 한 10여m를 갔다가 못 받은 전도지를 받으려고 발길을 돌려 다시 왔다. 드문 경우다. 그런데 이 청년 눈 익은 얼굴이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생각의 편린들을 끄집어내어 이리저리 맞추어 보았다.
상진이었다. 나보다도 재학이와 더 가깝게 지낸 한 마을 친구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얼싸안았다. 우리 셋은 가까운 음식점으로 가서 식사를 주문했다. 장로님에게 청구하면 되니 소고기 구이 5인분을 시키자고 했다. 상진 친구는 상고를 졸업하고 작은 회사에 다니다가 탁구장을 운영하려고 장소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상진이는 탁구 선수 출신이다. 국가대표까지는 나가지 못했지만 서울시 대표로 학생체전과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딴 경력을 갖고 있는 재주꾼이다.
"전도지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데, 이상하게 받지 않으면 손해라는 기분이 들더라구. 그래서 다시 돌아왔는데, 이렇게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게 되네. 친구 만나라고 하나님이 발길을 돌이키게 하신 게 틀림없어... 하하하. 여하튼 반갑기 이를 데 없네. 그려."
우리는 맛있게 식사를 했다. 상진이는 안주가 좋은데 소주 한잔 하면 안 되겠느냐면서 나에게 눈을 찔끔해 보였다. 소주 한 병을 달라고 해서 그에게 따라 주었다. 손이 떨렸다. 마음이 떨리는 외적 작용이 손떨림이다. 나의 경우는... 한 사람은 재학이가 죽었다 하고 재학이는 그 형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에 대한 판정은 친구 상진이에게 달려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답이 나올까.
상진이는 이것을 전혀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기야 같은 고등학교 다닌 친구 사이로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내가 맨 먼저 알고 있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재학이에 대해 어떻게 물어볼까로 궁리를 했다. 재학이 요즘 어떻게 지내지? 재학이 근황이 궁금하네? 비슷한 물음이다... 재학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 들리던데? 재학이가 세상을 떴다는데 사실인가? 또 다른 형식의 유사한 질문이다.
나는 문간방 그 형의 말에 무게를 두고 질문하기로 했다. "재학이가 세상을 떴다는 슬픈 소식이 들리던데 그게 사실인가?" 질문을 받는 그가 더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말인가? 누구보다도 친구가 먼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동네 J중학교에 교생 실습을 나갔었어. 하루는 실습 마치고, 재학이네 집을 찾아갔었지. 아무도 안 계시고 문간방에서 병색이 짙은 사람이 나오더니 재학이가 죽었다는 거야. 어떻게 세상을 뜨게 되었냐고 물으니 위암인가를 앓다가 죽었다고 하지 않겠어. 하지만 꿈에 재학이가 나타나 그 형이 거짓말하는 거라고 사실이 아니라고, 자기는 죽지 않았다고 외치고...“
상진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의 임종을 부모님과 함께 지켰지. 동부시립병원이었는데, 눈 뜨고 볼 수 없는 몰골이더군. 피골이 상접한 마지막 모습은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을 뻔했어.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용미리 추모공원에 묻혀 있지. 언제 시간 나면 함께 가서 만나보자구...“
9.
2차를 가서 둘러앉은 친구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다. 재학이 죽음 소식을 접한 친구들의 얼굴에 슬픔이 잔뜩 밀려왔다. "반세기 전에 일어난 일을 우리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매정한 친구들이군!"이라며 자책하는 친구도 있었다. 슬픈 일로 받아들이기는 매일반이지만 연재(나)의 슬픈 골이 가장 깊을 것이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반창회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쇠잔해져 가는 몸들에 재학이의 오래 전 죽음 소식이 반영된 결과이지 싶다. 성호와 현수는 며칠 뒤 출국하기로 항공편이 예약되어 있다고 했다. 국내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이야 여차하면 만날 수 있지만 미국 사는 친구들은 다시 만날 기회가 올지 모르겠다. SNS가 호황기를 누리는 시대이니 그것으로라도 자주 소식 나누자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염려해 주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어디선가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노래가 흘러나왔다. 글쎄,언제까지 얼마나 모일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한 자주 모이면 좋겠다고 모두들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 재학이도 호응하며 자기도 시간 내서 참석하겠다고... 흐흐흐.(*)
* 이 소설에 나오는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명재 / 목사(덕천교회), 철학박사, '그 열매, 진주보다 더 아름다운...'으로 제11회 활천문학상 최우수상 수상(단편소설 부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