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 사건
-괴산 증평 청주(북이 내수) 지역을 중심으로
이석우 문학박사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후 반공정책이 강화 되면서 좌익활동 검거자와 전향자가 많아 졌다. 정부는 그 후속 조치로 국가주도의 단체를 만들어 이들을 관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보도연맹(保導聯盟)은 좌익 전향자에 대한 보호와 지도를 그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향자들의 자백서를 토대로 제3의 좌익세력을 찾아 좌익을 무력화하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사업은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장관의 책임 하에 검찰과 경찰에서 주로 담당했다. 어찌 보면 보도연맹은 맹원들의 활동 조직 아니라 검찰과 경찰의 조직체계의 관리부서나 마찬가지였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전향자단체’를 내세웠으나 국가 주도한 ‘관변단체’로서 반공사상을 전파하고 보도연맹원의 사상을 전향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전쟁 직전까지 50만 명을 넘어서는 보도연맹 조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지까지 마무리 되자 멸공을 위한 단체라기보다는 점점 정권의 반대 세력을 막기 위한 경찰의 관리단체로 변질되어 갔다.
설립목적
국민보도연맹 창설은 좌익사상 전향자를 계몽·지도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직 목적으로 조직 되었다. 정부는 급증하는 전향자들을 정부가 관리하는 단체에 소속시켜 이들의 사상을 개조하고 관리하기 위해 보도연맹을 설립하였다. 전향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이들을 통해 남아있는 좌익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조직은 법률이나 훈령에 근거해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었고, 법률 근거도 없이 오제도(吳制道) 검사의 제안으로 내무부·국방부·법무부와 사회지도자들이 협의 후 정부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군·검·경의 간부들이 운영하는 법률상 임의단체이자 성격상 관변단체였다.
그러기 때문에 국민보도연맹이 ‘좌익전향자단체’라고 하였으나 좌익전향자들이 조직에서 실무집행부서일 정도를 맡을 뿐 사업 전반을 책임진 ‘운영협의회’나 ‘최고지도위원회’도 모두 검·경의 간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가입대상자는 국가보안법 관련자와 남로당원을 비롯해 노동조합전국평의회·인민위원회·민주주의민족전선·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등 남로당 외곽 단체 구성원들이었다. 정부는 보도연맹 창설 당시 취의서(趣意書)에서 전향자를 포섭하고 계몽하여 투철한 반공이데올로기로 교육하고자 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고취시키고, 좌익계열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이론적으로 설복하며 좌익세력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12월 12일까지 창립을 계획하다
국민보도연맹 창립식은 1949년 4월 6일 김태선 서울시경찰국장과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국민보도연맹 창립준비를 시작하여, 4월 15일 ‘국민보도연맹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한 후, 4월 20일 서울시경찰국 회의실에서 거행되었다.
6월 5일 ‘국민보도연맹중앙본부선포대회’를 선포하고 6월 27일에는 연맹 회의실에서 원호회를 개최하였고, 한편, 연맹은 창설 직후부터 지방 지부를 결성하여 자수자들을 중앙본부에서 모두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중앙본부에서 본격적으로 지방지부 조직에 나선 것은 서울특별시연맹을 조직한 이후였다. 1949년 9월 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여 12월 12일까지 완료할 계획이었다.
남로당을 모방하여 ‘맹원획득 책임제’ 강요하다
청원군 부용면 문곡리 이종태의 경우 보도연맹원이 가입히라고 구타를 일삼아서 어쩔 수 없이 가입한 것으로 보아 맹원들에게도 가입 책임을 지웠던 것을 알 수 있다.
보도연맹은 조직․선전․교육방식으로 ‘남로당의 1946~47년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중앙본부 간사장 박우천은 남로당의 조직체와 같은 방법을 운영하여 전향한 맹원들로 하여금 강력한 조직력과, 시간적 여유를 없이 하여 맹원생활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남로당은 당원 100만 명을 목적으로 ‘당원 5배가 운동’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서 당원 가입을 기존의 개별 심사방식에서 모집방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남로당들에게 ‘당원획득 책임제’를 부과했다. 이를 모방하여 보도연맹 또한 ‘맹원획득 책임’을 강요하였다.
지방조직의 말단 세포조직은 국민반을 통한 분회를, 서울연맹의 경우 구에는 구연맹을 조직하였다. 지방지부는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건설하였는데, 각 도마다 도연맹 → 시․군연맹 → 읍․면지부로 구성되었다. 검찰청․경찰․국민보도연맹의 협력 아래 각 ‘지도위원회’가 각 지방지부를 지휘했다.
누가 보도연맹원에 가입하였나
처음 보도연맹 가입자는 전향자들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맹원획득 책임제’를 도입하여 의무가입대상을 광범위하게 넓혀 놓았다. 이 규정에 의해 좌익과 관련이 없는 국민들이 가입되었다. 경찰들에게 지역에서 상부로 보고된 ‘공비’ 및 좌익 가담자의 수에 비례해서 맹원가입 인원이 할당되었다. 대체로 각 지역에서 상부에 보고할 때 수를 과장하여 보고한 까닭에 경찰서에 할당된 보련원 가입 책임 인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좌익에게 물자나 식량을 제공한 혐의로 강제로 가입된 경우가 있었고, 주민 간의 사적감정에 따라 보복으로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특정 단체의 가입되어 있으면 무조건 가입시킨 사람, 주민들을 지서에서 고문하여 좌경분자가 된 사람, 청년단 단원의 미움을 사서 가입된 사람,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지역에서 ‘똑똑한’ 사람, 이승만 대통령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 등이다. 심지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땅을 나누어 준다거나, 버스비도 공짜이며 비료도 공짜로 준다거나, 머슴살이를 안 해도 된다고 하여 속여서 가입시킨 경우도 있다. 실제 청원군 오창면 신청인 박임순은 “오창창고사건 나기 한 달 전쯤에 마을 구장과 반장이 품앗이도 하고 비료나 고무신을 타려면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해서 내용도 모르고 남편이 보도연맹 가입도장을 찍었다고 말했으며 증언하였으며, 청주시 내덕동에 살던 희생자 노학돌은 내덕동 주민이 식량 배급을 준다며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여 어쩔 수 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고 말하였다.
양식배급도 주고 매일 경찰서로 나가 교육도 받는 등 특별대우를 해준다는 말에 순진하게 현혹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좌익 관련자’가 아니었음에도 할당식․ 일괄적 가입, 협박 등에 의한 가입하였거나, 사감에 의한 가입, 비료 제공 등 유인책에 의해 도장을 찍은 이런 사람들도 6.25전쟁이 나면서 아타깝게도 무차별적인 학살대상이 되었다.
정부는 보도연맹 가입자의 신분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이들의 신분은 보장되지 않았다. 보도연맹원에게는 도민증이 지급되지 않았고, 대신 ‘보도연맹원증’이 지급되었다. 이는 보도연맹원을 법적인 ‘공민’의 지위가 제한 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주거지를 옮기거나 떠날 때 반드시 관할 경찰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거주 · 이전의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보도연맹원은 전향여부가 의심되어 경찰에 의해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었고 정기적으로 동태를 감시당하는 ‘좌익혐의자’ 또는 ‘요시찰인’ 대상이 되었다.
서울시연맹은 일반구외 특별구로 나뉘었고 각 구마다 반이 조직되었다. 지방조직의 말단 세포조직은 국민반(國民班)을 통한 분회(分會)를 조직하였고, 구에는 구연맹을 조직했다. 이는 서울특별시연맹의 세포조직과 동일했다. 지방지부의 조직원칙은 기본적으로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만들었으며, 도연맹 → 시·군연맹 → 읍·면지부로 구성되었다. 지방지부의 기본적인 지도방침은 검찰청·경찰·국민보도연맹이 협력하는 ‘지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보도연맹원의 활동과 결과
보도연맹 중앙본부는 전향자들을 국민들의 반공교육을 위해 동원하였다. 중앙본부가 주요활동은 대외선전활동과 교육·훈련, 문화활동 등 이었다. 이를 담당한 부서는 중앙본부 ‘문화실’이었다. 문화실은 문학박사 양주동(梁柱東)을 책임자로 했고 산하에 문학부·음악부·영화부·연극부·미술부·무용부·이론연구부 등 전문부서를 설치했다. 옥천의 정지용 시인은 문화실장으로 활동하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즉시 소집하여 예비검속하였다. 전쟁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관리 대상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검속하여 법적절차 없이 ‘즉결처형’해 버렸다.
경찰의 예비검속은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강원 북부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행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강이남 전국에서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을 학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으며,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공군정보처(G-2)·해군정보참모실(G-2)·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했다. 이 중 CIC와 경찰 사찰계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행과 사살 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2. 후퇴하는 군에 의한 충북민간인 희생
강릉지역에 있던 8사단은 6월 25일 새벽 6시 인민군의 침공에 맞서 반격할 결정을 하였으나 육군본부로부터 강릉보다 서울방어가 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원주로 이동하였고 7월 2일 제천에 주둔지를 정한다. 7월 4일 오후‘8사단은 대구로 이동하라’라는 육본의 전문작전명령을 받고 사단의 선발대가 대구에 도착할 즈음, 잘못된 전문이었으니 원위치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다시 받게 된다. 7월 6일 북상을 서둘렀으나 제천은 이미 인민군의 손에 들어가 있으므로 단양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8사단은 이날 단양에서 가까운 제천 한수면 동창리 주민 50여 명을 사살하였다. 7월 8일 전투가 끝나자 9사단은 12일 죽령을 거쳐 영주로 퇴각해 버렸다.
춘천, 홍천지역의 국군 6사단은 7월 3일 충주에 집결한다. 사단지휘부는 증평에 두었으며 7월 7일까지 전투는 없었다. 제6사단 제7연대 헌병 10여 명이 충주경찰서에 들이닥쳐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라”고 지시한다. 경찰들은 동네를 돌며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으며, 이들은 호암동 싸리고개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최은용 등 3명은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충주군 살미면에서는 73명이 희생되는데 군인들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기관총을 휘둘렀는데, 이로 인해 학살현장은 100여 구가 넘는 시신이 양곡자루처럼 쌓였다. 조선공산당 김삼룡의 고향이 엄정면이었기 때문에 좌익단체 가입자가 많았던 터라 자연히 보도연맹원의 수가 많았으며 따라서 희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음성에 주둔하던 제6사단 19연대 소속의 중령 1명과 특수대원으로 보이는 군인이 쌍권총을 들고 7월 5일 음성경찰서로 들어섰다.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기 위해서였다. 대소지서에서 소집한 보도연맹원 30여 명은 그날 진천군 만승면 조리방죽에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7월 8일 원남지서에 소집된 보도연맹원 30여 명은 원남면 문암리 백마령 고개에서 사살된다. 이밖에도 소이면 여인구가 음성군 소이면 ‘가막골’에서 희생되었다. 7월 8일 인민군에게 충주를 내준 사단사령부는 9일 보은으로 후퇴한다.
7월 9일 괴산에 주둔하던 국군 6사단 7연대 헌병대가 괴산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일으킨다. 괴산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7월 7일경 증평읍 양조장과 양곡창고, 도안국민학교, 청원군 북이국민학교, 괴산경찰서 유치장 등에 구금되었다가 7월 9일 제6사단 제7연대 헌병대와 CIC, 경찰에 의해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괴산군 감물면 공동묘지,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 솔티재, 괴산군 괴산면 남산 등지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에서는 1950년 7월 9일 괴산경찰서 유치장과 청원군 북이초등학교, 증평읍 양조장 등에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7월 2일에서 8일 사이 증평읍과 사리면 주민들은 증평의 양조장에 검속되고 북이면 주민들은 북이국민학교 교실에 검속된다. 소집 당일 저녁, 경찰들은 간부를 제외한 보도연맹원들에게 ‘밥 먹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며 내보내기도 했다. 자신이 도망치면 가족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며 다시 소집에 응하여 7월 9일 청원군 북이면 옥녀봉에서 희생되었다. 북이국민학교에는 당시 칠성면, 도안면 주민들도 섞여 있었다.
옥녀봉에 헌병이 미리 구덩이를 파고 준비하고 있다가 무려 4시간 동안의 총살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괴산, 증평, 청주 지역에서 끌려 온 주민들이 많아 옥녀봉에서 사망한 희생자만 800여 명에 이른다.
청원군 오창면에서는 7월 10일 오창지서와 오창창고 등에 갇혀 있던 10여 명의 주민들이 수도사단 헌병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7월 11일에는 오창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300여 명이 제6사단 19연대 헌병대 등에 의해 희생당했다. 군은 7월 14일 괴산군 연풍면 이화령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포천-동두천-의정부지역의 7사단과 2사단, 수도경비사령부는 7월 3일 서울지역에서 후퇴하였다. 6월 25일 예비검속 명령이 전국에 떨어졌고 6월 26일에는 김삼룡과 이주하가 총살당하는가 하면, 6월 27일과 28일에는 서빙고 강변에서 200여 명의 형무소 재소자가 총살당한다. 국군 2사단이 진천에 들어오기 전인 6월 30일에 보도연맹 간부 10여 명이 진천면 성석리 할미성 고개에서 사석출장소 경찰에게 사살된다. 2사단은 7월 6일부터 11일까지 진천에 주둔했는데, 제2사단 16연대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진천경찰서로 출두하여 “그냥 두고 내려가면 보도연맹원들이 일어나 피해를 볼 테니 모두 처리하고 가야한다. 군이 처리할 테니 색출은 경찰이 하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보련원들은 진천면 성석리‘할미성 고개’와 문백면 옥성리 ‘말부리 고개’, 덕산면 신척리 ‘구시울 골짜기’ 등에서 학살당했다. 덕산면 주민 10여 명은 7월 13일 덕산면 신척리 구시울 골짜기에서 가족의 가슴에 통한의 아픔을 남기고 군에 의해 세상과 하직하였다. 백곡면에서는 경찰과 국군 7~8명이 한 조가 되어 직접 주만을 색출하여 마을 인근에서 총살했다고 한다.
수도사단은 12일 청원군 오창읍 화산리와 오근장의 인민군을 공격하였고 13일에는 미호천전투를 치른다.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청원군 남일면에서 인민군과 격전을 벌인 후, 보은으로 후퇴하였다.
미리 보은으로 후퇴해 있던 수도사단 군인 일부는 7월 15일 산외지서에 감금되었던 20여 명, 보은경찰서에 감금되었던 50여 명의 민간인을 내북면 서지리에서 즉결처분하였다. 이들은 산외면과 내북면 주민들이었다. 같은 날 보은면, 수한면 보도연맹원 50여 명이 보은면 길상리 미륵뱅이에서 사살되고, 마로면 보도연맹원 20여 명은 마로지서로 연행되어 관기리 야산에서 처형된다.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줄밭골’에서는 탄부면 예비검속자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보은에 주둔하던 국군은 수도사단이었다.
영동 상주 김천지역에서는 미 25사단(24연대, 27연대, 35연대)이 7월 22일부터 31일까지 주둔했다. 27연대는 22일 영동 남쪽으로 철수, 23일 당저(영동군 황간면 용암리)에 주둔하면서 25일까지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서장에게 경찰의 협조를 요청했다.
영동군 용산면 보도연맹원 5명은 1950년 7월 초 경찰에게 연행돼 옥천군 청산면 샘티재에서 희생되었다. 이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중 간부급으로 보이는 주민들이 7월 10일경 상촌면에서 희생되었다. 희생장소는 상촌면 상도대리 3개 지점과 고자리 1개 지점이다.
7월 18일 충북도경국장으로부터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특무대(CIC) 영동파견대장에게 인계하라는 지시가 영동경찰서장에게 하달되었다. 17월 19일 오전, 특무대 영동파견대장 은 영동경찰서를 방문하여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300여 명의 주민들을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 영동읍 설계리 석쟁이재에서 사살하였다. 이는 7월 18부터 20일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트럭에 태워져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로 끌려간 주민들은 10명씩 99식 소총으로 경찰에게 총살당한다. 총살 지시는 CIC가 했는데, 주민 10명 씩 1열로 세우고 “공산당을 지지한다던가 앞으로 개심한다던가 이야기 해라. 네가 1번이니까 너부터 얘기해라”라고 한 후, 손을 위에서 아래로 저으면 뒤에 있던 경찰이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1950년 7월 18일 다시 충북도경국장으로부터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특무대(CIC) 영동파견대장에게 인계하라는 지시가 영동경찰서장에게 하달되었다. 1950년 7월 19일 오전, 특무대 영동파견대장 김 아무개 일등상사가 경찰서를 방문하여 전황 설명과 함께 서장에게 경찰의 협조를 요청했다.
영동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300여 명의 주민들이 1950년 7월 18부터 20일 사이에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 영동읍 설계리 석쟁이재에서 사살되었다. 이후 각 면단위 청년방위대원들이 경북 경산으로 이송된 후 보도연맹원으로 색출 연행되어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사살되었는데 그 희생자가 무려 89명에 이른다.
미 1기병사단 7기병연대는 7월 23일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 600여 명을 거주지에서 소개시켜 임계리와 안점에 집결시켰다. 미군은 7월 25일 이들을 하가리로 내쳤다. 하가리 하천변에서 하룻밤을 지낸 주민들은 일부는 마을로 돌아갔으나 대부분은 경부국도를 따라 계속 피난길을 나섰다. 7월 26일 피난 가던 주민들은 다시 미군에 의해 경부선 철길로 올라가 이동하던 중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100여 명이 사망했다. 폭격을 피한 주민들은 노근리 쌍굴로 피했다. 이후 7월 29일까지 3일 동안 미 육군에 의해 총격을 받아 300여 명이 사망했다.
3. 옥녀봉 학살 사건
1950년 7월 6일, 괴산군, 청원군의 각 마을 국민보도연맹원(이하 보련)들이 소집되어 군용트럭에 실려와 증평의 양조장 창고와 농협창고에 아무런 법적절차도 없이 예비검속되었다. 정부에서 만든 단체에 가입한 터에 경찰서장의 강연이 있다하니 바쁜 일손을 접고 소집에 응했던 것이다. 처형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몸을 피했던 사람도 스스로 돌아와 몸이 묶였다.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출타중인 형 대신 동생이 검속되었다가 다시 교체되는 사례도 있었다. 용변을 보라며 도망칠 기회를 주었으나 다시 검속 대열로 돌아오는 이도 있었는데 이는 도망친 자신 때문에 가족이 희생될 것이라는 공포감이 스스로 발을 옭아맸을 것이다.
1951년 7월 9일 오후 1시 죽음의 공포에 억눌렸던 날들이 지나고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기관단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괴산ㆍ청주경찰서 경찰과 헌병대, CIC대원 40여 명은 예방학살의 준비를 끝내고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골짜기에 대기 중이었다. 처형장소를 골짜기로 택한 것은 시체를 밀어 넣기 수월한 까닭이었다. 자신의 친구나 그의 형과 동생 혹은 먼 혈육이 검속 대상에 들어 있는 것을 아는 이 사살대원들도 왜 안타까운 마음이 없었으랴. 그러나 인륜의 도리가 멸살된 전시체제의 명령수행 중이니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형 대상은 괴산 불정면 지장리 새곡마을, 괴산 사리면 사담리, 송오리, 방축골, 수성리, 불당골, 하도리, 진암리 진지바위, 산정리 산정말, 중리 중말, 청원 북이면 신기리 일대에서 소집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괴산군의 소수면과 청안면, 청원군의 북일면 보련원들은 이 참사의 대열에서 빠져있었다. 당시 소수면와 청안면의 경우 지서 주임의 결단으로 보련원을 풀어주어 살상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지시주임이 처벌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북일면에서는 청년단장으로 활동하던 유흥렬 씨가 소방서에 감금되어 있는 보련원 40명 (9명은 이미 처형)을 지서 주임과 협상하여 풀어주게 된다.
보련원을 마치 가축처럼 실은 트럭이 연이어 도착하였다. 미혼이거나 어린 자녀를 둔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의 슬픈 영혼을 씻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7월의 장대비가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그들은 포승줄이 아닌 새끼줄로 양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1시 경에 시작된 학살은 오후 5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어느 조는 열 명이 줄로 세워지고 어느 조는 스무 명이 줄로 세워졌다.
현장 목격자인 희생자 유족 정종수씨는 “앞에 있는 사람을 쏴서 자빠지면 그 사람 시체를 구렁챙이에 넣고 자기가 또 그 위치에…”라고 증언하고 있다. 죽은 자를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당시 의용소방대원이었던 윤기병씨는 농사군 형색을 한 사람들을 개잡듯 죽였는데, 월북작가 홍명희의 계모인 조씨(당시 74세)가 흰 한복차림으로 현장에서 외따로 처형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인솔장교가 780명이 죽었다고 보고하는 걸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밖에 괴산읍 남산, 감물면 백양리 공동묘지, 청안면 솔티재 등에서 보련원들이 희생되어 괴산 지역의 당시 희생자는 1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진행된 살상은 그 뒤가 더욱 참혹하였다. 흙으로 제대로 묻히지도 않고 거의 골짜기에 방치된 시신은 산 짐승에게 훼손되면서 부패하고 있었다. 총상으로 사망할 경우 더 쉽게 부패된다고 한다. 유족들은 옷차림으로 겨우 시신을 확인하였다. 뒤늦은 유족은 확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미확인된 유골이 200여구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은 몇몇 인간의 과용한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그 상처는 민간인에게 돌아온다. 빠른 시일 안에 미확인 유골이 발굴되고 이 영혼들을 위로할 기념공원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3. 국민보도연맹원을 국방자원으로 활용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베트남 미라이 촌이나 90년대 이후 르완다나 코소보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보고되었을 때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제주 4.3 사건이나 거창 사건 그리고 보도연맹 사건 등이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설마 했던 일들이 잔혹한 참상으로 국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충격과 비분함을 어디에 비견할 수 없었다. 또한 누구나 다른 선택의 길은 없었을까하는 안타까운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특히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더욱 안타까움을 가중시킨다.
1949년에 이르자, 한국정부는 국가보안법 제정 등을 통해 남한 내의 모든 좌익 활동을 금지하고 남로당원을 체포한 후, 보련까지 조직하여 공산당 활동을 거의 위축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여순 사건 등을 거치면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다. 당시 1949년 1월 22일 동아일보에 1949년 1월 10일까지 3,392명의 희생자가 났다는 보도가 올라온다.
이러한 남한 내의 상황은 전쟁만 일으키면 ‘남한 내 주민 100만여 명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맞물리며 김일성의 조급증을 자극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미군정과 남한 정부가 정국안정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낼 찰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느닷없는 침공을 맞게 된 것이다.
북한군은 38도 선 전역에서 야포와 박격포를 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군단은 연천, 운천, 의정부를 축으로 하여 개성과 문산에 걸쳐 전투병을 집중시켰다. 제2군단은 소련제 T-34전차와 76밀리 자주포를 앞세우고 단숨에 38선을 돌파해 버렸다. 6월 28일 서울과 춘천 그리고 강릉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29일 김포비행장 마저 점령당하였다. 7월 2일 원주, 7월 3일 인천, 7월 4일 삼척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제4단에 의해 7월 8일 천안이 떨어지고 인민군 6사단은 서해안 지역의 예산을 향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이 순간 보련은 필시 인민군에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련은 본래 공산당이던 자가 전향하여 배신하였으니,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배신자처단 사태가 난무할 것이라는 예상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런 생각들은 일부 약삭빠른 보련원을 인민군 쪽을 항하여 움직이게 만들었다. 6월 27일 강화도에서는 인민군이 들어오자 보련원이 적극 나서기도 하였고, 3일 만에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떨어지자, 일부 보련원들이 인민재판에 열을 올리고 잔류 남한 정부인사 및 군경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북한군에 의해 '기회주의자의 표본'으로 후에 처단되긴 했으나, 보도연맹 명예간사장까지 맡았던 정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정부는 예비검속 중이던 보련원 모두 인민군에 동조할 것이라고 속단해 버리고 학살하기 시작한다. 학살은 7월 1일부터 시작하여 20만에 이르는 양민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북한은 인민군의용군을 만들어 남로당원으로서 변절자(보도연맹 가입자)도 의무적으로 의용군에 참가시키라는 규정을 로동신문(1950년 7월 12일자)에 싣고 있었다. 북한이 취한 보련의 의용군 참가 허용은 강화도 사태와 유사한 인민군에 동조할 세력을 확대시킬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부에서는 당시 보련원들을 특별, 보통, 정(正) 등급으로 분류하여 정(正) 등급에 한하여 일부 군입대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에, 아예 국가에서 국민보도연맹 반공부대를 창설했더라면 보련원들은 모두 인민군과 장열하게 싸운 애국 전사가 되었을 것이다. 내 고향 골짜기에서 내 고향 군경에게 총살당하다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오죽하면“골짜기로 간다”,“골로 간다”말이 “죽는다”는 속어로 굳어 버렸겠는가. 더구나 이 들의 젊은 희생도 억울한데 부모형제는 연좌제에 묶여 숨소리를 작게 토하며 세상 살아왔다. 농사일 하다말고 대부분 젊은이였던 보련원은 경찰지서 집합통지를 받고 서슴없이 지서로 달려가 군용트럭에 실려 가면서,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기회를 쥐도 그냥 경찰의 말을 믿고 실려 가면서“피난시키려나”, “보급 노무원으로”, “지원 국방군으로”, 나라를 위한 일터로 데려가려나”하는 순진한 생각들을 했었다고 한다. 미리 사살 정보를 듣고 몸을 숨긴 경우 나타나지 않으면 가족을 희생시키겠다는 협박에 검속에 응한 경우도 있었다.
4. 도민증 대신 ‘국민보도연맹회원증’을 주다
국민보도연맹은 일제 강점기의 정치범 전향 교화 시설인 대화숙을 모방해서 1949년 6월 5일 만들어진 정부기관이 아닌 임의 단체이다. 이 아이디어는 정치검사 오제도에서 나왔다.
1947년~1948년에 좌익 활동가는 이미 박헌영이 주도하는 남로당에 가입되어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상태였으므로 보련이 결성될 때는 좌익분자는 별로 없었다. 때문에 공무원이나 경찰은 할당된 가입 인원을 확보하려고 식량과 비료를 무기로 삼거나 가입하지 않으면 외부 출입을 10리 이상 못한다고 협박하는 등 온갖 감언이설로 가입을 권유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6.25가 터지기 전 30만 명을 넘어서는 맹원을 확보하였다. 괴산 지역만 보아도 한 자연부락에 30~40명의 가입자가 생겨난 것을 보면 보련원이 되면 많은 혜택을 줄 것처럼 홍보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지식인인 정지용(문인), 염상섭(문인), 정인택(문인), 황순원(문인), 김기림(문인), 박태원(문인), 이무영(문인), 임학수(문인), 김용호(문인), 이봉구(문인), 설정식(문인), 박영준(문인), 백철(문학평론가), 이병기(학자), 양주동(학자), 김용환(만화가), 신막(음악인) 같은 예술 활동가는 어떻게 가입하게 된 것일까..
이 때 가입한 사람은 대부분 농민이나 이미 전향했던 남로당이었는데 정지용 같은 시인이 협박과 회유를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946년 이화여대에서 해임상태에 있던 지용은 1948년 2월 교수직을 파면이나 다름없는 사임서를 제출한다. 이즈음 지용의 작품들은 국가이념 위반 저작물로 분류되고 있었다. 보련 가입의 압력이 가중되는가 싶더니 1949년 9월 15일 10 편이 넘는 그의 작품이 모든 교과서에서 삭제되고 말았다. 작가의 생명을 끊어 버린 것이다. 지용은 1949년 11월 4일 녹번보도연맹에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진 가입의 형식을 선택한다. 복직과 문학작품의 헤금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련은 특별, 보통, 정(正)으로 구별하여 특별맹원이 되면 복직, 복교 등을 알선해 줄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실제 보련 1주년을 맞아 서울에서는 약 7,000의 특별맹원을 탈퇴시킨다. 5.10 선거 이전에 좌익 계열에 가담했다가 자진 이탈했거나 정부 수립 후까지도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으나 자진 이탈하여 공산주의 타도에 충실한 자, 또한 국가 기관에 충실히 근무한 자수자 등으로 탈맹 자격 심사규준이 보도되었다.
1949년부터 도민증이 발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련은 이를 받을 수 없었다. 대신 ‘국민보도연맹회원증’이 발급되어 사실상 비국민으로 분류된 주홍글씨의 표식이 손에 쥐어 졌다.
보도(保導)란 무슨 뜻인가. 편안하게 보호하고 이끌어준다는 뜻이 아니던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가입시키더니‘요주의 신원증’을 만들어 족쇄를 채워버린 것이다. 출발부터 국가가 개인의 인권을 기만하는 술책을 동원한 것이다. 정부가 민족자존의 역사의식과 인간 존엄의 가치관을 외면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북한에서는 보련을 ‘반동분자’로 규정하여 문서로 기록하였다. 실제로 점령지역에서 보련을 의용군에 강제 집집하거나 자위대에 동원하였다. 그러나 각종 사업에 동원되어도 책임부서 일은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냥 협조하는 정도의 일을 시켰다. 북한 정권은 이들을 신뢰하지 않고 감시와 통제로 일관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남한과 북한에서 동시에 생존을 구걸해야하는 기구한 운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정지용은 국민보도연맹 문화실장으로 공산타도를 외치다가 북한군에게 납북되어 평양감옥에서 숨지고 말았다.
5. 결론으로 / 학도병과 의용군
산과 들이 꽃잎으로 뒤덮였다. 산수유가 노랗게 웃는 가운데 산벚나무는 눈송이 꽃잎을 지운다. 언제부터였을까 창꽃은 갈참나무 아래서 연분홍 볼에다 수줍음을 얹고 있다. 꽃이파리가 대수던가 모든 나뭇잎이 자신만의 빛깔로 잎새 꽃잎을 펴들고 자신의 봄을 구가하고 있다.
6.25 전쟁 중에 전선에 투입된 학도의용군은 모두 2만 7700여 명에 이른다. 그리고 후방 전투지원군도 20만 명에 달한다. 당시 학제는 중학 6년제였으니 이들은 모두 중학생으로 군번과 계급장도 없이 교복 차림으로 조국을 구하겠다고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 뛰어든 것이다. ‘만17세 소년’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핑 도는 꽃다운 나이에 그들은 펜 대신 소총을 든 것이다.
6.25 전쟁 기념관에는 1955년 문교부와 중앙 학도 호국단이 발표한 『무명(無名) 전몰 학도 학교 명단』이 걸려 있다. 전국 349개 중학교 출신 1,976명의 학도병 전사자를 동판에 새겼다.
군산 중학교가 97명, 경북 중학교 53명, 전주 북중학교 52명, 경주 중학교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 중학교 45명, 군산 상업 중학교 각 45명, 순창 농립중학교 37명, 서울 중학교 30명 순이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
이 편지는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의 부치지 못한 편지이다. 전사 직전에 쓴 것으로 그의 품속 수첩에서 발견되었다.
1950년 8월10일 남하하는 조선 인민군과 대한민국 제25연대 및 제3사단 학도병 사이에 포항전투가 시작되었다. 8월11일 새벽 3시 북한군과 우리 학도병 71명이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고 몸을 이빨로 물어뜯는 백병전까지 전개한 전투는 오후 2시 30분쯤에 끝났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학도병은 48명이 꽃잎처럼 목숨을 떨구었다. 그 속에 이우군 학도병도 함께 묻히고 말았다. 또한 순창의 농림 중학교 출신 학도병 37명도 목숨을 함께하였다.
학도병은 서울시내 각급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 200여 명이 수원에 모여 1950년 6월 29일 ‘비상학도대’를 만들었고 이들 일부는 교복을 입은 채로 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아 한강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7월 1일 대전에서 ‘대한학도의용대’를 스스로 조직하였다. 국군으로 참전하는 학도들이 줄을 이었으며, 여학생들도 간호원으로 참전하였다. 학도의용병들은 대구로 내려가 다시 조직되어 국군 10개 사단과 그 예하 부대에 편입되어 낙동강 방어선에서 계급도 군번도 없이 참전하였다.
북한 인민군에는 원래 17세의 소년병이 많았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남한 점령지에서 인민군 학도병을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았다. 남북의 소년병들이 전선에서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소년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묻었으나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하였다.
슬픈 한국전사여! 역사의 칼날이여! 꽃다운 17세 소년병은 어디로 갔나요. 이 17세의 화혼(花魂)을 어찌하오리까? 봄바람이여! 시든 꽃잎도 함부로 흔들지 마라.
*참고 자료
국민 보도연맹 취의서
민전 산하단체 간부층의 기만적이며 부소(附蘇) 관료주의적 독선독재와 특히 남로당의 살인ㆍ방화ㆍ파괴 등 멸족 정책은 마침내 탈당 전향자를 매일 수십 명씩 속출케 함으로써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천하에 폭로하기 시작하였다.
경향 각 신문을 통하여 보더라도 남로당을 멸족 파괴당으로 규정하고 탈당한다는 성명 광고가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공산주의 사상을 이념적으로 찬동하는 나머지 참가한 결과 그들 간부층의 멸족적 정권 쟁탈전에 이용도구로 되었다는 데 분개하여 과감한 자기비판과 준열한 자기 반성에서 단연 탈당을 천하에 성명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깨끗한 국민으로 지금 민족 분자의 말살운동에 적극 참가할 것을 민족 앞에 맹세하며, 혹자는 자기의 무지로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가입했던 것을 솔직히 자백하여 후회하고 혹자는 오늘날의 현실적인 환경을 무난히 돌파하자는 수단으로써 간단한 탈당 성명을 하는 자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남로당의 멸족 정책으로 이상과 같이 탈당 전향자가 속출하나 차등(此等) 전향자, 탈당자를 철저히 계몽 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국민으로써 멸사봉공의 길을 열어 줄 포섭기관이 절대로 요청되는 바, 여사한 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 나머지 오인은 천학미력을 무릅쓰고 결사보국의 지성일념에서 감히 전향자 국민 보도연맹을 기성하고자 하는 바이다.
전향자를 무조건 포섭도 무조건 배격함도 절대 금물이 아닐 수 없으므로 전향 탈당자를 지도 계몽함은 물론, 이들 중에는 우수한 역량과 식견이 있는 자가 허다하므로 과거 조직생활에서 체험한 바를 제 일선에서 출발되는 것으로 일종 신념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폭력이나 억압으로 근절하기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어서 일시적 미봉책은 될지언정 영구 차(且)로 완전무결한 대적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어디까지나 정치로 투쟁할 것이요, 사상은 사상으로 투쟁하여 상대방을 극복 시켜야 할 것이다.
이제 본 연맹으로 하여금 전문적 연구를 적극적으로 하여 과학성에 입각한 조리 정연한 이론으로 전향 탈당자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까지도 언론으로 기관지 등으로 일대 국민운동으로 일으켜 상대방을 압도 할 것이요, 남북로당 노선이 멸족적인 사실에 비추어 과거 과오를 범한 동포들에게 체계있는 이론으로 설복하여 대한국민으로서 멸사봉공의 정신함양에 적극 노력하여 멸족당인 남북로당 계열의 근멸을 기하는 바이다.
2. 강령
1. 오등은 대한민국 정부를 절대지지 육성을 기함
1. 오등은 북한 괴뢰정권을 절대반대 타도를 기함
1. 오등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 분쇄를 기함
1. 오등은 이론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로당의 멸족파괴정책을 폭로 분쇄를 기함
1. 오등은 민족진영 각 정당, 사회단체와는 보조를 일치하여 총력 결집을 기함
○ 이것은 1949년 4월 21일 서울시경찰국 국민 보도연맹 준비회의에서 작성한 것이다.
※부소= 소련에 부속된 = 소련에 예속된
※민전 산하단체 = “민족해방전선” 산하단체 = “국가 민족 통일을 주장하는 민족
충북지역 민간인 학살 현황
작성 :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1) 사건 유형별 학살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