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백제말기의 정치상황
출처: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6권'
제2절 국제정세의 변화
1. 고구려와 당의 전쟁
남북조시대의 분열기를 종식시키고 새롭게 등장한 통일제국인 隋는 고구려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경쟁을 하였다. 수의 외교정책은 주변 제국을 영향권 아래 직접 예속시킴으로써 고구려 등을 속국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돌궐·말갈·거란 등과 연계해서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수와 대립하며 경쟁하였다. 고구려와 수의 갈등과 대립은 ?陽王9년(598) 고구려가 요서지방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군사적 대결로 치달았다.
이에 수 文帝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수 양제는 영양왕 23년(612)에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을지문덕에게 패하여 물러갔고, 영양왕 24년과 25년에도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등 세 차례나 침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연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 패전한 수는 민심의 이반과 내분으로 멸망하고(618) 당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唐이 건국한 이후 고구려와 당은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영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류왕(榮留王 618~642)은 새로 건국한 당과 우호를 유지하고자 했다. 고구려는 당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통하여 군사적 충돌을 피하였다. 당 역시 영류왕 5년(622)에 수와 고구려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양국 백성들을 서로 송환할 것을 제안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등 평화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고구려도 이에 화답하여 당이 突厥의 ?利可汗(힐리가한)을 사로잡자 축하사절을 파견하면서 고구려 지도인 封域圖를 보냈고, 당에 책력을 보내줄 것과 불교와 도교 등의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은 고구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도사를 보내어 국왕·대신에게 노자를 강의하게 하는 등 문화적인 교류에도 힘을 쏟아 양국간의 관계는 우호적인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당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고구려에 대한 臣屬또는 정벌론이 대두하고 있었다. 당 高祖는 고구려를 당의 藩國으로 服屬시켜야할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였고, 이후 고구려에 대한 복속 의지를 표명하게 되었다. 당의 고구려에 대한 이런 의식은 점차 고구려에 대한 강압적 태도로 표출되었다.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해 영류왕 16년(633) 축조를 마치고 당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기민하게 대처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영류왕 23년(640) 世子 桓權을 당에 보내고, 子弟를 당의 國學에 입학시켜줄 것을 청하는 등 당에 대해 적극적인 유화책을 폈다. 이에 대해 당은 고구려의 청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하였다. 그렇지만 당은 그 다음 해인 641년에 답방사로 職方郞中陳大德을 보내어 겉으로는 고구려가 桓權을 보낸 것을 치하하면서 고구려 내지를 속속들이 돌아다니면서 정탐하는 등 고구려의 정세를 살피고 추후의 침공을 위한 사전 정보수집에 열을 올렸다. 직방낭중은 병조에 소속된 職方司의 장관으로서 군사용 지도의 제작과 관리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임무를 맡고 있던 진대덕이 고구려의 내지를 다니면서 한 일은 이전에 고구려가 바친 봉역도와 실제 고구려의 지리를 대조해 가면서 고구려 내부의 민심과 지리를 살피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귀국하자 당 太宗은 정탐한 내용을 보고 받고 기뻐하면서 고구려 정벌계획에 대해 논의하였다.
고구려도 당의 이와 같은 조치에 대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류왕은 당에 대한 유화정책을 꾸준히 전개하면서도 16년간에 걸쳐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당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천리장성은 동북쪽으로는 부여에서 서남쪽으로는 서해바다에 이르는 차단성으로 요동을 가로질러 침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당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영류왕의 대당정책은 당의 고구려 침공 명분을 차단하는데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642년 영류왕의 피살과 淵蓋蘇文의 집권은 당에게 침공명분을 주고 말았다.
천리장성 축조를 담당하고 있던 연개소문은 642년 군대의 열병식에 대신들을 초청하여 1백 명을 살해하고 영류왕 마저 시해한 다음 보장왕을 즉위시키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당의 위협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온건파인 영류왕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고구려와 당과의 관계는 급변하였다. 영류왕이 추진한 대당유화책을 버리고 당과 정면으로 대처하는 강경책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가 대당강경책으로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개소문은 정변 이후 대외적인 긴장과 위기감을 조성하여 집권력을 강화하고 자하였다. 그러나 집권 초기에는 당에 대한 정면대결은 회피하고자 하였다.
연개소문에 의해 추대된 보장왕은 영류왕의 조카로 즉위 초에는 당과 친선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보장왕은 즉위 다음 해인 643년 정월 당에 사신을 보냈고, 이어 3월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어 道敎를 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道士叔達등 8인을 보내 도교를 전하게 하였고, 아울러 老子의 道德經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보장왕 3년(644) 정월과 9월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白金을 바치고 官員50명을 보내 宿衛할 뜻을 비쳤다. 이러한 보장왕의 노력은 우선 당과의 화호관계를 깨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친당적이던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것에 대하여 책망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표방하였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방비를 튼튼히 하고 있고, 당에 공손한 태도를 취하자 바로 침공을 감행하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며 후일을 기약하는 형국이었다.
당의 고구려 공격 방침은 이미 영류왕 7년(624)부터 분명했지만, 보장왕 1년에 당의 毫州刺史裵行莊이 고구려정벌론을 제기했고, 이듬해에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 돌아간 鄧素가 懷遠鎭에 戍兵을 증파하여 고구려를 압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고 신료들과 의논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643년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조공로를 가로막고 있어 조공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구원병을 청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라의 원병요청은 바로 전 해인 642년 백제에게 40여 성을 함락당하는 등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신라는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는데 오히려 김춘추를 고구려에 억류하고 竹嶺이북의 옛 고구려 땅을 돌려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는 신라가 들어주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운 것으로써 결국 신라의 청병요구를 거절한 것이었다.
이에 신라는 당에 접근해 고구려와 당의 대립관계를 적절히 이용해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신라와 고구려 관계의 파국은 이후 신라가 당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펼치는데 전환점이 되었다. 고구려의 대신라정책은 결과적으로 당과 신라가 손을 잡게 함으로써 당과 배후의 신라가 고구려를 협공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4년 당은 司農丞 相里玄奬(상리현장)을 고구려에 보내 고구려가 백제와 더불어 신라를 치는 것을 중단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만약 또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다음 해인 645년에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이와 같은 당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은 당의 말을 듣지 않고 신라를 공격하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와 신라가 원수가 된지 이미 오래다. 지난날 수가 침범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고구려 땅 500리를 빼앗고, 그 城邑을 모두 차지하였으므로 그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싸움을 그만둘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당의 중재를 거절하자 상리현장은 당 태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당은 고구려 공격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이후 당과 고구려는 계속되는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충돌하게 되었다.
644년 7월 당 태종은 洪州·饒州·江州의 3주에 명하여 배 400척을 만들어 軍糧을 싣게 하고, 營州都督張儉 등을 보내 幽州와 營州두 도독의 군사와 契丹과 奚, 靺鞨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그 형세를 보게 하였다. 그리고 大理卿韋挺을 饋輸使로 삼아 河北여러 주의 군량을 모으도록 하고, 또 大理少卿蕭銳에게는 河南여러 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海路로 운반하게 하는 등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선물을 바치고 관원을 보내 숙위를 할 것을 청하는 등 회유책을 쓰기도 하고, 長安의 耆老들이 원정을 반대하자 잠시 주저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의지를 꺾지 않고 군량을 모으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앞서 마지막으로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던 前宜州刺史 鄭天璹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정천숙은 요동은 길이 멀어 양곡을 수송하기 어렵고 고구려는 守城을 잘하므로 갑자기 항복시키기 어렵다는 신중론을 개진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은 개의치 않고 고구려 정벌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면서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다. 645년 1월 장량과 이세적이 거느린 당군은 幽州에서 우선 합군하여 雲梯와 衝車등 攻城器械를 만들고 주변에서 징집하였다.
고구려 정벌 준비를 완료한 당 태종은 출정을 천하에 알리는 조서를 직접 지었다. 이 조서에서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고 있어서 인정상 참을 수 없어 그 죄를 묻고자 한다는 것으로 당과의 이해관계는 없는 것처럼 말하였다. 단지 연개소문의 폭정에 대한 응징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는 표면상으로 보면 당 황제로서 속국인 고구려의 왕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학대한 연개소문정권에 대한 징벌의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고구려 내정에 대한 간섭이었다. 또한 수 양제는 臣民을 殘暴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백성을 어질게 대하고 사랑하는 고구려왕을 친 까닭에 고구려 원정이 실패 했다고 말하여 스스로를 仁君으로 추켜세웠다. 그러므로 仁君인 당태종이 백성들을 학대하고 있는 연개소문이 집권한 고구려를 치는 것은 정당한 것이며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조서를 내렸던 것이다.
645년 3월 당 태종도 定州를 출발하여 요동으로 향하였다. 이 때 다시 한 번 출정에 앞서 侍臣들에게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본래 의도를 말하였다. 당 태종은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하였으나 취하지 못하였다.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 子弟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해서는 君父의 치욕을 씻으려 할 뿐이다. 또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아직 늙지 않았으므로 사대부의 餘力을 빌어 평정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당 태종의 고구려 출정 명분은 첫째, 본래 중국의 땅인 요동을 회복하려한다는 것이고, 둘째, 수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많은 희생자를 냈었는데, 이때 희생된 중국인 자제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희생당한 고구려 영류왕과 대신들의 치욕을 씻어주겠다는 것이고, 넷째, 사방을 다 평정했는데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평정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당의 속셈은 앞서 조서로서 내세운 공식적 명분인 연개소문의 폭정에 대한 응징보다는 당이 주변의 제민족을 평정하였으나 오직 고구려만을 평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평정하려한다는 패권주의를 드러낸 것이다. 즉 당의 최종 목표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당과 대립하며 경쟁하던 고구려를 제거하기위한 것이었다.
당 태종이 사방을 평정했다고 한 것은 당의 건국 이전부터 북중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동돌궐을 이미 제압하고, 서방 실크로드의 고창국마저 제압한 사실을 말한다. 당은 건국시 동돌궐 기마군단의 도움을 받았고, 당 태종이 즉위한 후 동돌궐군의 장안성 공격으로 위기상황을 맞이한 당이 동돌궐과 굴욕적인 화호를 맺는 등 동돌궐의 위세는 국운을 위협할 정도로 강하였다. 더구나 동돌궐은 동북만주에서 북중국과 실크로드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거란·실위·토욕혼 등의 유목민족과 실크로드의 고창 등을 세력권 아래 두고 있을 만큼 강력했었고, 고구려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동돌궐의 내분을 틈타 일격을 가하여 ?利可汗을사로잡고 동돌궐을 붕괴시켰던 것이다.
동돌궐을 제압한 당은 다시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켰고, 남방의 토번과 당 사이에 있던 선비족 국가인 토욕혼도 이미 630년에 무너뜨려 부용국으로 삼은 바 있었다. 토번에 대해서는 641년에 문성공주를 송첸캄포 왕에게 시집보내는 등 회유정책으로 후환을 없앴다. 이처럼 당 태종은 주변의 제국들을 제압하고 난 뒤에 고구려 정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당은 이미 정복한 제국에는 도독부나 도호부를 설치하고 기미정책을 통하여 정복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돌궐세력과 토번을 완전히 제압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기세를 꺾은 후에 동북아시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고구려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였다. 고구려마저 제압한다면 고구려와 연계된 돌궐세력을 고립시킨 후 장악할 수 있어, 결국 당이 동북방과 서방을 완전히 복속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당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던 영류왕이 시해되고 보장왕이 즉위한 시점인 642년은 당으로서도 주변의 제민족을 어느 정도 제압하고 고구려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좀 생긴 시기였다. 즉 보장왕 즉위 이전에 당은 고구려에 대한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공격을 준비할 여유가 별로 없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당의 고구려 정벌계획은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앞서 李靖에게 “공은 남쪽으로는 吳會를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沙漠을 깨끗이 하였으며 서쪽으로는 慕容을 평정하였는데, 오직 동쪽으로 高麗만 아직 복속시키지 않았으니, 공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물어본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출정에 앞서 근신들에게“고려의 막리지는 왕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였으니 이 기회를 틈타 정벌하면 쉽게 주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학대하고 있으니 고구려를 정벌하기 쉽게 되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즉 당으로서는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폭정을 일삼는 것을 바로잡는다는 핑계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마지막 걸림돌인 고구려를 제거하기 위해 출정하려 하였다는 사실을 간취할 수 있다. 고구려 정벌의 실제 목적은 동아시아의 패자로서 당제국을 완성하기 위한 야욕의 발로였던 것이다.
644년 당 태종의 출격명령을 받은 이세적이 거느린 육군과 장량이 거느린 수군은 제1차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645년 4월 이세적과 江夏王 道宗이 거느린 당의 육군이 요하를 건너 玄?城(현토성)과 新城(신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營州都督 張儉도 요하를 건너 建安城(건안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세적과 도종은 진로를 바꿔 蓋牟城(개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만 명의 포로와 10만 석의 양곡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당 태종이 직접 거느린 본대와 합세해 수 양제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요동지역의 최대요충인 遼東城(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國內城(국내성)과 新城에서 구원병을 보내 요동성을 구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요동성 함락으로 고구려는 전사 1만 명, 정예병사 포로 1만여 명, 백성 4만 명과 양곡 50만 석을 잃는 등 그 피해가 자못 컸다.
요동성을 점령한 당군은 여세를 몰아 白巖城(백암성)을 함락시키고 安市城(안시성)을 공격했다. 고구려는 안시성에 北部褥薩 高延壽(고연수)와 南部褥薩 高惠眞(고혜진)으로 하여금 15만 대군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전사 3만 명, 포로 3만 6천 8백여 명, 말 5만 필, 소 5만 두, 明光鎧1만 령과 막대한 양의 병장기를 잃고 말았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거느린 구원군 15만 명은 고구려의 가용전력 중 거의 대부분을 동원한 것이었으나, 이들의 패배로 인하여 고구려는 커다란 위기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장량이 거느린 수군은 황해를 건너 요동반도 남단의 요충지인 고구려의 卑沙城(비사성)을 함락시키고 당 태종과 이세적의 본군이 요하를 건너 평양으로 직공하기 위해 진군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군의 본대는 안시성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였다. 신성과 건안성의 고구려군이 배후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안시성이 당군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군은 안시성을 우회하여 건안성과 烏骨城(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이미 비사성을 함락시킨 장량의 수군과 함께 평양으로 진군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안시성을 배후에 남겨두면 당군의 보급로가 끊길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안시성을 함락시킨 후 진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5월 요동성을 함락시킨 뒤 시작한 안시성 공방전은 9월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당군에 완전 포위된 채였지만 끈질기게 저항하였고, 당군은 총공세를 폈으나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안시성을 공격하던 당군은 요동지방이 일찍 추워지고 군량도 떨어지자 결국 요하를 건너 철수하였다. 철수하는 과정에서 당군은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만했다.
결국 당군의 첫 번째 고구려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고구려의 인적·물적 피해도 막심했다. 즉 요동성과 개모성 등 10성이 함락당하고, 7만 명의 백성이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 또한 병사는 4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6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여기에 60만 석 이상의 양곡과 수많은 우마와 병장기를 잃었다. 더욱이 안시성 구원에 나선 15만의 고구려와 말갈병이 대패하여 고구려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후 이를 복구하는데 오랜 시간과 국력의 집중이 필요했다.
당군이 물러난 후 646년 5월 고구려는 당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나 당 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져 사신을 보내어 국서를 전달할 때도 그 말이 모두 허황되었으며, 당의 사신을 대할 때도 거만하였고 항상 변방의 틈을 엿보았다. 여러 번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침략을 그치지 않았다.”라고 하고 조서를 내려 조공을 받지 말고 다시 토벌할 것을 논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647년 2월 당 태종은 다시 고구려 원정길에 나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는 “고구려는 산에 의거하여 성을 만들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시킬 수 없다. 전에 황제가 친히 원정을 할 때 고구려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함락한 성은 당군이 모두 그 곡물을 거두어 들였고, 가뭄이 이어져 태반의 백성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지금 만일 자주 소규모의 부대를 보내어 그 영토를 번갈아가면서 소란스럽게 하면 그들은 우왕좌왕 피로해지고 농기구를 놓고 성채로 들어가, 몇 년 안에 천 리의 초목이 말라 시들게 되고 人心이 자연 이반되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도 않고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의 고구려 공격 전략이 대규모 전면전에서 소규모 지구전으로 전환한 것임을 알려준다. 즉 대규모 전면전을 중지하고 소규모 공격을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고구려를 지치게 하자는 공격전략으로 수정한 것이었다. 이는 지속적인 고구려 공격으로 민생을 피폐하게 함으로써 민심을 이반시키고 국력을 고갈시킨 후 전면전을 하자는 전략으로 수대 이후부터 견지해 오던 전면적인 속전속결전략을 일단 유보하고 지구전을 펴자는 것이었다. 당 태종은 이러한 전략을 받아들여 시행하였다.
647년 3월 당 태종은 이세적과 孫貳朗을 보내 南蘇城을 공격하였고, 7월에는 牛進達과 李海岸이 거느린 1만 명의 수군을 보내 石城을 함락시키고 積利城을 공격하였다. 648년 정월에도 3만 명의 수군을 薛萬徹과 裵行方에게 주어 고구려를 치게 했고, 648년 4월에는 古神感이 거느린 수군이 易山에서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5천을 격파하였다. 648년 9월에는 薛萬徹과 裵行方이 거느린 당군이 泊灼城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처럼 당군의 계속되는 공격을 받은 고구려에서는 646년 2월과 647년 12월, 648년 정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당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당 태종은 오히려 649년에 대규모의 고구려 정벌을 위하여 선박을 건조하고 군량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649년 4월 당 태종이 죽자 더 이상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고, 遺詔로 고구려 정벌을 중단할 것을 명하였다. 당 태종을 이어 즉위한 高宗은 잠시 고구려 공격을 멈추었고, 고구려도 보장왕 11년(652) 정월 당에 사신을 보내는 등 새로 즉위한 고종과 친선을 도모하려 노력하였다.
한편 보장왕 13년(654) 10월 고구려는 말갈병과 함께 당에 복속되어 부용세력이 된 거란을 쳤으나 오히려 新城에서 松漠都督 李窟哥에게 대패하였다. 655년 2월 당 고종은 잠시 중지하였던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당은 營州都督 程名振과 左衛中朗將 蘇定方을 보내, 그 해 5월 貴湍水에서 고구려군을 깨뜨리고 노략질한 후 돌아갔다. 당의 고구려 정벌이 소강상태를 거쳐 다시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장왕 15년(656) 12월 보장왕은 그 해 정월 代宗弘이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을 보낸다는 구실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어떻게든 전쟁을 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그치지 않았다. 보장왕 17년(658) 6월 당은 營州都督兼東夷都護 程名振과 右領軍中朗將 薛仁貴가 赤鋒鎭을 함락시키고, 豆方婁가 거느린 고구려군 3만을 대파하였다. 그리고 11월에도 橫山에서 溫沙門이 거느린 고구려군을 깨뜨렸다. 이처럼 당 고종은 고구려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당이 고구려 공격을 잠시 멈춘 시점은 단지 서돌궐원정에 나서거나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던 때였다. 당 고종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고구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렇지만 오랫동안의 고구려 원정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하였고, 태종 말년 이후로 견지해오던 소규모 국지전을 유발해 고구려의 국력을 점차 피폐하게 한다는 전략을 유지하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2. 羅唐同盟의 성립
당은 태종과 그 뒤를 이은 고종이 연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거듭 사신을 보내 회유하여 전쟁을 피해보고자 노력하였다. 645년 시작된 당의 고구려 침공은 거의 매 해 계속되었다. 다만 649년 당 태종이 사망하자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654년 고종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 후 끊임없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당 태종의 대규모 군단을 동원한 전면전 전략이 실패한 이후 즉위한 고종은 소규모 군단을 동원한 빈번한 침공으로 전략을 바꿨지만, 쉽사리 고구려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당의 고구려에 대한 강경책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전쟁으로 변모하자 당으로서도 대고구려 공격 전략을 다시 한 번 수정할 필요가 있었고, 고구려의 배후에 위치한 백제 및 신라와 연합하는 전략도 고려하게
되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에 이어 새로이 건국한 당에게 자주 사신을 보내어 특산품을 바치는 등 적극적인 외교전략을 펼쳐 양국이 모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도 다만 신라와 백제가 화호할 것을 권고하는 선에서 그쳐 특별히 어느 한 나라에 치우치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 의자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당은 고구려와 연합한 백제와의 관계를 점차 정리하고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당과 백제 사이의 외교문제에 신라문제가 적극적으로 개입되면서 양국은 점차 소원해졌다. 신라는 당과 백제 사이에 항상 개입하여 양국의 우호관계를 이간질하였고, 백제도 당과 고구려와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던 입장에서 고구려와 손을 잡는 것으로 외교전략을 수정하였다. 이는 신라와 백제가 거듭 전쟁을 치르면서 고구려와 당 양국 모두 자국편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분명해졌다.
신라와 백제는 한때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551년 양국군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유역을 획득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었다. 그러나 553년 신라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백제의 건국지이자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겨우 수복한 한강유역의 6군을 가로채자 이에 격분한 백제 성왕이 신라를 치기 위해 출정했다가 554년 관산성에서 신라군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 이후 양국관계는 파국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시작된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660년 백제의 멸망으로 끝날 때까지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었고, 양국은 국운을 걸고 싸웠다.
양국의 전쟁은 위덕왕대에는 신라 진흥왕에게 밀려 백제가 수세에 몰렸었다. 그러나 무왕이 즉위하면서 신라와의 전쟁을 점차 유리하게 이끌었고, 의자왕이 즉위한 7세기 중엽에는 신라를 압도하였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급급한 지경이었다. 『三國史記』를 중심으로 백제와 신라의 전쟁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
다.
554년(聖王32) 7월 狗川에서 신라군의 복병에게 성왕이 포로로 잡혀 주살됨.
554년(威德王元年) 9월 신라의 珍城을 공격하여 남녀 3만 9천, 말 8천 필을 노획함.46)
561년 7월 신라의 변경을 쳤으나 一善북쪽에서 伊? 世宗에게 패함.
577년 10월 신라의 서변 州郡을 쳤으나 패함.
578년 3월 신라가 閼也山城을 침공함.
602년(武王3) 8월 신라의 阿莫山城(一名母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옴, 신라가 백제국경을 침범
하므로佐平 解讐가 步騎4만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패배함.
605년 2월 신라가 국경을 침범함.
611년 10월 신라의 ?岑城을 함락시키고 城主 贊德을 죽임.
616년 11월 達率 ?奇를 보내 신라의 母山城을 침.
618년 신라 장군 邊品이 ?岑城을 공격하여 회복함.
623년 가을 신라의 勒努縣을 침.
624년 10월 신라의 速含·櫻岑·岐岑·烽岑·旗懸·穴柵의 6성을 빼앗음.
626년 8월 신라의 王在城을 공격하여 城主東所를 죽임.
627년 7월 將軍 沙乞을 보내 신라의 두 성을 함락하고 남녀 300구를 사로잡음.
628년 2월 신라의 柯峰(岑)城을 쳤으나 실패함.
632년 7월 신라를 쳤으나 패함.
633년 8월 신라의 西谷城을 쳐서 13일 만에 함락시킴.
636년 5월 將軍 于召를 보내 신라 獨山城을 공격하였으나 玉文谷에서 閼川에게 패해 사로잡힘.
642년(義慈王2) 7월 왕이 친히 신라를 쳐서 ?? 등 40여 성을 함락시킴. 8월 將軍 允忠을 보내 大耶城을
함락시키고 城主 品釋을 살해함.
643년 11월 고구려와 신라의 당항성 공격.
644년 9월 신라 金庾信이 백제의 7성을 함락시킴.
645년 정월 신라 매리포성을 침에 김유신이 막음.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친정하는 동시에 신라군을 징발하자
신라의 7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킴, 신라 김유신이 침입함.
647년 10월 將軍 義直을 보내 신라 茂山城·甘勿城·桐岑城을 쳤으나 김유신에게 대패함.
648년 3월 義直이 신라 서변의 要車城등 10성을 공취함. 4월 玉門谷에서 김유신에게 패함.
649년 8월 左將 殷相이 신라의 石吐등 7성을 함락시켰으나, 道薩城전투에서 김유신에게 패함.
655년 8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변 33성을 공파함.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멸망함.
이처럼 백제는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특히 무왕이 즉위한 이후 신라에 대한 공격은 거의 해마다 계속되었고 의자왕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왕은 소백산맥을 넘어 성왕 대에 백제의 영향권 아래에 두었던 옛 대가야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옛 대가야 지역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패사하기 전에는 백제의 통제를 받던 지역이었으나, 이후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점령한 곳이었다. 무왕은 상실한 백제의 구토를 회복하기 위해 소백산맥을 넘어 섬진강과 그 주변지역의 신라영토를 공격하여 상당부분을 되찾는 성과를 올렸다. 신라는 섬진강 유역의 옛 가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백제에게 내주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의자왕이 즉위한 이후 백제의 신라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의자왕은 대내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당과 고구려·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642년 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서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의자왕이 미후성 공격에 직접 나선 것은 즉위 초 왕권의 위엄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성왕대에 상실한 대가야 고토에 대한 무왕의 회복노력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자왕은 신라의 서방 거점인 미후성 등 40여 성을 친히 함락시킨 후 장군 윤충을 보내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옛 대가야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신라 수도 경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낙동강 서안의 옛 대가야지역을 대부분 확보하였다. 백제는 계속 공세를 취하여 낙동강 서안을 넘어 신라의 수도 경주마저 위협하였다.
이에 신라는 642년 김유신을 押梁州軍主에 임명하고 백제군을 전방에서 막는 임무를 맡겼으나 전반적인 판세는 열세였다. 신라는 백제에 대한 군사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먼저 642년 대야성이 함락된 후 김춘추를 고구려의 연개소문에게 보내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가 고구려에 침입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차지한 竹嶺 서북쪽 고구려 땅 500리를 반환하지 않으면 들어줄 수 없다고 하면서 신라의 구원요청을 거절했고, 오히려 김춘추를 억류하였다. 고구려에 대한 請兵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라가 기댈 곳은 唐밖에 없었으므로 즉시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일찍이 眞平王30년(608)에 고구려의 거듭되는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와 적대적이던 수의 양제에게 乞師表를 지어 바침으로써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신라의 善德女王은 고구려에 대한 청병외교가 실패로 돌아간 다음 해인 643년 9월 당에 사신을 보내 청병을 요청했다. 신라의 당에 대한 청병 목적은 본래 백제의 침범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당과 적대적이던 고구려를 끌어들여 청병함으로써 당에게 명분과 실리가 있을 것이라고 설득 한 것이었다. 즉 백제가 당의 적국인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자주 공격하여 신라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하면서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은 644년 정월 司農丞相里玄奬을 고구려에 보내 신라는 당에 귀의하여 조공을 빠뜨리지 않고 바치는 나라이니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침범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타이르면서, 만약 전쟁을 그치지 않으면 다음해에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위협하는 선에서 그쳤다. 실제 당은 원병을 보내지도 않았고 더욱이 신라가 원하는 백제에 대한 출병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당으로서는 오직 고구려 원정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에 끼어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제에 대해서는 신라와 화호할 것을 권고하는 璽書를 보냈고, 이에 의자왕이 사죄의 글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당이 백제에 대한 적극적인 조처를 하거나 고구려에게 한 것처럼 출병하여 공격한 다는 위협을 가하지 않은 까닭은 당에 대한 백제의 외교적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주 사신을 보내 입조하며 당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은 공연히 백제를 적대시할 필요가 없었다.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개시한 백제의 武王은 당에 자주 사신을 보내고 무기와 특산물을 바치는 등 정성을 다했다. 당도 무왕을 책봉하는 등 관례적이지만 외교적 노력을 다하여 양국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義慈王도 즉위 초에는 해마다 당에 사신을 보냈고,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등 적대적인 관계를 맺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백제 무왕이 고구려가 당에 입조하는 길을 막는다고 호소하자 당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원한을 풀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백제와 당의 외교관계는 무르익어 있었고,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표방하면서 당과 우호관계를 지속하였다. 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果下馬와 같은 특산물을 바쳤고, 明光鎧와 鐵甲, 雕斧 등의 무기를 바치기도 했다. 의자왕도 특산물과 무기를 바치며 당의 환심을 샀다. 당은 백제의 의자왕이 보낸 金?鎧와 玄金으로 만든 무늬가 있는 갑주인 文鎧를 士卒들에게 입혀 645년의 고구려 원정에 나설 정도로 군사적으로도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이처럼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당이 신라의 청병을 들어줄 까닭이 없었다.
그러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고 당에 入朝하는 길을 막으려 한다고 하면서 백제를 고구려와 같이 당에 적대적인 나라라고 주장했지만, 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형식적으로 대응하기만 했다. 게다가 당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백제의 공세라는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라의 청병요구를 회피했다. 당 태종은 신라가 위험에 처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 당이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곧 요동으로 쳐들어간다면 4국이 모두 소란스러워질 것이라며 청병을 거절했다. 또한 백제는 數十百船에 甲卒을 싣고 바다를 건너 공격하고 싶으나, 신라는 부인이 임금이라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다 하고 당 황실의 親族을 임금으로 삼되 당군을 보내어 보호하면 된다는 답을 하였다. 이러한 당 태종의 답변은 결국 신라의 청병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이 백제를 공격할 방안을 제시한 것은 이후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에 유효한 전략으로 채택될 수 있는 단초가 되었고,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백제는 수의 고구려 원정에 軍期를 정하여 출병한다고 약속했다가 결국 출병하지 않은 전력이 있었고, 당의 고구려 원정에 실제 병력이 아닌 군수물자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그치자 점차 당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었다. 더욱이 당이 신라를 두둔하면서 신라 편을 드는 일이 생기고 백제에게 외교적 압력을 가하자 점차 당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고구려와의 동맹을 강화하였다. 또한 의자왕 4년(644) 당에 사신을 보낸 이후 의자왕 11년(651)에 6년 만에 다시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관계를 소홀히 하였고, 그마저도 652년 한 차례 더 사신을 보낸 이후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않는 등 양국관계는 예전의 우호관계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에 반해 신라는 당에 대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외교적 노력을 계속하였다. 신라가 결정적으로 당의 신임을 얻은 것은 645년 고구려 원정에 3만대군을 보내 후원한 것이었다. 비록 백제에서도 갑옷과 투구를 보내 당군을 돕기는 하였으나, 직접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함으로써 당군을 도왔던 신라의 적극적인 행동은 이후 당과 신라가 군사적으로 결속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신 신라는 고구려와의 외교관계에 파
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더욱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통하여 당과 가까워지고자 하였다.
眞德王 2년(648) 백제가 義直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김춘추와 그의 아들 文王을 당에 보내 入朝케하고 請兵하였다. 이 때 김춘추는 당 태종에게 “우리나라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天朝를 섬긴지 이미 여러 해인데,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여러 번 침략을 맘대로 하고, 더구나 往年에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攻陷하여 朝宗의 길을 막았으니, 만약 폐하가 天兵을 빌리어 그 흉악한 놈을 없애주지 아니하면 우리의 인민은 다 사로잡히어 梯航述職은 다시 바랄 수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당 태종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결국 백제로의 출병약속을 받아냈다. 김춘추는 출병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法興王이후 사용하던 신라의 독자적인 年號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사용할 것과 衣冠制度역시 중국식으로 바꿀 것을 자청하는 등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자 노력했고, 아들 文王등으로 하여금 당 태종을 宿衛할 것을 자청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신라의 끈질긴 노력으로 인해 신라와 당은 군사동맹을 맺게 되었다.
당 태종이 백제에 出師할 것을 약속한 것은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과 당이 신라의 성심을 받아들인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 난 후에 평양 이북의 고구려 땅은 당이 차지하고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과 백제의 토지는 신라가 차지한다는 영토문제까지 합의한 후 나온 결정이었다. 즉 당이 신라의 청병요구를 들어준 것은 신라의 백제 병탄과 당의 고구려 점령이라는 쌍방의 전략적 이해가 일치한 가운데 전후 점령지의 귀속문제까지 타결된 뒤에 얻어진 결과였다. 김춘추가 당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해인 진덕왕 3년(649) 정월부터 신라는 중국의 의관을 입기 시작했고, 650년 당 高宗이 즉위하자 진덕왕은 신라 고유의 연호를 버리고 당 고종의 연호인 永徽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의 치적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五言詩인 太平頌을 직접 지어 새로이 즉위한 당 고종에게 바치는 등 당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성심을 다했다.
그러나 당은 출병약속을 하고도 바로 군사를 내어 신라를 구원하지는 않았다. 진덕왕 2년(648) 당 태종은 김춘추의 乞師에 응하면서 조서를 내려 소정방에게 20만 군사로 백제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이 소정방에게 20만 군사를 주어 백제를 치게 한 것은 김춘추의 청에 의해 교서를 내려 백제를 칠 것을 허락한 것이었을 뿐 실행되지는 못했다. 더구나 당 태종이 그 다음 해인 649년 5월에 죽자 당의 백제 공격계획은 실행될 수 없었다. 또한 당의 고구려 원정전략이 국지적인 소모전으로 전환됨에 따라 백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전략도 사실상 미루어졌다.
새로 즉위한 당 고종은 우선 황권을 공고히 하고 서돌궐과 고구려를 평정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당은 서돌궐과 고구려에 대한 원정을 번갈아 하였고 백제정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라의 끈질긴 청병요청에도 불구하고 당이 백제 공격을 미룬 것은 고구려에 대한 先攻戰略을 포기하지 않은 데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당은 고구려 공격이 성공하?지 못하고 거듭 실패로 돌아가자 '고구려 선공전략'을 '백제 선공전략'으로 전환하게 하였고, 당은 신라의 요청대로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은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먼저 친후 고구려를 병탄하기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신라가 당에 마지막으로 출병을 요구한 것은 태종무열왕 6년(659)이었다. 신라는 백제가 국경을 자주 침범하므로 백제를 치겠다고 하며 당에 김인문을 보내 원병을 청하였다. 당은 그 해 10월 신라의 청병에 응하기로 하
고 김인문을 불러 도로의 險易와 去就의 편의를 물었고, 김인문은 자세히 대답하였다. 당 고종은 이어 김인문을 백제원정군의 副大摠管으로 임명하고 출정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당의 고구려 원정 전략은 백제 원정 이후로 결정되었다. 당이 백제를 우선 공격하는 전략으로 전환한 것은 연이은 고구려 공격의 실패이외에도 백제 내부의 정치적 변화에 따른 당의 인식전환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백제의 대당외교가 의자왕 말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소원해지고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맺는 관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3. 麗濟同盟의 성립과 왜의 향방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범하는 과정에서 백제가 전적으로 고구려의 편에서서 외교정책을 전개했던 것은 아니었다. 삼국의 관계는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하였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長壽王의 침입으로 도성인 漢城이 함락당하고 熊津으로 천도 후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백제의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하류 지역을 한때 회복하였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다시 빼앗기고 554년 7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사로잡혀 죽는 치욕을 당했다. 고구려는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 패해 참살 당한 직후인 위덕왕 원년(554) 10월 백제의 熊川城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553년 신라가 백제의 한강유역을 탈취함으로써 나제동맹이 깨지자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각기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을 뿐, 서로 동맹을 맺거나 화호하지 못하고 3국이 서로 상쟁하게 되었다. 이후 신라와 백제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원수가 되어 약 100년간 전쟁을 치렀고, 고구려도 백제나 신라와 화호하지 못한 채 상시전쟁단계에 돌입했다.
백제와 고구려는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백제는 수 문제가 고구려를 원정할 뜻을 가지자 위덕왕 45년(598) 9월 수에 長史 王辯那를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 정벌에 향도가 될 것을 청하게 된다. 백제의 이러한 움직임을 안 고구려는 백제의 국경을 침범함으로써 응징하였다.
백제 무왕은 8년(607) 3월에 좌평 燕文眞을 수에 보내 조공하고, 다시 좌평 王孝?을 보내 조공하면서 고구려를 칠 것을 자청하였다. 이에 따라 수 양제는 고구려 공격을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하는 등 무왕의 고구려에 대한 적대적인 행동은 계속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607년 5월에 즉시 군사를 내어 백제의 松山城을 공격하였고, 다시 石頭城을 쳐서 男女3천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608년 3월 백제는 다시 倭國으로 가는 수의 사신인 文林朗 裵淸이 백제의 南路를 거쳐갈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고구려와의 갈등 관계를 이어갔다.
611년 2월에는 수 양제가 고구려원정에 나서려하자 무왕은 다시 國智牟를 보내 軍期를 청하였고, 수 양제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후하게 상을 주고 尙書起部朗 席律을 보내 의논하게 하였다. 이처럼 백제는 수의 고구려 공격에도 참여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막상 612년 수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백제는 말로는 수를 돕는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고구려를 의식해서 국경의 군비를 엄하게 하였을 뿐 어떠한 군사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때 백제가 수의 고구려 원정에 맞춰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향도의 역할을 직접 수행하지 못한 이유는 앞서 두 차례에 걸쳐 수를 돕는다고 하다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가 멸망하고 당이 건국한 뒤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왕은 27년(626) 당에 사신을 보내 明光鎧를 바치고 고구려가 당에 來朝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당 고조는 고구려에 散騎常侍 朱子奢를 사신으로 보내 백제와 원한을 풀 것을 권고하였다. 645년 당 태종은 백제가 제공한 투구인 金?鎧와 玄金으로 만든 무늬가 있는 갑주인 文鎧를 입고 고구려 원정에 나설 만큼 군사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백제의 대당외교는 고구려와 백제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려는 백제의 노력에 부응하지 못했다. 의자왕 3년(643) 11월 백제는 신라의 서해안 요충지인 黨項城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 入朝하는 길을 막는다고 하면서 당에 구원병을 청하는 것을 알고는 그만두었다. 그러나 644년 정월 당 태종은 司農丞相 里玄奬을 보내 신라를 침공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당병을 보내 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백제 의자왕은 당이 신라 편에 서서 백제에 위압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651년과 652년 새로이 등극한 당 고종에게 사신을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당과의 외교관계를 끊게 되었고 고구려와 동맹하는 것으로 외교정책을 전환했다.
고구려는 처음부터 백제나 신라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고구려는 백제와 별개로 신라에 탈취당한 죽령 서북의
남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영양왕 4년(603) 장군 高勝을 보내 신라의 北漢山城을 쳤으나 신라 진평왕이 친히 출전하므로 퇴각하였고, 平原王의 사위인 溫達이 신라에게 빼앗긴 谿立峴과 竹嶺서쪽의 땅을 되찾으려고 출전하였다가 阿旦城싸움에서 전사한 일도 있었다.
신라는 604년 7월 한강 남쪽에 위치한 南川州를 폐하고 대신 한강 북쪽에 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608년에는 진평왕이 圓光法師를 수에 보내고, 고구려가 신라 강역을 자주 침범하니 정벌해 달라는 乞師表를 지어 바치게 함으로써 당시 고구려 원정을 준비 중이던 수를 이용해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그 해 2월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8천명을 사로잡아갔고, 이어 4월에는 신라의 牛鳴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수가 멸망하고 당이 건국하자 진평왕 51년(629) 8월 신라가 大將軍 龍春·舒鉉과 副將軍 庾信을 보내 고구려의 娘臂城을 쳐서 함락시키는 일이 벌어졌고, 선덕왕이 즉위한 이후 고구려의 榮留王이 21년(638) 10월 신라 북변의 七重城을 공격하였으나 閼川에게 패해 물러간 일이 있었다.
642년 연개소문이 집권하고 보장왕이 즉위하자 신라는 당에게 고구려가 백제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치려한다고 알렸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백제의 침입을 받아 서부변경의 40여 성과 요충인 대야성 마저 함락당하자 이찬 김춘추를 급히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보내 구원해줄 것을 청한 사실을 통해서도 당항성 공격이 고구려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일 고구려가 백제와 함께 동맹을 맺고 당항성을 공취하려고 했다면 바로 몇 달 후에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항성에 대한 공격은 백제의 단독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친정에 나선 645년 5월 신라군이 3만 병을 보내 당군을 후원하고 있는 틈에 백제가 신라의 7성을 습격하여 빼앗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는 신라를 적국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백제는 신라를 견제할 수 있는 나라로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비록 백제가 당의 고구려원정에 병장기를 제공하기는 하였지만 신라처럼 직접 군병을 보내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신라를 쳐서 결과적으로 고구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 주효했던 것이다.
고구려에 대한 청병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라는 당에게 고구려와 백제를 함께 정벌해 줄 것을 본격적으로 요청하기 시작했다. 648년 김춘추가 당에 들어가 당 태종에게 백제를 정벌할 군사를 내어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고구려의 巡邏兵에게 붙잡혔으나 從者인 溫君解의 기지로 겨우 살아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와 당의 결합을 막아내야만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는 결국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655년 정월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를 연합하여 공격함으로써 麗濟同盟을 실현하였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는 말갈병과 더불어 신라 북변의 33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림으로써 당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백제에 적대적인 행위를 하는 신라를 응징하였던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의 북변을 압박하였고, 그 결과 658년 3월 신라는 何瑟羅에 설치한 小京을 파하고 군사적인 방어거점인 州를 설치하여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고, 悉直에는 北鎭을 설치하여 고구려군의 위협에 대비하였다.
결국 의자왕 말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을 맺어 당과 신라의 동맹에 대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고, 백제는 신라에 비해 군사적인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655년
신라에 대한 무력시위로써 신라 북변의 33성을 함락시킨 이후 (동맹 관계에 의한) 별다른 군사적인 활동이 없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동맹은 견고하지 못했고, 이런 느슨한 동맹관계로 인해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고구려는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왜는 중국대륙에서 수와 당이라는 제국의 출현과 함께 대륙의 정치와 군사관계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삼국을 통한 문화 수입 단계를 넘어 수당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한 선진문화 수용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왜는 중국과 책봉과 조공관계를 맺고 사신과 유학승을 파견하는 등 문화교류를 표방하면서 정치적인 교류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백제와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한 가운데 이루어진 것으로 기존의 외교관계의 틀을 깨뜨린 것은 아니었다.
왜와 신라는 대대로 원만한 관계를 가지지 못했으나 7세기에 접어 중국대륙에 통일된 국가인 수와 당이 출현하면서 양국관계도 개선이 되었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신라와 왜의 사신 교환이 빈번해지게 되었다. 신라는 642년 3월 왜의 舒明天皇이 돌아간 것을 弔問하고 皇極天皇이 즉위한 것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어 양국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642년 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대야성이 함락당하는위기상황에 빠지자 왜에 대한 사신파견을 중지하였다. 신라는 642년 고구려에 청병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43년에는 당에도 청병하였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645년 왜에서 皇極天皇이 물러나고 孝德天皇이 즉위하면서 親百濟勢力으로 이전까지 정권을 잡고 있던 蘇我氏가 大化改新으로 제거되었다. 이에 신라는 왜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647년에는 김춘추를 보내 왜에게 백제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신라에 군사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왜 조정은 일시적으로 신라와 친교를 맺으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나, 신라의 청병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신라는 656년까지도 왜와의 외교관계 유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냈다. 그렇지만 654년 孝德天皇이 죽고 655년 齊明天皇이 즉위하여 친백제정책으로 회귀하자 신라와 왜의 외교관계는 경색되었다. 신라도 657년에 왜의 유학승이 신라사신과 함께 입당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등 그동안 우호적이던 입장을 바꿔 왜와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한편 왜와 고구려와의 외교적 관계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고구려는 654년과 656년에 왜에 사신을 보내 왔는데, 특히 656년 8월에는 81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이 오고, 그 해 9월에 왜에서는 답사를 보내는 등 고구려와 왜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660년 정월에도 고구려에서 100여 명의 사절단을 보내는 등 왜와 고구려는 상당히 밀착되어 있었다. 이처럼 고구려가 왜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접근한 것은 당과 적대적 관계 속에서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자 그 배후에 있는 왜와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신라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린 것이었다. 고구려와 왜의 관계는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을 맺어 나당동맹에 공동으로 대응하게 되면서 군사적인 동맹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고구려와 왜의 관계는 백제가 개입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 강고한 것은 아니었다.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에 위협을 가하던 당과 외교관계를 청산하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고,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왜와 더욱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왜 또한 655년 齊明天皇이 즉위하여 친백제정책을 펴면서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백제와 왜의 동맹관계는 659년 당과 신라의 백제정벌 기밀이 누설될 것을 염려하여 당이 遣唐使로 왔던 왜 사신의 귀국을 막고 억류하였던 사실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왜는 백제가 멸망한 직후 시작된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에 직접 구원병을 보내고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등 군사동맹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왜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흐름을 바꿀 수 있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국력도 고구려나 백제·신라 등 삼국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에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을 막는데 이렇다 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소식도 백제가 멸망한 뒤에야 들을 정도로 국제정세에도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