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의 고향
이수영
오늘은 수목원 매화원을 찾아가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금주를 하고 오늘은 점심까지 먹지 않았다.
어찌하면 더 진한 매화 향을 맡을 수 있을까. 나름대로 궁리한 결과이다.
지금 시각이 오후 1시 수첩을 손에 들고 수목원으로 갔다. 매화원은 원래 가건물로 지어진 매점이 있던 곳이었다. 몇 년 전 가을, 그 가건물을 걷어내고 새 흙으로 복토를 하더니 내 키보다 조금씩 더 큰 깡마른 나무들을 심기 시작했다.
그곳은 선인장 온실과 겨울이면 노천에 전시하던 값비싼 분재들을 겨울동안 보관하고 전시하는 건물의 어간에 위치하는 곳으로 말하자면 수목원의 모든 사람이 찾는 VIP 코스랄까. 수목원에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가는 요지였다.
그러나 매점이 없어지고 수목원 입구에 새 매점이 지어지기 전까지 그곳에 들리는 사람마다 매점에 대한 향수로 한 마디쯤은 쓴 소리를 하고 지나갔다.
이듬해 봄, 그 깡마른 나뭇가지에 드문드문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꽃에 관심을 갖고 유심히 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올 해부터는 달랐다. 그 매화는 정성을 다해 키운 덕분인지 이른 봄부터 소담스런 꽃망울을 터뜨리며 많은 카메라맨과 시민들의 관심을 모우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그 곳을 지나며 매화나무 마다 세워둔 작은 팻말을 읽어 가던 나는 감탄했다. 거기에는 그 매화나무의 족보랄까, 어디서 왔는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색깔의 매화인지 자세히 쓰여 있었다.
아하!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매화로구나. 그리고 이렇게 생겼구나. 이름은 모두 매화인데, 꽃이 피는 시기와 색깔 그리고 매화에 얽힌 사연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매화들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한번쯤은 그 매화 향에 취해보고, 비록 그 매화의 조상이 있는 현장은 아니지만 상상의 나라로 가고 싶은 생각이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나는 그 매화들이 절정으로 필 날을 손꼽아 보고 며칠 전부터 금주도 하고 오늘은 점심도 거르고 수목원의 매화원을 찾았다.
여기 심겨진 매화들은 그들 조상의 특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2세목 내지 3세목으로 그들을 심고 가꾸어 온 수목원 담당자들의 사랑과 정성으로 피어난 꽃이다. 여러 종류의 매화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꽃송이가 조금 크거나 작고, 소박한 백매에서 은근한 분홍색, 그리고 짙은 홍매까지 색깔도 다 다르다. 그리고 향기도 뭐라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조금씩은 다른 것 같다 그것은 거기를 찾아오는 벌들의 꼬임을 보면 알 수 있다.
매화를 사랑하지 않는 이 누가 있으랴만 그 중에도 매화를 특별히 사랑한 선현들이 남긴 매화들의 후손을 보며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복스럽게 피어난 퇴계 선생의 백색 도산매, 서애 선생이 사랑했다는 병산 서원의 홍매와 백매, 강릉 오죽헌 별당에 자라고 있는 연분홍 율곡 매와 남명 조식 선생이 사랑했다는 산청재 정원의 복스런 백매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제 내 코는 매화의 짙은 향기에 마비되어 그 향을 구별 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거기까지 찾아온 벌들의 신명난 날갯짓이 부럽기만 하다.
또 있다. 남평 문씨 세거지에서 가져온 인흥매, 산청 예담마을의 홍매, 그리고 우리나라 주요 사찰에서 오래전부터 애지중지 가꾸어 온 매화들이 키재기 하듯 피었으니 이곳이 정녕 최고의 매화원이 아닐까 .
흑매라고도 불리는 화엄사의 짙은 홍매, 양산 통도사의 자장율사 홍매. 경남 산청 단속사 터의 정당매, 청도 운문사의 운문매, 순천 선암사 백매, 백양사의 연분홍 고불매 등, 그 많은 종류의 매화들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색깔도 크기도 피는 시기도 그리고 내 코로는 확인 할 수는 없으나 그 향기도 조금씩은 다르리라.
매화 향에 취하고 꽃에 매료되어 있다 돌아서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온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수목원 입구에 있는 새로 단장한 매점에 가서 먹는 한 조각의 빵과 차 한 잔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 오늘은 참 행복한 날이다.
사람도 고향이 다르면 말씨가 달라지고 그곳의 자연환경을 닮아 성격이 바뀌듯이 매화도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의 물과 공기와 토질에 따라 나무껍질의 모양부터 꽃의 크기와 색깔 까지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그곳에서 자란 매화는 그곳의 사람과 땅을 닮아 조금씩 달라지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을 깨달은 날이었다.
매화의 고향 그곳에는 매화에 얽힌 사랑이야기, 선비들의 고결한 성품과 꽃 사랑의 극치가 꽃과 함께 전설이 되어 살아 있다.
더러는 가난에 찌들은 민초들의 비난을 받은 적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꽃이 지닌 기품과 향기야 어찌 없어지겠는가.
그 후로도 나는 몇 차례나 그곳에서 멍하니 꽃만 바라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꽃에서 열매로의 변신, 화향(花香)에서 매향(梅香)으로의 변신을 상상하며 입안에 가득 고이는 침을 삼키곤 했다.
며칠 후면 매화는 그 꽃을 떨구고 몇 달 후의 결실, 그리고 내년을 기약할 것이다. 오늘은 나도 매화를 닮은 하루였다.
2019년 3월 17일
첫댓글 봄의 상징 매화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워 봅니다. 그 냥 스처보던 매화, 그 고결한 자태에만 매료되었던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내일 섬진강변 매화마을 견학일정에도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매화원을 방문하시고 그 느낌을 생생히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글을 통하여 전국 각지의 유명한 매화를 모두 접하게 되는 느낌입니다. 고결한 자태를 한번 느껴보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수목원을 방문해야 하겠습니다.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며칠간의 금주와 공복으로 매화를 만나러가는 선생님이 멋지십니다. 자연과 소통하는 마음이 전해옵니다.
다양하고 지역마다 특색있는 매화특색이 재미있네요. 저도 기회가 되면 수목원 매화원에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매화향을 즐기기 위한 자세를 터득하고 있다니 매화도인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매화 향만 아니라 홍매 백매 흑매 고불매 등 매화에 대한 탁월한 지식에 감탄 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수목원의 다양한 매화원을 잘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심코 꽃구경만 하였지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매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매화는 색깔이 다른것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구별되는 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매점이 있던 자리에 매화나무를 심어 놓은 것을 지나며 보았지만 선생님처럼 정성스럽게 살피지는 못했습니다. 매화의 고향, 얽힌 이야기, 고결한 선비들의 매화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매화꽃과 매화향을 대하는 선생님의 정성스러움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도 어제는 수목원의 봄을 찾으러 나섰더랬습니다. 매점이 있던 자리에 매화원이 만들어진 걸 보고 반가웠습니다. 화엄사 홍매와 통도사의 홍매는 유명하여 그 매화 자체를 보기 위해 그 절을 찾는 이도 있는데 그 매화의 자식 매화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더욱 반가웠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