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속리산 아래 유서 깊은 사찰. 신라 진흥왕때 의신 조사 창건.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 776년에 진표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대사와 벽암각성 스님이 능인전 팔상전 등 전각을 중건했다.
도는 떠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도를 멀리했고 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았으나 세속이 산을 떠났도다 山非俗離俗離山
조선 중기의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속리산을 보고 남긴 시의 한 구절이다.
속리산은 맑고 청량한 산이다. 그 옛날 이곳을 찾았던 백호의 시에 묘사된 것처럼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 피안(彼岸)의 세계다. 구름 속에 갈무리되어 마치 하늘나라처럼 신비스러운 유토피아, 곧 극락의 세계가 속리산이다. 속리산 문장대(文藏臺)의 옛 이름은 구름이 가득 서려 있는 곳이라는 뜻의 운장대(雲藏臺)였다.
매번 올때마다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절입구 오리숲의 전나무,소나무와 길가의 황토길이 인상적이었다. 절에 들어서면 눈에 보이는 1990년 설립된 청동미륵대불은 금동미륵대불로 개금불사 되있고 절안의 국보유물로는 오층목탑의 팔상전, 쌍사자 석등,석련지.법주사마애여래의상 등이 있다.
능인전(적멸보궁)은 보수공사 예정으로 폐쇄가 되어 세존사리탑을 친견할 기회가 사라져 아쉬었습니다.
도는 떠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도를 멀리했고 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았으나 세속이 산을 떠났도다 山非俗離俗離山
조선 중기의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속리산을 보고 남긴 시의 한 구절이다. 말티재 고개를 넘어가면 숨은듯 보이는 속리산은 맑고 청량한 산이다. 그 옛날 이곳을 찾았던 백호의 시에 묘사된 것처럼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 피안(彼岸)의 세계다. 구름 속에 갈무리되어 마치 하늘나라처럼 신비스러운 유토피아, 곧 극락의 세계가 속리산이다. 속리산 문장대(文藏臺)의 옛 이름은 구름이 가득 서려 있는 곳이라는 뜻의 운장대(雲藏臺)였다.
청주에서 한시간 남짓걸리는 지근 거리의 사찰이다. 요즘 세조길 트래킹코스로 엄청 각광을 받고 있다.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며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로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특히 법주사 인근에는 “정이품송”이 자리잡고 있으며 “솔향공원”이 있다. 국보와 수십점의 보물급 문화재의 보고(寶庫)이자 한국의 5대 사찰중 하나로 한국의 불교문화 유적지로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으며 한국적 정신문화의 고향으로 현대인들에게 마음과 정신의 평안한 안식처이다.호텔입구부터 금강문까지의 오리길은 법주사의 오래 연륜과 차분함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산책길이다.
절이름은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의 한시(漢詩)에서 명칭이 유래한 “속리산(俗離山)” 자락에 위치한 “법주사(法住寺)는 진흥왕 때인 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의신이 서역에서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그 명칭이 유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에 진표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보전은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할 때 건립한 것으로, 총 120칸에 건평이 170평, 높이가 61척에 달하는 대규모의 건물이다. 보물 제915호. 다포식(多包式) 중층건물로서 무량사(無量寺)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佛殿)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벽암이 중창할 때 조성한 것으로 부처님 중심으로 중앙에는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좌측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盧舍那佛), 우측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각각의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만도 3.9m에 이른다.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보은 법주사 팔상전 (국보 제55호)
5층의 옥개는 네모지붕이며 그 위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1968년 해체 중수할 때 5층 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고 심초석에서 사리장치와 함께 동판에 새긴 글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팔상전은 신라 진흥왕 때 의신이 세웠고, 776년에 병진(秉眞)이 중창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고 1626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내부에는 8폭의 팔상탱화(八相幀怜) 앞쪽으로 나한상(羅漢像)을 3열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본존불을 봉안하였다
원통보전(圓通寶殿)은 정방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춘 건물로서 의신(義信)이 창건하고 진표가 중창하였으며, 벽암이 1624년에 삼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높이 2.8m, 허리둘레 1.9m의 관세음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머리에는 수려한 보관을 쓰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담고 있는 거대한 목상(木像)이다. 원통보전은 보물 제9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 일주문은 정면 1칸의 건물로서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있다.안쪽에 속리산 법주사 편액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文殊菩薩),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은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서, 1624년 벽암이 중창하였고 1974년에 새롭게 단청하였다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 대웅전 우측에 위치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映嬪李氏)가 사용하던 원당(願堂)이었기 때문이다.
진영각은 이 절을 거쳐간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곳, 내부 중앙에 개산시조(開山始祖) 의신과 전법초조(傳法初祖) 태고화상(太古和尙)의 영정이 있고, 좌우로 이름을 알 수 없는 2인의 영정을 비롯하여 세홍(世弘)·함월(函月)·명찰(明察)·정준(靜俊)·장신(莊信)·도홍(道弘)·홍민(弘玟)·지영(智榮)·영린(玲璘)·진하(震河)·탄응(坦應)·석상(石霜)·금오(金烏)·명일(冥一)·보흔(普欣)·충은(衝恩)·법영(法英) 등 모두 24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천왕문 왼쪽편에 위치한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 사리탑의 계단을 오르는 곳에 위치한 아담한 전각으로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500나한을 안치하였다. 이 전각은 1624년에 벽암이 중창한 건물로서 건평이 16평이다.
능인전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이 탑을 조성하게 된 연기(緣起)를 적은 세존사리비(世尊舍利碑)가 있다. 1650년(효종 1)에 건립한 세존사리비에는 이 사리탑이 1362년(공민왕 11)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공민왕이 이 절에 행차하였을 때 왕은 사신을 통도사로 보내 석존사리 1립(粒)을 옮겨오게 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염화실과 응향각은 대웅전 오른쪽 안에 있는 일련의 건물로서, 모두 선원(禪院)에 부속된 것이다. 예전에는 대향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총지선원(總持禪院)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선원 위에 있는 염화실은 조실(祖室)이 기거하는 곳이며, 응향각은 노전(爐殿)이라는 직책을 맡은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다.
조선 말기떄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유지(遺址)에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다. 이 용화보전은 법주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 법당이었다. 용화보전은 산호전이라 불리었고 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산호전이라는 명칭은 이 전각의 후면 암석을 산호대라고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용화보전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크기는 35칸으로 대웅전 28칸보다 더 크고 웅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전각 안에는 금색의 장륙상(丈六像)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2년(고종 9)에 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의 명목으로 불상과 철당간을 압수하라는 명을 내려 불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은 헐리게 되었다.
현재에도 옛터에는 당시의 초석과 미륵삼존불의 좌대 3기가 있다. 이 용화보전 터에는 1964년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이 조성되었으며,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청동 160t을 들여서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 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미륵대불 앞에 위치하는 석조희견보살입상은 향로를 머리에 이고 굳건히 서 있는데 향불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진표나 영심 등이 대성(大聖)의 수기를 얻기 위하여 개인의 일신을 아끼지 않던 법상종 특유의 신앙형태를 조형적으로 나타낸 의미심장한 걸작이다. 즉,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 굳건하므로 머리의 뜨거움, 손의 뜨거움을 잊고 일심으로 향로를 받드는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상환암(上歡庵)에서 기도하였고, 세조는 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복천암(福泉庵)에 와서 3일 동안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팔상전(捌相殿)·명부전(冥府殿)·원통보전(圓通寶殿)·약사전(藥師殿)·천왕문(天王門)·금강문(金剛門)·능인전(能仁殿)·진영각(眞影閣)·사리각(舍利閣)·염화실(拈華室)·삼성각(三聖閣)·응향각(凝香閣)·진해당(振海堂)·궁현당(窮玄堂)·명월료·정제당 등이 있다.
현존하는 산내 암자로는 수정암(水晶庵)·복천암(福泉庵)·중사자암(中獅子庵)·여적암(汝寂庵)·탈골암(脫骨庵)·상환암(上歡庵)·상고암(上庫庵), 근래에 중건된 동암(東庵) 등이 있다.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광주박물관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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