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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2 / 내버려 두사 (롬1:24-32)
지난 시간까지의 내용을 잠깐 정리하자면, 서신 서두에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소개하던 바울은 주제를 바꿔 인간의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는 그냥 덮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바울이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경건치 않음과 불의’입니다.
‘경건치 않음’은 하나님께 대한 본질적인 죄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신뢰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부인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의’는 사람을 향한 죄입니다. 한마디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를 말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사람은 누구든 자기를 지목해서 죄인이라고 하면 불쾌하게 여깁니다. 스스로는 죄가 없다는 것이지요.
혹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들 사이에서의 죄를 지칭하는 ‘불의’에 대해서는 나름의 내세울 것들이 있다할지라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죄 곧 ‘경건치 않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겐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했으며,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죄인들을 향한 바울의 고발입니다.
이런 죄인들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봉독한 1장 24절, 26절, 28절을 보면 바울이 반복해서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심!’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고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버려 두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디도미’인데, 원뜻은 ‘전수하다, 전달하다’지만, 신약성경에서의 용례를 보면 ‘넘겨주다, 내어주다’ 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탄의 세력에 ‘넘기셨다.’ 또는 세상 권세에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행위의 주체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넘기고 내어주시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죄인들 스스로가 ‘넘어간 것’이고 ‘건너간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결과론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리 하신 것’이 맞지만, 의미상으로는 죄인들 스스로가 원해서 그리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강제로 그들의 행위를 막지 않으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내버려 두심’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지만, ‘인간들이 자초한 것’이라는 것에 포인트를 맞춰 이해해야 합니다.
혹,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가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제대로 깨닫지 못한 우문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일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개입하셔서 죄를 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택한 죄의 자리를 고집하는 자를 그냥 그 죄의 자리에 놔두시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때도 최후 진노의 순간 전까지는 죄인들 역시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자녀들은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설사 죄를 지었더라도 돌아오라 부르시고, 힘겹게 산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부르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품으시사 삶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 주십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품어주심’과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 사이에서, 여러분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원하시는 대로, 여러분도 하나님께 그리하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의인대로 죄인은 죄인대로, 하나님은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안타깝게도 시대를 초월해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 쪽으로 더 기울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간섭이라며 거부합니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죄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은 사랑이지 결코 간섭이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을 간섭이라 여겨 반항하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행여라도 여러분은 신앙의 철부지가 되려 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은 부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 이생에서든 마지막 심판 때든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사랑에만 머물러 사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본문을 보세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한 죄인들의 결국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내버려 두사’입니다.
24-25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이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죄인들이 어쩌다가 ‘더러움에 내버려졌다.’고 했습니까?
‘마음의 정욕’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 15:19-20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24절 후반부에서 내버려 두심의 결과가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바울은 당시 로마사람들의 주된 죄악을 간음이나 음행 같은 ‘성적 부도덕’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로 하여금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곧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도록 내버려 두신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 했지요?
이때 사용된 ‘바꾸다.’는 말의 원어는 ‘메탈랏소’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했을 때의 ‘바꾸다.’는 말은 ‘알랏소’란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똑같은 ‘바꾸다’지만, ‘알랏소’와 ‘메탈랏소’는 어떻게 다를까요?
‘바꾸다’는 말은 보통 ‘알랏소’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헬라어로 ‘대단하다, 크다, 많다’를 의미하는 ‘메타’가 합쳐져서 '메타 알랏소' 곧 ‘메탈랏소’가 된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대신 짝퉁 하나님 곧 피조물을 신으로 섬겼더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흐름을 잘 보세요. 23절과 25절 사이에 24절이 끼워져 있는 모양새입니다. 곧 ‘마음의 정욕’ 앞뒤로 ‘우상 숭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적 부도덕’과 ‘우상 숭배’는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요?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적으로 간음한 자들의 결과는 육적으로 간음과 음탕의 처지에 버려지게 되고, 그런 형편에서 서로를 욕되게 하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제 알려드리는 문장을 신앙 공식처럼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죄는 동일한 성격의 육적인 죄를 초래한다!’
이런 원리에서 앞서 마태복음 15장에서 언급했던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 등의 행위들은 영적인 죄인 동시에 육적으로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통과 괴롬과 문제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내버려 두사’는 26-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6절은 ‘이 때문에’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는 두 번째 내버려 두심의 이유가 앞서의 첫 번째 행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내버려 두신’ 상태와 이유와 그 결과의 순서로 본문을 재구성해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이유는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4절의 ‘마음의 정욕’과 26절의 ‘부끄러운 욕심’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24절의 ‘정욕’은 헬라어로 ‘에피뒤미아’라 해서 ‘충동, 욕망, 갈망’을 의미합니다.
반면, 26절의 ‘욕심’은 ‘파토스’라 해서 ‘고난, 수난, 욕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에피뒤미아’가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음행에 빠진 것이라면, ‘파토스’는 병적이거나 변태적으로 음란에 집착하는 ‘감정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를 원어의 개념대로 해석하자면 사람들이 쾌락으로 알고 있는 정욕이 결과적으로는 징벌이요 수난과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에는 ‘파토스’로 인한 구체적인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그들의 여자들도’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여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여자들 곧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속한 여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여자들이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썼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으니’ 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바울은 우상숭배에 빠진 여자와 남자들의 ‘동성애’에 빠진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동성애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도 엄히 경계해야 할 죄악입니다.
성경은 그들 모두가 죄인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임도 단호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동성애자들이 소위 ‘소수자 인권’이란 명목을 내세워 스스로를 합법화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인권’ 운운하는 용어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인본주의적 접근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하튼 동성애자들은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태어났으며 피동적으로 그리되었으니 자기들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약자라는 논리로, 일부에선 강경하게 그리고 대부분은 감성팔이식 접근을 통해 현대 사회 속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에 먼저 답을 찾고 나서 동성애의 경우를 보지요.
최근 묻지 마 폭력이라든가 연쇄 살인 등의 사건을 보면 가해자가 소시오 패스나 사이코 패스들인 경우가 자주 보도됩니다.
그렇다면 정신병자이고 극도의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소시오 패스나 사이코 패스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도 선천적으로 또는 피동적으로 그런 상태에 있게 됐다고 해서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 무리를 사회적 약자의 집단으로 인정해서 그들과 함께 살아도 괜찮다는 것인지요?
동성애가 그렇습니다. 동성애자들이 뭐라 하든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보기에 그 행위가 반사회적이며, 비인륜적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죄인인 것에도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고대의 소돔과 고모라가 그러다 망했고, 로마와 인근 나라들 대부분이 그로 인해 멸망했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기에 레위기 18장의 말씀을 적용해서 그들을 심판하거나 처벌하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동성애가 죄인 것이지 동성애자 역시 다양한 죄인들 중의 하나이겠기에 그들에게도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선택은 그들의 몫이겠지만,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해야 될 사명일 수 있습니다.
그럼 최근 일각에서 주장하는 ‘동성애 합법화’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거부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 죄인데도 사람들이 어떤 죄는 눈감아 주고, 어떤 죄는 합법화시켜 주고 한다면, 과연 믿음 안에서 조차 정죄해야 할 죄는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죄가 사람들의 주장에 의해 용인된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그래서 동성애 합법화는 단호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다만 사탄의 노이즈 마케팅(?)에 놀아나 반대한다면서 교회가 오히려 동성애를 세상에 널리 홍보(?)해 주는 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기에, 우선은 꾸준히 기도하면서 방법에 있어서는 뱀같이 지혜롭게 그리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동성애 죄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동성애가 이방으로부터 들어 온 죄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인간들의 무질서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여기서도 보시면 바울은 ‘바꾸다.’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때 ‘바꾸다’는 헬라어 역시 ‘메탈랏소’입니다. 하나님보다 ‘성적 욕망이나 성적 욕구’가 우선한다면 ‘성(性)’도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죄로 인해 육적 타락을 자초한 것은 인간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죄는 죄다!’ -이것이 바울의 선언입니다.
때문에 죄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내버려 두심을 받을 것인지.
세 번째 ‘내버려 두심’은 28절에서 보듯 ‘상실한 마음’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상실한’이라는 말은 원어로 ‘아도키모스’인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것, 즉 가짜라고 판명되어 거부된 것이란 의미에서 '가치 없는, 거절된, 거부된'이란 의미를 지닌 용어입니다.
또 ‘합당하다’는 말의 원어는 ‘카데코’인데, ‘적합하다,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는 살면서 적합한 일, 꼭 필요한 일이 아닌, ‘적절치 못한 일, 불필요한 일’만 하게 됨으로써 결국엔 하나님에게서도, 세상에서도 거부되는 인생 곧 의미 없는 가짜 인생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누가 그럴 것이라고 했습니까?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리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29-30절에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들로 무려 21가지나 됩니다.
게다가 바울은 32절에서 이러한 죄들은 하나님께서 사형으로 정하신 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결코 가볍게 넘길 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하는 모든 자들이 죄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죄들의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28절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것이 원인입니다.
이것이 원인이기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사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불의를 행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는 원인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결심이 아닙니다. 의로운 행위를 하거나 세상 죄 안 짓고 착하게만 산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에 의하면 죄의 근본적인 원인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할 때에라야만 순리의 길, 바른 길을 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후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죄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세상이 요구한다는 이유로 절대로 죄의 공범이 되려고 하지도 마세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칭찬만을 사모하고 그 칭찬을 받기 위해 온전한 믿음 생활을 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3:23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어 로마서 6:23절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심각성과 복음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오고,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인정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17-18을 참고하세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아멘!
모쪼록 여러분은 하나님만 인정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생명의 길만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