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將朴永根(영근 29세)遡源錄하598쪽 1885~1910 2003파보상439쪽 淑根 后
<의병장박영근공 창의사실 族姪 幸錫 謹記>
의병장(의병장) 박영근(朴永根)의 보명(譜名)은 재환(在環)이니 1885년 고종 을유 9월15일에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 771번지에서 박광엽(光燁)과 경주정씨(慶州鄭氏)의 사이에서 제3자로 탄생하였다.
상계세덕(上系世德)은 생략하고 음죽파조 찬선공(贊善公) 휘 함(咸)의 16대손이오 호조참판(戶曹叅判)공 휘 만천(萬天)의 12대 가선동추(嘉善同樞)공 응성(應星)의 9대손이며 증조는 휘 계신(啓愼) 조는 휘 필익(弼翼)이오 고는 광엽(光燁) 비는 경주정씨 춘화(春花)의 따님이다.
공은 천품(天稟)이 괴위(魁偉)하고 여력(膂力)이 과인하였으며 기자가 헌앙(軒昻)하며 의리에 명민하였다. 어려서부터 정우명(鄭遇明) 학자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사리판단이 분명했다.
1895년 을미에는 공이 10세였는바 정우명 선생께서 을미사변의 이야기 즉 [명성황후를 왜적이 시해했다]는 말을 듣고부터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이 용솟음치게 되었다.
1905년 을사 매국조약이 채결된 이듬해 1906년 병오 23세에 장성(長城), 성제(省齋), 기삼연(奇參衍) 선생의 창의감소(倡義監所)에 가맹(加盟)하고 즉시 전해산(全海山) 의병장 부대의 조직 속에 들어가 장군의 책임으로 조경환(曺京煥)과 같이 조직을 했으니 당시의 동지들은 선봉장에 정원숙(鄭元孰) 중군장에 김원범(金元範) 후군장에 윤동수(尹東秀) 도포장에 김범진(金凡鎭)등이었다. 그로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피나는 항일 전투를 계속하였으니 함평 불갑산 및 나주 석문(石門) 또는 대명동(大明洞) 나주 대치(大峙)의 전투를 비롯하여 고막원 병참소(兵站所) 습격등 수많은 왜적을 주살하여 전과를 올렸다.
1909년 기유 공의 25세 때 순창군 식지면 대안촌(大安村) 산에서 접전시에는 적군 9명을 사살하였으며 공도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동년 3월에 영광 오촌동(梧村洞) 전투가 있은 다음 총지휘부 전해산 의병장 부대가 해체됨에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대장이 되어 부하 20명으로 새 부대를 조직하여 활약을 계속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드디어 해산하고 말았다. 장성 동화면(東化面) 누님 집에 숨어 있다가 동년 7월 30일 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경술 5월에 심남일(沈南一), 오성술(吳聖述), 강무경(姜武景)등 의병장들과 함께 대구 감옥으로 이송되어가 동년 7월 23일 김해산(金海山) 대장과 함께 왜의 형장에서 최후를 마치니 애석(愛惜)할 손 향년은 청춘 26세였고 그날 그 시각에 흰빛 한줄기가 하늘에 뻗쳤다고 전하거니와 나라위한 충의의 죽음을 하늘인들 어찌 무심하였으랴!
여기에 한 말씀 특기할 공의 애국애족 사상의 일단을 소개하면
1908년 무신에 의병을 빙자(憑藉)하여 양민의 재물을 약탈(掠奪)한 박모, 김모등을 총살로 다스린 사례가 왜법정 공판기록에 남아있다.
동년 9월에 공의 형 영서(英瑞=在辰), 영유(英裕=在明)와 전해산의 종형 덕필(德弼)이 두분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나산면 회석치(會石峙)에 안장했다. 부인은 금성오씨(錦城吳氏) 영숙(永淑)의 따님이요 외동따님 꽃봉이가 진주 하대자(河大者)에게 시집가 아들 홍태(洪泰)를 낳고 뒤늦게 질(姪) 석렬(錫烈)을 입계하여 손 희수(熙洙) 민수(珉洙) 진수(晋洙)를 낳았다.
1970년 에 함평군수 김성흠(金聲欽)은 공의 고향 후배인 편모씨(片某氏)가 오늘까지 묻혀있던 본 창의(倡義)사실을 세상에 들쳐내니 함평읍내 공원에 기적비(記蹟碑)를 수립(竪立)하고 그 위적을 길이 빛내고 대한원호처(大韓援護處)에도 기록되었다. 공은 비록 청춘에 세상을 여위었지만 그 뜻과 이름은 천추에 길이 빛나리로다.
노산 이은상 짓고
우전 신호열 쓰고
의병장 박공연근 기념비 건립 위원회 세움
일찍 구한국 말엽 조국이 장차 망하게 됨을 보고 학자들과 젊은이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을 적에 특히 호남지방의 많은 의병들 중에 전남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 출신으로 일어난 청년 의병장은 박영근공이었다.
공의 본관은 무안이요. 부친 광엽의 셋째아들로서 고종 22년 을유년 서기1885년 9월 15일
에 출생하여 10세에 같은 마을 정우명 학자에게서 글을 배워 말과 글에 남달리 뛰어났고,
사리의 옳고 그른 판단이 분명했으며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개하고 강직하여 국모가 왜적에게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함을 참지 못했었다.
을미년 매국조약이 채결된 이듬해 장성의 성재(城齋) 기삼연(奇參衍)선생에게로 달려가서
창의감소(倡義監所)에 가맹하니 23세였고 그해 7월 25일에 전해산(全海山) 의병장의
부대가 형성되므로 그 조직 속에 들어가 군장의 중책을 띠고 활약하자 그때의 동지들은
선봉장에 정원숙(鄭元孰)이요, 중군장에 김원범(金元範)이요,후군장에 윤동수(尹東秀)요,
도포장에는 김범진(金凡振) 등이었다.
그로부터 이듬해 여름까지에 피나는 항일투쟁을 감행했던 것이니 7월 25일 함평 불갑산
전투를 비롯하여 7월 27일 나주 석문 전투, 10월 6일 대명동 전투, 10월 24일 대치전투,
11월에는 고막원 병참소를 습격 이듬해 기유년(1909) 25세 때 2월 17일 대안촌 접전 때
적군 9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며 3월 20일 영광 오동촌 전투가 있은
다음 3월 27일에 이르러 총지휘 전해산 의병장 부대가 해체됨이 이어 공은 의연히 의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대장이 되어 심복부하 20여명과 함께 새 부대를 조직하여 출발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그 부대마저 해산하고 장성 동화면 누님의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3일에
倭헌병의 손에 체포되었다.
경술년 서기1910년 5월에 심남일(沈南一), 오성술(吳聖述), 강무경(姜武景) 등 의병 대장
들과 함께 대구 감옥으로 이송되어가 마침내 7월 23일에 전해산 대장과 함깨 왜의 형장
에서 최후를 마치니 애석할 손 향년은 청춘 26세였고 그날 그 시각에 흰빛 한 줄기가
하늘에 뻗쳤다.
전하거니와 나라위한 충의의 죽음을 하늘인들 어찌 무심했으랴!
9월에 공의 형 영서(永瑞) 영유(永裕)와 전해산의 종형 덕필(德弼)이 두분을 고향으로
반장하여 공을 나산면 회석치에 장례모셨다.
부인은 금성오씨 영숙의 따님이요 외동 따님 꽃봉이가 있었으나 생사를 알 길 없고 조카
석렬(錫烈)이 뒤를 이었거니와 의사 비록 청춘에 세상을 여의었지만 그 뜻과 이름은 천추
에 전할 것이며 혈육보다도 겨레의 제사를 받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