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동포들 건질이 너와 나로다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건가
-후략-
작자미상의 독립군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합창한다. 어느덧 우리는
녹음반주에 맞추어 두손을 불끈쥔 용사가 된다.
박영만 작사, 한유곡 작곡의 압록강 행진곡은 전의를 다지게 한다.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 가자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 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 후략 -
그 울림은 청년의 기개처럼
우렁찼다. 도탄에 빠진 동포를 구하기 위해 결의를 다짐하는 노래로 1940년대 광복군의 대표적 노래로 널리 불려졌던 노래다.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며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되어 순국한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으로 향한다. 마지막까지 거주하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도남촌, 그가 독립자금을 마련하고자 세운 정미소에서 41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백야, 김좌진... 그가 소망하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조국의 독립을 보는 것이었다. 독립을 보지 못한채 동지를 가장한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되는 불운을 맞이한다. 독립의 영웅,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며 민죽의 위대한 지도자는 그렇게 허무하게 순국한다. 장군은 훌륭한 교육자였다.
홍성 갈산에 호명학교를 필두로 독립군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20여개의 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교육에 대한 철학이 대단했던 교육자였다. 또한
만석지기 양반가의 자제로 수많은 소작인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여 해방 시키는 평등주의 사상가였다. 농촌계몽. 항일의 선봉장으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또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미소를 세워 자금을 만드는 경제 실천가로서의 면모도 보이는 탁월한 기업형
CEO로 평가 받는 노블리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s-'사회적으로 상류층에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뜻하는 말' 정신을 실천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장군의 순국은 항일독립투쟁의 어려움을 예고해 주었다. 1931년 9월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고 1932년 3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집정으로 장춘에 만주국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만주지역 무장 독립전쟁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은 중국항일군과
긴밀히 협조해가며 독립전쟁을 폈다. 그러나 중국동북군벌군을 섬멸한 일본군이 만주를 실질적으로 점령하게 된 후 1933년부터는 한국독립군의 활동이
부진해졌고, 1938년에는 그간 끈질기게 항쟁하던 조선혁명군마저 해체되어 만주에서 무장독립투쟁은 종식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에 처한다.
김좌진 장군이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아쉬움이 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고 했다.
청소년기에서부터 25년여의 세월은 오로지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29세에 만주로 망명하여 41세로 순국하기까지 불꽃같은 삶을
살아온 백야, 김좌진... 우리는 그가 항일투쟁을 벌린 만주벌판에서 순국의 의미를 되새기며 안타까움과 설움, 분노, 애국심을 품는다.
백야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한중우의공원'이 2001년 기공식을 갖고 새롭게 조명하여 오늘에 이른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기념사업회는 학술세미나, '나라사랑 마라톤대회, 청산리독립전쟁 승전 기념행사 및 특별기획전과 매년 몇차례에 걸쳐 '청산리 역사대장정' 탐방을
하면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특히 역사문화관은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와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아울러 한중우호협력
차원에서 양국의 항일운동가를 공히 기렸으며 해외 현충시설물로서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고 한다. 문화관은 영상실, 투쟁의 방, 추모의 장,
추모터널, 분노의 방, 한중우의 활동관, 연수관, 복지관, 다목적홀로 이루어졌다.
10여년에 이르는 동안 중국 공안당국과 숱한
마찰을 격으면서 점진적으로 확대하여 오늘에 이른 기념사업회의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 백야, 김좌진 장군이 이 기념사업회를 깃점으로 다시 부활하여
우리에게 애국과 국가의식을 가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