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피에타]
가톨릭 용어로 시작된 공동선(共同善)은 좋은 말이다. 사실 세상을 두루두루 이롭게 하자는데 나쁠 리 있겠는가. 우리도 이 비슷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사상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단군 할아버지께서 처음 선포했다지 아마.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이를테면 어느 판사가 한 사건의 평결을 맡았다고 해보자. 재벌 2세가 재판정에 섰는데, 아들을 좋은 학군에 보내려 위장전입을 했고 주식을 불법으로 증여했으며 군대에 안 보내려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 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니 재벌 2세도 벌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상황이 묘해졌다. 판사 자신도 위장전입을 해 아들을 좋은 학군에 편입시킨 경력이 있고 조상이 물려준 땅을 아들 이름으로 슬쩍 바꾸었으며 군대를 빼려고 없는 병을 만든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판사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다루기 힘들 것이다. 설혹 자식 관련 일을 주도면밀하게 처리한 덕에 누구도 사실을 모른다 한들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판사는 재벌 2세를 국가경제를 책임진 사람으로 분류해 가석방 처분을 내렸고 휠체어에 마스크까지 하고 아픈 척하면 법정에 출두했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멀쩡해져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지병이 있었다는데 재판이 끝나자마자 기적적으로 호전된 것이다. 안 그래도 금 숟가락을 물고 나온 사람이 인복까지 있어 판사 운도 따른 셈이다. 만일 누구인가 이런 몹쓸 나라에 살고 있다면 공동선은 일찌감치 물 건너간 표어로 치부할 만하다.
이제 다른 가능성을 상정해보자. 여기 모든 죄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재판관이 있다. 그는 세상을 바르게 이끌려 불철주야 노심초사하고, 없는 사람 편을 들어 과부와 고아를 귀하게 여기며, 아들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기는커녕 오히려 아들을 희생시켜 온 누리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한다. 글자 그대로 ‘의로운 재판관’인 것이다.
구약성서로부터 ‘의로움’(체데크)은 오직 하느님만 가진 속성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인간에게 ‘의인’이라는 표현을 적용할 때도 일반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세부적으로, 우선 법적 차원에서 죄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데(창세 20,4;신명 25,1;1열왕 10,9;이사 5,23), 율법에 보면 “허위 고발을 물리쳐라. 죄가 없는 의인을 죽이지 말고 악한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말라”(출애 23,7)고 한다. 다음으로 ‘의인’은 언제나 의를 행하고 흠 없는 사람을 뜻한다(2사무 4,11;1열왕 2,32;욥기 12,4;17,9). 아브라함은 소돔의 파멸을 앞두고 하느님에게 “당신께서는 의인을 죄인들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이하)라며 자비를 구한다. 이 모든 구약성서의 경우는 하느님을 완벽하게 의로운 재판관으로 인식했기에 가능한 언급들이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는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분이 하느님이다.
마태오복음에도 ‘의로움’(히브리어 체데크의 헬라어 번역 디카이오쉬네)이라는 명사가 모두 일곱 번 나온다(3,15;5,6.10.20;6,1.33;21,32). 이들 중 5회가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다루는 산상설교에 나온다는 사실은 시사해주는 바가 매우 크다. 그 중 눈에 띄는 구절을 하나 선택해 보자.
마태 5,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하지 못하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는 의로움이 구약성서로부터 내려오는 개념이며 하느님의 속성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의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다. 법적인 차원에서 의인이란 원래 ‘법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이나 ‘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법 용어로서보다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고, 회당에서는 의인을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자칭 의인들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들은 의로움의 내적인 자질을 외면한 채 오직 외적인 성과에만 매달렸다. 그들의 행동은 선행으로 보이게끔 잘 포장되어 있지만 진정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했다(23,23). 그들의 말은 청산유수라 누구라도 현혹될 만하지만 언제나 말에서 그치고 만다(23,3). 말과 행동, 이 모든 게 사람들에게 칭송받기 위해서이다. 가장 중요한 기준인 하느님의 의로움은 만족시키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은 당연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 ‘의인’이란 본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을 뜻하지 않는가. 이제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너희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23,23.25.27...)라고 한 예수님의 호통에 수긍이 가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9,13)라고 한 예수님의 초대가 이해된다.
마태오가 의로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모든 의로움을 이룸’(3,15), ‘의로움에 굶주린 이’(5,3),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5,10), ‘너희의 의로움’(5,20), ‘너희의 의로움을 가장하지 말라’(6,1), ‘하느님의 의로움’(6,33), ‘의로움의 길로’(21,32) 등등, 대부분 인간이 가져야 할 의로움이다. 우리의 의로움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 의로움을 구현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바울로의 의화(義化) 가르침과 확연히 구분된다.
바울로 역시 마태오처럼 하느님 한분만 의롭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공유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세력 아래 놓여있으니, 죄는 인간에게 숙명이기 때문이다(로마 5,12-19). 따라서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세력으로 옮아가려면 무엇인가 획기적인 사건이 필요하고 하느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함으로써 그 일을 행하였다. 하느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진 속량 사건인 것이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가능하고, 여기에는 유다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로마 3,21-26).
마태 5,20은 대립명제의 서문 역할을 하고 그 결론은 5,48에 실려 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하게 되시오.” 여기서 말하려는 하느님의 완전함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겨냥한다. 모름지기 인간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좇아 우리의 말과 행동을 다스려야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수동적인 선언을 받기 보다는(義化) 하느님이 완전한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되어야 하니, ‘의로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세상에 불량한 재벌 2세나 불공정한 판사가 있는 한 공동선은 요원하기만 하다(모든 재벌 2세와 판사가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공동선은 참으로 좋고 잘 이룰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분명 아름다워질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과제이다. 그래야 하느님 앞에서 조금은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재벌 2세를 봐주었던 판사가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하느님은 반드시 물어볼 것이다. “자네 그 때 왜 공정한 판단을 하지 않았나? 몰라서 그랬다는 말은 아예 하지 말게.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은 못 속인다네.” 그 판사님 적당한 변명거리를 서둘러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