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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13편 1~6절
제목 : 절망 중에서 애원함
다윗의 망명기 저작 시로로 사울의 박해가 극도에 도달하였던 때인 것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삼상 23:26~29, 26:19~20)
1~2절은 믿는 자의 호소이고, 3~4절은 기도자의 부르짖음이며,
5~6절은 구원을 찬송함입니다.
1. 믿는 자의 호소(1~2절)
1) 언제까지 돌보지 않으시렵니까?(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말은 본절과 2절에 모두 네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의 실상을 능히 짐작케 해줍니다.
여기서 다윗은 사울의 그칠 줄 모르는 끝이 없는 박해에 대하여 거의 절망 상태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호소한 것으로 보아 아주 낙망해 버린 불신 상태의 절망이 아니고 살 소망조차 없는 것 같은 처지에서도(삼상26:20) 하나님께매달리는 신앙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르짖음은 호소이지 결코 원망이나 불평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그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함입니다(시42:1).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절망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면 완전히 죽은 영혼이니 이런 자라면 갈급증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는 이 고통의 시기도 한정이 있을 것을 믿음이며 그때는 돌보아 주실 것도 믿음에서 이 부르짖음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낮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체험하는 때도 있지만, 밤과 같이 갑갑하고 하나님에게서 버리운듯이 생각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갑갑한 시기에 영적으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음이 역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서만, 우리가 그것을 느낍니다.
다만 그 시기를 인간이 모르니까 답답해서 좀 속히 구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곁에 계셔서 다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십니다.
2) 언제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겠습니까(2절)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현재의 상태인데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 되겠습니까?하는 것입니다.
곧 속히 종결시켜 달라는 호소입니다.
“영혼에 번민”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생각에 잠기게 됨을 이름인데, 원수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별별 계책을 세우고 수색하며 거기 아부하는 자들은 수시로 자기의 거처를 탐색하여 고자질하고 있으니 거기에 대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생각이 많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그에게 다 맡기면 되지 인간이 무엇을 하겠다고 계책을 세우고 생각에 잠기며 교만할 것이 무엇이냐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계획도 세우게 하고 그 계획을 행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잠언16: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고 하였고,
잠언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고 하였으며,
잠언 19:21절에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고 하였고,
잠언 16:33절에는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간이 그러했고(수7:18), 요나단이 그러했으며(삼상14:42), 요나가 그렇게 되지 않았었는가? (욘1:7).
다윗의 이때의 여러 가지 계책들이 결국 불레셋 가드 땅으로 망명하는 것을 상책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삼상 27:1).
“종일 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이라고 하였는데 외국에 망명하는 일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에 모압에 망명하였다가 선지자 갓의 권유로 돌아왔던 일도 있고(삼상22:3~5), 불레셋 땅은 이스라엘과는 계속되는 적국일 뿐 아니라 전에 망명하였다가 위급함을 미친 체하여 겨우 모면하였던 곳이므로(삼상21:10~15) 아무리 시간이 경과되었다고는 하여도 같은 그 왕이 재임하고 있는데 보통 심사숙고할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고난으로 인하여 다윗은 도리어 유익을 얻었으니(시119:50,71),
불레셋 땅의 시글락이 다윗에게 속하여 유대 땅이 되었고(삼상27:6),
사울의 수색도 그쳤던 것입니다(삼상27:4).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하고 그렇게 안 되도록 간구한 것을 보면, 원수들이 무던히 설쳤던 모양이고 또 이제는 더 피할 곳도 없고 민심이 자기들에게 있으니 시간문제라고 무척이나 뻐겼던 모양입니다.
만일 다윗이 잡혀 죽기라도 한다면 원수들의 자랑 교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를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신(삼상16:13, 시4:3) 하나님의 일이 무너지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결코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점을 강력히 내세워 호소한 것입니다.
2. 기도자의 부르짖음(3~4절)
3절은 구원을 요청함이고, 4절은 구원을 요청하는 이유입니다.
1) 구원 요청(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하사”란 말은 “안다”(단10:1)는 말로서 “통촉하다”(시139:3), “살피다”(스8:15),“보다”(욥23:8), “감찰하다”(시33:15)등으로도 번역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잘 살펴보아 달라는 뜻으로 봄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셔야 바로 살피시고 추호의 틀림없이 올바른 대로 귀결을 잘 지을 수 있지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나타난 곁이나 보고 그것도 그때 놓치고 나면 후에 바르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삼상 16:7절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하였고,
잠언 16:2절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였으며 (잠21:2),
잠언14: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6:25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감찰하여 주심을 바라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응답하시고”는 기도를 이루어 달라는 간구입니다.
“나의 눈을 발히소서”라고 함은 “눈”은 건강이 민감하게 나타나는 기관이므로 여기서는 시력을 밝히시란 뜻이 아니고 건강한 원기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서는 그렇지 않으면 죽을까 두렵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하여 본편을 압살롬 반역 직전 병석에서 저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망명 시기에도 도망 다니느라고 시달리고 제대로 먹기조차 모하여(삼상25:4~8) 건강이 형편없었을 것은 불문가지 입니다.
그도 사울에게 청하기를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삼상26:20)라고 하였으니, 물론 이것은 잡혀 죽지 않게 하여 달라는 뜻이라고 하여도 도망 다닐 힘조차 이제는 없다는 것을 간취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사건 직후에 원수의 나라로 망명하기까지 그가 위급하였음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삼상27:1).
영안도 주님께서 띄워 주셔야 밝히 보고 주님을 찾을 수 있지 인간이 스스로 뜨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미 신형상이(하나님을 보는 지식의 눈-골3:10)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잠을 깨지 못하고 계속 자고 맙니다.
얼마나 가련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이미 이 눈을 띄워 주신 자들인데 세상 고뇌와 원수 사탄의 활동으로 쇠약해 가므로 새 힘을 얻도록 더하여 주시라고 함이 되는 것입니다.
영안이 활짝 열려 주를 밝히 보는 그 기쁨을 세상의 무슨 기쁨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 눈을 떠서 역경 중에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지켜 주시는 주님을 (시121:4) 본다면 어떠한 박해가 저를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있겠습니까?(롬8:31~39).
2) 구원 요청의 이유(4절)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구원 요청의 두 번째 이유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전절에서 말한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다는 것이고,
여기 두 번째 이유로 원수들이 이기고 기뻐할까 두럽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세우신 자이므로(시4:3) 다윗의 원수는 곧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원수들이 이기지 못하도록 자기를 구원하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울은 불순종으로 버림받고 다윗이 세움을 입었으니 사울이 이기도록 버려두실 리는 만무합니다.
그래도 다윗으로는 구하여야 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바라도록 하신 후에 주십니다. 그래야 그 받은 것의 귀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에스겔36:37절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고 하였습니다.
“요동됨”은 “흔들린다”(시46:2), “미끄러진다”(시94:18)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실족하다”(시38:16), “넘어지다”(시62:3), “굴복하다”(잠25:26)로도 번역된 말로서 여기서의 요동은 패전을 뜻합니다.
3. 구원을 찬송함(5~6절)
5절은 구원을 기뻐함이고, 6절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입니다.
1) 구원을 기뻐함(5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벌써 그 기도하여 구한 것을 주실 것으로 확신하였으므로 그 구원을 기뻐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다윗의 확고한 소망을 나타냅니다.
주의 구원이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너무나도 확고한 소망 가운데 이 구원을 기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롬 4:18)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졌기에 다윗은 극한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된다고 하였는데(마21:21, 막11:23), 하나님의 승리를 위한 기도를 어찌 확신하지 못하고 하여서 되겠습니까?
이사야 65:24절에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으므로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고 그 구원을 기뻐하겠다고 하였는데, “인자”란 말은 “인애”(창47:29), “은혜”(창20:13), “긍휼”(스 9:9), “은총”(창32:10)으로도 번역되었으니, 구원은 인간의 어떤 공로나 능력에 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를 말미암는 것이니 바로 의뢰한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구원하심이 임합니다.
롬9: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기쁨은 하나님의 구원해 주심을 기뻐함인데 원수들은 승전을 기뻐하니 참으로 그 대조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원수들은 인간 본위, 곧 인본주의 생활이니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시118:8~9, 146:3, 사2:22).
2) 하나님 찬송함(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에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즐거울 때는 노래하는 것이(사65:14)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어찌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야고보도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약5:13)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후대하여 주셨음을 인함인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 “후대하심”으로 번역된 말은 “갚는다”(시7:4), “보답하다”(신32:6), “상준다”(삼하22:21), “베푼다”(사63:7) 등으로도 번역된 말로서 응답하여 주신 것을 뜻합니다.
구한 것을 벌써 다 주신 것으로 믿었으니 받을 수밖에 없는 귀한 신앙입니다.
이렇게 믿고 찬송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식의 사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나타낼 뿐이다(Calvin).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종종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시인처럼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도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당신에 대해 눈을 떼어 본 적이 없으심을 기억하십시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절:시인은 무엇 때문에 근심하였습니까?
나도 누구에게 억울한 일이나 마음 아픈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 억울한 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3절:깊은 근심으로 인해 시인은 심히 쇠약해졌습니다.
눈을 밝혀 달라는 것은 자신을 회복시켜 달라는 뜻입니다.
시인이 이토록 근심에 빠진 것은, 하나님을 못 믿는 불신앙 때문이 아니라, 불의에 대한 정의감 때문입니다.
나도 불의를 볼 때 마음 아파하며 고민합니까?
그러나 고민 때문에 실망하거나 약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4절:여기서는 시인이 또 무엇을 염려했습니까?
사단은 우리가 영적으로 약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나는 요즘 영적으로 약해져 있지 않습니까?
사단에게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5-6절:시인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오늘 다시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