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동사에서 산다. 우동사는 우리동네사람들의 줄임말로, 인천 검암동에 위치한 마을공동체이다. 8년 전, 귀촌을 꿈꾸던 6명의 청년들이 모여 시작한 셰어하우스가 이제는 50여 명 규모의 마을 커뮤니티로 진화하였다. 5년 전 마을에 첫 아이가 태어났고, 2017년 말에는 나와 정아에게서 여민이가 태어났다. 작년에는 동네에서 함께 살고 있는 여신깡순 부부로부터 우와 율이라는 쌍둥이가 태어났다. 2세들의 존재감이 조금씩 마을을 데우고 있다.
여민이는 조산원에서 수중분만으로 세상에 나왔다. 태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집으로 돌아왔는데 대문에는 랑이(여민이의 태명)를 환영한다는 집 식구들의 환영인사와 숯이 볏짚에 꼬여 걸려 있었다. 정아와 나는 꼬박 100일간 집에서 여민이를 돌보았다. 함께 사는 종호형은 집안 청소를 맡아주었고, 숙곰은 매일 밥을 챙겨주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동네사람들의 손이 보태어졌다. 동네 친구들 덕에 초보 부모의 서투름이 만회되었고, 여민이를 돌보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간단치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아가 평소 여민이를 돌보는 데 도움을 주는 이모삼촌들과 이야기 모임을 열었다. 우동사에 사는 10여 명의 이모와 삼촌이 모였다. 주제는 ‘여민이 돌보기’지만 아이를 볼 때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 고민들로 자리가 채워졌다. 한 친구가 말한다. 여민이한테 뭘 하자고 했을 때 싫은 반응이 돌아오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듯이 느껴져 마치 자기가 거부당하는 거 같다고. 다른 친구가 말한다. 여민이가 울면 마치 내가 잘못한 거 같아서 옆사람 눈치가 보인다고. 그래서 울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고.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가 울면 자신의 반응에 신경이 쓰여 정작 아이가 어떤지까지 관심을 가지지 못했구나 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이를 돌볼 때 일어나는 자기의 반응을 털어놓고 나니 분위기가 점점 가벼워진다. 자기가 평소에 습관적으로 봐오던 머릿속 ‘아이’가 아니라 내 눈앞의 여민이는 어떤가. 아이는 이렇게 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불안감이 아니라 내 눈앞의 그 아이는 어떤 상태일까,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자리를 풍성하게 만든다. 이런 모임이 잦아지면서 여민이를 대하는 어른들도 왠지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여민이가 우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볼을 꼬집는다. 여민이가 뭔가 불만이 있다는 뜻일 테다. 아마도 여민이의 장난감을 우가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여민이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나 보다. 우가 얼굴을 찌푸린다. 여민이를 우에게서 떼어놓는다. 상황은 금세 종료된다. 여민이와 우는 어느새 다른 것에 집중한다.
이런 장면들을 대하는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꼬집는 건 남을 괴롭히는 거야.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라는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반응들, ‘저렇게 놔두면 나중에 아이 버릇이 나빠질 거야’라는 불안감으로부터 일어나는 행동들. 내가 생각하는 ‘괴롭힘’이 마치 아이의 생각인양 하는 ‘착각’이 쉽게 일어난다. ‘꼬집힌 상대는 상대를 원망할 거야’ 같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아이를 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눈앞에서 아이들에게 원망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껏 울며 지금의 기분을 표현한다. 스스로를 억누르거나 참는 기색이 없다.
아이를 관찰해보면 놀라우리만치 따라배우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말부터 표정, 행동거지 등등 주변 어른, 특히 함께 하는 시간이 긴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마음 상태도 그런 듯싶다. 부모가 누구를 좋아하면 아이도 좋아하게 되고, 누구를 경계하면 아이 역시 그런 기색을 보인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건 결국 아이의 모델이 되는 주변 어른이 제대로 사는 것이란 걸 알게 된다. 아이에게 인사를 잘하라고 훈육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인사를 잘하면 그걸 보고 따라하게 된다. 어른이 욕먹지 않으려고 인사를 하면 아이도 그 마음으로 인사를 할 테다. 진심으로 상대를 공경해서 인사를 하면 아이도 그 마음으로 인사할 테다. 당근(칭찬, 댓가 등)과 채찍(벌, 훈계 등)으로 아이를 대하면 아이도 자라서 그렇게 상대를 대하게 될 것이다. 인간사회란 당근과 채찍으로 다루어야만 유지가 되는 곳일까? 설사 지금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상대를 그렇게 대하고 싶은가. 당근(돈)이 없으면 일하지 않고, 채찍(의무, 구속)이 없으면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간들을 길러내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환경을 만들어가고 싶은가. 아이를 키우는 육아환경이란 결국 어른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 점점 명확해져온다.
정아가 6박 7일 과정의 ‘인생을 알기 위한 코스’에 다녀오기로 했다. 우동사와 교류하는 일본 애즈원 스즈카 커뮤니티의 사이엔즈 스쿨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평소 여민이의 주 양육자였던 정아가 빠지니 어떻게 상황을 조율할지를 이야기하는 장이 열렸다. 여민이가 정아 다음으로 안심하는 내가 여민이를 주로 보고, 동네 친구 재원이는 내가 모임을 위해 빠질 경우에 여민이를 봐줄 이모 삼촌을 섭외한다. 하루 3시간 정도 업무를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 시간 동안 여민이를 봐줄 사람도 알아봐준다. 옆 동네 사는 명주짱이 오기로 했다. 그 과정이 꽤나 순조롭다. 서로 부탁하고 부탁받는 것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몇 년 사이 일어난 변화다.
5일째가 되니 힘에 부친다. 여민이는 아빠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일할 시간을 못 낸다. 할 일이 쌓이는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다.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갈 만큼 급한 일이 아니면서도 마음은 분주해진다. 문득 평소 주로 여민이를 보는 정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독박육아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궁금해진다. 부탁할 사람이 있는 환경에서도 나는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는데, 힘들 때 마음 편히 아이를 맡기고 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라면 압박이 심하겠구나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지 않은 육아환경을 만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