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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하6장24~7장2절
제목 : 하늘에 창을 내신들
아람 왕 벤하닷이 전군을 이끌고 사마리아를 공격합니다.
포위된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이게 됩니다.
1. 사마리아 성에 닥친 재앙(24~30절)
1) 아람의 포위로 기근이 심각해진 사마리아(24~25절)
(1)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사마리아를 에워 쌓습니다(24절).
“[24]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
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 ‘그 이후’는 아람군이 엘리사에게 큰 굴욕을 당한 사건 이후를 말합니다.
여기서 벤하닷 왕은 아합을 공격 했던 바로 그 왕(Benhadad II)입니다(8:7;왕상 20:1),
이것은 요세푸스의 주장에 근거한 것인데 다른 신학자들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23절 이전의 사건이 있고 난 이후 수 년의 세월이 지나간 때(K.W.Bahr), 그러니까 엘리사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앞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잊었을 즈음에 발생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G.Rawlinson).
그러나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재차 침입한 것(6:24-7:20)은 앞에 언급된 8-23절의 사건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31절에서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저주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즉, 앞 사건에서 아람 군대를 놓아준 것 때문일 것입니다.
(2)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물가가 치솟았습니다(25절).
“[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
성중이 크게 주려서. - 사마리아 성이 당한 고통은 두 가지였습니다.
즉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므로 성 내외(內外)의 교통이 두절되어 물자의 반입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또 사마리아에 닥친 기근으로 인해 성 안에서도 먹을 식량이 극히 부족했던 것입니다.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 레 11:4에 의하면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절대로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머리는 다른 모든 부위보다도 먹기에 제일 나쁜 부분이라서 가장 값이 싼 고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나귀의 머리가 은 80세겔에 거래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기근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한편 은 1세겔(Shekel)은 일반 노동자 4일의 품삯이기 때문에(출30:24;삼하 24:24), 은 80세겔은 영국 화폐로 5파운드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G. Rawlinson) 일반 노동자의 320일, 즉 거의 1년 치의 품삯에 해당되는 값어치입니다.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 '비둘기 똥'이나 여물지 않은 콩과 같이 '영양가가 거의 없는 음식물 찌꺼기'(Berleb), 혹은 '작은 곡식'(Wycliff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브'의 정확한 용량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
진 바가 없으나 요세푸스는 이것을 '제스테', 즉 라틴어로 6분의1(sextarius)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와 같이 성이 포위되고 기근이 극에 달했을 때는 동물이나 사람의 배설물까지 먹었다고 더불어서 전합니다.
한편 이와 같은 일은 세계 제 2차 대전 말기에도 있었는데 독일이 유럽을 포위하자 유럽 사람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서 개와 고양이, 심지어 해충까지도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T.R.Hobbs).
이러한 곤경과 환란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셔서 이같은 고충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레 26:23-26).
2) 이스라엘 왕의 무능(26~30절)
(1)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도와 달라 하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26,27절)
“[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27]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하니라”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 대부분의 고대성들은 요새화된 성벽으로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사륜마차가 지나다닐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또한 그곳은 매우 높아서 적의 이동을 관찰하기가 매우 용이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보초의 경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 고관들이 자주 왕래하던 곳입니다.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 성 안에 있는 집들 중에는 성벽에 붙어 있는 집들도 있었기 때문에(수2:15; 삼상 19:12) 성이 적의 공격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을 때는 여자도 성을 방어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삿 9:53).
그래서 왕이 성벽 위를 통과하는 동안 여인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 여기서 왕이 말한 여호와의 이름은 마음 중심에서 나온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31-33절) 왕 자신의 탄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5:20).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왕의 표현은 사마리아 성 안에 기근이 심하여서 누구든지, 심지어는 왕조차도 백성을 도울 수 없다는 당시의 한계 상황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타작 마당...포도주 틀. - 본절에는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이 나란히 언급되어 있는데 이러한 특수한 표현의 구문에 대하여 해석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것은 생산의 원천인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을 언급한 것입니다(민 18:27,30;신 14:14;16:13).
왕이 이와 같은 단순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당시에 굶주린 백성들의 아사(餓死)를 막을 수 없음을 탄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호 9:1,2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이 내린 심판의 표시라고 보고 있습니다.
한편 당시 사마리아의 타작마당은 성문 앞에 있었는데(왕상 22:10) 아람 군이 이곳을 포위하여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② 이것은 후기 예언서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왕이 타작마당을 심판의 장소로 언급한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호 13:3;미 4:12;렘 51:33).
③ 이것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막막한 상태를 나타내는 숙어적 표현입니다.
즉 왕은 여인의 간절한 외침을 듣고 그 여인의 어려움 또한 현재의 상황으로 인해 왕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고 대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왕이 무슨 일이냐 물을 때에 여인이 대답하기를 아들을 돌아 가면서 먹는데 다음날 아이를 내어 놓으라하니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28,29절).
“[28] 또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
또 이르되 무슨 일이냐. - 문자적으로 '너의 불평거리는 무엇이냐'라는 의미입니다.
27절에서 왕이 여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대답을 하자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여인은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어떤 보충의 설명을 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혹자의 해석처럼 여인은 아마 자신이 왕에게 음식을 구한 것이 아니라 어떤 판결을 요구한 것이라고 설명했을 것입니다(K.W.Bahr).
그렇기 때문에 왕은 그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다시 질문한 것입니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
본절의 사건은 이미 성경에서 예언 하였던 바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레26:29; 신28:56,57).
그리고 이러한 기록은 그 당시 사마리아 성이 당한 기근이 얼마나 비참하였는가를 말해줍니다.
한편 성경에 나타난 이 같은 예언의 성취를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루살렘이
①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애 4:10)와,
② 디도(Titus)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Josephus)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에 대해서 전혀 비애하지 않고 그 시신(屍身)을 먹는 본절의 기사를 통해 한계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죄악 된 인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극도에까지 다다른 상황에서도 인간은 결코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음부에 있는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눅 16:3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셨습니다(30절)
“[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의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왕이...자기 옷을 찢으니. - 이처럼 여호람 왕이 자기 옷을 찢는 몸짓을 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5:7).
그는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현실의 참혹한 상황에 경악하여 백성의 지도자로서 느끼는 비통을 외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이러한 분노는 자기 백성의 참상에 대한 책임을 엘리사에게 전가시키는 심히 악한 격분이었습니다.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 '굵은 베'는 회개, 슬픔을 표시할 때 입는 거친 옷입니다(19:1;창 37:34;삼하 3:31;대상 21:16;에 4:1;욥 16:15;사 15:3;단 9:3;욘 3:8;마 11:21;계11:3).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이 공식적인 왕복(王服)속에 이 굵은 베옷을 걸쳐 입었다는 것은 사마리아 성에 닥친 재난으로 인해 회개하는 행동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겸손해진 행위라기보다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경문(經文)을 넓게 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난의 원인을 엘리사에게로 돌리면서 그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31절).
그리고 혹자가 말한 것처럼 왕은 이런 형식적인 옷차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켜 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Bahr).
그러나 진실된 회개의 신앙이 없이 슬픔과 회개의 표시로만 굵은 베옷을 입는 것은 외식적으로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딤전 4:7).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외식을 회개하지 않아 외식하는 자가 받는 율(律)에 처해짐 같이(막 7:1-27), 여호람 왕도 결국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외식하는 자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모든 자에게도 해당됩니다(마5:20).
2. 내일 이맘때(31~7:2절)
1) 엘리사에 대한 분노(31~33절)
(1) 이스라엘 왕은 참혹한 상황의 책임을 엘리사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31절)
“[31] 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
여기서 여호람 왕이 엘리사를 저주한 것은 8-23절의 사건과 24절에서 벤하닷이 재 침입한 서건을 서로 연관시켜서 이해할 때 보다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카일(Keil)이나 기타 다른 신학자들(Bahr,Rawlinson)은 이 두 기사를 서로 연관시키지 않고 해석하기 때문에 약간의 억지스런 추측을 했습니다.
즉 그들은 엘리사가 왕에게 항복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할 것을 묵시적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왕이 엘리사를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벤하닷은 엘리사에게 당한 굴욕을 잊지 못해서 사마리아를 다시 공격했고 이스라엘 왕은 그때 아람 군대를 죽이지 않고(22절) 놓아 보내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T.R. Hobbs).
그래서 여호람 왕은 엘리사를 저주한 것입니다.
또한 왕이 엘리사에게 저주를 한 직접적인 이유로서는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여호와의 도움을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8-23절의 사건과 24절의 사건을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왕이 엘리사의 목을 치겠다고 한 것은 율법의 어느 곳에도 그러한 행위를 용납한 곳은 없으나(Pulpit Commentary) 애굽과 바벨론과 앗수르 등의 이방에서는 흔히 행하던 참형(斬刑)입니다.
(2) 엘리사는 왕이 이르기 전에 그들을 문 안에 들이지 말라고 합니다(32절).
“[32] 그 때에 엘리사가 그의 집에 앉아 있고 장로들이 그와 함께 앉아 있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
그 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 엘리사의 거처에 대해서는 여러 곳이 언급되었지만 여기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본래의 집으로 추측됩니다.
장로들이. - 이들은 성의 관리들(Lange Commentary)이라기 보다는 사마리아 성에 있는 백성들의 대표자들입니다.
한편 그레이(Gray)처럼 여기에 언급된 모임을 정규적인 또는 습관적인 모임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사마리아 성이 직면해 있는 중대한 문제를 두고 백성의 대표자들과 상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Hobbs).
사람들 보내었더니. -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신하 중 한 사람(왕상 10:8;단 1:4,5)을 여호람은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살인한 자의 아들이. - 이것은 물론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의 나쁜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래서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표현이 '아합의 아들 여호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람이야말로 혈통적으로나 기질면에서나 광폭한 살인자 아합의 친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왕상 21:19).
그러나 본문의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말은 족보상의 어떤 구체적인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살인자와 같은 인간', '포악한 인간'등의 비유적인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삼상 20:30).
비근한 예로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그들에 대하여 '마귀' 즉, '살인한 자의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요 8:44).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호람 왕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사자를 보낸 성급한 행위를 후회하고 즉시 사자를 뒤따라 왔다고 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문을 닫게 하고 왕이 도착할 때까지 사자들을 들이지 말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33절에 기록된 말을 왕이 직접 언급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한글 개역 성경도 왕의 말로 번역했다).
그러나 일부 극소수의 학자는 이것을 왕이 뒤따라 온 것이 아니라 왕이 보낸 사자의 발소리라고 합니다(T.R.Hobbs).
(3)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33절).
“[33]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
왕이 가로되. - 원문에는 '와요메르'로서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것은 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왕의 사자가 말한 것(T.R.Hobbs)이 아니라 '왕자신'이 와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역 성경 RSV와 NEB는 말하는 주어를 왕으로 간주해서 번역한 것입니다.
한편 KJV는 그 주체를 왕의 사자로 번역해서 그 뜻을 모호하게 하고 있습니다.
어찌 더...기다리리요. - 이 모든 재앙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시인하는 여호람 왕은 이제 여호와께만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갖습니다.
그가 왜 이처럼 갑자기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으나 왕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바른 길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한편 7장 1절부터는 여호와의 재앙이 끝나고 새로운 국면이 시작됩니다.
2) 엘리사의 응답과 장관의 불신(7:1~2절)
(1)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에 극심한 기근이 해결 될 것이라 합니다(1절).
“[1]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
혹자는 본절 이후의 사건을 앞장의 기사와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6:33에는 등장인물이 '사자'인데 반해 2절에서는 그 등장인물이 '한 장관'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상으로 보거나, 사건의 연결상으로 볼 때에 앞장의 사건과 본절에는 긴밀한 연결 관계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7:1, 2절은 앞 사건의 한 구성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기사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G.Rawlinson).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예언을 선포할 때 사용되는 고전적인 서론 형식을 엘리사가 이처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러한 서론 형식은 공공의 집회에서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 시키기 위하여 흔히 사용되던 것입니다(렘2:4;10:1;미 3:1;암 7:16,17).
그리고 '들을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마'는 단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고(렘 2:4) 혹은 복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는데(미3:9) 일반적으로는 복수 형태로 사용되는 것이 정상입니다(Hobbs).
그러나 이 단어가 단수로 사용될 때는 '듣는 무리를 하나로 취급할 때'나 '무리 속에 있는 개개인을 하나 하나로 간주해 그 설교의 대상으로 삼을 때'입니다(렘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 이러한 표현은 사마리아 성이 아람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편 '이르시되'란 말은 히브리어 '아마르'의 번역으로서 '대답하다', '확인하다', '명하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여호와의 확신적 선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 여기서 '때'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카에트'는 명사 '에트'앞에 전치사 '카'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가 구약에서는 아주 드문 예로서(민 23:23;수 11:6;삼상 4:20;왕하 4:16), 이것은 어떤 특별한 시점(時點)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말한 바로 그 '때'(카이로스)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문에서. - 고대의 성들에는 큰 성문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넓은 뜰이 함께 있어 그 지역 사회의 공적인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즉, 공적인 연설의 장소(창34:20), 공무 집행소(왕상 22:10), 재판이 열리는 곳(신 17:5;행 7:58), 사열하는 곳(삼하 18:4) 뿐만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렘 17:19,20)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성문이 곡물을 파는 시장으로 사용된 듯합니다(17,18절).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 여기에 언급된 한 '스아'는 한 '에바'의 약1/3에 해당되는 부피로서 약 7.33l 정도입니다.
한편 이것이 평상시보다는 고가에 해당 되지만 당시의 형편으로 볼 때는(6:25) 엄청난 가격 절하입니다.
즉, 고운 가루 한 스아의 값이 당시에 거래되던 비둘기똥 사분 일 갑(kab)에 해당하는 가격의 1/5밖에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갑'(약 1.3l)은 한 '스아'의 약 1/6에 해당되므로 이것을 통해서 고운 가루의 가격 절하 정도가 얼마만한지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따라서 이 예언이 기근으로 허덕이던 사마리아 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선포로 들렸을 것입니다.
한편 '한 세겔'이 금인지, 혹은 은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금 한 세겔은 은 한 세겔의 15배에 해당되고(대상 21:25) 은 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4일에 해당하는 품삯입니다(출 30:24;삼하 24:24).
(2) 장관은 비아냥거릴 뿐 믿지를 않았습니다(2절)
“[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한 장관 – 여기서 '장관'을 뜻하는 히브리어 '솰리쉬'는 '셋'을 의미하는 '솰라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BDB(F.Brown, S.R.Driver, and C.A.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에서는 '병거에 탄 세번째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혹자는 이를 '셋째 관리'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한편, 거니(Gurney)에 따르면 헷족(Hittite)의 전차는 세 사람이 몰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은 전시에 가능한 한 빨리 많은 사람들을 수송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라암세스 2세와 가데스에서 전쟁할 때 헷족(Hittite)은 바로 이러한 삼륜 전차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는 '솰리쉬'라는 단어가 군대와 관련해서 번역된 적은 전혀 없습니다(T.R. Hobbs).
오히려 출 15:4에서는 '택한 장관'(RSV)으로, 겔 23:23에서는 '귀인'으로 번역되어 왕의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는 자를 나타냅니다.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 왕의 전속 부관, 즉 나아만과 같은 직급에 속한 이 사람은 이스라엘 왕이 신임하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 이것은 창 7:11에 기록된 홍수 사건을 의식한 말로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의 진실성을 의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선지자를 심하게 조롱한 것입니다(K.W.Bahr).
따라서 그는 정죄를 받아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20절).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처절한 아픔을 허락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시고 멸망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백성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임할 저주를 분명히 말씀하시고(레26:23~26; 신28:49~57), 저주가 임할 때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쓰라린 아픔이겠지만, 제대로 작용한다면 멸망에 빠지는 것을 막아줄 것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이스라엘 왕은 회개를 나타내는 베옷을 입으며 여호와의 도움을 구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26~33절).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비참했고, 마침내 그의 기대는 분노로 바뀝니다.
여호와를 탓하는 말과(27,33절), 엘리사를 향한 적개심(31절)은 그의 베옷(회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는 악행을 참으며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삶을 돌이키지 않고 영혼 없는 회개의 의식을 반복했습니다.
나는 일상적으로 회개의 말만 반복하며 살던 대로 그냥 살고 있진 않습니까(임후3:5)?
2) 성안에 같혀 절망과 굶주림이 지속되자 자식의 살을 먹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28~30절).
오늘도 세상은 약육강식하고, 긴 고통과 절망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하며, 자신을 착취하는 지도자를 분별없이 따르는 일이 허다합니다.
희생해야 할 부모조차 자기 욕망을 위해 아이들의 꿈과 신앙을 희생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과 훈육이 무엇인지 고민해봅시다.
3) 왕의 장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도 막상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고 하자 믿지 못합니다(7:1,2절).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한 것입니다.
나의 영적 상상력 속 하늘의 창은 얼마나 큽니까?
기도 : 하나님 능력을 의심하고 순종하지 않았던 삶을 말씀으로 돌리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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