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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길을 품다>
길은 낭만적인 단어다.
그걸 떠올리면 부드럽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원경의 하이웨이나, 티베트 고원을 빙빙 감아 도는, 마치 그렇게 걷다가 내 전생으로까지 가 닿으면 어쩌지 싶을 만큼 아득하고도 아득한 선이 그어진다.
하얗게 표백된 건조한 이미지 속엔, 인간의 흔적 또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길은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다.
그런데 길은 인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가만히 보면 길의 조형성은 흔적, 적층, 소멸과 같은 역사적인 공감각과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이번에 『역사, 길을 품다-풍찬노숙에 그려진 조선의 삶과 고뇌』라는 책을 보면서 자꾸만 그렇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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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원래 없었다. 토끼가 지나간 길을 사람이 따라가서 생긴 흔적이, 그런 우연이 몇만번이 겹쳐져야 길이 생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걸었을까, 얼마나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길을 걸었으며, 길 위에 흘린 그들의 걱정들은 우리의 경험과 상상으로 다 포괄할 수 있는 것일까.
길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을 관조할 때마다 신기루처럼 자꾸 내 시야를 어지럽히던 것이 드디어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길이 휘고 꺾이고 오르내리는 모든 모양을 따라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두 자기 사연을 지니고 있는 유령들이다.
나는 자꾸만 길에 철퍼덕 주저앉은 유령들이 있는 것만 같다. 마치 피어오르는 안개나 아지랑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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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옛길>
이 책은 물론 이런 공상에 가까운 사변을 읊어놓은 책은 아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걸어 다녔던 과거길, 요양길, 장례길, 휴가길, 첩보길, 암행어사길, 장길과 보부상길, 상소길, 마중길, 유배길 등이 소개된다.
가령 휴가길은 조선시대 하급관리 황윤석이 죽을 똥을 싸면서 격무에 시달리다가 어머니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으로 도망쳐 내려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배길은 조선후기의 화가 조희룡이 유명한 문인 집에 드나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유배를 떠나는 내용이고, 상소길은 집권 서인세력에 의해 조상의 위패를 모신 서원을 철폐당할 위기에 처한 한 안동 양반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서울로 달려 올라가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있고, 그가 실제로 걸었던 일정을 미세하게 따라가면서 복원해놓은, 소설같기도 한 역사책이다.
상소길의 경우 서울에 올라간 안동 양반들이 짚신이 닳도록 인맥을 동원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져있는데, 오늘날 국회의원들이 공천받기 위해 상도동이나 연희동을 뻔질나게 다니는 장면과 겹쳐서 보이기도 한다. 여러모로 흥미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치 어딘가에 그런 길이 독립적으로 10개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이 걸었던 길은 대부분 겹쳐진다.
물론 압록강을 건너 적의 눈을 피해 만주의 험한 산을 기어다니는 첩보길과 집앞을 사보작사보작 다니는 마중길은 다르지만, 나머지 길들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낙향하거나,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삼남대로가 주무대다.
공간과 여로는 똑같지만 길을 걷는 목적이 달랐고, 그 길 위에서의 삶이 달랐다. 길은 이 모든 흔적을 껴안고 흘러간다. 그렇게 좁은 길이 넓어지고 넓어지다가 이제는 아스팔트에 뒤덮히고 현대적인 구획에 따라서 소멸되기도 했다.
때론 아스팔트를 보고 있어도 그 위에 서린 역사적 삶들의 무수한 외침이 느껴지는데, 안동의 새재나 죽령 같은 곳에 남은 옛길을 걸으면 얼마나 모골이 송연해질까. 가을 밤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진다.
그건 그렇고, 요즘 이런 테마사라 할까 생활사라 할까, 소프트한 역사이야기 책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책들이 실록의 주요대목을 그대로 읊어대거나 자극적인 살인이나 연애 같은 주제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에 비해서 이 책은 우리가 잘 접하지 못한 민가에 남아있는 양반들의 일기를 토대로 해서 길 위에서의 인생을 들려주는 장점이 있다.
왠만한 소설책보다 훨씬 리얼하고 생생하다. 가을이 눈 앞에 무겁게 닥쳐 왔는데, 그런 가을처럼 성숙한 내용으로 마음에 느낌표 하나 찍을 수 있어서 좋았다.
첫댓글 옷~ 이런 좋은 책이 있었군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회하진 않으실거예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아신다면요. 환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