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가운데 가장 먼저 망한 나라는 촉으로 2대 43년동안 존속했다.
촉이 망하고 2년뒤(서기265년)에 위도 망했다. 5대 46년이었다.
오는 4주 52년이었으며, 진(晉)나라의 태강원년(280년)에 진에 항복했다.
촉나라에는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죽은 뒤 특별히 눈에 띄는 인재가 없었다. 오장원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여러 장수들 사이에 불화가 심해져 양의가 위연을 죽이는 소동이 일어났다.
강유(姜維)와 비위같은 사람이 촉나라를 지탱하고 있었으나, 비위가 죽은 뒤에 황호라는 환관의 횡포가 시작되었다. 위나라는 촉나라로 원정군을 파견해 토대가 썩어가는 촉나라를 타도해 버렸다...
원정군 장군 중 한 사람으로서 10만 위군을 이끌고 촉나라로 쳐들어간 사람이 다름 아닌 종회였다...
촉나라의 유선(劉善)은 경곡도를 지나 성도로 밀고들어온 등애의 군대에게 항복했다. 이리하여 촉나라는 망하고 유선은 낙양으로 끌려왔다...
종회는 낙공에서 진군했는데, 이를 막고 있던 촉나라의 중신 강유(姜維)는 유선의 칙명에 따라 무장을 풀고 종회에게 항복했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 촉나라의 장사들은 모두 분을 이기지 못해 칼을 뽑아들고 돌을 내리쳐서 울분을 터뜨렸다고 한다...
장군으로서 촉나라에 들어온 종회는 촉나라의 풍요로움에 마음이 움직였다. 이 땅에 할거한다면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항복한 강유(姜維)를 후하게 대접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자립했을 때 촉나라 사정을 잘아는 인물이 측근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위(魏)나라 경원5년(서기 264) 정월에 종회는 성도로 들어와 자신을 익주목이라 칭하고 자립을 꾀했다.
자립이라는 것은 중앙정부에서 보면 모반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기때문에 부하들은 모반에 반대했다. 장병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난전 끝에 종회는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강유(姜維)도 이때 참수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이것이 촉나라의 충신 강유(姜維)의 고육지책으로 되어있다.
강유가 종회를 설득해서 반대파 장수들을 죽이게 하고, 그 뒤에 종회를 죽이고 위나라 병사를 모두 죽여서 촉한을 부활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화양국지>나 <한진춘추>등에 이 일이 언급되었다.
예로부터 강유(姜維)를 놓고 무기력한 투항파라고 비난하는 설과 끊임없이 국가의 부흥을 꾀한 충신이었다는 설이 있었다.
정사 <삼국지>의 진수는 강유(姜維)를 비난하지만, <자치통감>의 사마광은 충신설을 취했다.
이처럼 정반대의 평가를 받은 것은 이 시대가 불안정했던 탓이기도 했다. 아무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경쟁심이 강했던 종회가 죽림현인과 동료 장군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마침내 자립해서 천하를 바라게 되었다. 이런 새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낙양으로 연행된 유선은 식읍 1만호를 받고 노비도 100명쯤 있어서 촉나라에 있었을 때와 거의 똑같이 생활할 수 있었다. 시골같은 촉나라와 달리 낙양은 꽃의 수도였으므로 유선은 모든 것이 신기했고 또 충분히 즐겼다.
촉나라가 생각나지 않느냐고 사마소가 묻자, 유선은 '이곳 생활이 즐거워서 촉나라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 자가 유비의 아들인가 싶을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한 사마소는
'제갈공명이 있다해도 군주가 이렇다면 보좌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강유(姜維)로는 어쩔 도리가 없구나!'고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다...291 - 294쪽
이야기 중국사 제3권, 진순신, 이수경 옮김,2011, (주)살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