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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속에 담긴 부끄러운 자화상--
어느 대학의 유명한 면접고사 문제(아니, 유명한 답변)가 있다. 여고생 시절, 우리에게 ‘다수결의 원칙’을 설명하기 전에, 사회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이야기이다. ‘다수’는 늘 옳고, 중요하다,고 믿어왔고 배워왔던 우리의 생각을 뒤바꾼 이야기.
-사람들은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에 세상의 모든 인간 유형을 한 명씩 태울 큰 ‘배’를 만들어 다양한 인간 군상을 1000명 태우고서 무너지는 지구를 떠나고 있었다. 면접에 참여한 학생도, ‘학생’ 대표로 살기 위해 매달리는 많은 사람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겨우’ 그 배에 타게 되었다.
그 배에는 학생, 교사, 종교인, 군인, 경찰, 대통령 뿐만 아니라, 사형수, 불치병에 걸려 곧 죽을 수도 있는 시한부 인생의 환자 등도 함께 타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사람들은 같은 유형의 사람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살기 위해’ 그 배에 탄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태운 배는 바다 한 가운데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신이 등장한다. 그리고 하나의 제안을 한다.
“너희들 중 1명의 목숨을 스스로 바친다면, 나머지 999명 사람들의 목숨을 모두 살려주겠다.”
과연, 이 1명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누가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 바로 이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유형의 답변-모진 죄를 지은 사형수가 죽어야 한다, 시한부 인생의 환자가 죽어야 한다는 대답부터 ‘제가 죽겠습니다.’라고 말한 학생, ‘종교인’이 죽어야 한다고 말한 학생들-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이유들을 마다하고서라도 사형수든, 시한부 인생의 환자든, 자신이든, 종교인이든 ‘살기 위해’ 그 배에 타지 않았는가?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 우리는 늘 질문에 ‘누구인가’를 먼저 택하는 법을 배웠고, 가르쳐왔다. 즉, 문제의 근본원인은 뒤로 한 채 ‘왜’ 이 질문이 나왔는가, 보다는 답을 찾기에 급급하다보니 늘 ‘나무’만 보며 숲은 보지 못한 채 지내온 것이다. 이 물음에서 묻고자 하는 것은 과연 ‘누가’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굳이 정해져 있다고 보기 힘들지만, 앞서 말한 다양한 답과는 다른 시각의 답이 있었다고 한다. ‘누가’가 아닌 ‘왜’에 초점을 맞춘 한 학생의 답은, 이것이다.
- 아무도 죽어서는 안 됩니다.
질문자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동문서답을 해 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질문자는 곧바로 물었다고 한다.
- 왜 아무도 죽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인가? 분명, 1명이 죽어야 다른 모두가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 죽어도 되는 것인가?
- 1명의 목숨이 다른 999명의 목숨보다 ‘덜’ 소중하지 않습니다. 소수라고 해서 다수보다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명의 목숨을 바쳐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 반드시 1명이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그렇다면, 다른 이를 위해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죽으면 됩니다.
- 그 배엔, 모두 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경쟁을 물리치고 탄 사람들밖에 없네. 만약,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죽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 모두가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회는 지속되어도 모두 헐뜯고 비난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기 급급할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의 의도는 ‘누구’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1명의 목숨과 나머지 999명의 목숨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당연함’ 속에서 나머지를 위해 죽어줄 (혹은 죽어야만 하는) 1명을 찾아내는 것을 우선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했다. 당연히 다수의 목숨이 중요한가? 우리는 소수의 의견도 늘 존중해야 한다고 배우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교사는 무의식중에「이렇게 해라」라는 암묵적인 지시를 내리고 있는 자신의 행위에 대개 무자각하기 때문에「아 그래 네가 스스로 생각한거야? 훌륭해 훌륭해」라고 말하고 감격한다. 그것을 보고 다른 아이들도「아! 이것으로 이 교실은 평화롭다」라고 안심한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빠져 있는가? 여기에는 사물과 현상의 ‘진실성’ 혹은 ‘진정성’의 실감이 없다. 「그것은 확실히 정말이다. 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거야?」라고 하는 실감이 없다.「왜 그리 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라는 자발적인 물음이 없다. 그리고「다른 가능성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보자」라고 하는 탐구심도 없다.
또한「안다고 하는」것의 의의가 교실을 넘어선 문화와 연결되지 않는다.「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교사가「나중에 시험에 내기」때문에「외워 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이 교실 바깥의 사회와 문화 속에서「진짜」이고 도움이 되고 또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과 인연을 맺고 있다고 하는「지식의 가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교육은, 우리의 사회는 늘 ‘다수결’의 원칙 속에 묵살되는 ‘소수’들의 가치를 잊고 있다. 이 물음을 던지자마자, 늘 ‘누구’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교육받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고,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서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듯이 ‘소수’의 권리(여기서의 ‘소수’란 ‘수’가 아닌 권력을 얻지 못한 이들의 적은 ‘힘’에 대한 것이다), 그 소수 속에 포함되는 나라, 국민, 그리고 학생들의 목소리를 이 나라의 권력을 쥔 ‘다수’들은 듣지 않고 있다. 그들이 만든 법과 교육, 언론은 인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정하고 '모든 악의 대표격'인 국가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강력한 국가권력이 유지, 존속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힘 없는 소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과연 그러한 의도인지는 끊임없이 의문을 가져야 한다) 법 조차, 끊임없이 사람들의 판단과 자유로운 의식을 대신하고 규정하고 있으며 비합법적이고 독재적인 국가권력의 힘이 되고 있다.
실패한 교육과 심리학,에서 촘스키가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 아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학교,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그 속의 권력과 부조리함. 강대국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의 무자비한 (그러나 보이지 않는) 행위를 파헤쳐내면서, 촘스키는 아무 관련이 없을 듯한 ‘교육’과 결부시켜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제안한다. 이 과제는 별도의 요점 정리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촘스키의 눈을 우리의 교실로, 한국으로 돌려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과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닌가, 생각하며 나의 생활을 되돌아본다.
#1. ‘화요일에만 등교하는 아이’와 ‘교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반에는 화요일에만 등교하는 학생이 있다.(가끔은, 토요일에도 얼굴을 비칠 때도 있지만.) 학생이 내게 말한 이유는 주말에 놀다보면, 월요일에는 피곤해서 학교에 올 수 없고, 화요일에 학교를 나오긴 하는데 재미가 없어서 수요일에는 학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고, 목요일 금요일에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다가 토요일에 놀 친구들이 없으면 학교에 들르거나, 일요일쯤 되면 다시 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 패턴이 계속 반복되어, 6월이 된 지금까지 거의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다.(물론 일주일 내내 학교에 오지 않을 때도 있다)
2학년 때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왔다고 하는데, 3학년이 되고나서는 일주일에 많아야 두 번 학교를 오고 있었다. 3월 말, 하루는 마음먹고 집에 가려는 아이를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해 보았다. 이야기를 듣고 나의 첫 반응은, ‘기가 막히는군.’이었다. 학교가 제 맘대로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겠구나, 이 아이를 어떻게 학교에 다니게 만들지, 이 아이가 학교에 오면 아이들은 또 싫은 티를 낼 텐데...등등의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감싸고 돌았다.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은 채, 실내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언제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 아이에게 나는 뻔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왜 오지 않는거니?
- 학교에 왜 와야 하는지 모르니까요.
학생이면 학교에 와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 학교 와야 하는 게 왜 당연해요?
다른 애들도 오잖아.
- 걔네들도 오기 싫을 걸요? 학교 오는 게 나한테는 정말 죽을 것처럼 싫어요.
아이와 대화하는 중, 나는 ‘당연’이라는 말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당연함, 우리가 말하는 그 당연함은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일까? 나는 왜 이제껏 나에게 쏟아지던 모든 것들을 평범함과 당연함 속에 묻어버리고 의식 없이 살아갔던 것일까? 아이에게 학교가 죽을 것처럼 싫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서 또 한 번 어설픈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어머니랑 선생님이 너한테 얼마나 많이 관심을 쏟고 있는 줄 아니?
- 그럼 신경 쓰지 마세요. 나를 좀 내버려 두세요.
나의 관심으로 아이는 바뀔 수 있다고 믿었던 시간들. 내가 이끄는 대로 아이들이 따라와 줄 것이라고 믿었고, 나는 아이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내 머릿속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나는 나의 능력에 자신이 있었으며, 아이가 바뀔 수 있다고 믿었기에 학기 초에 아이에게 많은 관심을 쏟아 부었다. 칭찬, 설득 등 ‘교수 기법’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아이에게 적용했다. 그러나, 아이는 점점 더 물러서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아이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공부도 꽤 잘하는 축에 속했으며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다고 한다. 아이를 지켜본 선생님들은 왜 저렇게 변했는가, 안타까워하는 분들도 많다.
「이상적인 교실」에서 교사의「보이지 않는 끈」에 의한 통치하에서는 아이의「자아」의 성장은 완전히 멈추어 버리고 만다. (중략)「진정한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직면하면 이번에는「학교」라는 것에 대한 불신이 폭발한다.「강제 당했던」공부가 싫어진다. 그렇게 하라고 시켰던 교사와 학교에 끝내 반발해 지고 싶어진다. 자신에게 있어서「공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물음이 갈 곳이 없는 바동거림이 되고 어디에서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모르고 일단「학교」를 거부하고「교사가 모르는」다른 세계를 꿈꾸고 떠나게 된다. 이것은 다름 아닌「끈이 끊어진 연」이 되는 것이다.
존 듀이의 핵심 사상 중 하나, 즉 “생산의 궁극적인 목표가 상품의 생산이 아니라, 평등한 조건에서 서로가 연대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 그리고 교육의 목표는 “지배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가치 감각을 길러주는 것이고, 자유로운 공동체의 지혜로운 시민을 양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며 (중략) 자연 속의 생명체처럼 어린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를 내 뜻대로 맞추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온순한 양처럼 길들여 놓고서는 그것이 ‘적응’한 것이라 칭찬하며 진정 아이가 바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아이는 이제 물러설 곳이 없어서 학교를 거부하고 있으며, 집을 거부하고, 사람을 거부하고 있다.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는 ‘몰라’로 일관하고 있으며, 친구들과의 관계도 하나둘 끊어내고 있다.
이 와중에도 우리의 학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다른 아이들의 학업 성적 자료를 정리하여 진학 상담을 해야 하며, 아이들에게 ‘학습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수업 방법을 고안해야 하고, 아이들의 ‘점검’하기 위해 시험 문제를 내고, 나라에서는 교사들의 제대로 서지 않아 교육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며 교사들을 평가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도망치듯 학교를 떠밀어내고 있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주는 것. 3월에 내가 했던 실수처럼 먼저 ‘단정’짓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진실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화요일에만 오는 이 아이는, 이런 규칙의 부질없음을 일찍이 몸소 터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이며,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의, 사회의 모든 규칙이 진리라고 믿고 살아왔다. 몇 차례 이 진리들을 흐트릴 뻔한 일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쉽게 깨어지지 않았고, 다른 이들에게 사회의 진리를 전하는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서고 보니, 내가 살아왔던 것과 너무도 다르게 사회를 향해 똑바로 서 있는 아이, 사회와 등지고 있는 아이, 사회에 길들여져 있는 아이 등, 너무도 다양한 모습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을 한 줄로 세우고서ㅡ 나라의 교육법에 맞게 그들을 아무 비판 없이 가르치고 있었다. 삐쭉삐쭉 튀어나가려는 아이들을 붙잡아 놓고, 내 말이 진리인양, 혹은 학교가 진리인양 아이들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2. 사교육 없는 학교
전국적으로, ‘사교육 없는 학교’에 선정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한다. 선정되는 동시에 몇 천, 몇 억 단위의 예산이 내려와서 학생들에게 ‘고루’ 배분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교육 없는 학교’에 선정된 후, 1년 간 수업을 진행해 본 학교의 교사들은 고개를 흔든다. 이 정책은 그야말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돈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것을 다 쓰기 위해서는 10교시까지 수업을 해야 한단다. 6교시 수업만으로도 하나둘 교실에서 푹푹 쓰러지듯 엎어지는 아이들을 일으켜 세워, 10교시까지 버티고 나면 아이들은 다시 학원으로 향한다. 교사들은 했던 얘기를 몇 번씩 더 반복하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보고 중얼거리듯 수업을 하게 된다고 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학문 중심 교육이 다시 우리나라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목표가 무엇인지 몇 번씩 묻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나의 교육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몇 번씩 되새기는 하루가 계속 된다.
여기에서 리프만의 주장을 빌려오고 싶다. 민주 사회에서 무지하지만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국외자들은 단 하나의 역할을 갖는다. 그 역할은 “행위의 참여자가 아니라, 행위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방관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지도계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제도를 통해서 힘을 몰아주고, 그 역할을 끝낸 뒤에는 본연의 일상 생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즉, 이 사교육 없는 학교라는 제도 자체도 학교의 힘을 키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었으며, 학교가 학생을 옭아매는 또하나의 사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나라가 원하는, 사회가 원하는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 넣으면서 지배자들의 통치 방식을 답습하고, 배우고 있는 것이다.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은 철두철미하게 진행되는 사전 조사에서 마치 주체가 되어 사교육없는 학교라는 것을 진행하는 듯 보이지만, 이마저도 이미 만들어진 틀 안에서 짜여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제도는 만들어졌다. 예산도 확보되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적당한 미끼를 던져두고, 학교를 유혹한다. 학교는 이끌려가며, 학생들에게 주지시킨다. 이 모든 것들이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며.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학교는 ‘사교육을 없애기 위해’ 학력 향상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너희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말하고 있다.
낙제생의 대다수가 저소득 계층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교육자들은 발표나 연구에서 계급이라는 용어 사용을 애써 피한다. 계급으로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부시의 연설을 통해서도, 미국의 정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부자에게 미국은 아주 특별한 나라이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 있으나 여전히 빈곤층이 겪는 어려움은 크고, 가난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빈곤한’ 국민들은 계급 없는 사회에서 평등하게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계급차를 해소하고, 빈부격차를 줄여 아이들의 학력 향상을 꾀한다고 정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돈 있는 가정의 아이들은 이 수업 후에도 또다른 사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사교육 없는 학교를 진행하기 위해 들어가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세금은 올라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부자들에게는 감세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에서 또다른 학교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게는 학교에 대한 호감도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아이들은 지쳐가고, 교사와 아이들의 대화 시간은 더욱 줄어간다. 아이들은 바깥에서 보고 듣고 무엇인가를 누릴 경험을 상실하고 있다. (사교육 없는 학교에서는 ‘예산’을 쓰기 위해 아이들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수업을 듣게끔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동시에, ‘학업’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계속해서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학교라는 제도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이끄는 대로 아이들은 따라야 한다. 옳지 않을 것을 보고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학습자의 머리 속을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기계적인 지식들로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다. 교사들이 ‘사교육 없는 학교’를 진행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아이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런 과정이 반복될 수록 학생들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외우고, 단편적으로 바라보게 되어 진실을 파악하는 힘을 잃게 된다.
이런 와중에, 교감 선생님은 사교육 없는 학교의 좋은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교사들은 월급에 해당하는 수당을 받게 됩니다.”
결국 교사는 이러한 모든 수고에 대한 대가로 물질적 보상을 받게 된다. 결국 이런 사회에서 교사란 물질적 보상을 위해서 전문적 기술과 지식을 제공하는 전문가에 불과하다.
#3. 교원평가와 오토바이 이야기의 상관관계
금요일 오후 6시를 지날 무렵이었다.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난 후였고, 나는 학교에 남아서 아이들의 진학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발신자는, 학교 문제에 ‘관심 많은’ 한 학부모였다.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 이 전화를 받으면 나는 ‘한 시간’동안 통화를 해야 함을 직감했고(이전에도 자주 통화를 하였으므로) 몇 초동안 고민했건만 전화를 받지 않으면 계속 전화가 올 것임을 알았기에 (이전에도 그러하였으므로) 전화를 받았다.
- 어머님, 안녕하세요?
- 네, 선생님. 그런데 이거 해야 합니까?
- 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다짜고짜 내게 ‘해야 하는지’를 물은 것은 교원평가였다. 목소리나 교육 방식도 모르는 선생님, 하물며 얼굴도 모르는 선생님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45분’ 분량의 동영상과 사진 한 장으로 총 15명 이상을 평가해야 한다는 건 ‘누구’의 생각이냐며 내게 교원평가 시스템의 불합리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것의 주도권을 ‘학부모’와 학생에게 주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교원평가를 위해 우리는 몇가지 ‘공개’를 했다. 첫 번째는 학부모들을 초청하여 ‘공개’수업을 했고, 두 번째는 학교에 오지 못한 학부모들을 위해 수업 동영상 촬영을 하여 홈페이지에 ‘공개’했고, 세 번째는 교사의 학습자료 및 학생들과의 활동 상황을 홈페이지에 탑재하여 열람할 수 있게 했으며, 네 번째는 동료교사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도록 했다. 공개수업, 혹은 수업 촬영을 위해 준비하는 선생님들의 입에서는 공통된 말이 나왔다.
“우리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요?”
그래,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를 감싸고 있는 제도 속에서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몸소 겪고 있는 것이었다.
교육의 목표가 듀이의 주장대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든, 지배계급의 소망대로 순종과 복종과 소외화를 촉진하는 교육이든 간에, 교육이 공식적인 체계를 통해 이뤄지는 것은 사실이다. 시카고 대학의 사회학자로서 교육이 어린아이의 삶에 미치는 효과를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학생의 성취도를 결정하는 데 학교에 관련된 변수보다 가정이란 배경이 갖는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 결론내렸다. 따라서 사회정책과 지배문화가 이런 요인들, 가정의 영향력 등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인간의의지에 당연히 종속되어야할 제도가 만들어낸 결정에 우리가 구속되어야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사회 제도가 미치는 영향력, 나라가 학부모와 교사, 아이들에게 지시하는 제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교육의 근본적인 목표가 학생들과 교사, 사회의 소통을 통한 학생들의 성장이라면, 제도 자체의 변화를 생각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의 교육은 오로지 ‘학업’ 아니던가. 아이들이 비행 청소년으로 낙인 찍히고, 학교를 벗어나려 애쓰는 모든 상황들도 교사의 능력 부족으로 귀결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그렇다. 수업의 모든 ‘잘못’은 교사에게 있는 것이라고 이 시스템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바르게 앉아있지 않은 것도, 학교에 오지 않는 것도,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오르지 않는 것도 교사의 책임이다. 교원 평가 시스템은 교사를 ‘점수’화하여 일렬종대로 줄세우기 할 것이 분명하다. 이 교원평가 홍보 영상은 더욱 가관이었다.
“선생님들의 수업에 대해 만족하냐는 질문에 72%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그렇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수업의 질을 향상시키고, 학교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교원 평가는 꼭 필요합니다.”
라는 멘트부터 시작하여, 갖갖이 통계를 통해 교원평가의 정당성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오토바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두 가지의 리얼리티가 충돌하며 서로의 ‘당연함’이 충돌했을 때, 아주 객관적이라 여겼던 숫자마저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용됨을 깨달았다. 당연함을 깨뜨렸던 ‘통계’와 교원 평가를 위해 사용된 통계 역시 권력을 지니며, 아이들과 학부모로 하여금 교사 평가에 대한 당위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교원평가의 결과는 해당 선생님에게 ‘%’로 전해졌다. 지금까지 교사가 아이들을 성적이라는 울타리로 등급을 매겼듯, 아이들은 교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수치화 하여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 누군가에게는 ‘교육의 질에 대한 객관적 통계’로 사용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책임 소재는 역시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는 교사에게 돌아갈 것이다.
#4. 선거와 민주주의, 그리고 교육
이번 지방선거가 치러지기 전, 한창 설문조사 전화가 올 때 나는 무심히도 끊어버렸다. 속사포처럼 쏟아 뱉는 말 속에 나의 의견이 1%라도 반영될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던 데다가, 과연 설문조사가 ‘선거’와 연계되어 어느 것 하나 좋은 쪽으로 쓰여질 수 있는가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전화 설문조사 결과와는 다른 선거 결과가 나타났다. 통계 속에는 엄청난 통계적, 수학적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표본오차 +-5%, 신뢰도 95%라는 말을 들으면, 그 설문조사는 ‘믿을 법한’ 것이 된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서울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조사를 했다고 하면 나와 같은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긴 통화를 할 수 있는 확률도 줄어들고, ‘집’전화를 받을 수 있는 확률, 사전 정보가 있어서 설문 조사 내용에 꼼꼼이 대답할 수 있는 확률들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부 조건’들은 사라진다. 나머니 5%의 결과들이 선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미국에서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모델은 국민을 의사결정에 참여시키기보다는 방관자의 역할에 묶어두는 상의하달식의 지배라는 미국식 모델이었다.
새삼스레 표본오차를 들먹이며, 설문조사의 신뢰도를 이야기하는 이윤는 선거의 ‘민주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노암 촘스키가 말하고 있듯,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꾸며진 부분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선거가 표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뽑은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능력이 뛰어날 것이며, 일을 잘 해 나갈 것임을 인정받은 것이므로 믿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5% 내외의 표본 오차를 지니고 있는 설문조사 마저도, 선거 결과를 뒤집고 있다. 우리는 과연 선거의 결과를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선거에서는 ‘거부’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기권은 우리 사회에서는 열외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불참석으로 해석하지 않는가!) 그들이 제시한 방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라도 택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선거에서는 다른 이에 비해 1%라도 높은 표를 얻었다면 무조건 당선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적’ 절차인 ‘다수결’의 원칙을 표방하는 예이다. 지금의 선거는 많은 이들의 의견을 거쳐 만들어진 구조나 규칙이 아니라,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당연히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결론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더불어 선거에서 이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입김(의사결정 권한)에 따라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생겨나는 것이다.
경남 도지사가 ‘무소속’ 후보가 된 후로, 경남 지역의 많은 이들이 이야기했다. 4대강 반대하겠구만, 예산도 못 얻겠구만. 하는 식의 대화들. 이것이 과연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가 확보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국민들에 의해 뽑은 정치인은 국민의 뜻을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지만, 현재의 구조로서는 국민들에 의해 뽑힌 정치인은 그 사람의 의견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피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다수의 국민들은(혹은 소수의 힘을 가진 국민들은) 힘있는 정치인의 의견을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거나, 소수를 배려하거나 하는 과정이 어느 정당에 뿌리박혀 있는가? 아직까지 우리에겐 ‘기권도 권리임’을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 틀 안에서라도 억지로 ‘투표’에 참여하면서 제한적으로나마 민주주의에 대한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꾸고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나라의 지배 아래 학교에 입학하여야만 하고, 학교의 교육과정을 준수해야만 하며, 그 결과에 따라 졸업장을 받고 상급학교로 진학하며, 그 결과들이 합쳐져 ‘취업’을 하게 된다. 아이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학교는 민주주의 이념을 실천하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고, 우리 사회가 민주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거도, 아이들의 머리길이도, 학업성취도 평가도,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길들여지고 있지만 말이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내 귀에는 ‘정답과 오답’으로 나누어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지, 그건 아니지로 나누어진 수업에 흐르는 대화 속에서 그 두 대답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는가.
#5. 천안함 사건과 근조리본, 미디어
자신의 분야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그것을 사회와 인간을 위해서 확대하지 못할 때 그는 지식인이아니라, 지식 전문가이다.
이 글을 볼 때마다, 나는 여전히 교육자가 아닌 교육 전문가로서 서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사회에 대한 판단 없이, 도덕적인 무책임감을 가지고 있을 때, 혹은 집권 세력의 입맛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 모양새는 전문 지식인일 뿐이라는 것. 특히나, 언론과 교육부과 총괄하는 어떠한 일들 (그것이 설령 개인적 의사와 무관한 것일지라도)에 대해서는 나의 의견을 펼쳐내지 못하고 있다. 그와 관련한 사건은 천안함 사건이다.
마음이 아픈 일임에는 틀림없다. 젊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울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그들의 죽음을 진정 위로했는가.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이들은 수업 시간마다 말한다.
- 선생님, 전쟁 일어나는 거에요?
아이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전쟁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철없는 소리를 한다. 학교에 오는 것보다 전쟁을 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철없다고 치부하기엔, 학교라는 곳이 너무 잔인한 곳은 아닌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천안함 사건을 통해 아이들은 ‘북한’을 적으로 여기고 있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천안함 사건’을 일으킨 범인인 ‘북한’을 적으로 매도하며, 장병들을 ‘의로운 죽음’이라 보도하고, 우리 모두를 애국자이기를 강요한다.
어느날 출근해 보니, 근조 리본이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시험을 치는 도중에도 아이들은 희생 장병들을 위해 3분 동안의 묵념을 해야 했다.
미디어와 교육이 만들어낸 힘은 무시무시했다.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 한, 우리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장병들의 죽음은 정치적인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고 어느 당에서는 ‘주적이 된 북한에 대한 정책’을 위한 근거로, 어느 당에서는 ‘국방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여당에 대한 뭇매’로 사용되었다. 아이들은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묵념하고,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 짓고, 북한에 대한 증옹심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더불어 북한에 대한 응징을 (폭력에 대한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학교가 진실로 민주적이라면, 학생들에게 실천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구태여 민주주의에 대한 상투적인 구호를 학생들에게 주입시킬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 학생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본질과 그 역할을 발견하도록 유도할 때, 진정한 학습이 있는 것이다.
학교는 신화 속에 감추어진 이념적 내용을 드러낼 수 있는 비판적 도구를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진정, ‘민주’를 목표로 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이라면,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는 사건들에서 관련성을 찾아내어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벗겨줄 비판적 도구를 학생들에게 안겨줄 수 있어야 하지만 하나의 결론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우리 군의 미흡한 대처, 허술한 관리 체계, 더 넓게는 북한과의 관계 두절에서 오는 냉전 상태의 심각성 등이 모조리 빠져 있고, 오로지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슬픔’과 ‘애국’심이 강조될 뿐이었다. 아이들은 매스미디어를 ‘신뢰’하고 있으며, 자유롭다고 여기는 인터넷에서 오히려 ‘조작되는’ 여론을 신봉하기도 하며, 알게 모르게 지배세력의 논리에 젖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학교와 교사가 거기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6. 거짓을 가르치는 교육의 이면을 벗기며, 한 학기를 되돌아보다.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가 매스미디어나 책을 접했던 ‘착한 사회’의 모습 이면에 숨겨져 있는 너무도 많은 ‘악’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어차피 변하지도 못할 것, 변하게 하지도 못할 것을 왜 이렇게 이야기 할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되새겨보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 주위에서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고 있는 무자비한 폭력들과 억압들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교육 심리 시간에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비의 날개짓(도대체 이 문제들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의 근원지를 되새겨보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금 나를 되돌아본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제 상황들은 ‘세계의 상황’에 비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나, 학교라는 틀 속에 갇혀 지내며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우치게 만들었다.
교육 심리 첫 시간을 떠올려본다. 우리는 ‘학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학습을 요소로, 분석으로 보고 있는 우리의 수업. 개인의 능력 신장이 목표라고 하지만, ‘평가’라는 일관적 잣대가 존재하는 이상, 개인의 능력 신장을 뒷전이고 ‘기준’에 맞추기 위한 애씀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는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우리의 수업을 되새겨본다. 행동주의와 인지주의의 맹점을 논하고, 우리의 이야기가 사회,문화,역사적 접근이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했다. 단순히 개인의 책임으로 이야기 되었던 것들이(학교폭력, 등교거부, 성폭력, 학습부진 등) 사회 제도 속에서 발현된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가 개인의 노력 부족이라고만 여기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일들이 사실은 지배계층에 의해 가려진 사회구조적 문제였음을, 언어를 통해서, 고양 최씨를 통해서, 오토바이 이야기를 통해서, 디나와 민디의 선생님을 통해서 새로이 알게 된 것이다.
‘교원평가,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든 것들이, ‘아이들’과 ‘교육’으로 귀결되고 있지만 익히 알아왔던 관점은 아니었다. 매번 수업 시간을 통해서, 과제는 나로 하여금 눈을 뜨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도 모른 채 나를 감싸고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사회이다. 여지껏 ‘왜?’에 대한 질문은 내 삶에서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비겁한 변명을 하자면, 굳이 ‘답’이 나오지도 않을 문제에 ‘왜’라는 질문을 하며 매달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며 몸부림을 치는 쪽과 받아들이기만 하는 쪽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나를 대화 속으로 끌고 들어가게끔 만든 수업은 솔직히 때로는 긴장되었으나(나는 여전히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모범생의 틀 안에 갇혀 있었으므로), 재미있었다. 내가 느낀 재미는웃김, 덜 졸림의 수준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나의 생활에 대해서 하나씩 ‘깨어있도록’만드는 깨우침의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옷을 입는다. ‘안타깝게도’ 학교에서는 학교의 규율과 통제를 깨뜨릴만한 ‘변신’을 시도하지 못했지만, 아이들과의 수업에서 나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중이다. 수업의 주인은 어느 한 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조금씩이나마 깨우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교육 심리 수업이 그러했듯, 내가 그 수업의 맥락 속에서 ‘생각’하거나 ‘대화’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도 깨우칠 수도 없다. 나의 목소리는, 순수한 나의 목소리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단, ‘받아들이기’만 하던 나의 목소리를 나의 내면과 생활과 섞어서 새로이 낼 수 있다면 나의 삶의 방식은 변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안다’는 것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큰 힘을 가지지는 못할 지라도, ‘앎’을 통해서 제대로 된 ‘삶’을 해 나가려는 마음가짐이 있는 한, 사회는 조금씩 변화하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다시, 되새기는 말.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읽어준 이 간결한 글만큼 지식인의 단호한 자세를 피력한 글을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p52). |
‘속내’를 감춘 채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려는 교육의, 사회의 어두운 힘을 닫고, 아이들을 만나는 새로운 눈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수업을 통해 나는 새로운 눈을 얻는 행운을 얻었다고 믿는다. 적어도 앞으로의 나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입을 다물고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한 학기동안, 좋은 강의로 만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