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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들은 강의 내용을 적어 봅니다. 물론 일목요연하지 않을 겁니다.
각 자 들은 내용을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차이
서양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은 분리될 수 있는 개념. 그러나 동양에서는 실천이 확보되지 않은 이론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 지식을 가진 자가 정치권력을 잡는 것은 동아시아 정서로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폴리페서의 문
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폴리페서가 가지는 정치 지향성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겠다.
# 논리학과 철학이 '수사학'을 버리는 순간 천박해진다. 말은 상대방에게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맘을 전달'하는 것이
다.
# 책익는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노자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 것은 각 자의 삶이 견디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
는가? 이제는 말하고 싶고 듣고 싶은데 그 수단인 언어가 잡히지 않아서가 아니겠는가! 그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 공부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토론을 할 때, 이런 이론 저런 이론이야기 하면서 장단점을 구구절절 이야기 하다가 결국 현상태를 유지하자고 하는
것은 돈 받고 이야기 하거나 모르거나 둘 중에 하나고, 이해하기 쉽게 통계자료 준비해 가면서 설득력 있게 구체적으
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믿어도 된다.
# 동양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사실 고전 원본을 잘 읽지 못한다고 한다. 대학,논어,맹자 정도나 읽을까? 그외 것은 중
국 학자들이 쓴 글을 읽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한문을 익히고 배운다는 것을 철학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문과
경구들이 내포하는 사회 역사적 의미를 알게 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6장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골짜기의 신령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빈이라 하는데 이 현빈의 문은 일컬어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
면면이 이어지는 것이 마치 있는 듯하니 그것을 써도 힘겹지 않다.
1. 곡신불사(谷神不死),현빈(玄牝)
이 장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많이 인용.현빈이 당시에 제사에 올리는 암컷소로 신령스러움을 상징.이를 서양학자들이
mysterious feminity로 해석. 세상만물의 신령스러운 운행이 영원하고 그것이 여성성으로 상징화 되니 페미니스트들이 주목할 수 밖에. 지모신을 숭배하고 가이아를 숭배하듯이 노자도 현빈을 모셨다는 이야기. 사실 동양고전에서 음양의 이치를 이야기 할 때 양은 군자요,대인배요,남자로 주로 긍정적으로 쓰였고 음은 신하요,소인배요,여자로 부정적으로 쓰였다. 주역이 그렇고 논어가 그렇다. 그러나 노자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에서 교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비평적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말씀을 하셨다. 무엇이냐면.. 그렇다면 이런 여성학자들의 주장이 맞냐? 현빈은 하나의 실체나 실체의 상징으로 보기 보다는 '그냥 좋다'로 해석하는게 옳다. 여성학자들의 이러한 해석은 왜곡와 오해를 수반하는 것이기에 틀리다. 그러나 꼭 틀리다고 또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시각으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헌상의 전거가 있냐 없냐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논쟁이 발생한 싯점을 생각하고 철학적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고전을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 이야기 하신다. 교수님의 이러한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각 자 고민할 문제라 생각된다.
또한 곡신을 도올 김용옥은 god of valley으로 해석. 이는 기독교적 유일신을 염두에 두고 해석한 것으로 도올의 강의가 노자 vs 기독교의 비교에 중점을 둔 연유로 본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해석.
神은 하나의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령스럽다 정도의 수사학으로 생각하면 된다. 옛 사람들이 신령스럽다고 하는 것은 한 겨울이 지나고 들판에 새싹이 돋고 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자연의 신비로움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근대화 되는 과정에 천박한 기독교적 사고로 필터링된 神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되어 옛날 사람들이 말한 神을 엉뚱하게 해석해 버린 것이다.
면면약존의 면면은 누에고치를 삶아서 실을 빼는 사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 실은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의 기회를 엿보는 정치꾼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청나라 초 120년을 울궈 낸 000, 박통때 김종필처럼 이해관계가 바뀌어도 오래 오래 해 먹은 2인자들의 행태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누에에서 보이지 않는 실을 뽑아내듯 존재하는 것은 힘들이지 않고 세상을 제 것으로 하는 사용을 오래 오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까놓고 통으로 해석을 하자면 정치꾼들의 면면약존하는 면모는 산골짜기에서 일어나는 사계절의 변화(운행)과 같아 느끼지 못 하는데 나중에 보면 변화됨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묘사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신령스럽고 나아가 천지만물의 뿌리로 비유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 노자책은 천박한 정치처세술로 전락한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교묘하게 고도의 철학적 수사학으로 바꿔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왠 도덕교과서?라는 이야기. (이 부분은 강의를 듣고 정리글을 쓰며 제가 소설을 좀 썼음. 정리가 아님.)
# 옛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더 사고가 단순하고 획일화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기능적 측면에서 현대인이 더 무식할 수 있다. 불을 필 때 우리는 라이터를 켜면 된다. 기술의 진보가 우리에게 불을
켤 수 있게 고민을 하게 하거나 기능을 갖추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라이터가 없었 던 옛 사람들은 자연의 도구
를 이용하여 불을 피울 줄 알았다. 기술의 진보가 현실 생활을 편리하게 했으나 획일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동양고전인 예기에는 사돈의 팔촌까지 대상에 따라 행동할 규칙을 세세히 표현했다. 현대인은? 악수만 하면 된다. 규
범세계를 뒷받침하는 정신세계가 현대인에게 더 단순화 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 死에 대한 논의
땅을 파서 사람을 꺼꾸로 묻는다는 뜻. 이는 사람이 죽으면 매장한다는 문화적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이렇게 한
문은 그 자체가 상형적 문자. 중국사람들이 상징적이고 유비적(아날로그적) 사고를 했다는 증거이다. 서양에 있어 die
란 그냥 죽었다는 것으로 풍장이든 천장이든 그 죽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적 언어이
고 서양이 논리적 사고에 익숙했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곡을 하는데 '에고~에고~'하는 장치를 만들었는데 사람이 올 때마다 진정으로 온힘으로 슬퍼하
며 곡을 하다 보면 사람이 힘이 들어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쓰러져 버리는 폐단이 생기니 그때 사람들이 모여 이 정도
로 하면 어떻겠느냐하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에고~'장치를 만든 것이다. 자고로 예라고 하는 것은 옛 사람들이 다
이러한 자기 경험(몸에 대한 경험)에 나온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또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집안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 보고 솥뚜겅을 잡아보고 장독을 둘러 보며 뭔가를 찾는 시늉을
한다거나 지붕위에 올라가 고인의 옷을 흔들며 세 번 "돌아 오시오~"하는 것을 초혼(招魂)이라 하는데 이것도 죽은 자를
더나 보내는 산 자의 슬픔과 충격을 달래는 장치라 볼 수 있다.
(내 생각: 이것이 세상이 변화하면서-집 지붕이 올라가기가 어렵게 되거나 올라갔는데 먼 산이 보이는게 아니라 앞집
담벼락이 보인다거나등등-이것을 경험하는 몸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고 이것이 절차로 명문화-규범화-되어 해야할 의
무로 되어 버리면 누군가에게는 허레허식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장례를 자기 맘대로 하는 것도 맞는
말은 아닐 터! 망자와 산자가 동시에 같이 사는 '예의 현실적 적용'를 발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서양철학에 로고스,에토스,파토스가 있는데 파토스가 바로 겪음과 감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이 영어 '-pathy'의 어
원이 된다. 바로 동양의 예라는 것이 감정의 함께 겪음을 정리해 논 거라 할 수 있다. 근데 요새 함께 겪음이란
sympathy가 '동정한다'는 부정적으로 이해되면서 empathy(공감)이란 말을 쓰는데 사실상 다 같은 말이라 할 수 있다.
# 양아치에 대한 논의
한말 황건적이 난리치고 있을 때 세사람의 영웅호걸이 이 난세를 평정하고 자 뜻을 세우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도원결의를 하는 데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유비,관우,장비다. 그러나 실제 정사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모두 다 '양아치'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그들의 직업은 '호위무사'. 소금을 운반하며 장사를 하는 상단을 호위하는 일로 입에 풀칠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일 없는 날에는 주막에 죽 치고 놀고 칼 차고 돌아 다닌 부류라는 이야기. 그들의 직업적 특성상 각 지역마다 인맥이 있었고 이를 통해 서로 정보를 주고 받고 교류를 했던 것이다. 도원결의한 후 자금과 사람을 구하는 데 있어 지나가는 상인들이 이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재화를 기부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강탈당한 것. 물론 어치피 강탈당할 것을 기부한다고 선선히 내주는 상인이 어떻게 보면 더 대단한 것이 아니겠느냐...
7장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基不自生
하늘과 땅은 오래 오래 간다. 하늘과 땅이 능히 오래 오래 갈 수 있는 까닭은 그네들이 스스로 낳지 않기 때문이니,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산다. 이러한 까닭은 성인은 자신의 몸을 뒤로 물리지만 몸이 앞서고 자신의 몸을 도외시하지만 몸이 보전된다. 그에게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부자생에서 생은 事의 의미를 갖는다. 즉,스스로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일은 사람을 부리는 것으로 사람이 움직이다보면 사단이 나고 사단이 나면 누군가 책임을 지는 '회생양'이 생긴다. 사람들이 회생양이 되지 않으려고 책임제도를 만든 거다. 그래도 사람이 오래 살려면 책임짓는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말은 기본적으로 약속(約束)을 낳기 때문이다.약속은 당근 책임을 수반하고 말이다.
교수님은 이러한 회생양이나 책임제도가 어떻게 현실에서 나타나는지 설명하는데 바로 조폭의 모습과 일부 대기업의 행태를 예로 든다. 조폭은 이렇다. 보스가 "제~담궈~"하면 행동대장이 담그고 빵에 다녀 온다. 그리고 조직의 2인자가 된다. 영화는 빵에 다녀 왔는데 보스가 배신을 때린다거나 엉뚱한 놈이 2인자가 되어 행패를 부린다거나 하면서 시작된다. 대기업 최00가 회삿돈 가지고 외국의 선물에 투자해서 손실을 보자 부장 누가 대신해서 책임을 지게 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 친구를 승진시킨다. 또 하나 예. 정치검찰. 한명숙씨를 그렇게 괴롭힌 검사가 재판에서 연거푸 졌음에도 나중에 보니 영전했다. 누가 영전시키고 누가 시켰을까? 이건 물론 추정~! 이러한 꼴딱서니를 만들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법을 공부하고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법이 바뀐다고 바뀌지 않는다는 말씀.
# 마찬가지 논리로 이00 재벌가나 이00 권력자가 벌어 들이는 돈의 액수는 그 것이 수백억이든 수천억이든 의미가 없다. 그냥 숫자 놀음인 것이다. 부의 편중과 사회 양극화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얼마까지만 해~!하고 나머지는 세금으로 내! 하는 규칙을 만들면 된다.그런데 이렇게 못 하는 것은 사람들이 힘이 없는게 아니라 '자신이 그런 자리에 오르면~'이라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각속에 우리가 살고 있으므로 안되는 것이고 이게 '신자유주의 논리'가 먹히는 이유다.
여기서 더 생각해보면 부자생이라 함은 심판자의 위치에 서 세상일을 하라는 것도 된다. 한비자의 통치론을 보면 이렇다.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두사람을 내세운다. 주장을 듣고 말한다. "그럼 니가 해 봐라!", 그리고 책임지라 한다. 그가 못 하면 죽인다. 경쟁의 논리를 내세우되 자신은 심판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부자생이 아닐까? 론스타가 외환은행의 단물을 다 빼먹고 얼마 안되는 떡고물을 내던지는 거나, 한미FTA에서 다국적 기업이나 재벌들이 한국 경제의 단물을 다 빼먹고 알량한 지원자금을 내 놓고 니들끼리 알아서 챙겨 가져라라고 하는 것이 그게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기지 않으면 죽는다거나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라는 것만 이야기 하는 처세서들만 주구장창 읽어 대는-되지도 않는 전의를 불태우면 살고 있는- 중생은 아닌지. 무슨 무슨 스펙을 쌓는다고 이렇게 허벌나게 살아 왔어도 결국 나의 위치는 비정규직 88만원 세대의 위치라면 이건 분명 잘못돼도 많이 잘못된 건 아닌지..
송나라의 과거제도를 이야기 하면서 심판자로서 황권을 어떻게 강화시켰는지를 알아 보자.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절도사 출신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처럼 북방오랑캐를 토벌하러 가다가 역모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다. 정권을 잡은 후 조광윤은 자신의 역모를 부추킨 군장들을 다 제거한다. 역모를 꾀한 인물이면 자신에게도 역모를 일을 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제거한 부장들 자리에 문관들을 배치했고 문에 의한 통치를 표방하였다. 군인들이 움직이려면 문관들의 도장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문관에 의한 통치를 안착화 시키기 위해 '과거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과거제도는 사람들에게 출세하기위해 칼을 버리고 책을 들게 했다. 사람들은 동일한 교과서를 가지고 같은 개념을 가지고 피 터지게 싸우게 되니-한마디로 협소한 상상력에 머물게 되고 경쟁이 치열해 지니- 심판을 보는 황제의 권력은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향시와 성시,그리고 전시를 거쳐 황제앞에서 보는 시험(이 제도의 이름은 모르겠다)을 거쳐 급제한 사람과 황제는 제자와 스승의 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물론 역사적 현실은 황제 뒤에 있는 당파들의 권력투쟁과 분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역으로 심판관의 아래에 있으면서 경쟁하는 무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심판관이 되면 되지.아니면 어차피 세상은 먹이사슬로 이루어 진 것. 해도 안 되니 내 위치에 만족하고 살 것. 아니면 치열한 경쟁속에서 하나둘만 살아 남는 승자독식의 사회시스템을 개혁하는데 동참하는 것. 이도 물론 각 자가 판단할 일이다.
# 송나라가 문치주의로 가면서 문약해졌다고 주장하는 것에 한마디. 송이 외부에서 쳐들어 오는 침략에 조공체제를 갖추어 전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남송의 물산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전쟁을 치루지 않고 사회를 보존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북방 이민족도 침략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물산이 빈곤하여 먹을 것이 없는 관계로 또한 그로 말미암은 내부의 원성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그러한 것이다. 그들의 기질이 애초부터 호전성이 강한고 야만적이여서가 아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한 사회에서 부의 편중은 올바르지 않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항의에 총칼로 누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더욱이 법과 제도로 교묘하게 그들의 저항을 억누르는 것은 치사하다. 송나라가 했듯이 나눔으로서 부자들이 자기 것을 유지할 일이다. 물론 가지지 못한 자들이 부자의 자비만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긴 하다.
# 국가와 민족 vs 사회와 공동체
교수님의 갓길로 세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당신의 사회관이랄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언급하신 것이여서 기록한다. 우리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어 얼마나 많은 회생과 불이익을 당하였던가! 사실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윤리나 가치관 만큼 반대적인게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신자유주의 논리가 판치는 이 세상은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그렇다. 경쟁을 이야기할 때는 자본의 논리로 다가서지만 복지와 국제정세를 논할 때는 국가와 민족을 앞에 둔다. 앞은 긍정의 논리로 뒤는 부정의 논리로 사용한다. 나도 개인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 담론을 거부하고 싶다.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시회,공동체의 삶을 중시하고 싶다. 이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벌어 지고 있는 차별등, 다문화가정의 문제,독거노인,장애우들의 문제,학생들의 왕따,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이 것은 경제영역의 문제가 아니다)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로서의 책익는 마을을 생각하고 여기에서 권력을 누리고 찾을 것이 아니라 각 자의 삶의 지혜를 나눌 일이다. 집단지성으로 갈 일이고 각 자의 삶의 발전에 영양분을 얻어갈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님의 국가와 민족에 앞서 사회와 공동체를 우선하는 말씀은 나에게도 좋은 영감을 주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지역은 사회와 공동체의 시각으로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이 바뀌어야 지역이 바뀌는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할 때 우리 삶과 생활을 바꾸는 정치의 담론은 중앙에서 생산될 수 밖에 없다. 중앙의 논리는가 결국 국가와 민족을 사고의 단위로 한다면 지역에 사는 우리도 그렇게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지역의 인물이 없다. 국회의원 후보도 지역에서 크고 자란 이가 못 되고 중앙에서 다들 한가닥 했던 지역출신 인사들이 한다. 중앙의 논리와 정서로 빽으로 학력과 경력으로 지역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실망스런 일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좀 더 나은 인물을 걸러 내고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가까이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멀리 하지도 말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각자의 삶에서 열심히 살 일이다. 그것으로 스스로 위로받을 일이다.
8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 일을 잘하니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니
故幾於道
그래서 도에 가깝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政善治
事善能
動善時
거할 때는 땅처럼 낮은 데에 처하는 것을 잘 하고
마음 쓸 때는 그윽하고 깊게 하는 것을 잘 하고
사물과 더불어 할 때는 어질게 하는 것을 잘 하고
말할 때에는 믿음직스럽게 하는 것을 잘 하고
바로 잡을 때에는 다스리는 것을 잘 하고
일을 할 때에는 능숙함을 펼치는 것을 잘 하고
움직일 때에는 때를 맞추는 일을 잘 한다.
夫唯不爭 故無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으니 이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상선약수 고기어도는 도가의 경구이지만 과거시험에 제일 많이 나온 문제였다고 한다. 실제 유학이 그렇게 경직된 학문이 아니였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아는 유학은 조선 숙종대이후 송시열로 상징되는 완고한 유학의 전통과 식민지 시대에 굴곡된 교육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실제로 유학은 유연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옛 선현들은 물의 흐름을 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한 것이다. 물은 골짜기에서 생겨 작은 바위는 넘고 큰 바위는 돌아 가고 절벽에서 떨어져 암석을 뚫고 그 밑으로 스며들어 흘러가고 큰 물을 이루고 결국에는 가장 낮은 데 있는 대양에 닿는다. 그렇게 사는 삶이 상선이고 그 구체적 행태가 뒤에 열거한 그러한 것이다.
여선인에서 仁을 이야기하자면 노자는 인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으로 긍정하지도 않을 터. 그럼 뭐냐. 앞뒤가 안 맞는데. 교수님은 도덕경은 전체체계로 읽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단구단구 하나하나로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삶-즉.지금,여기-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해야 한다.
信자를 해석할 때 사람과 말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사람의 말이 실천이 될 때에야 믿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믿음이 없다면 관계는 끊어지는 것이다.
무취에서 취(허물)취는 일종의 혹같은 것. 그것도 내 안에 앙금이 남아 있는 것(恥)말고 다른 사람 맘속에 앙금을 남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섟지 말고 책임질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9장
持而 ㅁ 之, 不如其已
가지고 있으면서 더 채우고자 하는 것은 그만 두느니만 못 하다.
단而銳之, 不可長保
다듬어서 그것을 더 날카롭게 하면 오래도록 보전할 수 없다
金玉滿堂 莫之能守
금과 옥이 집안을 가득해도 능히 그것을 지킬 수 가 없고
富貴而驕, 自遺其ㅁ
부유하고 귀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
功遂身退, 天之道
공이 이루어지면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이 하늘의 도이니
출판사들이 돈을 많이 번 것은 노무현정권때. 파주 출판단지를 만들어 주면서 각 출판사들이 몇 십억대의 건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판사들이 자기 역량대로 책을 내고 팔고 했으면 망하지 않는데 한 번 대박을 치면 사업을 확장해서 재정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중국의 전국시대에도 비일비재 했을 거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첫번째 경구는 바로 그러한 것을 빗대는 것일 것이다.
교수님은 청담과 죽림칠현에 대해 이야기 하셨는데 이것이 옆길인지 줏길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용이 하도 흥미진진해서 옮겨 본다. 위진시대 청담(淸談)이라 하는 것이 있었는데 영어로 pure metaphysiology. 고준담론의 철학적 용어로 느껴지는데 이는 20세기 중국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고 실제론 그러한 것이 아니였다 한다.
청담은 청언(淸言)에서 유래한 것인데 淸流들의 말이라는 뜻이다. 청류는 관료후보생인 유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일종의 비판적 지식인들이었다. 이에 대응한 탁류는 중앙권력에 머물고 있는 환관,외척세력등을 지칭한다. 위나라시절에는 구품중정법이라는 일종의 인재등용제도가 있었는데 선발관이 지역의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화두 하나를 던진다. 이에 알맞게 잘 대응하여 말한 이가 있으면 그를 중앙 정계에 발탁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오고 간 대화를 청담이라는 것이다. 즉 청담은 본질상 수험생입장에서 정부에 혹은 대기업에 취직할려고 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든 것이 위나라 재상 하안과 도덕경 주석자 왕필의 대화. 하안이 성인들에게는 감정이 없다라고 이야기 하니 대부분은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불세출의 천재 소년 왕필이 對하여 말하기를 성인은 감정이 없는게 아니라 이를 억제하고 인의를 펼치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로 인해 왕필은 당근 발탁~!
죽림칠현에 대해서도 아주 재미있게 말씀하셨는데..이 것은 누가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다..에고..헥헥~~~
한자 議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의란 옛날 황궁에서 6조 관아가 있는 외관에서 정책을 만들고 황궁에 보고하기 전에 각 관아의 행정관들이 모여 황제께 올릴 정책을 심의하고 토론하는 것을 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연원을 이해하는 것이여서 도움이 되었는데 한자를 보니 義를 말(言)하는 것이니 취지는 좋은 것 같다.ㅎㅎ
是非도 행정적 용어였다고 한다. 정책을 행하매 그것을 했으면 공문에 是라 썼고 못 했으면 非했다 한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 첫번째 경구에 대한 왕필의 해석은 전혀 딴 이야기라고 한다. 지란 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원문과는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모든 주석은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기에 이것이 나쁘다고 볼 수 는 없는 것이다. 또한 주석이 그럴 듯하게 원문과 비슷해야 새로운 말을 끼어 넣을 여지가 생기기도 한다고 한다. 하긴 베끼는 주석이 주석인가? 맞는 말이다.
경구의 마지막을 이루는 功遂身退, 天之道는 황제의 지위,심판관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몸을 낮추고 뒤로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노자철학이 중시하는 화두라 한다. 그러나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우리 시대에는 빼어난 사람이 자꾸 나서줘야 한다. 그러나 본인이 그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것을 주변 개인이 쉽게 할 수는 없다. ㄱ,래서 우리시대 언론이 해 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하고 있다.
첫댓글 헉!헉! 읽기만해도 숨이 가뿐데,,,,우리에 원장님 많은 내용 정리하랴 올리랴 그 성실함에 박수를 보내며 생각에 머물고 실천하지 않는 나 자신을 반성해봅니다^^
세상에나! 들으면서 필기까지 이렇게 열심히 하시고 또 정리까지 하시니.....
전 듣는 일만으로도 바빴는데...
그래서 후기도 못 올리고 있는데...
허허~~ 읽는디 30분 걸렸으니 쓰는디는? 여전히 달인자릴 지키구 계시네...
허어~
이것이 사람이여~ 구신이여
가히 녹신이라 부를만 허구만
녹음기를 관장하는 신
잘 읽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저도 강의 쫓아가기 바빠서.....
진짜네요.. 필기의 달인! 놀랍습니다^^
죽림칠현에 관한 내용은 안쌤이 정리해 주시면 정말~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