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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고라운드
어느 날 그는 반듯하게 보이는 길에서 어이없이 넘어졌다. 깨진 무릎을
부여안고 속상해서 또 창피해서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 길은 가장
빠르고 편한 길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소문과는 다르게 뾰족하고 날카
로운 틈새뿐이었다. 그의 눈에 성한 보도블록은 단 한 개도 보이지 않았으
니까.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다짐하면서 그는 그 길을 떠났다. 밑창이 두
꺼운 군화를 찾아 신고 용감하게 지나가 보려는 시도는 하지 못한 채......
망향원에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원오빠가 꿈속에 연이어 나타났다.
첫 꿈에서 그는 단아한 한복 차림의 엄마와 대청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엄
마의 올린머리, 옅은 보라색 모시적삼과 풀 먹여 부풀린 치마가 우아했다.
오빠는 핼쑥하고 피곤한 표정에 눈에 익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리본이 달린 핑크빛 깜찍한 구두를 신고 그 장면에 나타난 것을 미루어 짐
작해 보니 오빠는 분명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유학을 가겠노라는
오빠와 말리려는 엄마 사이의 팽팽한 대결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일찍 돌
아가신 우리 집은 외가에서 받는 생활비가 전부여서 오빠를 유학 보낼 형
편은 못 되었다. 쇼윈도 앞에서 오랫동안 바라봤던 그 구두와 오빠의 뿔테
안경을 사느라 그 달치 월급이 뭉텅 잘려나갔던 기억이 났다. 잠에서 깨었
을 때 등줄기가 서늘했다.
다음은 엄마가 형제들에게 사과를 나눠 주는 꿈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였는지 오빠는 까까머리 소년이었는데 형제 모두가 똑같이 사과 한 개
씩을 받자 몹시 화가 난 듯했다. 오빠는 집안의 장남, 옆집 순덕오빠처럼
더 달라고 엄마한테 대드는 것 같았다. 엄마는 바구니를 옆에 치워놓고서
모른 체한다. 오빠는 발딱 일어나 사과 바구니를 발로 걷어찼다.
또 다른 꿈은 돌이키기에도 끔찍하다. 역시 비슷한 어린 시절, 저녁 어스
름이 깔릴 즈음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재미있게 놀고 돌아오는 길
이라 기분이 고조되어 대문을 발로 뻥 차고 기세 좋게 들어왔다.
“야, 지금이 몇 시야?”
고함소리와 함께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오빠가 나를 때렸다. 그것도 친
구 앞에서 뺨을…… 믿어지지 않았다. 오빠를 죽을 때까지 미워하겠다고
울면서 소리쳤다. 그 친구가 누구였더라.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정남이 살금
살금 문 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정남이. 내 초등학교 때부터의 단짝.
그녀와도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져 있었다.
오빠가 등장하는 꿈을 연이어 꾸면서 나는 그가 20여 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 동안 어떻게 가족과 떨어져 살았을까, 싶은 의문에 안타까워지기 시
작했다. 혹시 내가 죽을 때까지 증오한다고 해서? 그건 아니겠지. 그런 일
은 딱 한 번뿐이었는데. 아주 어렸을 때였고.
물론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연년생 오누이로 누구보다
그와 함께 한 시간이 많은 나로서는 전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뗄 처지도 아
니었다.
망향원에 혼자 다녀왔다. 엄마 곁에 바싹 붙어서 젊은 모습의 오빠가 행
복한 미소를 띠고 있다. 대학 졸업식 때의 사진이다. 상처를 받아 가슴 아
파하면서도 엄마 사랑을 받고 싶어 했던 오빠가 왜 다시는 안 오겠다고 엄
마 곁을 떠나갔을까. 오빠가 더욱 그립다. 그가 귀국한 후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막 운명을 하신 엄마 때문에 오빠한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오빠
자신도 혼절할 정도였으니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오빠를 챙길 걸. 그렇게 슬퍼할 줄은 미처 몰랐다. 두 언니는 그런 오빠를
두고 입술을 삐죽였다. 엄마가 그렇게 그리웠으면 왜 진작 귀국해서 엄마
옆에 머물지 못했냐고 다그치기까지 했다. 그녀들을 보면 신데렐라의 배
다른 언니들 같다.
집에 돌아와 여전히 오빠를 생각하고 있을 때, 모르는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같으면 그대로 수신 거부를 눌렀을 터인데 전화기에다 대뜸“오빠?”
라고 불렀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저쪽에서“여보세요?”하는 소리
가 났을 때에야 그만 실소를 하고 끊으려고 했는데 놀랍게도“나 정남이
야.”라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잠시 믿어지지 않았다. 꿈이 생각났다.
오빠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어둠 속에 숨어들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
다.
“나, 정남이라구……너 혹시 날 잊어버린거야?”
전화선 저 쪽에서 정남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렸는데도 잠시 멍하니 있었
다. 참 얼마만인가?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후 내내 기다려 왔던 전화였다.
너무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호리병 속의 괴물처럼 그만 심술이 나고 말았
다.
“뭣 땜에 전화한 건데……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대?”
느적느적 입을 열기는 했지만 자꾸 심사가 꼬였다. 그래, 그렇게 오랫동
안 모른 척 했으면 계속 모르고 살지 뭐. 새삼 전화는 왜 하는데…… 싶었
다.
10년쯤 전 어느 날, 정남은 지영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선
언했다. 지영은 결혼 한지 여러 해 만에 어렵사리 얻은 정남의 늦둥이 딸,
유행에 민감하지는 않더라도 남들 하는 만큼은 따라하고서야 직성이 풀리
던 정남이 그때까지 그 일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씩씩한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고 나는 부러워하면서 듣고만 있었
다. 그때는 한창 기러기아빠가 유행이었고 일찍부터 미국에 가서 정착한
두 언니가 있었으니 모든 환경이 그녀에게 미국행을 권하는 것과 다름없
었다. 나? 내게는 모든 게 생소했다. 언니들은 여학교 선생님, 내 주변에
미국과 관계 있는 사람을 들라면 오래 전에 유학 가서 여전히 박사학위 과
정에 머물러 있던 오빠뿐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교육을 시도하기에는 내
아이들은 너무나 커버렸다.
중학교 2학년짜리 외동딸의 아빠인 정남의 남편은 여의도서 잘 나가는
치과 의사였고 내 쪽은 두 고등학생의 아버지로 겉늙은, 명퇴자 명단이라
도 도는 날이면 한없이 작아지는 중소기업의 무기력한 샐러리맨…… 그렇
게 우리들은 헤어졌다.
“채원아. 야, 미안하다. 그만 마음 풀고…… 너, 나 만나기 싫은 거야?”
정남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고집피울 수가 없었다.
“그래 어디서 만날 건데?”
우리는 만날 장소를 정하느라 한참이나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만날
만한 곳이 금방 생각나지 않았다. 정남이 S 백화점의 이름을 댔다. 미국에
서 한국 드라마를 줄곧 보고 있었는데 단골로 그 백화점이 나온다는 것이
다.
“거긴 마누라와 애인이 딱 마주치는 곳이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딴맘
먹고 만나는 그런 곳이지.”
드라마와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시간이 좀 어긋
나도 만나기는 좋은 곳일 것 같았다.
“여긴 8층이야. 엘리베이터가 붐비니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
라와.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백화점에 도착해서 통화했을 때, 정남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마
음이 설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화점은 한창 세일 중이었다. 수많은 POP광고가 넓은 공간을 가득 채
우고 있었다. 층마다 밝고 화려한 색깔의 물건들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백
화점에 자주 오는 편은 아니지만 마음이 울적할 때 화려한 분위기는 한결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 잘한것같아. 새로운물
건들, 새 것이 주는 깨끗함이 풀 먹여 빳빳한 칼라를 댄 여학교 때 교복을
연상시켰다. 교복이라…… 요즘 젊은이들이 교복의 청순함을 알기나 할
까.
“백화점의 캐치프레이즈가 뭔지 알지? 영원한 젊음이야. 그래서 사람들
이 백화점을 좋아하는 거야.”
옛날 함께 쇼핑할 때 정남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
어도 백화점은 여전히 젊은 것을 보니 그녀의 이야기가 틀리지 않다.
천천히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쪽에서 손을 흔드는 정남이 보인다. 10
년이 무색하게 금방 알아보겠다. 머리를 풍성하게 부풀리고 빨간 원피스
를 입고 한 팔엔 베이지색 코트를 얌전하게 걸쳤다.
“채원아, 어서 와!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
정남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는 나를 서둘러 껴안을 태세다. 나는 좋
아하던 옛날 영화‘초원의 빛’에서, 나탈리 우드가 오랜만에 만나는 여자
친구와 하던 대로 손을 잡고 빙빙 돌고 싶었는데…… 둘의 마음이 달랐던
때문에, 우린 이럭저럭 껴안지도 손잡고 돌지도 못하고 말았다.
“웬 검은 옷? 너 혹시......?”
어색해 하던 그녀가 화제를 돌린다. 하긴 정남은 언제나 눈썰미가 있었
다.
“어떻게 알았어? 돌아가신 지가 얼마 안 되어서…… ”
정남은 어머니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물었고 대답해 주면서 나
는 다시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긴다.
“그 동안 고생했구나. 같이 있어 주지도 못했네.”
정남이 내 손을 꼭 잡아준다. 먹먹하다. 정남어머니는 훨씬 전에 돌아가
셨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어머니를 회상하고 있다.
“그렇게 힘든 일 치르고도 얼굴이 옛날 그대로네. 난 늙었지?”
정남이 손을 잡은 채 밝게 표정을 바꾸면서 내 얼굴을 이리 저리 뜯어본
다.
‘십 년 세월인데 내 얼굴이라고 그냥 지나칠 리야 있겠니? 이 친구야.’
생각하며,“ 너도옛날이랑똑같아.”라고말해준다. 사실이다. 아니정남
은 더 젊어진 것 같다. 내 눈이 늙어서 그런가. 그 말을 하니,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음식점 같은 데서“옛날하고 똑같아.”를 외치는 동창생 할머니들이
된 기분이다.
백화점 8층 식당가, 한식당 식탁에 마주앉아 다시금 얼굴을 찬찬히 바라
본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얼굴이 눈앞에 있다. 내 얼굴만큼이나 오랫동안
친숙했던 얼굴이다. 정남을 처음 만난 것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첫 날부터
짝꿍이 되었다. 운이 좋아 5학년까지 내리 3년을 같은 반으로 배정 받았
다. 같은 반 안에서도 떨어지기 싫어 매번 짝으로 붙어있었다. 우리가 먼저
나란히 앉아 버티면 담임선생님조차 어쩌지 못했다. 그렇게 초등학교에서
찰떡 우정을 쌓은 두 사람이다. 중학교 때 다른 학교로 갈라진 후 대학까지
달랐지만 서로의 집으로 다니며 꾸준히 만났다. 그렇듯 다정한 친구였는
데 그녀가 미국 간 후에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
식당에서 함께 비빔밥을 먹고 찻집으로 옮겨가는 중에 결국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말았다.
“미국 가서 진작 전화라도 해줬으면 이렇게 연락 끊기지도 않았을 거 아
냐?”
정남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았다. 움찔하고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아, 미안, 미안. 처음 3년 정말 애먹었어. 영어가 되니? 언니들 뒤를 쫓
아다니기만도 얼마나 바빴는지…… 집도 구해야지. 차도 적당한 걸로 사
야지. 무엇보다 지영이 좋은 학교 넣어야지.
그러다 보니 세월이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가더라. 그 때쯤 내가 너한테
전화했을 거야. 근데 번호가 바뀌었더라구.”
“우리나라 휴대폰 시장이 혼란스러웠잖아. 그러니 내 번호가 그대로 있
을 리가 있나?”
“그랬었구나.”
“새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응, 그건…… 너희 여고 동창회에 물어봤다.”
“아니 뭐라고?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네.”
나는 좀 당황스럽다. 그런 방법이라면 나도 정남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
었을 텐데…… 그런데 개인정보를 그렇게 쉽게 알려주는 것이 맞나? 하긴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누구든지 상대방에 대해서 알려고 들면 알
수 있는 정보사회 아닌가. 문제는 알고 싶고,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만 말이다.
찻집에 들어가 옛날처럼 같은 쪽에 나란히 앉아서 주문했다.
“그래…… 넌 이제 영구 귀국한 거니?”
“아니, 직장에서 휴가 받아서 온 거야.”
“그럼 언제 가는데?”
정남이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갑자기 서운해진다.
“좀 있다가 가지 뭐. 그런데 어머님 어디로 모셨니?”
“왜?”
“나한테 얼마나 잘 해 주셨니? 한 번 뵈러 가고 싶어서......”
“고맙지만 괜찮아. 먼 곳인 걸.”
“엄마 뵈러 미국서 너의 오빠도 왔었니?”
“그럼, 왔었지. 아들인데……”
“장례식 끝나고 오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셨니?”
계속 묻는다.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정남을 노려본다.
누가 오빠에 대해 물으면 정말 속이 상한다. 정남이 뭘 알고 묻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와 도, 누구와도, 오빠에 대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내
기분을 그녀도 눈치 챈 모양이다. 나를 잠시 바라본 다음 다른 이야기로 넘
어간다.
며칠이 지나 정남에게서 연락이 왔다. 광화문 P호텔로 오란다. 그곳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알려준 방의 벨을 누르자 기다린 듯 정남이 문을 열
어준다. 그녀는 부드러워 보이는 분홍색 목욕가운을 입고 있다. 두 팔을
펴고 나를 제 가슴에 껴안는다. 정남의 품에서 빠져나와 이곳저곳을 둘러
본다. 입구의 옷장을 여니 기내용 빨간색 트렁크가 보였고 서너 벌의 여자
옷이 옷걸이에 걸려 있을 뿐, 남자 용품은 아무 것도 없다.
“박 정남, 짐이 겨우 이것뿐야? 지영아빠는?”
“지영아빠와는 미국 가기 전부터 문제가 있었어. 너한테 차마 말을 못
했지만 사실은 이혼 후 미국에 간 거야.”
“이혼이라고?”어이가 없다.
“그걸 감추려고 연락 끊은 거니? 너 내 친구 맞아? 그래서 그 말 하려고
날여기오란거니? 아님무슨말을더하려고?”
“나, 여러 가지로 미안해. 너하고 많은 얘길 하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
어. 신뢰하지 못하는 것 이해하지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믿어줘야 해.”
“네 이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뭘로 날 또 놀래키려는 건데?”
“미국에서 동원오빠 만난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동원오빠라고?”
나는 무엇으로 한 방 세게 맞은 것 같다. 동원오빠라고? 네가 어떻게?
정남이 놀란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지난 얘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한 5년쯤 전이었어.”
하얀 솜사탕구름이 서너 조각 떠 있는 새파란 여름 하늘, 한국의 초여름
날씨가 그랬었지. 바람에 흠씬 온몸을 내맡기고 싶을 만큼 대기는 달콤하
고 고혹적이다. 승용차와 밴과 트럭 등 갖가지 색깔과 모양의 자동차를 뱉
어내는 흰색깔의 카페리선은 힘차게 바닷물을 토해내는 하얀 고래 같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의 크고 작은 요트들, 바다에선 흰색깔
이 매력적인지 모두가 흰색이다. 길을 걷는 활기찬 모습의 어른들, 아이
들. 정남과 지영은 보행자통로로 먼저 배에서 내려 항구의 풍경을 감상하
는 중이다. 지영의 남자 친구가 초대해 도착한 미국 동부의 휴양지 마사스
빈야드섬, 미국의 대통령도 가끔 휴가를 보낸다는 이 섬은 선착장에서부
터 풍요와 여유로움이 넘쳐흐른다. 마중 나올 차를 기다리며 선착장 주변
을 걸었다.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여인, 높은 웃음을 터뜨리는 소녀들을 지나
치며 걷다가 정남은 조그만 회전목마집을 발견한다.
“신기하네요. 한국에서는 놀이공원에만 이런 회전목마가 있는데……”
지영이 정문 위 큰 간판 속에 그려진 회전목마 그림을 올려다본다. 흰 바
탕의 넓은 간판에는 칠이 약간 벗겨진 채로 말 위에 올라타 기둥을 잡고 포
즈를 취한 소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림 오른쪽 끝에는 조그맣게‘마
사의 메리고라운드’라는 가게 이름이 비스듬한 글씨체로 씌어 있다.
“하긴 여긴 섬 전체가 놀이 공원이니까.”
정남이 입구를 들어서며 유쾌하게 말한다. 밝은 야외에서 실내로 들어
가니 처음엔 모든 게 어두컴컴하다. 이윽고 열두어 개 정도의 목마가 사람
들을 태운 채 얌전하게 돌아가는 작고 소박한 회전목마가 눈에 들어온다.
바닥은 다져진 흙 그대로고 천장엔 얼기설기 엮어진 철제 구조물이 노출
되어 있다. 서커스 가설무대 내부 같은 분위기다. 한국의 놀이공원처럼 화
려한 색깔도 없고 불빛이 번쩍거리지도 않는다. 벽에 붙은 안내문을 읽으
려고 하는데 동양 남자의 모습을 한 종업원이 나타난다.
“한국말을 하시던데, 한국 분이신가 봐요…… 안녕하세요?”
지긋한 나이와 점잖은 태도가 책임자 같은 분위기다. 남자가 발음하는
한국말이 너무나 감미롭게 들린다. 감청색의 윈드자켓을 입은 얼굴엔 미
소를 띠고 있다.
“이 회전목마는 이 섬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인, 지금부터 이백 년 가량
전부터 돌아가기 시작했지요. 지금도 원형을 훼손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돌
고 있답니다.”
“그랬군요. 여기 사람들은 전통을 보존하는 데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정남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영이 호기심을 나타낸다.
“엄마, 우리도 한번 타 봐요. 내가 표 사올께요.”
지영이 매표소에 표를 사러 간 동안, 정남은 그 남자의 얼굴이 어쩐지 눈
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채원이 오빠 아니세요? 동원오빠?”
동원은 정남을 응시한다. 정남은 채원한테 졸라서 대학교 때 축제의 파
트너로 동원오빠를 초대한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오빠로부터의 애프터가
없어서 무척 서운했었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동원이 드디어 집에 무시로
드나들던 동생의 짝꿍을 기억해낸다. 대학축제 때 두사람이 들렀던, 혓바
닥을 낼름 내민 소녀의 모습이 간판에 그려져 있던 아이스크림집을 정남
이 묘사하면서부터 두 사람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만다.
동원은 이곳을 좋아해서 여름마다 와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말한다. 지
영이 돌아오고 모녀는 회전목마를 탄다. 지영은 엄마의 드높은 웃음소리
에 놀라워하고 동원을 호기심에 차서 바라본다. 믿기지 않은 해후에 가슴
이 벅차서 정남은 목마의 기둥을 가만히 껴안는다. 군용바지에 낡은 군화,
실밥이 풀어진 군모를 삐뚜름히 쓴 동원오빠는 얼마나 멋있었던가. 지금
으로는 아마 자유분방한 래퍼의 차림이었을 옛날의 모습을 정남은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먹은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맛도... 둘러보니 이 회전목마
의 승객들은 어린이보다 어른들이 더 많다. 정남처럼 목마의 기둥을 두 손
으로 쓸어보는 노인도 보인다. 그에게는 회상할 추억이 그녀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눈여겨보니 한 장소에서 조그만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목마
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승객들이 특별한 기둥에 붙어 있는 거치대에 쌓인 코
인을 집어 드는 것이다. 말이 도는 속도를 감안해 신중하게 집어야 하나라
도 손에 쥘 수 있다. 아이들은 한꺼번에 두개씩 쥐려고 하고, 두개 다 떨어
뜨리기도 하지만 혹 성공하기라도 하면 기쁨의 괴성을 지른다. 말에서 내
린후정남은아이들이그렇게흥분하는이유를동원에게물어본다.“ 코인
의 숫자를 세어서 가장 많이 가진 승객에게 다시 탈 수 있는 티켓을 주는
거야.”그 말을 들은 지영이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어 안달을 부리고 정
남은 그런 딸을 말린다. 지영도 벌써 컸다. 한 바퀴 더 돌 수 있는 권리, 그
건 아이들만의 특권일 것 같다.
“동원 오빠를 회전목마 집에서 만났단 말야?”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입도 벌어진다. 회전목마에 얽힌 우리들의
추억이 있지 않은가. 어렸을 때, 그것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초등학교 3학
년 시절로 거슬러 가는 추억 말이다.
“그래서 오빠랑 만나서 뭘 했니? 그 다음엔 어떻게 됐다는 거니?”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쓴다. 벌린 입도 다물고 치뜬 눈도 애써 내
리깐다.
“오빠랑 그냥 헤어진 것은 아니지?”
오로지 정남의 대답을 기다린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오빠의 잃어버린 20년 삶의 한 조각을 겨우 붙잡는 느낌이다.
오빠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기억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엄
마는 작은 일에도 오빠를 혼냈고 오빠는 그때마다 반발했다. 두 언니들 때
문인 경우가 많았다. 아들을 귀하게 여기던 당시 풍조와는 반대로 엄마가
언니들을 편들곤 했기 때문이다. 불똥은 내게 떨어지곤 했다. 내가 친구를
데려오기라도 하면 오빠는 심술을 부려서 친구를 울리곤 했다. 오빠와의
추억은 입술이 터지거나 코피가 난다든가 하는 몸싸움으로 끝날 때가 많
았다. 내가 호락호락 맞고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나는 오빠가 좋았고
또 불쌍했다. 엄마는 왜 이 잘생긴 아들을 아프게 하나? 언니들은 왜 하나
뿐인 남동생을 못살게 구나? 그 당시 난 엄마를 절대로 이해 할 수가 없었
다.
오빠는 대학과 군대를 마친 후 집에서 하릴없이 지내면서 더욱 엄마랑
부딪치더니 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떠나버렸다.
“그랬구나. 너를 만났었구나. 오빠가……”
손가락 끝까지 몸이 떨린다. 정남이 도리어 걱정스럽게 나를 본다. 그녀
는 내가 너무 놀라는 것에 도리어 당황해 하는 것 같다. 오빠와의 얘기를
하면서 줄곧 그녀의 얼굴이 홍조를 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남은 그
를 사랑했구나. 그래서 행복해 하는구나. 정남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내가
몰랐던 동원오빠의 과거, 그녀와의 행복했던 과거다.
미시간호 가까이에 집을 하나 빌렸다. 결혼해서 미시간주에 정착한 지
영의 아기를 때때로 돌봐주기 위해서였다.
지영은 고등학교 졸업 무렵, 교회에서 사업가 아버지를 둔 교포청년을
만났다. 한국인 며느리감에 크게 만족한 그 집 부모는 결혼을 서둘렀다. 지
영은 대학에 갈 생각이라 아기를 낳지 않으려고 했는데 덜컥 임신이 되었
다.
동원은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에 취직했는데 주로 저
녁에 강의가 있어 낮에는 둘만 있곤 했다. 오빠를 만난 후에, 정남은 늘 하
던 시간제 아르바이트조차 그만 두었다. 그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까웠
다. 정원 뒤쪽엔 호수로 향한 작은 길이 있었다. 바다같이 넓은 호수에
항상 바람이 불어 왔다. 겨울엔 칼날 같은 북풍에 눈이 쌓였다. 눈은 4월이
될 때까지도 녹지 않았지만 정남은 좋았다. 추운 줄도 몰랐다. 추워도 좋았
다. 추워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더 좋았다. 벽난로에 자꾸만 장작을
넣어주는 동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뒹굴면서 그의 몸에 난 털
을 하나하나 만지다가 수염이나 관자놀이 근처의 머리털이 하얗게 센 것
을 발견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적도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
는 벽난로의 따뜻한 불길 앞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미시간호의 바람이 오
빠의 머리를 백발로 만들고야 말 것 같은 두려움에 그의 몸에서 떨어질 수
가 없었다.
지영아빠와는 이런 애틋한 마음이 없었다. 정남이 몇 년이나 아기를 기
다렸을 때, 그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한 여자가 정남을 만나서
남편의 아들을 낳았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 사실도 모르고
지날 뻔했다. 시댁에선 이미 그 아이를 손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정남이가
어렵사리 지영을 낳았을 때조차 시큰둥했다. 그래선지 아빠 사랑을 모르
던 지영은 동원을 제 아빠처럼 좋아했다.
그는 지영의 아이를 잘 돌봐 주었다. 그가 우유도 잘 타고 기저귀도 갈
줄 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학교 다니면서 베이비시터도 해 봤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접시닦이도 했었고 나중에는 요리도 어깨 너머로 배웠다고 했
다. 제일 좋아하는 것이 햄앤드치즈 샌드위치. 가장 만들기 쉽고 영양도 충
분한 것 같아서 그것만으로 한 달을 보낸 적도 있었다고 했다. 한 가지 종
류의 샌드위치만 어떻게? 하지만 그에겐 먹는 건 언제나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동원이었지만 정남이 요리해 주는 것은 무엇이나 잘 먹기 시작했
다.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삶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한국 이야기는 여전히 금기였다. 정남은 가끔 채원
과 전화하고 싶었다. 친구에게 동원과의 사랑을 낱낱이 알리고 싶은 충동
에 빠지곤 했지만 그는 원하지 않았다.
“오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고민했어.”정남이 말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어머니에 대한 반감 때문에 한국을 떠났다는 사실을
부인했지만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만나러 가기 전에 감정을 정리하지 않
으면 안 되었지. 오빠는 한국의 견고한 가부장제 하에서 장자에 대한 특별
대우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에겐 상대적으로 큰 상처를
주었다고 말했어. 오빠의 많은 친구들 모두가 수혜자였는데 오빠만이 역
차별로 소외감을 느꼈기 때문이지. 외할아버지의 편애로 그 당시로는 드
물게 대학 교육을 받았던 너희 엄마는 모든 자녀를 평등하게 키우려고 했
다지. 선구적으로 양성 평등사상에 매몰된 어머니는 자신이 아들에게 얼
마나 고통을 주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신 거야. 오빠는 미국에 와서
살게 된 후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다고 했어. 자신이 부끄럽게도 생각되었
다고.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돌아가고 싶어 하진 않았어. 대신 부평초처럼
떠도는 삶을 선택한 거야. 날 만난 후에까지도 말야.”
정남은 긴 이야기를 끝내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채원아. 네가 오빠에 대해 말하기를 싫어하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만 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어. 그이는 이곳에 와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니?
동원 오빠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내게 잘 왔다는 전화를 주었어. 그리고
지금껏 연락이 없어. 난 너무 걱정이 돼. 그이는 지금 어디 있니?”
정남은 참고 참았던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내고야 만다. 이제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어야 할까. 이제 정남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니까. 우린 가족
과 다름없으니까.
“너, 내 전화번호, 여고 동창회에서 알아본 것 아니지?”
나는 확인하듯 그녀의 눈을 응시한다.
“그래, 난 언제나 네 번호를 가지고 있었어. 그의 연락망 속에서 넌 항상
첫번째였으니까. 언제나 너한테 전화하고 싶었지. 미안해, 진작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정남은 간절한 눈빛으로 내 손을 꼬옥 잡는다. 나는 오빠에 대한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말해주기로 결심한다.
“오빠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단다. 그래도 어머니는 운명하시기 전
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지. 그렇게나 듣고 싶어하던…… 오
빠는 그 말을 어머니한테 직접 들었어야 했어. 그는 너무나 한스러워 장례
식장에서 대성통곡을 했지.”
나는 오빠의 그 많고 많던 눈물을 기억한다. 눈물은 얼굴을 적시고 옷깃
을 적시고 수건을 적셨다. 어머니의 주검이 있던 영안실은 깊은 한을 풀어
내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그가 슬픔을 다 흘려보내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나는 얼마나 바랬던가.
“그랬구나, 그랬구나.”
정남은 가슴에 두 손을 얹는다. 기도하는 자세가 된다. 그녀의 눈이 붉어
진다. 이내 눈물이 터지고 오열이 된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고이고
넘쳐서 흘러내린다. 오늘 밤을 세우고도 모자를 것 같다. 그래도 날이 밝으
면 그녀와 갈 곳이 있다. 나는 울면서도 그녀의 빈약한 옷장을 뒤져서 그
곳에 알맞은 옷을 골라 놓는다.
하늘이 청명하게 맑은 날이다. 나는 정남과 함께 용인 에버랜드 앞에 서
있다. 천안에 있는 어머니와 오빠의 새 집 망향원에 다녀오는 길이다.
오빠는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날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응급실로 실려 갔고 의료 요원들이 오빠를 살리고자 온 힘을 다 했
지만 그는 이승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다는 듯 편안한 얼굴로 다시 돌아오
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오빠를 엄마 곁으로 보내 주기로 했다. 엄마의 사
랑을 무척이나 받고 싶어 했던 어린애 같은 오빠. 그 사랑을 받지 못해서
언제나 고독했던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것을 보고 정남은 절을 하면서 몇 번이
고 웃고 울고 했다. 영정 앞에서 난 정남을 꼭 안아줬다. 엄마한테는 올케
라고 소개했다. 물론 엄마는 옛날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 또랑또랑 영리
한애라고좋아하셨다.‘ 엄마, 정남이하고살면서오빤행복해했대요. 그
만하면일생잘산거죠. 그렇죠?’
망향원을 떠나서 서울로 운전해 돌아오다 용인 에버랜드가 생각났다.
거기에 회전목마가 있지 않을까. 에버랜드 입구에서 표를 두 장 사면서 매
표원에게 회전목마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회전목마요?”
그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씩씩한 어조로,
“로얄 쥬빌리 캐루셀 말씀이십니까. 이쪽으로 계속 걸어가시면 이정표
가 나옵니다.”
우리는 직원이 알려준 대로 똑바로 펼쳐져 있는 길을 걸었다. 회전목마
를 가리키는 이름은 어려웠지만 기억할 수 있었다. 정남과 함께 검은 의상
을 입은 채로 행락객의 부분이 되어 걷는 기분은 어색하면서도 행복했다.
추억으로 돌아가는 길 같았다. 주변은 즐거운 표정의 남녀노소, 호화로운
놀이건물들, 제철 옷을 곱게 차려 입은 봄꽃들로 화사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때가 기억난다. 대형 손수레에 철판을 깔고 몇 개
의 의자를 붙여 빙빙 돌리는 기계로 아이들을 끌어모으는 아저씨가 있었
다. 의자 앞에 말그림을 붙여놓고 회전목마라고 선전했다. 거기에 올라타
고 돌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로얄 쥬빌리 캐루셀이 가당
키나 했던 때인가. 한 의자에 체격이 작은 어린이 두 명씩도 가끔 앉았는데
나와 정남은 꼭 붙어 앉은 채, 따로 타고 있는 동원오빠를 향해 혀를 날름
거렸다.
캐루셀 앞에 이르렀을 때 내게 그 이미지가 떠올랐다. 오빠는 그때 얼마
나 약이 올랐을까. 하하…… 돌이켜보자 킥 웃음이 났다. 정남도 골똘히 생
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녀도 분명 그때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정남아!”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정남을 불렀다.
“너, 심각하게 뭘 생각하는 거니? 나하고 같은 생각하는 거 아냐?”
웃음이 끓어올랐다. 정남이 나를 쳐다봤다. 그 표정, 기묘했다.
“채원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는 있는데, 나 정말 미안해.”
“뭐가?”
“나, 사실, 너 없을 때 동원오빠하고 몇 번 같이 탄 적 있다. 그 가짜 회전
목마.”
“뭐라고?”
기가 막혔다.
‘정남이...... 넌 그런 애였어. 앙큼하기도 하지. 그래, 네가 젤 좋아하는
게 백화점이랬지. 서로 딴 생각하면서 쇼핑하는 그런 곳이 재미있다고. 백
화점뿐이겠니? 옛날부터 넌 날 속여먹고……’
나는 그녀를 흘기면서 서너 발짝 뛰어가 회전목마를 타는 줄 끝에 섰다.
정남이 쪼르르 쫓아와 내 뒤에 붙어 섰다.
‘오빠와 그 엉터리 회전목마에 함께 탔다고? 나한텐 비밀로 하고 말이
지……’
생각할수록 얄미웠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서너 조각 떠있고, 바람은 상쾌했다. 정남과 오빠가
만났던 그 휴양지의 하늘이 이랬을까? 그 섬의 회전목마집의 이름이 무엇
이랬지?‘ 마사의메리고라운드’라고했던가? 직접보지는못했어도상상
속의 두 연인이 생생히 눈앞에 떠올랐다. 오빠는 여름 아르바이트를 하러
매년 그곳에 들렀지만 아마 한 번도 목마엔 타보지 않았을 것이다. 정남과
만난 그 이후에도 그랬을 것이다.
‘언제 한 번 같이 탔더라면 좋았을 걸. 타 보았다면, 목마 위에 높이 앉
아 저 아래 현실의 사소함을 여유 있게 내려다볼 수도 있었을 텐데. 올라가
고 내려가면서 돌아가는 회전목마가 꼭 누구나의 일생 같다고 느끼고 웃
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다 그만 두고 유년 시절의 즐거움에 푹
파묻힐 수도 있었을 텐데…… 그저 단순하면서도 행복한 유년의 추억 속
에 잠겨서…… 그래도 정남인 같이 해주었지. 어렸을 때에, 그리고 또 인생
의 동반자로도……’
로얄 쥬빌리 캬루셀은 어느 곳에서 본 것 이상으로 크고 호화로웠다. 오
르내리면서 빙빙 돌아가고 있는 승객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갑자기 눈 앞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나는 나비를 향해 홱 몸을 돌이켰다. 나비를 쫓아 한 손이 올라갔다. 뒤에
섰던 정남은 내가 자기를 혼내는 줄 알았나 보다. 한 팔로 쓱 가드를 올린
다.
“너, 너, 어엇! 널 때리는 줄 알아? 바보같이……”
올렸던 손을 내리며 나는 얼른 나비를 찾았다. 노랑나비는 정남의 머리
주변을 한 바퀴 돌고는 너울너울 사라져 갔다.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린, 둘이똑같은생각을한다는걸알수있었다.
‘그래, 이젠 인생의 길 틈새에 끼어 생채기가 나고 아퍼하지 않아도 돼.
날아갈 수 있는 길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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