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식 (姜以式)
고구려의 인물
생년 550년 -
몰년 미상
진주 강씨
1. 개요
『원화성찬(元和姓纂)』과 『당암집(戇庵集)과《진주 강씨 족보》와 《조선상고사》 등 문헌에서 언급되는, 수나라를 물리친 고구려의 장수이자 현재 한국의 대성인 진주 강씨의 시조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2. 생애
광동에서 태어나 천수에서 성인(成人)이 된 그는 양견〔수 문제, 재위 581~604〕을 도와 수(隋)나라를 건국(581)하고, 나아가 남북조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통일(589)하여 중국천하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5년 후 수나라에는 예기치 않은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수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 문제(文帝)와 형 양용(楊勇)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한 것이다.
문제를 도와 중국을 통일한 강이식으로서는 당연히 이러한 정치적 참변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강이식은 한동안 수나라의 벼슬 직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중국 『광동강씨보(廣東姜氏譜)』에 “공(강이식)이 태조(수문제)를 도와 중국 천하를 안정시켰으나 태조의 아들인 양제가 제위를 찬탈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公佐太祖以定天下後帝纂位公以退野).”는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패륜을 저질러가면서까지 제위를 찬탈한 양광(수 양제)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진시황과 한 무제의 치적을 흠모하여 동도를 조영하고 ‘대운하를' 건설하는 등 영토 확장준비에만 총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그는 지나치게 권세를 남용하였을 뿐 아니라 언제나 국고가 가득 차고 병력이 막강해지기를 갈망하였으며, 독단적으로 모두를 정복하고 모두를 노예화시키려는 신념으로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이르는 곳마다 대단위의 궁궐을 축조했는데, 그 수만 해도 모두 40곳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수나라 백성들은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이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무리하게 고구려 원정(遠征)을 결심하였다.
이를 위해 양제는 전 국토를 뒤져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이를 병사로 삼고, 전 나라를 통틀어 부역을 충당했는데, 이로 인해 수나라의 전답(田畓)은 모두 황폐해지고 경작하는 사람마저 없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같은 실정에서 8년 전(604), 양제가 제위를 찬탈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던 강이식 또한 군사 징발대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강이식은 과거 문제를 도와 수나라를 세우고 남조의 진을 평정하여 중국을 통일한 경험까지 있었으니, 고구려와의 대전(大戰)을 목전에 둔 양제로서는 중국천하를 안정시킨 경험 많은 그에게 중책(重責)을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강이식은 병마원수(兵馬元帥)의 자리를 맡게 되지만 고구려로 귀화 한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감행한다 수 문제의 국서에 열이 뻗힌 고구려가 선빵을 날릴 때 50,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요서 지역과 영주를 공략했고, 나중에 임유관을 공략했다고 한다.
한편 그 무렵, 고구려(영양왕 23)는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였을 때부터 장차 통일된 중국의 세력이 반드시 고구려를 침공해올 것이라고 예견하여 그들보다 먼저 전쟁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 때문인지 수나라는 평양성전투에서 대패하였을 뿐 아니라, 살수(薩水)에 이르러서는 살아서 돌아간 자가 불과 몇 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구려 군이 아무리 그들보다 먼저 전쟁준비를 마쳤다 하더라도 당시 수나라의 군사는 백만이 넘는 대군(大軍)이었는데, 단지 고구려 군의 발 빠른 대비책만이 승리의 관건이 될 수 있었을까?
짐작컨대 수나라가 고구려 군에게 패배하게 된 저변에는 분명 유형적인 모습 이외에도 무형적인 또 다른 요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이후 작성된 한국의 일부 족보, 문집과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정확히는 거기에 인용된 일부 문헌)에 등장하는 영양왕 재위 시절의 장수. 진주 강씨의 시조다.
고구려-수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수양제 수문제가 조공을 바치고 신하국이 되라는 국서를 날리자 '이런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시랑 강철상의 아들로 15세 때는 90척짜리 철퇴를 마상에서 구사하고 진법을 이루었으며 24세 되던 해(573년)에 동명대회에서 장원했다고 한다.
이를 역산해 보면 출생년은 550년. 이후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서부 총관부에서 벼슬하며 돌궐, 계단(거란), 말갈 등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다고 한다.
그 뒤 고구려 귀화 후 동명대회에서 장원한 후 아직 보직을 받지 않은 을지문덕이 592년(영양왕 3년) 8월 하순 요동성 서부 총관부의 총관 강이식을 찾아와 총관부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고 수 문제가 고구려에게 무례한 국서을 보내자 이때 강이식 장군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으로 병마도원수[2], 을지문덕은 서부 총관으로 각각 승진했다고 한다.
3. 실존 문제
강이식 장군의 무덤이 중국 심양현 봉길선 원수림역(元帥林驛)에 있고, 1930년대에 현지를 방문해 강이식 무덤의 비석을 확인했다는 주장도 존재하며, 진주 강씨 종친회에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 2002년 KBS 역사스페셜에 방송되기도 했지만 현존하는 역사자료로는 강이식에 대한 전승을 조선시대 이전으로는 소급하기 어렵다.
《삼국사기》나 중국 《24사》, 일본 《육국사》 등 당대에 가까운 정사'라 할 수 있는 사료에는 강이식을 언급한 자료가 없으며, 금석문도 전해지지 않는다.
당대로부터 한참 지난 20세기에 신채호가 남긴 저서 《조선상고사》에서는 강이식을 언급하면서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의 기록을 참고했다고 했으나 둘 다 현존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고[3] 《진주 강씨 족보》(17세기 후반 이후 작성), 17세기 진주 강씨 사람 강익(姜翼)이 작성한 짤막한 기록과 야사 등을 통해서 전승되지만, 당대 기록도 아니고 숭조사업으로 조상의 업적을 윤색하는 서술이 일반적인 족보는 사료로서의 신빙성을 높게 치지 않는다.
또한 역임했다고 나오는 병마원수나 병마도원수는 후대의 것으로 고구려에서 실존했던 관직으로 보기에는 다소 이질적인 이름인 것도 감점 요소이다.
삼국시대에 병마원수라는 관직이 사용된 다른 사례가 없으며, 중국에서도 고구려가 멸망한 지 50여년이 지난 당현종 이후에 처음 등장하는 관직명이다.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따라서 강이식이 병마(도)원수를 역임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몹시 의심스럽고, 합리적으로 추측한다면 고구려의 관직 체계를 모르는 후대인들이 당대의 벼슬인 병마원수로 지어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참조.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등장
[2] 쉽게 말해 대장군. 지금으로 치면 5성 장군, 원수에 해당한다.
[3] 다만 《서곽잡록》의 경우, 조선시대 야사의 총집합서인 《패림》에 실려있고, 일본 가와이 도서관에도 이본이 있으며 백과에도 현존한다고 적혀 있으므로 실제로 실전했는지는 의문이다.
출전 :나무위키 2022.03.25
첫댓글 573년 동명대회 장원이라면, 이전에 망명했다는 이야기인데, 수양제의 쿠데타는 604년, 임유관 전쟁은 598년이다.
강이식 생년은 550년이라니
어디에서 나온 기록인가요?
573년 동명대회 장원?
연원보 서문엔 강이식의 손자 강행본이 당나라가 설치한 평양의 안동도호부 총병으로
그 때까지도 귀화하지 않은 당나라 사람이라 했는데
그의 조부가 그전에 귀화를 했다? 는 의문 투성의 글입니다
이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에 인용된 <서곽잡록>의 임유관전투 병마원수와
또 다르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족보는 시조님이 고구려사람인 걸로... 알아 왔고,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국로추사 ' 618년에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귀국하지 않았다'라고 쓰여있네요.
당고조가 고수전쟁시 고구려에 잡혀있던 포로의 귀환을 요청하자, 고구려 영류왕이 많은 포로를 돌려보냈으나, 강이식장군은 돌아가지 않았다고 쓰여있네요
본 글의 [출전 :나무위키 2022.03.25]라고 맨 밑에 쓰여 있는 바,
나무위키의 글은 누구든지, 아무나 이미 쓰여진 글을 수정하고 추가할 수 있는
인터넷사이트로 신뢰성이 없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자세히 본 글을 읽어 비교하면
사건이 발생된 시기의 전,후관계가 맞지 아니한 잘못된 부분도 많음을 알 수 있고
강무학의 장편대하소설 <성장(聖將) 을지문덕>에서 573년 동명대회와 부친의 이름(강철상)등이
인용된 것[1976.7진주강씨중앙종회 강신창편 <진주강씨종감> 참조] 을 확인 하였습니다.
강이식 시조님의 아버지에 대한 휘가 다른 3가지 예시(例示 : 차후 카페글 발표예정)를 소개하면
1) 강철상(姜哲尙 고구려 양원왕 545~558때 상서원 시랑?) : 강무학의 위 소설 속에 나오는 분
2) 강문성(姜文星 제강공의 후손으로 영양왕 607정묘년 입조?) 진주지역 은열공파 지하석함 발견 사적
3) 강진(姜眞) : 2015.9 <중화강성원류여与태공문화연구> 강행본(姜行本) 가승
★1451강희안의 연원보 서문의 손자 강행본(姜行本)에 대한 가승 추적중
최근 앞의 3)에서 확인된 바로는 조부가 강이식이 아닌 강경(姜景)이라 또 다르게 나타남
참고로 강행본(姜行本)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고려 평장사)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에 나오는
유일한 강씨 성(姓)을 가진 분<강대희 카페지기님 확인>이라 합니다.
삼국사기는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역사서이죠~!
@노털한강 예, 고맙습니다. 많은 것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