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자. 한줌의 재가 되어 조계산의 흙이 되다.
-김병기
침몰해버렸던 학자.
이국자씨가 세상을 떠났다.
순사 13회 이국자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3회 이국자씨가 서울대분당병원에서 몇년간 앓았던 유방암으로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지금 이 나라는 세월호 침몰로 온국민이 공황상태에 빠져있다. 그 와중에 4월25일 홀연히 눈을 감은 것이다.
이국자는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의 부유한 공주이씨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는 보성에서 보냈지만 교육자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중학교는 곡성중학교를 10회로 졸업했다. 곡성중학교 재학시절 곡성읍의 진산( )인 동악산의 이름을 딴 "동악"이라는 곡성중학의 교지에" 다람쥐"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문재(文才)를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동악을 편집한 국어선생님이 문도채씨였는데 문도채선생은 순사 2회의 선배이며 "보아라 들어라" 의 순사응원가를 작사한 시인이었다.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순천으로 이사온 이국자는 순천사범 졸업후에 보성군 회천국민학교 승주군 해룡교, 승주군 송광교등에 근무하다가 이화여대 국문과로 진학 하였다. 이대대학원을 마친후에는 이화재단의 금란여고 국어교사로 근무하였다. 그후 전북대에서 "판소리의 해석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순사시절 은사였던 김용백선생이 학장으로 있는 순천간호 전문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때부터 문학쪽을 버리고 판소리연구에 올인하였다.
이국자는 연구하는데 치열했고.집요했고,강인하였다.
그가 지닌 인간적 단점등도 학문적 열의로 변용되었으며 판소리를 열애하는 지적 편식은 유치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국자는 이내 판소리분야에서 매우 촉망받는 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국자의 전성시대는 오래가지 못 했다. 건강에 이상이 온 것이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연약한 여인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과중한 지식적재였던 것이다. 간호대학에서도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학자로서는 사망해버린 것이다.
그떄부터 이국자는 아픈몸으로 고달픈 여인의 길을 홀로 걸어야 했다. 이때 순사13회 동창인 이병래씨의 협조는 이국자가 노년을 보내는데 큰힘이 되었다.
이국자의 업적
판소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두전승(口頭傳承)의 도제적인 민족음악이다. 서민대중을 모아 민중의 판을 짜서 아니리(대사) 발림(액션, 동작)을 섞어가면서 북장단에 맞추어 소리로 표현하여 청중과 함께 울고웃는 극음악이다. 서양의 오페라에 비교할수있는 장르이다.
200년의 역사를 지닌 판소리는 동편제 (남원 구례중심) 와 서편제(보성 장흥 목포중심)로 대별되는데 근래에는 서편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보성소리라고 통칭되는 강산제가 한국판소리의 대세가 되고 있다.
현재 한류로 전세계에 전파되고 있는 k팝도 엄밀히 분석해보면 아니리(랩) 발림(춤) 추임새(청중참여)소리(노래)가 형식과 활동공간이 변화된 , 진화된 판소리라고 해야할 것이다. (학자들의 이론정립과 검증이 필요하다)
건강상 일찍 학계를 떠났지만 이국자가 한국판소리 학계에 남긴 공적은 매우 크다. 이국자의 대표저서는 "판소리연구"(정음사)와 "판소리예술미학"(나남)이다.판소리연구는 김대중대통령의 애장서 100권중에 뽑혀서 전시되기도 했다. 판소리예술미학은 판소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꼭 읽어야 할 책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국자가 판소리예술미학을 쓰기 전에 내게 전화를 했다. 판소리명창들의 열전을 연재하고 싶은데 신동아나 월간조선에 지면을 얻고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현실적인 욕심이었다. 광주일보주필인 이강재( 보성읍출신) 선배에게 부탁했더니 광주일보와 연관된 예향(藝鄕)에 연재할 수있다고 했다. 판소리는 호남인의 독특한 감수성을 표현하는 대표적민족음악이니까 오히려 광주의 예향지에 연재하는 것이 옳다고 반겨주었다. 이강재씨의 부친과 이국자의 할아버지는 절친한 세교지간(世交之間)이기도 해서 2년에 걸쳐 이국자의 활달한 문체로 마음껏 쓸수있었다. 연재할때의 제목은 "판소리의 맥(脈)을 찾아서"였다.
판소리예술미학은 200년 판소리 역사속에서 대표적인 명창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르포기사였다 . 그러나 평면적 르포기사가 아니었다. 명창 특유의 자아가 방출되는 득음(得音)할때까지의 과정까지 소개하는 판소리학계에 사료(史料)로 남는 다각도 다방면 의 입체적 취재였다.
2500년전 아난(阿難)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기록했던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불경처럼 ,이국자는 기록이 진실하고 ,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정성을 쏟았다. 이렇게 이국자에 의해 한국판소리계의 호적등본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판소리계의 통설이 되어있는 "보성소리" 동편제의 "송판가계"( ) 서편제의 "정판가계" ( )등도 이국자가 처음 창안한 술어들이다.
이국자가 학문적 요절을 하지않고 정진할수 있었다면 국문학계의 거목으로 성장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생야일편 부운기(生也一片 浮雲起) 사야일편 부운멸 ( 死也一片 浮雲滅)
이국자의 시신은 화장되어 유언에 따라 순천송광사 뒤 조계산에 뿌려졌다. 그가 자꾸 되뇌었던 서산대사의 시처럼
생야일편 부운기(生也一片 浮雲起)ㅡ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ㅡ
사야일편 부운멸(死也一片 浮雲滅)ㅡ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ㅡ.
부운자체 본무실(浮雲自體 本無實)ㅡ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요ㅡ
생사거래 역여연(生死去來 亦如然)ㅡ 죽고사는 것이나 오고가는 것이 모두 그와 같도다ㅡ
이 되었다.
그래도 , 그래도,
잘 가세요. 이국자
고통도 고민도 없는 도솔천의 저 세상에서
편히 쉬세요.
살아서 흠모했던 법정스님, 순천시절 존경했던 구산스님과도 어울리면서
"이산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의 사철가 한가락 뽑으시구려.
햋볕이 안개를 쫓아내는 아침이면
보성소리가 잠겨있는 주암호에는
이국자의 넋이 서려있을 것이고
별빛이 맑은 밤, 푸른 빛이 사그러드는 새벽에
송광사 부도전에서 시누대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낄때는
진양조의 판소리가락이 조계산을 기어오를 것이다.
이국자의 병사는 특정인의 사망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시대가 소멸되고 있으며
우리들의 한평생이 섬진강 물처럼 흘러가버리고 있는 것을
확인해야하는 현장감이 우리를 더 처연하게한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밥 먹고, 똥사고 ,네 발 벌리고,잠잘 것이다.
진짜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태양도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솟아오를 것이다."
송춘강: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요즘 카페를 들릴때는 좋은 글보다도 동문님들의 동정을 알고 싶어 뜸하게 라도
열어 보게 되는데 비보가 올라 왔네요.
가끔 국자 친구의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쉽게 떠날줄 몰랐습니다
다재 다능했던 친구였는데 투병생활하고있을때 찾아 가보지 못한
죄책감에 가슴이 저며 옵니다.
부디 저 세상가서는 못 다 이룬 꿈 이루고 편이 쉬기를...
김병기씨!
국자에대한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인에 대한 업적도 상세이 소개해주셔서 잘 알았습니다.
자주들려서 좋은 글로 재능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이홍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