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다 사람이 소중한 영화 <롤라>
박영선
영화 <롤라>는 갑자기 나타난 엄마의 새 남자친구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았던 롤라가 비밀스러운 전학생 레빈을 만나 우정을 쌓으면서 행복을 찾는 이야기이다. 롤라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빠를 간절히 기다리는데, 밤마다 머리맡 사진 속 아빠와 인사하고, 사진 속 아빠가 움직이며 자장가를 들려주는 장면이 롤라의 간절한 마음을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이 판타지 장면은 롤라의 감정 상태에 따라 조금씩 변형, 반복되기 때문에 영화적으로 탁월하다는 인상을 준다.
롤라가 돌아오지 않는 아빠에 대해 점차 단념하고 주어진 상황을 긍정한다는 큰 줄기 외에 영화가 또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엄격한 규칙과 인도주의의 대조’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레빈이 낚시 면허 없이 물고기를 잡으려 하자 롤라가 꾸짖는데, 그 때문에 레빈네 가족은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한다. 마을의 부유한 이웃 바켈트는 자신 소유의 강에 그럴싸한 요트 항구를 만들고 싶은데, 정박한 배 위에 사는 롤라네가 방해되니 경찰에게 ‘오물 처리 규정’ 따위를 운운하며 항의한다. 깐깐한 교장선생님은 불법체류자인 레빈을 학생으로 받아들이는, 규정을 뛰어넘는 선택을 하는가 하면, 엄마의 남자친구 쿠르트는 수의사이지만 위급한 레빈의 엄마에게 약을 처방, 제공한다.
영화는 이렇게 규칙과 인도주의의 대조를 거듭하면서 동시에 인도주의의 손을 들어준다.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사람을 위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관객은 규칙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린 결국 인간답게 살도록, 다른 이웃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가 ‘불법체류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연결된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람’이기 이전에 ‘불법’이다. 바켈트의 아들이자 롤라, 레빈의 급우인 케빈은 인터넷 검색창에 ‘불법(illegal)’을 또박또박 입력해본다. 꼭 레빈과 그의 가족들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낙인을 새기는 것 같다. 한편 바켈트는 자신이 고용한 타입(레빈의 아빠)의 이름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서부, 중앙, 또는 남부아시아 어디쯤의 흔해 빠진 이름일 ‘알리’라고 대충 부른다. 그러면서 타입이 바켈트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면 ‘내 이름은 바게트가 아니고 바켈트라고!’라며 성을 낸다.
불법체류자 신분인 레빈 가족은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 가장 편하게 쉴 수 있어야 하는 집에서도 언제나 경직되어 있다. 이웃과 함께 어울리기는커녕 집에 누군가 노크를 하면 극도로 경계하고 겁을 먹는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말을 걸어오면 서로 좋아하는 걸 대며 사귀는 게 아니라 되도록 피하고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 출생 신고도 안 되어 있고, 아파도 병원에도 못 간다.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되어 사는 것이다. 누군가는 배고픔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외로움이라고 했는데, 이 가족은 배고픔과 외로움을 동시에 갖고 산다.
레빈의 ‘인간답지 못한 삶’이 극적으로 표현되는 부분은 ‘학교 청소’를 하는 장면이다. 레빈의 엄마가 아파서 학교 청소 일을 못하게 되자, 레빈이 학교를 그만두고 엄마 일을 대신 하게 된 것이다. 레빈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는 것 말고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겪어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영화는 레빈 가족을 단순히 빈곤하고 불쌍한 불법체류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합법적’으로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사랑으로 대하고, 저녁 식사에 웃음이 꽃피고, 고유한 문화 속에 흥겨운 음악과 춤이 있다.
불법체류자도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치는 바로 이름이다. 타입이 쓰는 언어는 ‘쿠르드어’, 롤라 엄마의 남자친구 이름은 ‘쿠르트’, 마을 유지 교장 선생님 이름은 ‘쿠바르트’이다. 비슷비슷한 발음은 우리 모두 그저 비슷비슷한 사람이라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이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와서는 인간다움이 딱딱한 규칙을 완벽히 승리한다. 법을 어긴 강 위의 배, 그 위에서 펼쳐진 롤라의 생일 파티, 파티의 음악과 춤, 흥겨움과 웃음은 쿠르드어가 쿠르트인 듯, 쿠르트가 쿠바르트인 듯 스리슬쩍 바켈트의 스포츠클럽 행사 장소에 스며든다. 자신의 편의에 따라 규칙을 따지고 이웃을 남으로 가르기만 했던 바켈트지만 이 자연스러운 즐거움에 당해낼 수가 없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 되어 파티를 즐기고, 롤라는 이런 말을 남긴다.
“친구는 서로 돕는 거래요.”
너무 쉬워서 싱거운 말이다. 그러나 레빈을 학생으로 받아주고 롤라의 생일파티가 열릴 수 있도록 도운 교장 선생님, 제 코가 석자면서 따돌림 당하는 롤라를 도운 레빈, 레빈을 위해 쿠르트에게 용기 내어 도움을 요청한 롤라,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롤라의 말만 듣고 레빈의 가족을 도와준 쿠르트, 딸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던 롤라의 엄마를 생각하면 저 쉬운 문장이 진하고 묵직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