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신앙생활과 기차여행
전계영 미카엘
우리 가족이 사창동성당 교적을 둔 것은 그리 오래지 않는다. 불과 5년 전 아들(전찬휴 프란치스코)가 소화어린이집에 다닐 때, 김석문 가를로 원장수녀님께서 성당에 다녔으면 하는 바람을 전해주셨고 아내(정혜 엘리사벳)와 마음을 모아 가족이 함께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이다. 정확히는 다시 다니게 되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 그리고 나에게 마음 빚을 두고 있었는데,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유년시절 초등학교 앞에 있던 강화성당을 바라보면서 시작된 성당에 대한 동경은 서른 살이 되어서야 세례와 견진성사로 이루어졌고, 내덕동 주교좌성당 합창단, 또 교구합창단 활동도 하면서 소속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의욕만 앞선 탓이었는지, 생각이란 것을 몰랐던 젊은 시절의 무책임에 기인한 것이었는지 여하간 이유도 없이 성당 다니기가 뜸해졌고 오랜 기간의 냉담기가 있었다. 이후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대전 정림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1년여의 중국 생활. 살아남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어렵게 찾은 예수님을 또한번 놓치고 말았다. 가끔 옌타이시에 위치한 ‘따마루(大馬路) 성당’을 찾곤 했었지만, 하느님을 만난다기보다는 타국에서의 무료한 삶과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한국 사람들이라도 보기 위함이 목적이었던 것 같다. 2009년 귀국 후 고단하고 바쁜 삶 속에서 예수님이나 성당 등의 종교적 어휘는 나와는 전혀 별개의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게 있어 성당과 신앙생활은 삶이 괴로울 때 내가 선택해서 찾아가는 도피처로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사창동성당은 살아가는데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해주었고, 의지할 곳 없는 청주에서 굳건한 버팀목이 되었으며,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었다.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되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되었으니 지금이 내 삶의 전환점이라 여겨도 무방하리라.
성당에 다시 다니게 되면서, 정신적 삶이 여유로워졌고 우리 가족을 신앙생활로 이끌어 주셨던 여러 분들을 다시 추억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의 결혼식을 집전하셨던 대전 정림동성당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2012년 8월 16일 선종)과 내덕동 주교좌성당에서 세례를 주셨던 김광명 아우구스티노 신부님(2015년 1월 1일 선종)이 특히 그러하다. 우리 가족을 가톨릭 신자로 받아주신 분들인데, 아직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했는데, 이미 선종하셨다는 소식에 또한번 죄인의 심정이 되어버린다. 안타까운 마음에 두 곳 성당에 찾은 적이 있었다. 내덕동 성당을 찾았을 때엔, 강철구 요셉 대부님을 다시 뵈었고, 여전히 충실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통해 나의 마음도 더욱 새롭게 하려는 다짐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우리 가족에게 있어 ‘신앙생활’은 매우 중요한 행사이자 생활이고 약속이다. 사창동성당에서는 신자들의 행복한 신앙생활을 유도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바로 모든 신자가 함께 참여하는 ‘기차여행’이다. 우리 가족은 2014년 최상훈 신부님이 계실 때 처음 참여하게 되었으니, 올해로 기차여행은 3번째가 된다.
2014년 11월 전남 여수 한화아쿠아리움, 2016년 6월 충남 서천 국립생태원, 그리고 2018년 5월 27일 연천군에 위치한 전곡선사유적지까지. 이번 여행의 주제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이다.
기차여행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시작되었다. 아이를 깨우고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아내는 김밥집에 부랴부랴 다녀온다. 옷을 입고 밖에 나가니 카풀하기로 했던 안기동 선생님과 동현이가 있다. 안기동 선생님은 찬휴가 어릴 때 아이돌보미 선생님으로 오셨었는데, 지금은 같은 동네에 살게 되었다. 인연이 있나보다.
7시 43분 아파트를 출발하여 8시 10분 청주역에 도착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엔 필립보회 형제님들이 웃음으로 반겨주며 주차 안내를 하고 있었다. 선거철이어서인지 지방선거 유세하는 분들로 나와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기차에 오르고 8시 24분 좌정. 자리에 앉자 봉사활동하시는 교우님들이 출석을 부른다. 동현이와 찬휴는 “나는 기차여행 처음이야.” “나는 3번째야.”하며 기차여행에 대해 조잘거린다.
드디어 출발, 잠시 후 잠사박물관을 오른쪽으로 보여주며 기차는 쿵쿵거리면서도 부드럽게 철로를 달린다. 회색빛 하늘과 초록의 대지, 간간이 논일 나온 농부가 보인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고즈넉하다. 8시 37분 명찰과 스카프를 받았다. 선사유적지 입장권 대신으로 성당에서 준비한 선물이다. 세심한 배려다.
8시 43분 기차에서 미사가 시작되었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을 읊조린다. 미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9시 3분 천안역을 지나는데 찬휴는 벌써 덥다고 투정부린다. ‘주님의 기도’ 속에 찬휴도 조용해진다. 9시 12분 ‘평화의 기도’와 앞뒤좌우 평화의 인사, 9시 13분 성체성가를 부르고, 9시 14분에 성체성사, 신부님의 강복, 9시 31분 파견성가, 그렇게 기차 안에서의 미사는 마무리되었다.
미사가 끝나자 기차 안은 미사 이전보다 왁자지껄해진다. 괜히 신이 나서 찬휴를 데리고 1번 차량으로 이동했다. 이웃사촌인 태헌네 식구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7호차. 1호차로 이동하면서 느낀 점 하나. ‘참 활기차구나. 흥이 나는구나!’였다. 우리 기차 칸은 어른들이 많아서인지 조용했는데, 다른 차량은 시끌벅적 그 자체였다. 시원한 맥주 한잔씩!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서울을 벗어났다.
저만치 앞에 한탄강이 보인다. 스무 살 젊을 때 군 생활을 했던 곳이다. 초성리역에서 바라본 ‘2군수 지원사령부 예하 562중대’는 그때와 변함이 없어 보였다. 28개월의 군대생활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난다. 지금 저곳에는 그때의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고 있을 텐데, 시원한 음료수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11시 50분에 전곡역에 도착. 도보로 이동해서 전곡선사유적지에 들어섰다. 잔디밭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하고 구역별로, 반별로, 친분이 있는 분들끼리 점심을 먹고자 흩어졌다. 12시 40분 점심, 우리는 김밥이다. 태헌네 식구하고 함께 분수가 있는 연못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낮술도 먹게 되었고, 점심 식사 후에는 찬휴, 태헌, 태위를 데리고 토끼와 닭을 보러 갔다. 토끼가 잘 먹는 씀바귀, 명아주, 민들레, 클로버 등을 따다 주고, 그 사이 찬휴 왈 “아빠, 응가가 큰 거 나올 것 같아”. 허둥지둥 화장실에도 다녀왔다.
다시 토끼와 닭을 구경하는데, 찬휴를 가르치셨던 소화어린이집 선생님이 다가오신다. “찬휴야, 어떻게 이런 풀들을 토끼가 좋아하는 줄 아니?” 선생님 말씀에 “우리 아빠가 아주 시골에서 살았거든요. 이런 거 잘 알아요!” 묘한 어감의 대답. 기분 좋게 칭찬으로 해석했다.
전곡리 토종 전시관에서 동영상도 보고, 산책 중에 만난 필립보회 형제님들과 맥주도 한잔 하고, 다시 선사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노라니 모두 우리 가족 같고 형제 같았다. 이제야 나도 성당 구성원이 되었구나 하는 뿌듯함도 느꼈다. 구경도 잠시, 어느새 전곡역으로 돌아가 기차에 올라야 한다. 4시 30분 전곡역 도착. 우리는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우리는 기차에 올랐고 이제부터 기차는 한탄강 남쪽으로 흐른다.
묵주기도를 드리다 잠시 고개를 드니 초성리역과 그 인근에 위치한 562중대. 잠시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곳의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저곳에 있는 젊은이들이 늘 건강하게 군 생활을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소서!” 그리고 그곳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 예수님의 ‘빵과 포도주’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아릿하면서도 행복하고, 안타까우면서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처음 기차여행 때에는 신부님과 수녀님을 빼고는 아는 분이 없어서 우리 식구 셋이서 밥을 먹은 기억이 난다. 두 번째 기차여행 때에는 2구역 분들하고 함께 밥을 나눠먹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이번 세 번째 기차여행 때에는 많은 분들과 인사도 하고 술도 나누었으며, 같이 이야기하며 길을 걷기도 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교우들과의 교유 정도가 늘어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하느님도 참 좋게 보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