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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40-41살 명철보신 계획과 명나라 멸망 예언
2021년 1월 15일
왕양명은 40-41살에 북경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허리 통증도 심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까닭은 왕양명이 직접 북방지역의 농민반란에 관하여 자세한 소식을 듣고 명나라가 멸망한다(時事到此,亦是氣數)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왕양명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아파서 요양하는 동안에 『주역』을 읽고 점치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마도 명나라 멸망을 예언한 것은 나름대로 정치사회적인 멸망 조짐을 보고 점을 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향에서 소작농들에게 원한을 사지 않도록 하고 조용히 살려는 명철보신 계획(退藏之計)을 아버지께 알렸습니다.
그런데 전덕홍의 『왕양명 연보』는 왕양명이 48살(1519)에 주신호 반란을 진압하고 포로를 압송하여 넘긴 뒤 49살(1520) 정월 30일에 여산(廬山) 개선사(開先寺)에 머물 때 여산 독서대(讀書臺) 암벽에 새긴 글귀에 주목하였습니다. “하늘이 주신호 반란을 보시고 황령(皇靈)을 밝히셔서 우리나라를 아름답고 안전하게 회복하여 주셨습니다.(天鑒於宸濠,式昭皇靈,嘉靖我邦國。)”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덕홍은 정덕 황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 가정 황제가 뒤를 이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왕양명의 벗 허장(許璋)이 천문에 밝아서 세종 황제가 뒤를 이을 것이라고 점쳐서 예견한 것을 왕양명에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明儒學案』,卷十,「姚江學案」,許璋:
“正德中,嘗指乾象謂陽明曰:‘帝星今在楚矣。’已而世宗起於興邸。其占之奇中如此。”
왕양명이 가정 황제 즉위를 예언하였다고 보아도 좋겠지만, 사실상 이 예언은 왕양명이 40-41살에 명나라 멸망을 예언하였던 것을 오히려 가려서 덮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왕양명이 사직하려는 결심에는 당시 북경에서 비난을 받았던 것도 있습니다. 왕양명 41살에는 어떤 학생이 서신을 보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간언하지도 않고 앉아서 보기만 하고 무심하게 강학한다고 심하게 비난하였습니다.(坐視亂亡,不知執事今日之仕為貧乎?為道乎?) 또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왕양명의 무심한 태도를 지적하였습니다. 왕양명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더구나 당시에 수정 주자학자들은 너도나도 찾아와서 왕양명의 정좌 수양공부를 비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북경에서 더 이상 강학하기에는 곤란한 처지에 왔습니다.
이밖에도 왕양명이 곤란하였던 것은 아버지의 뇌물 사건입니다. 왕양명이 귀주에 귀양갈 때와 귀주에서 여릉현 지현으로 승진하여 귀양살이를 마쳤던 배경에는 분명히 아버지가 과거시험 동년 친구 황순(黃珣)을 통하여 환관 유근에게 뇌물을 주었던 것입니다. 왕양명이 결백을 밝히려고 들자 아버지 왕화가 급히 서신을 북경에 보내 아들 왕양명을 나무라고 소명을 관두게 막았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왕양명은 북경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신임을 많이 잃었을 것입니다.
왕양명의 곤란한 처지는 서애가 편집한 『전습록』 상권 전반부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왕양명이 41살에 북경에서 강학할 때 지행합일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양명과 서애의 문답을 보면, 지행합일의 사례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만 들고 국가 존망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학생이 왕양명을 비난하였듯이 왕양명은 국가 존망에 관하여 지행합일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왕양명의 지행합일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왕양명의 매부 서애(徐愛)가 왕양명 41살(1512) 정월에 북경에 와서 왕양명을 만났고 6월에는 3년 근무 기간을 마치고 북경에 와서 왕양명의 문인이 되었습니다. 왕양명은 서애와 함께 12월 중순에 남경으로 내려갔습니다. 서애는 6개월 동안 공부하면서 『전습록』 권상 전반부를 편집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당시에 농민반란과 국기 문란에 관하여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을 유의하고 『전습록』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왕양명의 명철보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무조건 나쁘다고만 평가할 수 없습니다. 경세 관점에서 보면 왕양명은 세상을 등지고 모르는 척하였기에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왕양명이 젊어서부터 발원한 것은 수양공부하여 본심과 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왕양명은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였고 고향에 돌아가서 공부하겠다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도 마다않고 심지어 세상과 국가가 엎어지는 상황에서도 발원한 결심이 흔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낫습니다.
왕양명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의 명철보신도 지켜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49살(1520) 정월에 강서성 제학 첨사 소예(邵銳, 1480-1534, 1508년 진사, 1520년 강서성 제학 첨사)가 부임하자마자 올린 사직 신청서를 허가하였습니다. 왕양명은 명철보신이 속세에서 더럽혀지지 않겠다(潔身)는 개인의 의지(人各有志)라고 동의하고 동시에 소예에게 명철보신이 군신 관계(君臣之義)를 끊는 것이라고 사회적 책임감(爲國)도 고려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왕양명은 소예의 의지를 충분히 이해하였기에 이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왕양명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서 개인마다 선택할 여지를 남겨주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왕양명, 「批提學僉事邵銳乞休呈」(正德十五年, 1520, 49살 正月) :
據江西按察司呈,看得提學僉事邵銳求歸誠切,堅守「考槃」之操,而按察使伍文定挽留懇至,曲盡緇衣之情。是亦人各有志,可謂兩盡其美。然求歸者,雖亦明哲保身,使皆潔身而去,則君臣之義或幾乎息。挽留者,雖以爲國惜賢,使皆靦顏在位,則高尚之風亦日以微,況本院自欲求退而未能,安可沮人之求退?
왕양명은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명철보신하려고 아버지께 여요현에 있는 전답을 아들들에게 분배할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왕화 나이도 65살을 넘었고 계모 조씨와 양씨의 자녀들도 성장하여 북경 국자감과 소흥부 학교에 다니고 몇몇은 결혼하였습니다. 아마도 왕화가 재산을 조카들에게도 나누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왕양명의 서신 4통을 읽어보면 왕양명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속경남 선생도 말하였듯이 서신에는 왕양명의 문집이나 역사 서적에는 없는 내용도 많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서신들 가운데 북경에서 41살(1512) 4월에 보낸 서신이 중요합니다. 왕양명은 명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실상 왕양명은 정덕 황제에 대하여 실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덕 연간 말기에 일어난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 반란에서도 머뭇거리고 정세를 관망하였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명나라 정덕 연간에도 많은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농민 수십만 명이 가담하였습니다. 모두 관군에게 진압되었습니다. 왕양명도 40대에는 강서성 감주(贛州)에서 장군으로서 이민족과 농민의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학계에서 명나라 농민전쟁과 계급투쟁 연구자들은 왕양명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속이고 신의 없고 간교하고 잔인하였다고 나쁘게 평가합니다. 물론 왕양명이 감주에서 한족 평민과 이민족의 여론을 참작하여 우대정책을 펼쳤던 기록도 있습니다.
王陽明
1509年閏9月,陞廬陵知縣。
1510年3月18日,到廬陵。
1510年10月下旬,至北京,居大興隆寺。
1510月10月,陞南京刑部四川清吏司主事。
1510年11月,至南京刑部四川清吏司主事。
1510年12月,由楊一清薦,陞吏部驗封清吏司主事。
1511年2月,至北京,寓長安灰廠。
1511年3月,偕春遊,夜宿功德寺。
1511年10月,由楊一清薦,陞文選清吏司員外郎。
1512月正月,遊香山,登玉巖。
1512年3月,陞吏部考功清吏司郎中,自是四方士子來學日眾。
1512年12月8日,陞南京太僕寺少卿。
1512年12月中旬,便道歸省,與徐愛同舟返越。
1513年2月,歸至紹興。
1513年5月,偕徐愛赴餘姚龍泉山,作天台、雁蕩之遊。
1513年10月22日,到滁州。
徐愛
1512年正月,入京,見陽明受業。
1512年6月,祁州知州考滿進京。
1512年11月,陞南京兵部員外郎,編定傳習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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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華의 뇌물사건과 사직
明、『武宗實錄』,卷74︰
正德六年(1511)四月辛卯(12日),書辦官劉淮以瑾黨繫獄,詞連原任戶部尚書致仕顧佐、刑部尚書致仕屠勳、刑部尚書韓邦問、南京吏部尚書致仕王華、刑部右侍郎致仕沈銳、先布政使降兩淮運司同知陸珩等,皆嘗托淮(劉淮)行賂於瑾者。命各巡按御史逮治,俱贖杖釋遣。
정덕 6년(1511) 4월 신묘일에 서판관 유회(劉淮)가 환관 유근(劉瑾)에게 협조한 무리이기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진술서에는 호부 상서 퇴임한 고좌(顧佐), 형부 상서 퇴임한 도훈(屠勳), 형부 상서 퇴임한 한방문(韓邦問), 남경 이부 상서 퇴임한 왕화(王華), 남경 형부 우시랑 퇴임한 심예(沈銳), 포정사에서 양회 운사 동지 퇴임한 육형(陸珩) 등이 유회를 통하여 환관 유근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한다. 황제는 각 지역의 순안어사가 이들을 체포하여 죄를 조사하고 모두 장형(杖刑)을 돈으로 속죄시키고 풀어주라고 하였다.
國榷,卷48︰
正德六年(1511)四月辛卯,前戶部尚書顧佐、刑部尚書屠勳、韓邦問、南京吏部尚書王華、刑部右侍郎沈銳,皆賂瑾,見獄詞,各下巡按御史,論贖。
王華
1509年5月7日,降為南京吏部右侍郎。
1510年9月,致仕王華,復原南京吏部尚書。
1511年4月12日,劉淮奏王華等行賂劉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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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경에서 40살(1511) 5월 3일에 아버지께 올린 서신 :
서울 북경에 머물고 있는 아들 왕수인은 백배 절을 올리고 아버님 앞에 서신을 올립니다.
지난달에 종복 왕수(王壽)와 내융(來隆)이 북경을 떠나 매제(徐愛, 1487-1518)가 근무하고 있는 하북성 기주(祁州, 현재 安國市)에 들렀다가 내려가서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정을 계산하면 곧 집에 도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계모 조씨)의 일상생활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다고 들어 위안이 됩니다. 아들들은 모두 평안합니다.
며느리들(왕수인 부인과 태학생 王守儉의 부인 및 사촌 형제들의 부인들)는 북경에 오지 않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꼭 오겠다고 하여 말리지 못하면 종복 1명과 제 처에게 옷 한두 벌을 갖고 짐 없이 가볍게 보내세요. 저는 북경에서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작년에 강서성 여릉현에 찾아왔었을 때처럼 먼 길을 왔는데 헛고생만 할 것입니다. 내융이 떠난 뒤에 여기에는 종복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 처가 오지 않겠다면 종복 1명에게 겨울옷과 여름옷을 갖고 급한 배편으로 보내주세요.
아들은 최근에 체력(精神氣血)이 많이 떨어지고 허리뼈 아픈 것도 4-5년이나 되었는데 통증이 요즘 더욱 심합니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요즘 정국이 어렵고 제 몸도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소흥부에 누각을 지으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나무 심듯이 고생이 크실 테니 단층집을 짓는 것도 좋습니다.
여요현에 있는 전답을 분배하시는 일은 어떠십니까? 아무래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 경작시키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제(徐愛) 가족은 지금 기주에서 평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회계현 지현 이씨가 가는 편에 평안하다는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고향에 돌아가서 아버지를 모실 날을 기약하지 못하여 글을 마치면서 몹시 그립습니다.
1、寓都下男王守仁百拜書上父親大人膝下(1511년 5월 3일)︰
前月,王壽與來隆去,從祁州(四川省)下船歸,計此時想將到家矣。邇惟祖母老大人、母大人起居萬福為慰。男輩亦平安。媳婦輩能遂不來極好,倘必不可沮,只可帶家人,媳婦一人,衣箱一二隻,輕身而行。此間決不能久住,只如去歲江西,徒費跋涉而已。來隆去後,此間卻無人,如媳婦輩肯不來,須遣一人帶冬夏衣服,作急隨便船來。男邇來精神氣血殊耗弱,背脊骨作疼,已四五年,近日益甚。欲歸之計,非獨時事足慮,兼亦身體可憂也。聞欲起後樓,未免太勞心力,如木植不便,只蓋平屋亦可。餘姚分析事,不審如何?畢竟分析為保全之謀耳。徐妹夫(徐愛)處甚平安。
因會稽李大尹行,便奉報平安。省侍未期,書畢,不勝瞻戀之至。
五月三日,男王守仁百拜。
출처 : 手札真跡,藏中國歷史博物館,『陽明文集』失載。
재인용 : 속경남, 『왕양명 연보 장편』, 616-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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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왕양명이 40살(1511) 가을에 매제 서애에게 보낸 서신 :
서신을 받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머니께서 인자하시고 후덕하시기에 복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제를 생각하면 어찌 감당하시겠습니까! 어찌 감당하시겠습니까!
제가 급히 의사를 찾아보니 훌륭한 의사는 하씨(夏氏)가 가장 낫습니다. 하씨 의사가 관청 일 때문에 곧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반나절 정도 늦게 출발하여 기주에는 3일 뒤에는 도착할 것입니다. 하늘도 어머니를 아신다면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건강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회복하시지 못하면 어찌합니까! 어찌합니까!
종복 내인(來融)과 의사 하군(夏君)이 먼저 출발하고 어머니의 오라버니와 아이들은 뒤따라 갑니다.
황급한 상황에 말에 순서가 없고 하고 싶은 말도 다하지 못합니다.
왕수인은 훌륭한 매제에게 고개 숙여 절을 올립니다.
得書,驚惶莫知所措。固知老親母(繼母趙氏)仁慈德厚,福祿應非至此。然思曰仁,何以堪處!何以堪處!急走請醫,相知之良,莫如夏者。然有官事相絆,不得遽行,未免又遲半日,比至祁且三日。天道苟有知,應不俟渠至,當已平復。不然,可奈何!可奈何!來人(來融)與夏君先發,趙八舅和兒輩隨往矣。
惶遽中,言無倫次,亦不能盡。
守仁頃首曰仁太守賢弟。
출처:『三希堂法帖』,『陽明文集』失載。
재인용 : 속경남, 『왕양명 연보 장편』, 620쪽.
* 祁州 북경 지도
(북경과 기주의 거리는 190km이고 당시에는 3일이면 도착하였습니다.)
* 속경남 선생은 이 서신이 왕양명 40살(1511) 7-8월이라고 고증하였습니다.
첫째, 서애가 기주(祁州) 지주로 있을 때(1509년 6월-1512년 6월)이다.
둘째, 조써 어머니의 오라버니(趙八舅)가 1512년 윤5월에는 여요현 전답 분배를 마쳤다. 따라서 이 서신은 1511년에 쓴 것이다.
셋째, 왕양명이 1511년 5월 3일에 아버지께 올린 서신에서 “어머니께서 일상생활을 잘하신다.”고 말한 것을 보면 조씨 어머니가 소흥부에 있다. 따라서 7-8월에 조씨 어머니가 기주에 갔다가 병이 난 것이다. 다시 말해 조씨 어머니가 1511년 5월에는 소흥부에서 잘 지내다가 7-8월에 하북성 기주에 있는 딸을 돌보려고 왔다가 병이 났다고 고증하였습니다.
그런데 7-8월이라고 추정한 근거는 부족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첫째, 서애가 1512년 6월까지 기주에서 근무하였다. 둘째, 1511년 5월 3일 서신에서 조씨 어머니는 소흥부에 있다. 셋째, 5월 3일 서신에서 왕양명이 소흥부에 있는 며느리들을 북경으로 보내라고 부탁하였다. 넷째, 1512년 4월 서신에서는 여동생(王守讓, 서애의 처)가 북경에 머물면서 요양하여 병이 나았고 1511년 8월에 임신하였다.
다시 말해 1511년 5월 3일 서신에 따르면 소흥부에 있는 아버지가 아들 왕양명의 서신을 받고 조씨 부인 및 며느리들과 다른 아들들을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조씨 부인은 북경에 가지 않고 북경 가까이 있는 기주의 딸네 집에 가서 머물다가 병이 났습니다. 딸은 5월까지는 기주에서 잘 지냈고 유산하였다가 8월에 다시 임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돌봐줄 사람을 찾아 북경에 와서 1512년 4월에는 왕양명 집에 머물면서 올케(왕양명 부인)의 간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실을 추정하면 딸은 1511년 5월 이후에 유산하였기에 조씨 어머니가 기주에 와서 딸을 돌봐주다가 병이 났습니다. 딸이 8월에 임신하고 얼마 뒤에 북경에 올라왔습니다. 왕양명이 5월 3일에 보낸 서신이 소흥부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15일 내지 1개월이 걸리고 식구들이 기주 또는 북경에 도착하려면 비슷한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조씨 부인이 기주에 왔을 때 빨라도 6월 초순입니다. 딸이 북경에 온 때는 빨라도 1511년 가을이고 늦어도 1512년 4월 이전입니다. 종합하면 조씨 부인이 병이 났던 시기는 1511년 6월부터 1512년 4월 이전입니다. 따라서 속경남 선생이 고증한 대로 1511년 7-8월이라고 기간을 짧게 잡을 수 없습니다. 짧게 잡는다면 1511년 6월부터 가을까지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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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북경에서 41살(1512) 4월에 아버지께 올린 서신 :
모씨(毛氏) 추관(推官)이 북경에 왔기에 아버지께서 일상생활하시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듣고 크게 안심하였습니다. 어린 동생들이 평안하지 못하고 할머니께서 늙으신 것도 걱정이 됩니다.
저는 이부 상서 양일청(楊一淸, 1454-1530) 선생의 추천을 받아 이부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사직하고 싶어도 사직할 수 없어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하는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하는데 국가의 어려움을 보고도 사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상황을 따져보면 사직할 정당한 이유도 있기에 사직할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라면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온 힘을 다 바쳐야 합니다. 어찌 상황을 보면서 이럴까 저럴까 관망하다가 사직할 길만 찾겠습니까?
며칠 전에는 얼굴도 모르는 학생이 저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직언하고 충간하지 못하고 사직하지도 못하면서 국가가 망하는 꼴을 앉아서 보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지금 가난하여 월급 받으려고 관직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학술을 강연하려고 있는 것입니까? 입장을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한평생 쌓은 것이 모두 무너질 텐데 그때는 후회하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서신을 읽으면서 정말로 부끄럽고 한심하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도 자주 이 문제를 꺼내서 저를 풍자합니다. 제가 평소에 좋은 일을 하지 못하고 헛된 명예를 훔쳤기에 이런 비난과 풍자를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대부들은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아무나 지목하고 비난합니다. 마침 제가 관직에 그대로 있을지 사직할지 진퇴양난에 있을 때는 어떻게 대답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을 반성해보면 세상을 속이고 헛된 명예를 훔친 응보라고 생각합니다. 『주역』 해괘(解卦)에서 말하듯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좋은 수레에 탔더니 도둑들이 덤빈다.(負且乘,致寇至)”는 것처럼 관직이 부담스럽습니다.
북경 근처 지역(北直隷, 하북성)의 유육(劉六)과 육칠(劉七) 형제 농민반란군과 산동성 지역의 양호(楊虎) 농민반란군이 1510년 8월에는 패주(霸州)에서 북경 가까이 쳐들어오면서 출몰하는 것이 보통이 아닙니다. 하남성에서는 장군〔副摠兵 都督 馮楨〕이 1511년 3월에 진압 전투에서 죽었고 반란군 세력이 더욱 커졌습니다. 변방을 지키는 군대(遼東、宣府、大同、延綏 4개 사령부)를 진압 전투에 동원하여 내지에서 오래 머물며 진압하였기에 피곤이 쌓이고 군기가 해이하여 전투 의지력도 없고 원성만 높은데 변경지역 장군들도 어떤 대책이 없습니다.
진압하는 관군에서 전염병이 돌고 군량미도 부족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창고가 텅텅 비었기에 황실에서 지원하는 비용도 날마다 달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황실에서는 황제의 양자(1512년 9월에 127명), 티베트 승려, 연예인, 여자배우 모두 궁궐 안에서 사는데 몇천 명씩 되며 좋은 비단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습니다.
또 양자들을 위하여 왕부(王府) 건물을 짓고, 티베트 승려들을 위하여 탑을 세우고 절을 세우는데 비용을 받지 못하면 황실의 외척 집을 찾아가서 돈을 뜯고 환관 집에 찾아가서 돈을 뜯습니다. 또 양자들은 부하들을 이끌고 태감들의 재산도 빼앗고 또 황태후 장씨(효종의 황후이며 무종의 생모 孝康敬皇后, 1471-1541)를 찾아가서 돈을 뜯습니다. 또 황태후를 억지로 연회에 모시고 가서 여러 배우에게 상금을 주라고 요구하고, 또는 황태후를 속여 외출하게 한 뒤에 몰래 사람들을 태후궁에 들여보내 재물을 찾아서 모두 훔쳐갔습니다. 황태후가 궁궐로 돌아오려고 하여도 궁궐 문을 열어주지 않거나 돈을 빼앗은 뒤에 풀어주기도 하였습니다. 태후는 슬펐으나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합니다. 황태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붙잡아 와서 많은 상금을 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때로는 뇌물을 주고 모면하면 다행입니다.
궁궐 안팎에서는 북소리와 대포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큰바람이 부는 날이나 질병이 도는 하루 이틀 동안에만 멈추었습니다. 관원과 백성은 습관이 되었으나 지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환관 장영(張永, 1465-1529)이 환관 유근(劉瑾)을 몰아낸 공로로 환관의 우두머리가 되어 일을 꾸미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장영이 형 장부(張富)를 태안백(泰安伯)에, 아우 장용(張容)을 안정백(安定伯)에 세우고 2개 도독, 도지휘, 지휘 수십 명, 천호와 백호 수십 명의 좋은 집과 분묘 및 점포들이 북경 밖 몇 리까지 퍼져있습니다. 북경 안에서만 30곳에 시장을 만들고 시장마다 가게 몇백 곳을 열었습니다.
환관 곡대용(谷大用)과 환관 마영성(馬永成, 1468-1526)도 집안 세력이 비슷하며 지붕 서까래 높이도 마주 볼 만큼 비슷합니다. 궁실 짓는 토목공사를 전례 없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대학사들도 환관들의 지시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데 점차 환관 유근 시절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간교하기가 유근보다 심하며 아랫사람들의 불만은 윗사람에게 돌리고 아랫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인심을 얻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황하가 봄에 갑자기 3일 동안 맑았습니다.〔1511년 12월에 황하가 淸口부터 柳浦까지 90리가 3일 동안 맑았습니다.〕 패주(霸州) 등 여러 곳에서는 12번이나 지진이 났고 각기 지방정부에서는 지진이 나서 산이 무너지고 하늘에서는 운석들이 떨어졌다고 날마다 보고하였습니다.
전국 13개 성(省) 가운데 우리 절강성과 남경 지역에서만 농민반란이 없습니다.
최근에는 변방지역 4개 사령부〔정덕 황제가 환관 곡대용을 시켜 遼東、宣府、大同、延綏 4개 사령부 군대를 북경 수비에 동원하였음〕의 장군들이 몹시 흉악하여 군사력을 믿고 말을 듣지 않고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려고만 생각하고 더구나 이들은 내지에 주둔한 뒤에는 변경지역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동생〔王守讓이며 계모 趙氏가 낳은 딸, 徐愛에게 시집감〕은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목 메여 울다가 며칠 지나니 기쁘게 잘 지내고 아픈 병〔유산 우울증?〕도 많이 나아지고 안색도 회복하였습니다. 아마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부모 형제를 보고 싶은데 만나지 못하여 아팠던 것 같으며 다른 병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남경으로 이직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곧 함께 남쪽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더욱 기뻐합니다. 아픈 것은 약을 쓸 것도 없이 나을 것 같습니다. 최근 8월에 다시 회임하여 아주 기뻐하고 있습니다.
매제(徐愛)는 6월에야 3년 근무 기간을 마칩니다. 매제는 하북성 기주(祁州)에도 농민반란이 많아 지주(知州) 관직을 지내기 어려워서 얼른 지주 관직에서 빠져나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북경(京兆) 관직으로 옮기려면 지주로서 3년 동안 받은 봉급을 모두 날려야 합니다.〔徐愛는 文官 正七品의 知州이며 법적으로 연봉 쌀 90가마를 받지만 실제로는 거의 받지 못하고 낮게 받았습니다. 지방관이 경조관으로 옮기려면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사는 비용을 말한 것 같습니다.〕 또는 승진하여 북경 관직으로 옮기려면 자격이 부족합니다. 아무튼지 6월에 3년 근무 기간이 끝난 뒤에 천천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매제는 북경보다는 남경으로 옮기려는데 이 생각은 정말로 옳습니다. 저도 남경 관직으로 옮길 수 있으면 함께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부 상서 양일청(楊一清, 1454-1530, 號邃庵) 어른께서도 최근에는 사직하시려는데 까닭이 있습니다. 환관 장영(張永)의 세력이 날로 커져서 분명히 무너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양일청 어른이 이부 상서에 취임한 것도 실제로는 환관 장영이 추천한 것입니다. 장영이 무너지면 양일청 어른도 화를 입는 것은 당연하니 어찌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중간에서 저도 말씀드리지 못할 일이 있습니다. 마치 청각 장애인이 귀신을 보고도 주위 사람들에게 설명하지도 못하고 혼자 무서워하는 것과 같습니다.〔왕양명을 여릉현 지현에서 북경 이부 관원으로 추천한 사람이 양일청이기 때문입니다. 왕양명이 환관 장영과 얽힌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이동양(李東陽, 1447-1516) 등 원로들은 예전에 환관 유근에게 비석을 세워주었다는 일 때문에 조사를 받고 있는데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동양 원로의 현재 영향력이 환관 장영에게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양일청 선생은 환관 장영의 추천을 받았기에 부끄러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궁궐 안에서는 황제의 양자(養子), 총애를 받은 젊은 관원과 높은 관원 세 부류가 서로 결탁하였는데 곧 큰 난리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양자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야만 제 목숨을 겨우 지킬 수 있습니다. 세상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모두 명나라 왕조의 운명이 다되었기 때문인가 봅니다.〔왕양명은 앞으로 30-40년 뒤에는 명나라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집안의 모든 일은 세상에서 숨어 살 계획을 미리 짜야 합니다. 동생들에게 공부를 시켜야 하지만 농사짓는 일도 배우고 소박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혹시 깡패들이 찾아오더라도 어울리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이 올바르고 믿음이 있고 욕심이 없는 현명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나쁜 습관을 고치고 오로지 적선하고 복을 짓는 것에 힘써야 하며 남에게 양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 30-40년 뒤에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제가 말씀드린 명나라가 멸망한다는 운세는 모두 실제로 보았던 상황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며 나중에라도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점쟁이들처럼 옛날 예언서를 보고 마구잡이로 앞날을 점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사람들은 명나라가 멸망하려는 여러 조짐을 보면서도 멸망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고향 여요현의 농지 분배는 일찌감치 아들들에게 구획을 나누어 분배하고 경작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아버지께서 절대로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아들들에게 불쌍한 마음, 공평하고 정직한 마음, 양보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매듭을 지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속이 편안하십니다. 이것저것 생각하시다가 끝을 내지 못하시면 걱정거리가 생길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가서 아버지를 모실 날이 점점 다가오지만 언제 길을 떠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머리를 들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립습니다.
아들 왕수인 절을 올리고 서신을 씁니다.
바깥에 나가실 때 쓰시는 모자와 망건을 함께 보내드립니다.
3、父親大人膝下︰
毛推官來,□(聞)大人早晚起居出入之詳,不勝欣□(慰)。弟羔尚不平,而祖母桑榆暮□(景),不能□。
為楊(楊一清)公所留,養病致仕,皆未能遂,殆亦命之所遭也。人臣以身許國,見難而退,甚所不可,但於時位出處中,較量輕重,則亦尚有可退之義,是以未能忘情。不然,則亦竭忠盡道,極吾心力之可為者死之而已。又何依違觀望於此,以求必去之路哉!
昨有一儒生,素不相識,以書抵男,責以“既不能直言切諫,而又不能去,坐視亂亡,不知執事今日之仕為貧乎?為道乎?不早自決,將舉平生而盡棄,異日雖悔,亦何所及?”等語,讀之,良自愧歎。交遊之中,往往有以此相諷者,皆由平日不務積德,而徒竊虛名,遂致今日。士大夫不考其實,而謬相指目,適又當此進退兩難之地,終將何以答之?反己自度,此殆欺世盜名者之報,『易』所謂“負且乘,致寇至”也。
近甸及山東,盜賊奔突,往來不常。河南新失大將,賊勢愈張。邊軍久居內地,疲頓懈弛,皆無鬥志,且有怨言,邊將亦無如之何。
兼多疾疫,又乏糧餉,府庫內外空遏,朝廷費出日新月盛。
養子、番僧、仱人、優婦,居禁中以千數計,皆綿衣玉食。
又為養子蓋造王府,番僧崇飾塔寺,資費不給,則素索之戚里之家,索之中貴之家。又帥養子之屬,遍搜各監內臣所蓄積,又索之皇太后。又使人請太后出飲,與諸優雜劇求賞,或使人紿太后出遊,而密遣人入太后宮,檢所有盡取之。太后欲還宮,令宮門毋納,固索錢若干,然後放人。太后悲咽不自勝,復不得哭。又數數遣人請太后,為左右所持,不敢不至,至即求厚賞不已。或時賂左右間,得免請為幸。
宮苑內外,鼓噪、火炮之聲,晝夜不絕,惟大風或疾病,乃稍息一日二日。臣民視聽習熟,今亦不勝駭異。
永(宦官張永)齋用事,勢漸難測,一門二伯,兩都督,都指揮、指揮十數,千百戶數十、甲第、墳園、店舍,京城之外,連亙數里,城中卅餘處,處處門面,動以百計。
谷(谷大用)、馬(馬永成)之家,亦皆稱是,榱角相望,宮室土木之盛,古未有也。
大臣趨承奔走,漸復如劉瑾時事。其深奸老滑,甚於賊瑾,而歸怨於上,市恩於下,尚未知其志之所存,終將何如。
春間,黃河忽清者三日,霸州諸處一日動地十二次,各省來奏山崩地動、星隕災變者,日日而有。
十三省,惟吾浙與南直隸無盜。
近聞□(邊)中諸□(將)頗黠桀,按兵不動,似有乘弊之謀,而各邊謀將又皆頓留內地,不得歸守疆場,是皆有非人謀所能及者。
七妹(王守讓)已到此,初視悲咽者久之,數日來喜極,病亦頓減,顏色遂平復。大抵皆因思念鄉土,欲見父母兄弟而不可得,遂致如此,本身卻無他疾。兼聞男有南圖,不久當得同歸,又甚喜,其羔想可勿藥而愈矣。又喜近復懷妊,當在八月間。
曰仁(徐愛)考滿在六月間。曰仁以盜賊難為之,故深思脫離州事。但欲改正京職,則又可惜虛卻三年歷俸,欲遷陞,則又覺年資尚淺。待渠考滿後,徐圖之。曰仁決意求南,此見亦誠是。男若得改南都,當遂與之同行矣。
邃庵(楊一清)近日亦若求退事,勢亦有不得不然。蓋張已盛極,決無不敗之理,而邃(楊一清)之始進,實由張引,覆轍可鑒,能無寒心乎?中間,男亦有難言者,如啞子見鬼,不能為旁人道得,但自疑怖耳。
西涯(李東陽)諸老,向為瑾賊立碑,槌磨未了。今又望塵莫及張德功,略無愧恥,雖邃老亦不免。
禁中,養子及小近習與大近習交搆,已成禍變之興,旦夕叵測。但得渡江而南,始復是自家首領耳。時事到此,亦是氣數。
家中凡百,皆宜預為退藏之計。弟輩可使讀書學道,親農圃樸實之事。一應市囂虛詐之徒,勿使與接,親近忠信恬淡之賢,變化氣習,專以積善養福為務,退步讓人為心。未知三四十年間,天下事又當何如也。
凡男所言,皆是實落見得如此,異時分毫走作不得,不比書生據紙上陳跡,騰口漫說。今時人亦見得及,但信不及耳。
餘姚事,亦須早區劃。大人決不須避嫌,但信自己惻怛之心、平直心、退步心,當時了卻,此最灑脫,牽纏不果,中間亦生病痛。
歸侍雖漸可期,而歸途尚爾難必,翹首天南,不勝瞻戀。
男守仁拜書。外山巾及包頭二封。
출처 : 『式古堂書畫彙考』,「書考」,卷25,『陽明文集』失載。
재인용 : 속경남, 『왕양명 연보 장편』, 661-6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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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북경에서 41살(1512) 윤5월 11일에 아버지께 올린 서신 :
서울 북경에 머물고 있는 아들 왕수인은 백배 절을 올리고 아버님 앞에 서신을 올립니다.
아버지께서 항주에서 보낸 사람이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일상생활과 유람하시는 것을 자세히 물어서 듣고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얼마 뒤에 서신을 받았습니다. 작은 아버지(24번째 叔父)께서 돌아가셨다는데 미리 예견된 일이지만 어찌하여 지금 돌아가셨는지요? 정말로 좋은 일들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인생이 어디에 맡겨놓은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잘난 사람들은 마음이 가는 대로 놀러다니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타고난 진기(眞氣)를 기르면서 기쁘게 사는 이상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王華, 1446-1522, 1512년 66살)께서도 일흔 살이 다가오고 상장례(喪葬禮)에 참여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편안히 즐겁게 지내시고 경치 좋은 곳에 놀러 다니셔야 합니다. 시문을 지으시는 사천(謝遷, 1450-1531) 어른과 풍난(馮蘭) 어른이라도 때때로 찾아가셔서 가까운 회계산이나 감호(鑑湖) 등 여러 곳에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놀러 가셔서 세상 근심을 씻으시고 기분을 바꾸시는 것이 연로하신 할머니께도 좋고 자손들에게도 좋습니다.
아들들은 북경에서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으며 여동생(王守讓)도 작년 8월보다는 건강이 더욱 좋아졌습니다. 시어머니와 관계도 많이 화목해졌습니다. 사위(徐愛)는 다음달 초순에 3년 근무기간을 마치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북경에 온 뒤에 상의하여 결정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남성 지역의 농민반란군〔楊虎가 산동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유육과 유칠 형제 반란군과 연합하였고, 양호가 나중에는 하남성 지역에서 활약하다가 죽은 뒤에는 그의 부인이 반란군을 이끌었기에 양과부군이라고 불렀음〕은 조금 평정되었으나 잔당이 있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산동성 지역의 농민반란군 세력〔劉六와 劉七 형제와 齊彦名 등이 하남성에서 1510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키고 산동성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512년 8월에 진압됨〕도 조금 줄었으나 유칠을 끝내 잡지 못하였습니다.〔劉六은 1512년 윤5월 호북성 黃州에서 싸우다가 죽고, 劉七은 7월 18일에 강소성 通州 狼山에서 싸우다가 죽음〕 사천성 지역과 강서성 지역에서도 반란을 진압하였다는 승전보가 올라오지만 새로 일어나는 반란도 적지 않습니다. 군량미가 부족하고 군마도 부족하고 변경지역 군대는 진압하느라고 지치고 유랑민은 더욱 곤궁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뭐라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아주 평안하며 태평세월을 누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농민반란을 더욱 가볍게 여기고 태만하게 놀러 다닐 것입니다. 그럴수록 농민반란은 더욱 많이 일어나고 유언비어는 날로 심할 것입니다.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무슨 희망을 갖겠습니까?
사촌 동생 수성(王守誠)의 처에게는 부탁할 것이 없습니다. 장씨 매부도 혼자 왔다가 돌아갔습니다.
제 처의 곁에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저에게 보내서 함께 살도록 해주세요.
사촌 동생 수온(王守溫)은 벌써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듣기로는 고향 여요현의 집과 땅을 벌써 나누어 주셔서 각자 관리하기에 황폐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제야 재산 분배하는 일 하나가 끝났습니다.
올해 토지 조사에서는 척박한 토지와 친척들의 기탁 토지는 법에 따라 제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탁을 받지 않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명대에는 토지 세금을 줄여 탈세하려고 세금을 내지 않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토지의 명의를 기탁하는 사례가 아주 많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흉흉하니까 자손들이 안전하게 살도록 계획을 세우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전답이 아주 적은 것도 나중에는 자손들에게 피해가 덜 갈 것입니다.
외삼촌(계모 趙氏의 오라버니)의 전답은 소작농에 따라 명의를 나누었으나 그들이 명의를 다시 돌려줄 것입니다. 반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사직하겠다고 통보하였는데 호부 창장(倉場)에서 기다리면 곧 남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사촌 동생(王守儉)이 아픈 것은 요즘 어떤지 궁금합니다. 몸이 튼튼하지 못하니 공부하는 것도 느슨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드시 왕문원〔王文轅은 절강성 山陰縣 사람이며 字가 司輿이고 병약하여 정좌를 잘하였고 왕양명 31살 때부터 가까운 벗이었습니다.〕에게 보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욕심을 줄이는 수양공부를 배우면 나중에 좋은 지식인이 될 것입니다. 반드시 열심히 공부하여 관직에 나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우 수문(王守文, 계모 趙氏 소생)과 수장(王守章, 계모 楊氏 소생)도 좋은 도덕 선생에게 맡기고 과거시험 공부는 하지 않아도 좋고 함양공부와 강론을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요즘 사람들의 자제가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까닭을 보니까 모두 부형들이 가르쳐주는 것이 과거시험 공부뿐이고 기대하는 것도 관원이 되라는 것뿐입니다.
수문의 사람 됨됨이를 말하면 성격이 별난데 너무 무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잘 지낸다는 소식을 알려드리고 곁에서 모시지 못하여 서신을 마치면서 더욱 그립습니다.
윤5월 11일 아들 수인 절을 올리고 서신을 올립니다.
4、寓都下男王守仁百拜上父親大人膝下︰
杭州差人至,備詢大人起居遊覽之樂,不勝喜慰。尋得書,迺有廿四叔□□□□□□固自有數,胡迺適□□時,信乎樂事不常,人生若寄。古之達人所以適情任性,優遊物表,遣身家之累,養真恬曠之鄉,良有以也。
伏惟大人年近古稀,期功之制,禮所不逮,自宜安閑愉懌,放意林泉。木齋(謝遷)、雪湖(馮蘭)詞老,時往一訪,稽山、鑑湖諸處,將出一遊。洗脫世垢,攝養天和,上以增祖母之壽,下以垂子孫之福,慶辛!慶幸!
男等安居如常,七妹當在八月,身體比常甚佳。婦姑之間,近亦頗睦。曰仁考滿,亦在出月初旬,出處去就,俟曰仁至,計議已定,然後奉報也。
河南賊稍平,然隱伏者尚難測。山東勢亦少減,而劉七竟未能獲。四川諸江(西)雖亦時有捷報,而起者亦復不少。至於糧餉之不繼、馬匹之乏絕、邊軍之日疲、流氓之愈困,殆有力不可勝言者。而廟堂之上,固已晏然,有坐亨太平之樂,自是而後,將益輕禍患,愈肆盤遊,妖孽並興,讒諂日甚。有識者復何所望乎!
守誠妻無可寄託,張妹夫只得自行送回。
大娘子早晚無人,須搬渠來男處,將就同住。
六弟(王守溫)聞已起程,至今尚未見到。
聞餘姚居址,亦已分析,各人管理,不致荒廢,此亦了當一事。
今年造冊,田業之下瘠者、親戚之寄託者,惟例從刊省,拒絕之為佳。
時事如此,為子孫計者,但當遺之以安,田業鮮少,為累終寡耳。
趙八田近因農民例開,必願上納,阻之不可。
昨日已告通狀,想亦只在倉場之列,不久,當南還矣。
九弟(王守儉)所患,未審近日如何?身體若未壯健,誦讀亦且宜緩,須遺之從黃司輿(王文轅)遊,得清心寡欲,將來不失為純良之士,亦何必務求官爵之榮哉!
守文、守章,亦宜為擇道德之師,文字且不必作,只涵詠講明為要。
男觀近世人家子弟之不能大有成就,皆由父兄之所以教之者陋,而望之者淺。
人來說,守文質性甚異,不可以小就待之也。
因便報安,省侍未期,書畢,不勝瞻戀。
閏五月十一日,守仁百拜書。
出處:陽明手跡石刻拓本,藏貴州省博物館。另有拓本,藏日本九州大學圖書館、蓬累軒姚江雜篡著錄,陽明文集失載。
재인용 : 속경남, 『왕양명 연보 장편』, 671-6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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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德 연간 劉六과 劉七 형제와 楊虎의 農民起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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