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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明學錄』 제12-13조︰왕양명 42살 저주(滁州) 강학과 명예욕(傲) 습기(習氣) 제거의 어려움
2021년 5월 24일
『陽明學錄』 제12조︰
『전습록』 제19조에서 맹원(孟源, 남경 출신)은 자신이 옳고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 병이 있기에 왕양명 선생이 여러 번 고치라고 타일렀습니다. 하루는 조심하고 고치라고 타일렀는데 어느 학생이 자신의 최근 공부를 왕양명 선생께 아뢰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때 맹원이 왕양명 곁에 있다가 “이것은 태어날 때 타고난 재산(本心 또는 靈明)을 되찾는 것입니다.”
왕양명이 말하길 “너의 병이 다시 도졌구나.”고 하였습니다.
맹원이 안색을 바꾸며 마음속에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왕양명이 말하길 “너의 병이 다시 도졌구나.”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양명이 다시 깨닫도록 일러주며 말하길 “이것은 네 일생의 아주 큰 마음 병의 근원이다. 가로세로 3m 좁은 땅에 커다란 나무가 있으면 비와 이슬 및 땅의 거름을 받아 잘 자라면서 뿌리를 튼튼하게 한다. 그런데 나무 주위에 좋은 곡식을 심으면 곡식 위쪽은 나뭇잎에 햇볕이 가리고 아래는 나무뿌리에 곡식 뿌리가 얽히는데 곡식이 어떻게 잘 자라겠느냐? 반드시 나무를 베어버리고 잔뿌리마저 남기지 않아야만 곡식이 잘 자랄 수 있다. 베어내지 않고 아무리 김매주고 북돋아 주어도 나무뿌리만 기르는 꼴이 된다.”고 하였습니다.(陸澄 기록)
『陽明學錄』 제12조︰
(『傳習錄』)孟源有自是、好名之病,先生屢責之。一日警責方已,一友自陳日來工夫請正。源從旁曰:“此方是尋著源舊時家當。”先生曰:“爾病又發。”源色變,議擬欲有所辨,先生曰:“爾病又發。”因喻之曰:“此是汝一生大病根。譬如方丈地內,種此一大樹,雨露之滋,土脈之力,只滋養得這個大根;四傍縱要種此嘉穀,上面被此樹葉遮覆,下面被此樹根盤結,如何生長得成?須用伐去此樹,纖根勿留,方可種植嘉種。不然,任汝耕耘培壅,只是滋養得此根。”(陸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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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明學錄』 제13조︰
(『전습록』 제339조) 왕양명이 “사람의 마음 병 가운데 큰 병은 ‘내가 잘났다(傲, 오)’는 것이다. 아들로서 잘났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을 것이고 신하로서 잘났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임금님께 충성하지 않을 것이고 부모로서 잘났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자녀들에게 자상하지 않을 것이고 벗으로서 잘났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벗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순임금의 배다른 아우 상(象)과 요임금의 큰아들 단주(丹朱)가 모두 아버지를 닮지 못한 까닭은 잘났다고 생각하였기에 아버지를 닮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사람 마음이 원래는 천연의 이치가 곱고 밝으며 극히 작은 먼지조차 없으며 이것이 내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무아(無我)라는 것을 항상 새기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내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없도록 하여야 하며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 잘났다(傲)는 생각입니다. 옛날 성인들의 많은 좋은 점들이 많지만 중요한 것은 무아입니다. 내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야만 자신을 겸손하게(謙) 할 수 있습니다. 겸손(謙)은 모든 선(善)을 이루는 출발점이며 오만(傲)는 모든 악(惡)의 우두머리입니다.”고 하였습니다.(黃以方 기록)
『陽明學錄』 제13조︰
(『전습록』 제339조)先生曰:“人生大病,只是一傲字。爲子而傲必不孝,爲臣而傲必不忠,爲父而傲必不慈,爲友而傲必不信:故象與丹朱俱不肖,亦只一傲字,便結果了此生。諸君常要體此人心本是天然之理,精精明明,無纖介染著,只是一無我而已;胸中切不可有,有即傲也。古先聖人許多好處,也只是無我而已,無我自能謙。謙者眾善之基,傲者眾惡之魁。”(芳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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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록』 제105조) 왕양명이 말하길 “공부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마음의 병은 명예를 좋아하는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설간이 여쭙기길 “저는 지난해부터 이 병이 조금씩 나아졌고 최근에 자세히 살펴보니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남의 평론에 따라 사람이 되려고 하기에 칭찬을 들으면 기뻐하고 욕을 먹으면 답답해하는데 이 병이 도진 것입니까?”고 하였습니다.
왕양명이 대답하길 “정말 그렇다. 명예와 실제는 서로 상대되는데 실제에 힘쓰는 마음이 조금 무거우면 명예에 힘쓰는 마음이 그만큼 가벼워진다. 완전히 실제에 힘쓰는 마음이 있으면 명예에 힘쓰는 마음이 전혀 없게 된다. 실제에 힘쓰는 마음은 마치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사람이 마실 것을 찾는 것과 같으니 명예를 좋아할 여유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또 대답하길 “『논어、위령공편』 ‘군자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예가 실제와 어긋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고 하였는데 ‘칭(稱)’ 글자는 제4성으로 읽어야 하며, 『맹자、이루장 하』 ‘명성(聲聞)이 실제 행실보다 지나쳐 넘친 것을 군자는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실제 행실이 명성에 걸맞지 않을 때 살아있을 때는 고쳐서 때울 수 있는데 죽으면 때울 수 없다. 『논어、자한편』 ‘40대 50대에도 들은 것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공부를 배우지 못하였다는 뜻이며 명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소문났다(聞)는 것은 실행하였다(達)는 뜻이다.’ 어찌 이런 경지를 일반인에게 기대할 수 있겠냐는 뜻입니다.”고 하였습니다.(薛侃 기록)〕
〔先生曰:“爲學大病在好名。”侃曰:“從前歲自謂此病已輕,比來精察,乃知全未,豈必務外爲人,只聞譽而喜,聞毀而悶,即是此病發來?”曰:“最是。名與實對,務實之心重一分,則務名之心輕一分;全是務實之心,即全無務名之心;若務實之心,如饑之求食、渴之求飲,安得更有工夫好名?”又曰:“‘疾沒世而名不稱’,稱字去聲讀,亦‘聲聞過情,君子恥之’之意。實不稱名,生猶可補,沒則無及矣。‘四十五十而無聞’,是不聞道,非無聲聞也。孔子云‘是聞也,非達也’,安肯以此望人?”(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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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선생이 남경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왕양명을 비방하는 서신을 가져왔고 왕양명이 화를 냈는데 화 낸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말하길 “끝내 명예욕의 뿌리를 완전히 없애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왕양명은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 이렇게 절실하였습니다.(耿記,癸酉甲戌年間)((1513-1514년, 왕양명 42-43살)〕
〔先生在留都,人傳謗書,心動自愧,曰︰“終是名根消煞未盡。”自反深切如此。耿記,癸酉甲戌年間(1513-1514년, 왕양명 42-43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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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禮記、曲禮上』:“傲不可長,欲不可從,志不可滿,樂不可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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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2개 조목에 관하여 몇 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왕양명은 30대에는 질병을 치료할 목적에서 수양공부를 배웠으나 40대 초반부터는 습기(習氣, 宿根, 三毒)를 어떻게 제거할지를 수양공부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습니다. 왕양명은 41살(1512) 북경에서 황관(黃綰)과 습기(習氣)에 관하여 토론하였고 봄에 안남국에 사신 가던 담약수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습기를 어떻게 제거할지 또 일생에 습기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얼마나 답답하였으면 목이 메었습니다. 황관은 가을에 북경을 떠나 고향 절강성 태주부로 가던 길에 왕양명에게 올린 서신에서 숙근(宿根) 제거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왕양명은 습기의 근원이 나(我)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나(我)는 사실상 제7식을 말합니다.
왕양명은 43살(1514) 남경에서 강학할 때 “나 잘났다는 자오(自傲, self-expansion)”를 해결하는 방법이 “내가 잘못하여 미안하다는 자겸(自謙, humility, humbleness, self-abasement)”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오(自傲)를 비롯하여 내가 옳다거나(自是) 명예욕(好名, 務名, 名根) 같은 생각들은 나(我, 제7식)에서 나왔고 다시 나(我)를 키워(增上) 모든 악을 짓는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하여 미안하다는 자겸(自謙)이라는 마음 태도로 바꾸면 자오를 잠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성인이 되어야만 나(我)를 무아(無我)로 전환한다고 보았습니다. 사실상 유식 불교 전식성지(轉識成智)의 영향을 받아 해답을 찾은 것입니다. 물론 유가의 자겸(自謙)은 불교가 제8식의 원죄(原罪, 不淨門)를 인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왕양명은 아직 이 점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왕양명은 사람 마음에서 행동을 일으킨 동기(動機, motivation)가 명예욕인지 또는 실제 상황의 욕구인지를 구별하였습니다. 좋은 행동을 하더라도 명예욕에서 우러나온 동기가 있는데, 배고픈 사람과 목마른 사람이 밥과 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실제 상황의 동기와는 다르다고 구별하였습니다. 나 자신에게 절실한 실제 상황의 동기가 실학(實學)이라는 말로 바꾸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주자학 연구방법에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면 서로 지식과 이해를 경쟁하는데 이것은 명예심을 조장하는 결과를 불러옵니다. 사실상 왕양명은 자오(自傲)가 주자학의 지해(知解) 추구의 병폐라고 지적하고 학생들에게 정좌를 가르쳐서 자겸(自謙)을 느껴보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둘째, 왕양명은 습기 문제를 학생들의 정좌공부에도 적용하였습니다. 왕양명이 42살(1513) 10월 22일 남경 근처에 있는 저주(滁州) 태복시(太僕寺)에 도착하여 근무를 시작하였고 이듬해 4월 21일 남경 홍려시(鴻臚寺) 시경으로 승진하여 남경으로 가서 강학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왕양명의 강학과 정좌공부는 습기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 과제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정좌공부를 가르치면서 습기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왕양명은 학생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명예욕이며 명예욕의 현상이 『예기、곡례상』 “내가 옳고 잘났다는 생각이 길러지지 않도록 하라(傲不可長)”에서 말하는 “나 잘났다는 자오(自傲)”라고 보았습니다. 자오는 사실상 내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여기는 생각이 자라서 나 잘났다는 생각이 되며 결국에는 명예욕으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왕양명이 저주에서 강학할 때 맹원(孟源)이 아우 맹진(孟津)을 데리고 와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왕양명이 남경에서 강학할 때도 맹원이 다시 찾아와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어떤 학생이 수양공부에 관하여 왕양명에게 여쭙자 맹원이 곁에 있다가 나서서 “타고난 본심 또는 영명(舊來家當)을 찾아야 한다고 끼어들었고, 왕양명이 나무라자 또다시 어떻게 변명할까를 생각하였기에 왕양명이 다시 나무랐습니다. 맹원이 이런 태도는 결국 명예욕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전습록』에서 맹원을 나무랐던 말을 이어 왕양명이 성인의 무아(無我)를 설명하였습니다. 불교에서 말하였듯이 무아(無我)는 아(我)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아(我)를 무아(無我)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셋째, 왕양명은 42살(1514) 저주 강학에서 사려 분요(思慮紛擾)를 해결하는 방법에 관하여 사려가 싹트는 순간에 성찰극치(省察克治)를 제시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정좌하는 동안에 사려가 어지럽게 일어나면 억지로 사려를 금지할 수 없으니까 사려가 일어날 때마다 자세히 관찰하여(省察) 인욕(人欲, 習氣)에서 우러나온 것이면 제거하라(克治)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맹원이 정좌하면서 겪은 문제이었습니다. 성찰극치는 사실상 왕양명이 저주 강학에서 제시한 존천리 거인욕 수양공부입니다.
맹원(孟源)과 맹진(孟津) 형제는 전덕홍과 추수익에 따르면 남경(南直隸) 출신이며 형제가 저주에 찾아와서 공부하였고 맹원은 왕양명이 남경에서 강학할 때 다시 찾아와서 공부하였습니다. 왕양명이 53살(1524)에 소흥부 집에 있을 때도 맹원이 찾아와서 공부하였습니다. 맹원은 남경에서 왕양명의 가르침을 기록하여 어록을 만들었습니다. 왕양명은 44살(1515)에 맹원이 기록한 기록에 서문(「서맹원권(書孟源卷)」을 써주었습니다. 왕양명은 북경 강학과 저주 강학을 비교하여 저주 학생들이 지식과 이해(知解)를 추구하는 것이 심하였기에 정좌공부(高明一路 : 靜坐)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저주에서 정좌를 배운 학생들이 나중에는 공허(空虛)를 추구하는 불교(空)와 도교(虛)에 빠졌다고 탄식하였습니다. 따라서 맹원이 기록한 왕양명 어록은 왕양명이 저주와 남경에서 어떻게 강학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 가치가 있으나 현재 전해오지 않고 『전습록』에도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넷째, 왕양명은 40대에 아(我)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던 사실을 실토하였습니다. 왕양명이 41살부터 습기를 가진 아(我)를 수양공부의 문제로 삼았고 42-43살 남경에서 강학할 때 누가 왕양명을 비방하는 글을 가져와서 보여주자 왕양명이 화를 냈다가 금방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왕양명은 후회하면서 “아직도 명예욕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다.(終是名根消煞未盡)”고 실토하였고 마치 흙탕물을 잠시 가라앉혀서 맑은 물이 위에 있는 것과 같다고 반성하였습니다. 흙탕물은 흙이 가라앉으면 맑아지고 흔들면 다시 흙탕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습기(흙)를 제거하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왕양명의 학생 왕기(王畿)가 왕양명에게 48살에 주신호 반란을 진압할 때 마음을 여쭈었습니다. 왕양명은 마음이 흔들렸다고 고백하고 50살 이후에 양지를 수양한 현재 상황에서 주신호 반란을 진압한다면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다섯째, 왕양명 만년의 문인 왕기(王畿)와 전덕홍(錢德洪) 모두 왕양명 학술의 교법(敎法)이 3번 바뀌었다(三變)고 보고 저주 강학을 중시하였습니다. 물론 사실 고증에서 더러 억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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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王畿,『龍溪王先生全集』,卷一,「滁陽會語」︰
先師在留都時,曾有人傳謗書,見之不覺心動,移時始忘,因謂:終是名根消煞未盡,譬之濁水澄清,終有濁在。
맹원(孟源) 자료 :
『전습록』,제17조:“(孟源)日間工夫,覺紛擾則靜坐,覺懶看書則且看書,是亦因病而藥。”
『전습록』,제19조:“處朋友,務相下則得益,相上則損。”
王陽明,「書孟源卷」(乙亥,1515,44살):
聖賢之學,坦如大路,但知所從入,苟循循而進,各隨分量,皆有所至。(着力處와 得力處의 뜻)後學厭常喜異,往往時入斷蹊曲徑,用力愈勞,去道愈遠。向在滁陽論學,亦懲末俗卑汙,未免專就高明一路開導引接。蓋矯枉救偏,以拯時弊,不得不然;若終迷陋習者,已無所責。其間亦多興起感發之士,一時趨向,皆有可喜。近來又復漸流空虛,爲脫落新奇之論,使人聞之,甚爲足憂。雖其人品高下,若與終迷陋習者亦微有間,然究其歸極,相去能幾何哉!
孟源伯生復來金陵請益,察其意向,不爲無進;而說談之弊,亦或未免,故因其歸而告之以此。遂使歸告同志。務相勉於平實簡易之道,庶無負相期云耳。
王陽明,「與滁陽諸生書並問答語」:
諸生之在滁者,吾心未嘗一日而忘之。然而闊焉無一字之往,非簡也,不欲以世俗無益之談徒往復爲也。有志者,雖吾無一字,固朝夕如面也。其無志者,蓋對面千里,況千里之外盈尺之牘乎!孟生歸,聊寓此於有志者,然不盡列名,且爲無志者諱,其因是而尙能興起也。
或患思慮紛雜,不能強禁絕。陽明子曰:“紛雜思慮,亦強禁絕不得,只就思慮萌動處省察克治,到天理精明後,有個物各付物的意思,自然靜專,無紛雜之念。『大學』所謂‘知止而後有定’也。”
德洪曰:“滁陽爲師講學首地,四方弟子,從遊日眾。癸丑(1553)秋,太僕少卿呂子懷(呂懷,1492-1573,湛若水門人)復聚徒於師祠。洪(錢德洪,1496-1574)往遊焉,見同門高年有能道師遺事者。當時師懲末俗卑汙,引接學者多就高明一路,以救時弊。既後漸有流入空虛,爲脫落新奇之論。在金陵時,已心切憂焉。故居贛則教學者存天理,去人欲,致省察克治實功。而征寧藩之後,專發致良知宗旨,則益明切簡易矣。茲見滁中子弟尙多能道靜坐中光景。洪與呂子相論致良知之學無間於動靜,則相慶以爲新得。是書,孟源伯生得之金陵。時聞滁士有身背斯學者,故書中多憤激之辭。後附問答語,豈亦因靜坐頑空而不修省察克治之功者發耶?
錢德洪,『王陽明年譜』,正德八年癸酉,先生四十二歲,
冬十月,至滁州。
滁山水佳勝,先生督馬政,地僻官閑,日與門人遨遊瑯琊、瀼泉間。月夕則環龍潭而坐者數百人,歌聲振山穀。諸生隨地請正,踴躍歌舞。舊學之士皆日來臻。於是從遊之眾自滁始。
孟源問:“靜坐中思慮紛雜,不能強禁絕。”先生曰:“紛雜思慮,亦強禁絕不得;只就思慮萌動處省察克治,到天理精明後,有個物各付物的意思,自然精專,無紛雜之念;『大學』所謂‘知止而後有定’也。”
錢德洪,『王陽明年譜』,嘉靖三年甲申(1524),先生五十三歲,在越。
正月。門人日進。
郡守南大吉以座主稱門生,然性豪曠不拘小節,先生與論學有悟,乃告先生曰:“大吉臨政多過,先生何無一言?”先生曰:“何過?”大吉曆數其事。先生曰:“吾言之矣。”大吉曰:“何?”曰:“吾不言,何以知之?”曰:“良知。”先生曰:“良知非我常言而何?”大吉笑謝而去。居數日,復自數過加密,且曰:“與其過後悔改,曷若預言不犯爲佳也。”先生曰:“人言不如自悔之眞。”大吉笑謝而去。居數日,復自數過益密,且曰:“身過可勉,心過奈何?”先生曰:“昔鏡未開,可得藏垢;今鏡明矣,一塵之落,自難住腳。此正人聖之機也,勉之!”於是辟稽山書院,聚八邑彥士,身率講習以督之。於是蕭謬、楊汝榮、楊紹芳等來自湖廣,楊仕鳴(楊鸞)、薛宗鎧、黃夢星等來自廣東,王艮、孟源、周沖等來自直隸,何秦(何廷仁)、黃弘綱等來自南贛,劉邦采、劉文敏等來自安福,魏良政、魏良器等來自新建,曾忭來自泰和。宮刹卑隘,至不能容。蓋環坐而聽者三百餘人。先生臨之,只發『大學』萬物同體之旨,使人各求本性,致極良知以至於至善,功夫有得,則因方設教。故人人悅其易從。
鄒守益,『鄒守益集』,卷七,「陽明先生書院記」︰
陽明先生官滁陽,學者自遠而至,時孟友源伯生,偕弟津伯通,預切磋焉。逾四十年,而伯通令黃州之黃岡,以所聞師友者,與兩庠來學及諸縉紳宣暢之。良知之同,遠邇翕然,每月三會,每會率數百人,默坐澄心,共明學脈。或質疑問業,期以改過遷善為實際。少間,則考鐘擊鼓,歌詠情性。少長咸秩,怡怡充適而歸。兩庠來學,議建書院,以永藏修,而中丞方近沙任,舊學於予也,謀於諸縉紳曰︰陽明公歸自貴陽,諸生郭慶、吳良吉輩及門人受學,請尸祝公為矜式。孟尹以聞於當道,撫按、監司咸韙之。而督學劉初泉亟允以垂永久。乃市安國寺左隙地及僧房二重,廓而新之,於聽訟中酌助其役。曰講堂,曰祠堂,曰書屋,曰大門,繚以周垣。而先師圖像之刻、祀典之備、門役之守,以次而具。
孟君入覲於京,屬予兒善(鄒善,號穎泉,鄒守益子,嘉靖三十五年進士)以徵言,且曰︰“願闡師門同然之蘊,以波於江漢。”某拜手復曰︰
“夫同然之蘊,子孟子發之矣,二三子亦知其有時異乎?口之悅芻豢也,而惡寒發熱則異矣;心之悅理義也,而遺親後君則異矣。故同者,本體也;異者,病症也。良師勝友,冠弁一堂,法語必說,巽言必從,是上帝降衷,靈明弗昧,無知愚一也。能繹能改,則如靈明杲日,為美為大,以達諸聖神;弗繹弗改,則靈明如閃電,為暴為棄,以淆諸禽獸鳥。嘻,其幾微矣!
昔者,孔聖之南游於楚也,歌衰鳳則避之矣,封書社則沮之矣,問津則耰而弗告矣。彼皆一時高流名卿,而意見一滯,靈明遂壅障。今黃之耆舊俊髦,超於齊民,欣聆正學,如茹橡采蕨,獲飫膏粱,意見可謂融脫矣。其亦有鼓舞於意氣、點檢於格套、擔當於聞見者乎?悅子之道,中心誠服矣而諉諸力,則終於自畫;克伐不行,篤於踐履矣,而觀所由,猶不得謂之仁。見禮聞樂,智足以知聖矣,而博學而識,終與一以貫之殊科。在聖門猶患之,而況吾儕乎?聖學之得其宗者,曰弘以任重,毅以道遠,戰戰兢兢,臨淵履冰,以研皜皜一脈。’平日見稱為魯,而超然文學威儀之上,二三子其亦念之乎?以江漢,地相邇也;以秋陽,時相遇也。自濯自暴,而不為三蠹所障,即其同以辨異,則纖慝除;反其異,趨其同,則明命瑩矣。由是而智及之,曰入門,由是而仁守之,曰升堂,由是而勇終之,曰入室。將質鬼神,俟後聖,舉幽明古今,更無二矩,是謂致良知之蘊。願與二三子交儆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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