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57코스(여수구간)-2
도로를 따라 이영산 남쪽 고개를 지나자 여자만이 시야를 독차지한다.
가막만에서 시작하여 장수만을 거쳐 여자만 구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길가 쉼터에서 여자만과 고흥반도를 반찬삼아 아내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발 아래 산골짜기의 다랑이논들과 해변에 솟은 낮은 산봉우리들이 내 마음을 소박하게 해준다.
소박한 마음이 헛된 욕망과 허세가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해준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벚꽃 가로수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며칠 전 만개했을 이곳 벚꽃은 지나는 사람에게 꽃비를 내려준다.
산비탈 나무들은 새잎을 틔워 산색을 연둣빛으로 채색했다.
연두색 신록과 하얀 산벚꽃이 모자이크 문양을 이뤘다.
산전삼거리에서 산전마을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여수자매로캠핑장을 지나자 벚꽃터널이 등장한다.
이곳 자매로에는 주변 다른 곳보다 늦게 핀 벚꽃이 벨트를 이루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속으로 빠져든다.
꽃은 인간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우리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된다.
바람이 불거나 차량이 지날 때는 꽃잎이 휘날리며 꽃비가 내린다.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것 같다.
남파랑길 57코스는 벚꽃 필 때 걷는 것이 가장 좋다는 얘기가 실감난다.
산전마을은 벚꽃이 벨트를 이룬 도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산전마을은 작은 산골마을로 ‘산 안쪽 마을’이라는 뜻의 ‘자치내’다.
몇 가구 안 되는 민가와 주변 푸른 밭, 연두색 산이 자매로 벚꽃과 어울려 ‘봄의 교향곡’을 연주한다.
봄이 마련해준 공연장에 온 것 같다.
전동마을로 내려가는 좁은 길을 따라 한 굽이를 돌아서니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물위에 비친 막 피어난 신록이 신선하다.
구미저수지를 지나자 전동마을이 다랑이논들을 바라보고 있다.
농촌인구가 줄고 고령화되면서 마을 앞 많은 다랑이논들 중 상당수가 묵혀있다.
전동마을 앞 두 그루 느티나무가 당당하다. 연두색으로 채색된 고목이 전동마을의 봄을 화사하게 해준다.
느티나무 아래 용틀임하듯 서 있는 팽나무는 아직 새잎을 틔우지 않았다.
주변 농경지에서는 양파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이미 수확을 마쳤거나 수확을 앞두고 있다.
전동마을을 지나자 다시 여자만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전마을과 전동마을에 비해 규모가 큰 구미마을이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다.
남파랑길은 구미마을에서 이목리로 이어진다.
구미마을에서 이목마을로 가는 길은 자동차가 다니는 해변도로를 따르면 쉽고 가깝지만 남파랑길은 언덕길로 인도한다.
처음에는 그냥 손쉽게 해변도로를 따라갈까 하다가 아내만 쉬운 길로 보내고, 나는 언덕길을 따르기로 했다.
해변은 구미마을-이목리-서연리-연말마을로 이어지면 타원형을 이루는데, 언덕길에서 이런 해변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볼 수 있다.
길은 언덕에 올라 산자락 밭길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진다. 밭가에 서 있는 복사꽃이 화사한 봄을 선물해준다.
밭길을 걸으며 해변마을과 에메랄드빛 바다, 그리고 여자만 뒤 고흥반도가 보여주는 풍경에 흠뻑 빠져든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당삼은 해변마을들이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잠시 후 만나게 될 서연해변을 바라보며 걷다가 이목리 마을로 들어선다.
서연마을 뒤에 솟은 산이 서이산(296.3m)인데, 남파랑길 57코스는 서연마을을 거쳐 서이산 북쪽 임도를 따라
서이산 동쪽 자락 서촌마을까지 이어진다. 이목리 마을을 지나 서연해변으로 가는 초입에서 아내와 재회한다.
이정표에 적힌 종점인 서촌마을까지의 거리가 5.7km다. 앞으로도 2시간 가까이 걸어야할 것 같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화양반도에 감싸인 여자만이 거대한 호수 같다.
바다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며 걷다가 바로 옆에서 걸으니 바다가 이웃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서연마을을 지날 때도, 이미 지나온 이목리나 구미마을을 바라볼 때도 고향처럼 포근하다.
해변길은 연말마을 앞에서 다시 언덕으로 오른다. 이어 소서이마을과 대서이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난다.
하나의 언덕을 넘자 소서이마을이 도로 아래 해변에 자리 잡고 있다. 여자만에 떠 있는 여자도도 조망된다.
다시 도로를 따라 대서이재라 불리는 고개를 넘어선다.
서이산 자락에 둥지를 튼 마을 이름은 모두 서이산에서 비롯되었다. 서연마을, 소서이마을, 대서이마을, 서촌마을이 그러하다.
대서이마을로 내려가는 도로와 임도가 갈리는 삼거리에서 오른 쪽 임도 숲길로 방향을 잡는다.
임도는 산비탈을 구불구불 돌아가면서 조금씩 고도를 높여간다. 임도에서는 벚나무가 길안내를 자처한다.
깊은 산속에서 개소리가 들리더니 기도원이 나타난다. 기도원을 지나 해발 150m 쯤 되는 고개를 넘는다.
벚꽃 핀 임도 숲길이 천천히 걷기에 그지없이 좋다. 종종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난다.
시야가 트이더니 서촌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마을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여수시 화양면에서는 가장 넓은 들판이다.
동쪽 멀리 화동리 마을이 보이는데, 화동마을에는 조선시대 호국군마를 길렀던 곡화목장이 있었다.
화양반도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과거 군사적 방어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서촌마을 골목길을 지나 마을 앞 정자에 도착한다. 서촌버스정류장 옆에 남파랑길 58코스 안내판이 서 있다.
정자에 앉아 긴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한숨을 돌리고 나자 다도해를 이룬 가막만, 장수만, 여자만과 소박한 해변마을길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2022. 4. 9)
*여행쪽지
-남파랑길 57코스는 화양반도 가장 남쪽에 있는 산에 올라 다도해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가막만과 장수만‧여자만을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코스(정규코스) : 원포마을 버스정류장→봉화산 임도→고봉산 임도→이목-안포 도로→산전삼거리→이목리→서연해변→대서이재→새에덴국제기도원→서촌마을 버스정류장
-코스(봉화산‧고봉산 경유코스) : 원포마을 버스정류장→봉화산→고봉산→이목-안포 도로→산전삼거리→이목리→서연해변→대서이재→새에덴국제기도원→서촌마을 버스정류장
-거리 : 17.8km
-소요시간 : 5시간 30분
-난이도 : 어려움
-출발지 내비게이션 주소 : 원포마을 버스정류장(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셋돔길 6)
-남파랑길 57코스에는 이목리 해변에 식당(정다운시골밥상, 010-2934-4241, 백반‧매운탕‧생선구이)이 딱 한 군데 있다. 종점인 서촌마을에서 5km 거리에 있는 화양면소재지에 식당이 많다. 나진국밥(061-683-4425)의 수육과 돼지국밥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