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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이민족에 대한 신탁들(13-23장)
이사 13-23장은 앞의 장들에 연속되지 않는 새로운 부분으로서, “...에 대한 신탁”이라는 표제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본문을 바빌론에 대한 신탁(13,1-14,23), 모압에 대한 신탁(15,1-16,14), 다마스쿠스에 대한 신탁(17,1-11), 이집트에 대한 신탁(19,1-25), 바닷가 광야(바빌론)에 대한 신탁(21,1-10), 두마(에돔?)에 대한 신탁(21,11-12), 드단족(아라비아)에 대한 신탁(21,13-17), ‘환시의 계곡’에 대한 신탁(22,1-14), 티로에 대한 신탁(23,1-18)으로 구분할 수 있다. 표제의 형태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14,28-32에는 필리스티아에 대한 신탁도 들어있다.
이사야서에서 ‘신탁(맛사 משׂא)’이라는 단어는 여러 민족에 대한 심판선고를 지칭하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신탁들이 모두 이사야 예언자의 것은 아니다. 많은 부분 특히 13-14장의 바빌론에 대한 신탁은 분명 후대의 것이다. 이러한 신탁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흥망도 오직 주님의 결정에, 그분의 손에 달려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이 본문들 안에서는 종종 다른 민족들, 특히 과거에 이스라엘을 억눌렀던 이집트와 아시리아까지도 언젠가는 주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특히 19,24-25) 이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기게 되리라는 것은 2장에서 예고되었고 이사야서 제3부까지를 포함하는 이사야서 전체에서 부각되는 중요한 주제다. 민족들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가 하느님을 섬기게 되는 데에서 완성된다.
바빌론의 멸망(13,1-22)
13장에서는 아직 영화를 누리고 있는 바빌론이(19절) 메디아인들에게 무너지게 되리라고 선포한다.(17절) 배경은 기원전 6세기 말, 바빌론 유배의 끝 무렵이다. 바빌론은 기원전 6세기 전반에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으나 기원전 562년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내정이 불안해져 7년 사이에 네 명의 임금이 교체되었다. 그 네 번째가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 나보니두스인데(기원전 555-539년 재위)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마르둑 신을 섬기던 사제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런 이유로 페르시아 출신 메디아의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에 침입했을 때 바빌론의 사제들은 그에게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해방자로 보고 환영했다. 그 결과 바빌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13,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본 바빌론에 관한 신탁.
13,2 너희는 민둥산 위에 깃발을 올려라. 그들에게 소리를 높여라. 그들이 ‘귀족 문’으로 들어오도록 손을 흔들어라.
너희는 민둥산 위에 깃발을 올려라
나무가 없는 민둥산에 깃발을 올린다는 것은 멀리서도 잘 볼 수 있도록 표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군을 도시로 불러들이는 표시다. 그런데 13,2-22의 신탁에서 특별한 점은, 공격을 받는 도시가 어디이며 그 도시를 공격하는 이들이 누구인지가 2-16절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격자들이 메디아인들이라는 것은 17절에서, 그리고 공격을 받는 도시가 바빌론이라는 것은 19절에서야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1절의 표제 없이 본문 내용만 듣는 이들은 바빌론의 멸망을 생각하지 못한다. 바빌론의 압제를 받던 유다에게, 바빌론이 멸망하리라는 것은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들이 ‘귀족 문’으로 들어오도록 손을 흔들어라
“귀족 문”이 구체적으로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고, 이 구절이 처음부터 바빌론에 대한 공격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확실하게 단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든, 적군이 문으로 들어오도록 손을 흔든다는 것은 이미 도시가 적군에게 넘어간 상황을 말한다.
13,3 내게 봉헌된 이들에게 나는 명령을 내렸다. 내 분노의 심판을 위하여 나의 용사들도, 내 엄위에 환호하는 자들도 불러 모았다.
내게 봉헌된 이들에게
“내게 봉헌된 이들”, 곧 ‘나에게 축성된 이들’은 거룩한 전쟁, 곧 하느님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준비된 군인들을 지칭한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메디아인이라는 점이다. 모든 민족의 역사가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으므로, 메디아를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 역시 하느님의 역사다. 비록 하느님을 모르는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하느님께 봉헌된 군대라고 할 수 있다.
내 분노의 심판을 위하여
심판이 선고되는 것은 하느님의 분노 때문인데, 13장의 끝까지 가도 하느님께서 바빌론에게 분노하시는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14장에서야 드러나는데, 기본적으로는 아시리아가 심판을 받는 것과 같은 이유다.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던 바빌론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세상의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듯이 교만해졌기에 하느님께서 그를 낮추시는 것이다.
13,4 들어라, 수많은 백성들이 모인 것처럼 저 산들 위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어라, 왕국들이, 모여든 민족들이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만군의 주님께서 전투에 나갈 군대를 사열하신다.
만군의 주님께서
2-3절에서는 하느님이 언급되지 않고, 4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전쟁을 하느님께서 소집하셨음이 드러난다. 본문은 모든 것을 신비롭게 감추어 놓고 독자에게 하나하나 천천히 열어보임으로써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것은 거대한 세력들 속에 억눌려 살아가는 인간이 역사의 의미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당신의 길이 바다를, 당신의 행로가 큰물을 가로질렀지만 당신의 발자국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시편 77,20)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를 인도하시지만, 어두운 순간들에 그 하느님의 현존은 명백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아시리아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바빌론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또 그 바빌론이 멸망해 가는 것을 바라보는 인간은 이 13장을 읽는 독자와 같이 숨어계시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서서히 깨달아 가는 것이다.
13,5 그들은 먼 땅에서, 하늘 끝에서 온다. 주님께서 당신 진노의 도구들로 온 땅을 멸망시키러 오신다.
히브리어에서 “땅(에레츠 ארץ)”이라는 단어는 ‘나라’라고도 번역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지금 바빌론이라는 한 나라의 멸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온 땅의 멸망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9절 이하에서 묵시문학적인 표현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온 세상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기도 하지만, 13-23장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신탁들로 미루어 일단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각 나라에 대한 심판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빌론이 당시에 “온 땅”의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거대 세력이었으므로 바빌론에 대한 심판은 온 세상에 큰 변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먼 땅”, “하늘 끝”이라는 표현도 이 심판이 온 세상에 대해 지니는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13,6 슬피 울어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 그것은 파멸과도 같은 것, 전능하신 분에게서 온다.
슬피 울어라
바빌론에게 심판이 선고된다면 이스라엘은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슬피 울어라”라고 하는 것은 그 닥쳐올 심판이 너무 크고 두렵기 때문이다. 7-8절과 유사하게 하바 3,16에서도, 민족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의 소리에 “그것을 듣고 내 배 속이 뒤틀린다. 뼈는 썩어 들어가는 듯하고 다리는 밑에서 후들거린다”고 말한다.
주님의 날이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날, 당신의 권능을 떨쳐 보이시는 날을 말한다. 그날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날이 될 수도 있고 심판의 날이 될 수도 있다.(아모 5,18020참조)
“주님의 날”에 관해서는 2,12 참조. 아모 5,18-20에서 분명히 표현되듯이 주님의 날은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시는 순간인데, 기원전 8세기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은 그날이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날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모스와 그 이후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죄악에 빠져있다면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아니라 재앙의 날이 되리라는 것이다. “불행하여라. 주님의 날을 갈망하는 자들! 주님의 날이 너희에게 무슨 득이 되느냐? 그날은 어둠일 뿐 결코 빛이 아니다.”(아모 5,18) 이사 2,12-17에서 주님의 날은 지진 또는 산에서 바다로 몰아치는 폭풍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파멸과도 같은 것, 전능하신 분에게서
“전능하신 분”으로 번역된 단어는 ‘샷다이 שׁדי’인데 전통적으로
70인역 등 그리스어 번역본들과 대중 라틴말 성경의 영향으로 ‘전능하신 분’이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아카드어에서 ‘산’이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본문에서는 “파멸”로 번역된 단어가 ‘쇼드 שׁד’이기 때문에 ‘샷다이’를 어원적으로 여기에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대해 더 이상의 증거를 제시하기는 어렵고, 이 구절의 경우 단순히 비슷한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강한 문학적 효과를 내려고 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13,7 그래서 손이란 손은 모두 맥이 빠지고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녹아내리며
7-8절에서는 주님의 날을 맞은 인간의 공포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들이 열거된다. 모두 성경 여러 곳에서 사용되는 표현들인데, 그 가운데서도 “해산하는 여인”은 이사야(23,4 ; 66,7)와 예레미야(6,24 ; 13,21 ; 22,23 ; 50,43)가 자주 사용하는 비유다.
13,8 불안에 떨리라. 그들은 경련과 고통에 사로잡히고 해산하는 여인처럼 몸부림치리라. 서로 넋 나간 듯 쳐다보는데 그들의 얼굴은 불처럼 달아오르리라.
13,9 보라, 주님의 날이 온다. 무자비한 그날이 진노와 격분과 함께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그 죄인들을 땅에서 절멸시키러 온다.
보라, 주님의 날이 온다
9-16절에서 주님의 날은 좀 더 강하게, 온 세상의 죄인들에 대한 심판의 날로 나타난다. 6절에서 ‘다가왔다(קרוב 가깝다)’고 예고된 그 날은 이미 ‘오고 있다(בא)’고 선포된다. 이 동사를 완료형으로 이해하여 ‘왔다’로 번역하는 이들도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두 형태가 같은데 일반적인 어순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분사형일 가능성이 더 크다.
13,10 하늘의 별들과 별자리들은 제빛을 내지 못하고 해는 떠올라도 어둡고 달도 제빛을 비추지 못하리라.
우주적 변화. 특히 어둠은 아모 5,18-20 ; 요엘 2,10 ; 3,4 ; 스바 1,15 ; 즈카 14,6 등에서 주님의 날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해와 달과 별이 기능을 잃는다는 것은 창조질서 자체가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창세 1장) 하느님의 심판이 세상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뒤흔든다는 사상이 나타난다. 늦은 시기의 묵시문학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이른 시기의 예언자인 아모스가 주님의 날이 “어둠일 뿐 결코 빛이 아니다”(아모 5,18)라고 말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3,11 나는 세상을 그 사악함 때문에 벌하고 죄인들을 그 죄악 때문에 벌하리라. 나는 오만한 자들의 교만을 끝장내고 포악한 자들의 거만을 꺾으리라.
나는
2-9절에서는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10-11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 이로써 예언자의 선포가 참되다는 것과, 그러한 심판의 근원이 분명하게 밝혀진다.
세상을
여기에 사용된 단어 ‘테벨 תבל’도 때로는 ‘땅’이라고 번역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단어와 달리 인간이 사는 땅덩어리 전체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이사야서 안에서는 제1부에서만, 그리고 주로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맥락에서 사용된다.(이사 1,17.21 ; 18,3 ; 24,4 ; 26,9.18 ; 27,6 ; 34,1)
포악한 자들의 거만을 꺾으리라
다시 한 번 이사야가 매우 중시하는 주제가 나타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바빌론이 심판을 받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낮다, 낮추다(שׁפל)’라는 어근은 이사야서에서 매우 자주 사용된다.(2,9.11-12. 17 ; 5,15 ; 10,33 ; 25,11-12 ; 26,5-6 ; 28,1-4) 이사야서에서 심판의 내용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낮추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사야서 외에도, 하느님께서 교만을 꺾으신다는 것은 1사무 2,7 ; 시편 18,28 ; 75,8 ; 147,6 ; 잠언 16,19 ; 25,6-7 등에서 언급된다. 루카복음의 마리아의 노래에서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루카 1,51)라고 할 때 이러한 구약성경의 전통이 바탕에 깔려있다.
13,12 나는 사람을 순금보다, 인간을 오피르의 금보다 드물게 하리라.
‘드물다(יקר)’라고 번역된 단어의 더 일반적인 의미는 ‘값지다, 귀중하다’이고, 실제로 70인역이나 타르굼에서는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 또는 하느님께 충실한 이들은 금보다 더 귀하게 되리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그러나 ‘드물다’라는 번역이 더 문맥에 적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13,13 그러므로 하늘은 떨고 땅은 흔들리다 제자리에서 벗어나리라. 만군의 주님의 진노로 그분 격분의 날에 그러하리라.
하늘은 떨고
10절 참조.
우주적 변화. 특히 어둠은 아모 5,18-20 ; 요엘 2,10 ; 3,4 ; 스바 1,15 ; 즈카 14,6 등에서 주님의 날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해와 달과 별이 기능을 잃는다는 것은 창조질서 자체가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창세 1장) 하느님의 심판이 세상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뒤흔든다는 사상이 나타난다. 늦은 시기의 묵시문학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이른 시기의 예언자인 아모스가 주님의 날이 “어둠일 뿐 결코 빛이 아니다”(아모 5,18)라고 말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3,14 마치 쫓기는 영양들처럼 모으는 이 없는 가축 떼처럼 저마다 제 겨레에게 돌아가고 저마다 제 땅으로 도망가리라.
이 절에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한 지역을 향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럴 때에야 심판을 피해 도망가려는 시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주해자들은 이 구절을, 바빌론이 많은 민족을 정복하여 끌고 갔으며 바빌론이 심판을 받게 될 때에 그들은 각자의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13,15 그러나 발각되는 자마다 찔려 죽고 붙잡히는 자마다 칼에 맞아 쓰러지리라.
여기서 도망을 치는 이들은 “어린것들”과 “아내들”이 있는 사람들, 곧 장정들이다. 전투에서 적군을 피해 도망가다가 잡혀 죽는 것이다.
13,16 그들의 어린것들은 그들 눈앞에서 내동댕이쳐지고 그들의 집들은 약탈당하고 그들의 아내들은 욕을 당하리라.
전쟁에서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은 구약성경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다. 어린아이들을 내동댕이치는 것에 대해서는 2열왕 8,12 ; 나훔 3,10 ; 시편 137,9등, 여자들을 욕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애가 5,11 ; 즈카14,2 등 참조. 이 절에서는 수동태들이 사용되는데, 이로써 특정한 주어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이 그 행위의 원천이심을 암시한다.(신적 수동태) 실제로 어린이들을 내동댕이치고 집들을 약탈하고 여인들을 욕보이는 것은 적군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이러한 전쟁의 재앙은 주님의 날에 내려지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13,17 보라, 나는 그들을 거슬러 메디아인들을 일으키리라. 메디아인들은 은에도 관심이 없고 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메디아인들을
17절에서야 비로소 주님께서 불러일으키신 군대가 어느 군대인지 밝혀진다. 그런데 이 절에 언급된 “메디아인들”은 역사적으로 말한다면 메디아와 페르시아를 함께 일컫는 것이다. 두 민족은 정치적으로 서로 연합했고, 처음에는 메디아인들이 그 연합을 주도했다. 그 후에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메디아 임금을 폐위시키고(기원전 550년), 메디아인들의 수도 엑바타나를 자신의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기원전 549년) 바빌론을 점령한 것은 기원전 539년의 일이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 장의 각주 2를 참조하라.
13장에서는 아직 영화를 누리고 있는 바빌론이(19절) 메디아인들에게 무너지게 되리라고 선포한다.(17절) 배경은 기원전 6세기 말, 바빌론 유배의 끝 무렵이다. 바빌론은 기원전 6세기 전반에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으나 기원전 562년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내정이 불안해져 7년 사이에 네 명의 임금이 교체되었다. 그 네 번째가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 나보니두스인데(기원전 555-539년 재위)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마르둑 신을 섬기던 사제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런 이유로 페르시아 출신 메디아의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에 침입했을 때 바빌론의 사제들은 그에게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해방자로 보고 환영했다. 그 결과 바빌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메디아인들은 은에도 관심이 없고 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말을, 바빌론이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메디아인들을 누그러뜨리고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바빌론은 하느님께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하기에 어떤 인간적인 방책으로도 그 멸망의 재앙을 피할 수 없다.
13,18 그들은 활로 젊은이들을 거꾸러뜨리고 태아를 가엾이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아이들도 불쌍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활로 젊은이들을 거꾸러뜨리고
이 구절은 ‘(그들의) 활들은 젊은이들을 ’내동댕이치고‘로 직역할 수 있다.
태아를 가엾이 여기지 않는다.
구약성경에는 전쟁 중에 임신한 여인들의 배를 가른 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본문들 자체 안에서 매우 잔혹한 일로 평가되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2열왕 8,12 ; 아모 1,13 등
그들에게는 아이들도 불쌍하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 구약 시대에 후손은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길로 여겨졌다.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대를 잇는다’는 개념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태아와 아이들을 죽이는 것은 적의 미래를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13,19 나라들 가운데 보배요 칼데아인들의 자랑스러운 영광인 바빌론은 하느님께서 뒤엎으신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리라.
칼데아인들의 자랑스러운
“자랑”(가온 גאון)은 11절의 “교만”과 같은 단어다. “칼데아인들의 자랑”이라는 표현에서 바빌론인들은 자기 도시가 멸망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고 예상되지만,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바로 그런 인간의 교만을 꺾으시는 분이다.
영광인 바빌론은
13,1의 표제에서 언급되었던 바빌론의 이름이 여기서 비로소 명백하게 드러난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소돔과 고모라”는 부와 향락의 상징인 동시에 하느님께 벌을 받아 완전히 멸망한 도시들을 대표한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창세 19,25)고 말한다.
13,20 거기에는 영원토록 거주하는 사람이 없고 세세 대대 이주하는 사람이 없으리라. 아랍인들도 그곳에는 천막을 치지 않고 목자들도 그곳으로는 양 떼를 몰고 가지 않으리라.
“아랍인들”, “목자들”은 유목민을 일컫는다. 그 땅에 아무도 정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떠돌아다니며 사는 유목민들마저 잠시도 그곳에 머물지 않아 완전히 인적이 없는 곳이 된다는 뜻이다.
13,21 오히려 사막의 짐승들이 그곳에 깃들이고 그들의 집들은 부엉이로 우글거리리라. 타조들이 그곳에서 살고 염소 귀신들이 그곳에서 춤추며 놀리라.
사막의 짐승들이
이 단어의 뜻은 분명치 않으나 들개, 승냥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악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부엉이로
“부엉이”는 구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단 한 번 사용된 단어로서,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동물을 지칭하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염소 귀신들이
70인역은 “마귀들 δαιμόνια”이라고 번역한다.
13,22 그 궁성에서는 늑대들이 울부짖고 안락하던 궁궐에서는 승냥이들이 울부짖으리라. 그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날들은 미루어지지 않으리라.
그 궁성에서는
히브리어 본문은 ‘그것의 과부들 באלמנותיז’이다. 자음만 표기한 히브리어는 한 글자가 차이나고 בארמנותיו, 고대 번역본들을 참조하여 “그 궁성”으로 옮긴다.
그때가 다가오고 있다
6절과 9절에서 각각 사용된 ‘다가오다(가깝다)’와 ‘오다’가 함께 사용되어, 바빌론에 대한심판 선고를 끝맺으며 예언자가 미래의 일로 예고한 그날이 반드시 예정대로 올 것이고 그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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