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란 무엇인가?
어떤 한 개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이 지칭하는 다양한 의미들이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특정한 형용사나 꾸밈어가 있을 때 다양한 의미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분명히 해 주어야 한다. 한 마디로 단어가 지시하는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규정이 있어야 하고, 그런다음 이러한 규정에 해당하는 사실들에 적용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규정이 모호하거나 희미하거나 애매할 때,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하거나 갈등 상황이 유발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논리학에서는 <애매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표현의 자유’란 먼저 ‘자유’라는 큰 범주의 개념에서 ‘표현’이라는 꾸밈어가 있는 ‘자유’ 보다 구체적이고 협소한 개념이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가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자유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자유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를 몇가지로 규정해 볼 수 있다.
신체나 행동에 구속이나 억압이 없는 상태 (신체의 자유)
내가 원하는 것을 방해 받지 않고 선택하거나 행할 수 있는 상태 (선택의 자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 받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상때 (언론의 자유)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 받지 않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 (표현의 자유)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으로 외부의 압박이나 압력이 없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상태 (내적인 혹은 정신적인 자유 / 사상의 자유)
내가 옳다거나 정의롭다거나 혹은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 (윤리적 자유 혹은 양심의 자유)
세상의 모든 법이나 율법 등을 초월하여 완전히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선택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상태 (형이상학적 혹은 영적인 자유 – 불교 승려들의 대 자유)
이기주의나, 본능적인 자기애로부터 벗어나 오직 진리나 선을 행하거나 살아가는 내적인 능력 (죄로부터의 자유 / 복음적 자유)
이렇게 자유도 무수한 의미의 자유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자유들에서 정당하거나 참된 자유이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거나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할 때, 나의 자유가 상대방의 자유를 박탈한다면,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서 5명의 여행객이 조난을 당했다고 하자. 거기에 사과나무 하나가 있고, 사과나무의 주인이 없으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는 사과를 따 먹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의 자유가 무조건적으로 혹은 무제한 적으로 허용된다면, 다른 4명의 자유가 박탈된다. 이때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를 원한다면 결국 싸움이 발생하고, 이 싸움은 결국 모든 이의 자유를 박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의 자유가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언론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는 어떤 것일까? 이것도 위와 동일하다. 언론의 자유가 ‘말할 자유’를 의미한다면, 여기엔 나의 말할 자유가 타인의 말할 자유를 훼손하거자 박탈하지 않는다는 한에서 정당성을 부여 받는다. 예를 들어 A와 B의 대화에서 모두가 말할 자유가 있다고 할 때, A가 ‘B는 이것을 말해서는 안된다’ ‘B는 저것을 말해서는 안된다’라고 자유롭게 말한다는 것은 ‘B의 말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기에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즉 언론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에는 나의 말할 자유가 상대방의 말할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다는 한에서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언론사나 작가 혹은 예술가나 영화 감독 등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친구들끼리 대화하면서는 ‘언론의 자유’이나 ‘표현의 자유’이니 하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지칭하는 것이 ‘공적인 영역’ 혹은 ‘공공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적인 영역 혹은 공공의 영역에서 모든 행위의 기본적인 원칙은 그 행위가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공공의 이익’ 즉 ‘공익’을 지향한다는 한에서 정당성을 부여 받는다. 만일 누군가 공적인 영역에서 자꾸만 개인의 자랑이나 자기 집안의 일만을 애기한다면, 이는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정당성을 부여받기 어렵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공익을 위한 것’이란 대전제 하에서 정당성을 가질 수가 있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둘 것은 과연 이것이 모두(공익)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개인이나 특정한 집단의 사적인 이익을 위한 것인가를 질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자유로운 표현이 타인의 자유로운 행위를 침해하거나 명백하게 타인의 권리나 이익을 침해 한다면, 이러한 자유는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가 없으며,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 된다. 모든 방종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 혹은 이익을 침해한다는 차원에서 비-윤리적이거나 부도덕한 일이며, 결코 자유의 이름으로 포장되거나 허용될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번에 논란이 크게 일고 있는 영화 <암살자들>은 십중팔구 표현의 자유라기 보다는 <영화적 방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타인들이 분노하고 고발까지 할 정도라면 분명 공공의 이익 보다는 사적인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나 자유를 침해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 보다는, 솔직하게 시인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라고 보는 것이 현명하고 성숙한 자세일 것이다.
한 가지 덧 붙이자면, “영화를 영화로만 보아달라”라고 말한다는 것도 애매어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논리 속에는 “영화는 아무표현을 해도 된다” “영화이니까 거짓말을 해도 되고, 영화니까 타인을 모함해도 된다”라는 숨은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상식적인 어떤 예술인도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란 하나의 종합예술이며,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만큼 예술 중에서도 가장 공적인 것이며, 가장 먼저 공익을 지향하는 예술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이 즐거움을 선사하든, 진실을 밝혀주든 혹은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주든, 모든 영화는 우선적으로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대중들에게 ‘유익함’이나 ‘선’이 되는 것을 제공한다는 한에서 진정한 ‘예술’로 인정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희생물로 삼아 큰 이익을 보고자 하는 영화만큼 반-예술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이는 비단 예술 뿐이겠는가? 모든 인간적인 영역에서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