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나도야간다]6편 다시 간 경주 수학여행 2023년 11월 2일. 63년 전 아득한 옛날 고교 2학년 때의 수학여행의 추억을 되살려 고교 동기들과 경주로 재(再)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다. 교통편은 기차 여행인데다 하루 만에 다녀오는 당일 일정이라 이른 아침 출발과 늦은 귀가를 각오해야 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정이지만 수서와 서울역 출발 SRT와 KTX를 이용, 2시간이면 경주에 도착할 수 있다. 최종 여행 참가인원은 22명으로 수서팀이 17명, 서울역팀이 5명이다. 기차 여행은 특히 나이가 나이인지라 혹 깜빡하는 순간, 여행은 큰 차질이 난다. 사전에 카톡방에 알림을 두번 보내고 개인 전화까지 하여 출발에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신경주역 도착과 수학여행의 시작 아침 8시경 수서역과 서울역을 각각 출발해 2시간 10분만에 신경주역에 도착한 일행은 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해설 가이드를 만나 미리 대기하던 관광버스에 탑승했다. 억양이 경상도 사투리이지만 오랜 경륜으로 해박한 지식과 달변에 일행의 귀와 눈은 가이드에 집중되었다. 건성으로 눈으로 보는 여행만 하려던 것이 가이드의 상세한 설명으로 새로운 역사문화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경주에 관한 해설이 시작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서라벌(현 경주)의 인구는 100만명이나 되고 가구 수도 19만8,000호나 되었다고 한다. 현재 경주의 인구수는 겨우 24만8,000명이라고 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신라는 BC 57년에 박혁거세가 건국하여 935년에 고려에 멸망하니 신라의 존속 기간은 정확히 992년이다. 그러나 대략 천년에 가까워 신라천년이라고 하고 경주를 천년의 고도(古都), ‘천년의 미소’라고들 한다. 필자는 대구에서 나고 자라 중학교와 고등학교 수학여행 시 필수 코스였던 경주는 어릴 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래서 같은 재경 고교 동문들과 함께 63년 전의 추억을 회상하며 다시 수학여행 온 기분은 만감이 교차하는 특별한 것이었다.
김유신 장군 묘
첫 여행목적지는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의 묘이다. 김유신은 가야(금관가야)출신으로 김수로왕의 12세손이다(필자는 72세손). 가야국이 신라에 멸망한 후 신라의 명장으로 자리잡아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과 왕비의 묘는 능이라 칭하지만 왕이 아니므로 묘이다. 그런데 석비에는 능이라고 되어 있어 의아했다. 이는 김유신 후손들이 묘를 능으로 고쳤다고 하는 설명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 시대 경주 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대릉원(大陵園)의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미추왕릉 두번째 탐방지는 대릉원 천마총. 대릉원은 경주시 노동동과 황남동에 있는 무덤군으로 옛 신라의 왕과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지역이다. 대릉원에는 23기의 능이 있는데 4세기 말에서 6세기의 능이라 추정된다. 23기의 능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천마총과 황남대총 그리고 유일하게 왕릉 이름을 가진 미추왕릉이다. 1973년에 발굴된 천마총은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약탈당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고분이다. 발굴 당시 많은 문화재가 출토되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안으로 들어가 천마총 내부에 전시된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눈부신 황금의 나라로 불렸던 신라의 찬란한 금제품 들이다. 금관, 금팔찌, 금모자, 금동신발, 금귀거리 등 다양하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자작나무로 만든 말다래(말이 달릴때 튀는 흙을 막는 마구)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마가 그려져 있어 고분 이름을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 건너편에 큰 봉분이 두 개인 대형무덤이 황남대총이다. 대릉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 남분과 북분의 쌍릉으로 두 봉분을 합치면 120m에 달한다. 총이라고 하는 것은 왕릉으로 확인이 안 되었기 때문이며 미추왕릉만은 유일하게 확실한 피장자가 확인되는 것이라 왕릉으로 불린다. 신라 13대 왕인 미추왕은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은 재위 23년에 돌아가시니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일대를 대릉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
천마총 유물
영원한 신라의 보물 불국사 쌈밥집에서 점심을 마치고 다음 코스인 불국사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불국사이다. 63년 전 고교 수학여행 때 가장 많은 사진을 남긴 곳이 바로 불국사이다. 불국사는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신라 연간을 기원으로 하는 사찰이며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불국사에는 국보 7점과 보물5점 그리고 사적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가 각 1점씩 있다. 가이드를 따라 불국사(佛國寺)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아름다운 반야연지를 지나면 천왕문이 막아선다. 천왕문을 지나 반야교를 건너 마당에 들어서면 좌우로 길게 자하문과 안양문을 잇는 긴 회랑이 시선을 압도한다. 가구식 석축으로 높이 쌓여 있다. 자하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청운교와 백운교(국보)가 그리고 안양문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연화교와 칠보교(국보)가 장식되어 있다. 계단 밑으로 내진 설계의 아취굴(쌍홍예)이 있어 지나갈 수 있다. 석축에는 반원형의 토수구가 설치되어 궁금증을 유발한다. 토함산 기슭에서 흘러온 물이 이 토수구를 통해 구품연지(九品蓮池)로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자하문 회랑의 양쪽 끝에는 좌경루(목어와 운판 설치)와 범영루(법고가 있음)가 높이 솟아 있다. 자하문을 지나면 대웅전으로 이르고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른다 예전 수학여행 시 찍은 사진을 보면 청운교 백운교와 회랑에 수십, 수백 명이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체 계단 출입이 금지되고 좌우측 길로 올라가서 대웅전, 극락전으로 가게 되어 있다. 대웅전(보물)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대웅전 마당에는 그 유명한 다보탑(국보)과 석가탑(국보)이 좌우에 서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 부처인 다보불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나타낸 것이란다. 다보탑은 1925년경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 해체 보수하였는데 기록도, 탑속의 사리와 사리장치와 유물이 모두 사라졌고, 기단 돌계단 위 네 마리의 돌사자 중 세 마리는 약탈돼, 현재는 한 마리의 돌사자가 남아 있다. 석가탑은 삼층석탑이라고도 하고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불린다. 대웅전 뒤쪽으로 무설전(無說殿)이 있었다. 무설전은 경론을 강술하는 강당인데 무설이라는 현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의 진리를 언어로써 해설이 가능하겠는가 즉 언어도단이란 의미란다. 관음전, 비로전, 나한전을 차례로 관람하고 마지막으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극락전을 참배했다. 그런데 극락전 현판 뒤쪽에 모두의 관심이 쏠려있다. 복돼지가 숨어 있었다. 지난 2007년 초 극락전 현판 뒤에서 우연히 돼지 조각이 발견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복돼지를 구경하고 내려오니 마당에는 누구나 만지면서 복을 비는 복돼지상을 만들어 놓았다.
자하문 안양문과 백운교 회랑
불국사 대웅전 마당
다보탑과 석가탑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 성덕대왕 신종 당초 예정지였던 박물관을 대신하여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선택했다. 기러기와 오리가 노닌다는 뜻의 안압지(雁鴨池)로 많이 알려진 동궁과 월지는 특히 조명이 아름다운 야간 관광지로 유명한데 낮이지만 크고 아름다운 연못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동궁은 세자의 거처로 외국 사신의 접대, 연회장소로 활용하였는데 현재는 1970년대에 복원한 3채의 별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안압지의 물을 빼고 발굴 작업을 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주령구(酒令具)라는 주사위처럼 생긴 14면체의 술잔이 출토되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산책을 하면서 잠시 성악 감상시간을 가졌다. 우리 친구 일행 중에 성악으로 요즘 한창 바쁜 일과를 보내는 S군이 몇곡의 가곡과 트롯트곡까지 불러 박수를 받았다.
동궁과 월지
저녁 식사시간까지 약간의 시간의 여유가 있어 박물관 마당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을 구경하기로 했다.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여 버스 안에서 25,000평이나 되는 황룡사 터 불빛을 구경할 수 있었다. 황룡사 역사관에는 전시실을 만들어 1/20 크기의 황룡사 탑의 모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워낙 일정이 빡빡해 아쉬웠다. 박물관 마당에는 성덕대왕 신종이 우람하게 걸려 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성덕대왕 신종은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만들고자 했으나 완성은 혜공왕 때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폐사된 봉덕사에 걸렸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하고 어미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라는 의미의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최대의 거종으로 타종은 안되고 녹음된 종소리를 30분 간격으로 들려준다. 1004자의 한자가 새겨진 18.9t의 무게를 갖는 이 신종은 종소리 크기로는 으뜸이고 맥놀이 현상이 특징이다. 덤으로 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구경을 마치고 상경하기 전에 식당으로 향했다.
성덕대왕 신종
빡빡한 여행 일정이 마무리되는 시간이다.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신경주역에 도착하여 가이드도 관광버스 기사도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었다. 역 구내로 들어갔다. 기차 탑승시간이 조금 남아 카페에서 L 원장이 내는 차 한잔을 마시며 휴식시간을 가졌다. 바삐 다닌 하루의 여행코스를 뒤돌아본다. 멋모르고 친구들과 어울려 소란스럽게 다녔던 고교 수학여행에 비해 옛 추억을 되새기며 비록 발걸음은 느릿하지만 한결 노숙한 어르신의 수학여행을 즐겼던 친구들--과연 각자 느낌이 어떠했을까? 궁금해진다. 2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하여 각자 자택으로 가는 발걸음은 피로한 듯 무거웠지만 얼굴 표정은 마냥 행복한 모습들이다.
<글: 김수철(상학62)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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