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제 서해 최학송(오른쪽)과 조운(1930년대 초) |
한국문학사에서 영광은 타 지역에 비해 문학적 자산이 매우 풍부하다. 경제적·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던 만큼 문학 유산도 많다. ‘남도문학 1번지’의 주인공 시조시인 조운의 발자취를 담아본다.
시조시인 조운(1990-?)은 전남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136번지 구름다리 옆집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이 주현(柱鉉), 자가 중빈(重彬)인데 1940년부터 집앞의 구름다리를 딴 운(雲)을 필명 겸 본명으로 써 왔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으로 망명할 만큼 민족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영광으로 돌아온 후 민족운동을 하면서 시 ‘불살너주오’가 1921년 4월 5일 동아일보의 ‘독자문단’에 실리면서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최서해와 깊은 교류를 통해 ‘조선문단’에 많은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시인의 입지를 굳혔다.
가람 이병기와 교류하면서 시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법성포12경’을 시작으로 시조쓰기에 전념했다. 그는 민중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로 관념적인 시조가 아닌 생활 시조를 썼다.
▲영광 사람들과 함께 찾은 금강산 비로봉(1930) 왼쪽 첫 번째가 조운 |
일제의 감시에서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9개월을 복역했다. 일제는 전시동원 체제를 가동했고 많은 작가들이 친일의 길을 걸었으나 조운은 1941년부터 1947년 2월까지 절필했다.
그는 강인한 항일 민족정신의 소유자였다. 그가 다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인 1947년 3월이다. 이후 조운은 전남 영광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그리고 나서야 ‘조운시조집’을 냈고 이병기와 조남령의 작품을 모아 ‘현대시조삼인집’ 발간을 준비했지만 월북과 분단으로 발간하지 못했다.
그는 북한에서도 시조를 썼다. 특히 구전되는 민요를 수집하여 ‘조선구전민요선집’을 냈고, 창극 ‘춘향전’을 박태원과 공동 창작했고 ‘조선창극’을 박태원, 김아부와 함께 냈다. 그래서 1988년 해금될 때까지 남한의 문학사에 이름을 거명하는 것과,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불온’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단아한 정조로서 전통적인 정한의 세계를 즐겨 다루고 있어 돋보인다. 남다른 언어의 조탁에다 섬세한 개성미를 지녀 공감을 얻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전혀 이념적인 색채가 없고 자연이나 인간의 평이한 서정을 읊은 순수문학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제 또 한 가을
제비 훨훨 날아가고
기럭이는 돌아오는데
내故鄕은 그어덴고
하늘을 바라다보니
맘만 깊어지노라
나그네 아닌 몸이
鄕愁가 어인일고
萬頃蒼波에
목마른 沙工일레
千里에 한 보금자리가
날 기달삥고 있으리
- 思鄕 중에서 -
▲서해 최학송의 묘비 제막식에 모인 문인들(1934) 뒷줄 오른쪽 끝이 조운 |
조운은 현대시에서 시조로 시형을 밖어 창작하면서 현대 창작시조와 시조시형 연구의 지평을 넓힌 현대시사의 중요한 지점에 있는 시인이다. 활발하게 시조를 창작하던 그의 월북은 많은 의문을 남겼다. 그렇다고 그것이 현대시사에서 그의 위치를 소거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1988년 해금되었으나 업적에 비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조운은 “시도 여기까지 이르면 시신도 감히 시 앞에 묵언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시가 스스로 우러나므로 시를 쓰는 천래적 시인”이었다. 또한 선배 시조시인들이 채 벗어나지 못했던 유가적 관념의 벽을 허물고 서민적 리얼리티를 성공적으로 시조문학에 도입함으로써 생활시로써 시조의 새 길을 열어 놓았다.
그는 일제하 사상사적 맥락에서도 한치의 흔들림 없이 ‘조선혼’을 노래한 ‘표범’ 같은 천재시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말버릇이 시조라는 율격과 어울리어 이루어내는 놀라운 활력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조운 특유의 사실적 재치와 해학이 두드러진 작품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적 성과는 월북 후 분단을 거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통치의 수단으로 작동함으로써 한 동안 연구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또 조운은 화자가 드러나 있던 드러나 있지 않던 관계없이 시인 조운과 일치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또한 작품 속에 담긴 경험 내용 또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직접 겪은 바를 말하는 방식을 유지했다. 조운은 시조 ‘법성포12경’을 발표한 후 주로 시조를 썼고, 시 ‘비’ 이후에는 해방까지 시조만 썼다.
▲조운의 가족사진 (1941) : 왼쪽부터 3남 명재, 차남 청재, 조운, 사위 임 씨, 장남 홍재, 부인 노함풍 씨, 딸 나나 |
시인 조운과 가족들의 민족운동과 의미
조운의 형제들과 매부, 매제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투옥되어 옥고를 치른 뒤 고문의 후유증과 병으로 해방 전에 요절하였다. 조운도 작은형인 조철현과 함께 망명,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펼친 덕분에 형제들과 매부, 매제들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매부인 위계후를 비롯하여 조병현, 조철현 형제의 독립운동은 국가의 공훈을 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매제인 김형모는 상해에서 활동한 기록을 확보할 수 없어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최서해 또한 망우리에 유족 없이 묘지마저 방치되었다가 관리인에 의해 발견된 뒤 작은 행사를 갖고 있을 뿐이다.
▲북한에서 발간된 잡지 ‘천리마’ 1964년 4월호에 실린 ‘조선음식’ 꽃밭에 오래 있으면 향내 나는 줄 모르듯이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대하기 때문에 의례히 그러려니 하고 범상히 여기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의 음식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쌓아 온 경험에 기초하여 창조되고 발전되어 온 조선음식은 영양 가치로 보아서나 위생 상으로 보아서나 아주 합리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조선 음식은 우선 그 종류부터 다종 다양하며 맛이 있고 보기만 해도 구미가 돈다. 생선 조기 하나를 들어 보아도 생선으로 먹는 것은 물론이고 간조기, 굴비, 가조기, 조기젓, 속젓, 석란젓, 아가미젓, 조기포 등등으로 만들어 먹는다. 생선으로는 조기죽, 조기찌개, 조기 조지, 조기 졸임, 조기 찜, 전유어, 어만두, 어채, 회, 구이 등으로 조리해 먹는다. 또한 조기는 다른 음식과 함께 조리하여 양념으로도 쓴다. 구이에도 통구이, 자반구이 또한 석쇠에 구워서 남비나 전철에다 거듭 익히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와 같이 조기 한 가지로도 20여종의 요리를 만든다. 모든 음식에서 영양 가치가 기본적인 문제이지만 이와 함께 더 맛 있게 만드는 문제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음식이 가지는 맛은 실로 부유하다. 음식 맛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 중에는 자극성이 진한 것, 단 것 등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순순하고 은근해서 깨물수록 고소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먹은 뒤에도 입에서 맛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음식 맛을 잘 내기 위하여서는 우선 재료를 잘 고르고 양념을 잘 해야 한다. 즉 소고기 하나에서도 양지 머리와 허벅지살을 쓰는 료리가 다르다. 곰거리와 내장을 가지고도 염통은 산적으로, 콩팥은 구이로 담낭은 즙을 내고 간은 생회감으로 쓴다. 살코기도 썰어 쓸 데가 다르고 얇게 썰러 쓰는 데가 다르고 또한 잘게 다져서 쓰는 데가 각각 다르다. 뿐만 아니라 새로히 XX 져며 쓰고 깎아 쓰며 갈아 쓰고 채를 쳐서 쓴다. 또한 음식을 익히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물을 익히는 방법만 하더라도 데치는 것, 갊는 것, 끓이는 것, 고기 고음, 달이는 등 그 열도와 시간이 제각기 다르다. 조선 음식은 다 만든 음식이라도 먹어보고 남의 입 맛에 맞게 간을 맞추어 먹도록 초장, 유장, 초고추장, 겨자, 후추 등 다종의 조미료를 음식장에 갖추어 놓고 쓴다. 고음에는 흰소금이 제일이고, 회 곁에는 참기름, 소금, 탕평채에는 겨자가 좋다. 속담에 <보기 좋은 떡은 먹기도 좋다>는 말과 같이 우리는 상차림의 순서와 그 색조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또한 음식을 상에 차릴 때 우선 먹기 편리하게 놓으면 색깔릐 조화도 맞춘다. 조선 음식은 또한 그 맛이 정미하고 우리의 섬세한 미감각을 충족시키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미 조리해 놓은 음식 중에서도 지방과 마을에 따라 맛이 달라서 평양 랭면이니, 개성 관수니, 매친 인절미니 하여 지방 특식과 특산이 따로 있으며 4월에는 어채요, 6월에는 XX 수단이요 하는 식으로 계절에 따라 제각각 독특한 맛을 자랑하고 있다. 떡에는 송편, 노리 등이 잇으며 약과 강정, 산자, 기타 주류 등 특수한 음식도 있다. 이밖에도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먹는 반찬은 발효시킨 음식이다. 간장, 된장은 물론 진장, 고추장, 김치, 짠지, 깍두기 콩과 수십 가지 되는 젓갈 등은 간과온도 시간을 맞추는 데서 모두 정밀한 기술을 요하는 발효음식들이다. 이렇듯 조선음식 문화는 오랜 옛날부터 창조되고 발전 되어 왔다. 지금도 합성 료리로 최고명을 이루는 것은 열구자이지만 이 열구를 안치고 재당하는 신선로는 이조 연산조 때 정해량이라는 사람이 창안했다고 하는데 이도 벌써 460년 전 이야기다. 조선 음식은 또한 우리들의 비위에만 맞는 것이 아니라 풍토와 식성 다른 외국 사람들로부터도 사랑을 받고 있다. 중국 한나라 때, 부여의 구이가 전해져서 <맥적>(貊炙)이란 이름으로 호평 받았으며 당나라에서도 이것을 계속 즐겼다. 또한 우리의 과즙은 원나라에서도 <고려병>(高麗餠)이라고 하면서 매우 즐겨 먹었다. 현재에도 중국,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 조선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으며, 일치하게 그 맛이 특이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음식은 모든 사람들의 비위에 맞게 만들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풍습과 식성이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도 즐겨 먹는 것이다. |
조운은 매부와 형들의 민족운동을 지켜보며 성장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민족운동과 지역 문화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남한의 정치지형에서 조운의 월북은 독립운동마저도 거론할 수 없는 배제의 이데올로기에 눌려 있어야 했다.
조운은 월북을 이유로 아직도 그의 독립운동은 인정받지 못한 채 월북의 굴레에 갇혀 있다. 남은 가족들마저 조운의 가족임을 숨기고 살고 있다. 이것은 국가의 정치적 이념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한 가족이 어떻게 역사 속으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잘 보여준다. 조운의 형제와 가족들의 항일민족운동을 밝힌바 앞으로 면밀한 연구를 통해 논의를 보완하는 후속 연구로 이들의 위치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도동리 조운 생가 출처 - 영광군민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