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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강 - 行由品-10
慧能이 辭違祖已하고 發足南行하야
兩月中間에 至大庾嶺이러니
[五祖歸하사 數日을 不上堂하시니
衆이 疑聽問曰, 和尙이 少病少惱否이까 曰,
病卽無로되 衣法이 己南矣니라 問誰人傳授니이까 曰,
能者得之니라 衆乃知焉하고]
逐後數百人이 來欲奪衣鉢할새
一僧의 俗姓은 陣이요 名은 慧名인데
先是四品將軍이라
性行이 麤慥하야 極意叅尋하더니
爲衆人先하야 趁及於能이어늘
慧能이 擲下衣鉢於石上曰,
此衣는 表信이어니 可力爭耶아하고
能이 隱草莾中이러니
慧明이 至하야 提掇하되 不動이라
乃喚云, 行者여 行者여 我爲法來요
不爲衣來니이다
慧能이 遂出하야 坐盤石上하니
慧明이 作禮云, 望行者는 爲我說法하소서
慧能曰, 汝旣爲法而來어든 可屛息諸緣하고
勿生一念하라 吾爲汝說하리라
明이 良久에 謂明曰, 不思善不思惡하라
正與麽時에 那汝- 是明上座의 本來面目인고하니
慧明이 言下에 大悟하고 復問云,
上來密言密意外에 還更有密意否이까
慧能이 云, 與汝說者는 非密이라 卽非密也니
汝若返照하면 密在汝邊이니라
明이 曰, 慧明이 雖在黃梅나 實未省自己面目이러니
今蒙指示하오니 如人이 飮水에 冷暖을 自知로소이다
今行者는 卽慧明의 師也니이다
慧能曰, 汝若如是인덴 吾與汝로 同師黃梅니
善自護持하라 明이 又問 慧明이
今後에 向其處去리이까
慧能曰, 逢袁則止하고 遇蒙則居하라
明이 禮師하니라
[明이 回至嶺下하야
謂趁衆曰 向陟이 崔嵬하여 竟無蹤跡하니
當別途尋之라하니 趁衆이 咸以爲然이러라,
慧明이 後改道明하니 避師上字러라]
***
慧能(혜능)이 辭違祖已(사위조이)-하고→
조사를, 5조 스님을 사위. 사기켰다.
떠났다 이 말입니다.
떠나는 것은 어기는 것이니까
어길 違(위)자를 쓰는 것입니다.
사위했다. 떠났다. 떠나고 나서,
發足南行(발족남행)하야→
남쪽으로 발족해서,
남쪽으로 발을 발족한다할 때도 이렇게 쓰지요.
그러니까 발을 발했다. 발을 내디뎠다 그 말입니다.
남쪽으로 발을 내디뎌서
兩月中間(양월중간)에→
두 달여 사이에,
至大庾嶺이러니→
대유령 이라고 하는 데에 이르렀다.
대괄호한 것은
육조스님이 직접 하신 말이라기보다는
뒷 사실을 나중에야 안 사람이 편집을 하면서
거기다 삽입시킨 것입니다.
[五祖歸(오조귀)하사 數日(수일)을
不上堂(부상당)하시니→
5조가 돌아와 가지고 수일을 법당에도
아니올라 오시니, 그래서
衆(중)이 疑聽問曰(의청문왈),→
대중이 의심해서 청문해 가로대. 물어 가로대,
和尙(화상)이 少病少惱否(소병소뇌부)이까→
화상께서 “어디 아프십니까?”
큰스님께서 어디 아프십니까?
법당에도 안 나오시고,
공양하러 도 안 나오시고
그러기에 그래서 물었어요. 그러니까
曰(왈), 病卽無(병즉무)로되→
“병은 없어. 내가 왜 병이 있어? 그런데
衣法(의법)이 己南矣(기남의)니라→
옷과, 내 가사하고 내 法衣(법의)가
이미 남쪽으로 가 버렸다.”
그때야 고백을 하는 겁니다. 여러 날 지난 뒤에...
그러니까 대중이 그때야 묻기를
問誰人傳授(문수인전수)니이까→
어떤 사람이 전수해 갔습니까? 누가 받아갔습니까?
曰, 能者得之(왈, 능자득지)다→
능한 사람이 얻어갔다. 참 묘한 말입니다.
혜능이 가져갔다고 해도 되었을 텐데,
“능한 사람이 얻어갔다.
아 유능한 사람이 가져가지
그걸 뭐 아무나 가져가느냐?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가져갔겠지.”
아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衆乃知焉(중내지언)하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행자가 없어졌거든요.
대중들이 그때야 알아차렸다.
수 백 명 대중이 있으니까
누가 뭐 있는지 없는지 그거 일일이 다 아나요?
모르지요. 한 100명만 살아도 잘 모른다고요.]
逐後數百人(축후수백인)이→
뒤를 쫓아가는 수 백명이,
來欲奪衣鉢(래욕탈의발)할새→
가 가지고 의발을 뺏으려고 막 그때 사
야단법석이 일어나 가지고,
대중들이 막 그냥 들고 일어나서, 아, 이놈이
어디로 가져갔는가? 안 된다 말이지 아무리
지가 法이 있다손 치더라도, 절에 들어 온지
8개월 밖에 안 된 행자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그리고 지금, 5조 대사의 법을 받을 그야말로
영순위인 신수대사 같은 이가 있는데,
도대체 그런 스님을 놔두고, 명색도 없는 어떻게
그 못난 행자가 와서 받아갈 수 있느냐 해서
막 그냥 야단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 全(전) 대중이, 5조 스님이 말려도 소용없고,
수백 명 대중들이 벌떼같이 일어나서는 가사하고
발우떼 뺏어 와야 된다고, 속에 있는 법이야
뭐 어찌됐든 알바 없고, 옷하고 발우떼만 뺏어
와야 된다고 이렇게 해가지고서 그냥 산지사방
다 흩어진 겁니다.
어디로 갔을까 하고
그냥 있는 길이라고 하는 곳은 다 몇몇씩
나눠가지고 갔는데, 그 중에
一僧(일승)이→ 한 중이 있었는데
俗姓(속성)은 陣(진)이요
名(명)은 慧名(혜명)인데→
속성은 진씨라, 그리고 이름은 혜명이라 또...
그런데
이 사람이 先是四品將軍(선시사품장군)이라→
선시사품장군이면, 그 당시 사품장군 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장군은
힘이 장사여야 되고, 몸집도 아주 크고, 걸음도
빠르고 칼도 잘 쓰고 활도 잘 쓰고 말도 잘 타고하는,
그런 사람이라야 옛날 사람들은 장군이 됐어요.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요?
지금이야 안 그렇지만 옛날에는 의례히 그랬어요.
그런 사품장군을 지냈던 사람이 아마
5조스님 밑에 와서 스님생활을 하고 있었나봐요.
性行(성행)이 麤慥(추조)하야→
추조라는 말은 거칠다는 말입니다.
성품이 아주 거칠고 사품장군을 지냈으니까
우락부락하고, 얼른 떠올리자면 노지신 같은
그런 타입 이었던 모양입니다. 노지신...
아니면 저기 장비쯤이나 되거나요.
그런 타입 이었는데 이 사람이 힘이 장사고
걸음도 빠르고 하니까,
極意叅尋(극의참심)이라→
자기가 공을 세우겠다는 뜻도 있겠지요.
발우를 뺏어오는 거야 문제없고,
공로도 세워야 되고요.
그러니까 이 때다 하고 얼른 나서가지고,
爲衆人先(위중인선)이라→
다른 사람들. 여러 대중들보다 훨씬 먼저 나서 가지고,
趁及於能(진급어능)이라→
마침 헤능이 가는 그 길을 쫓아왔더라.
자기가 가만히 짚어보니까
그 쪽으로 갔을 것 같으니까 쫓아와서...
그 뭐 몇 날 며칠을 갔는데도 붙들렸지요
“게 섰거라”
하고 쫓아오는데, 할 수없이,
헤능이 붙들리면 얻어맞을 거고
그 때는 뭐 별 수도 없지요.
慧能(혜능)이→
아 이거 나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옷 하고 발우떼 때문에 온 것이다 하고서,
擲下衣鉢於石上曰(척하의발어석상왈)라,→
발밑에 반듯한 돌이 마침 있었어요.
거기다 옷 하고 발우떼하고 턱 놔두고
“니 가져가려면 가져가거라.”
하고 풀 속에 숨어 있었어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기를,
此衣(차의)는 表信(표신)다→
이 가사는 믿음을 표한 것이다.
可力爭耶(가력쟁야)아→
어찌 가히 힘으로 다툴 것인가 이 말입니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이 가져가는 것인데,
이것을 힘 있다고 가져갈 그런 물건 같으면
이 까짓 것 난 안 가져간다 이겁니다.
힘 있다고 가져간다면 내가 가져간들 뭐 하느냐?
어찌 힘으로 다툴 것이냐?
그러고는 반석위에다 떡 올려놓고, 그랬어요. 그리고
能(능)이 隱草莾中(은초망중)이라→
저 멀리 떨어져서 풀숲 속에 숨어 가지고
떡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慧明(혜명)이 至(지)하여→
혜명이라는 사람이, 사품장군 지낸 이 사람이
쫓아와 가지고는,
提掇(제철)이라→
바위에 있으니까 얼른 집어가가지고 가려고 하니까,
不動(부동)이라→
움직이지를 않는다고요. 딱 그냥 바위보다도
더 무겁게 움직이지를 않는 거예요.
혼자 끙끙 거리고 들어봤지만,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때야 이 사람도 알아차렸지요.
‘아! 이건 참 어떤 법력에 의한 것이지
보통 이렇게 무슨 힘으로, 사람의 무력으로
할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서 그때야
乃喚云(내환운),→
정신 차리고 불러서 말하기를,
行者여 行者(행자 행자)여 我爲法來(아위법래)요
不爲衣來(불위의래)니이다→
행자여, 행자여 나는 법을 위해서 왔지,
옷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 법력이 있다면 제발 나와서
나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나도 불법공부 하러 절에 들어왔지
무슨 뭐 힘 자랑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지요.
그렇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慧能(혜능)이 遂出(수출)하야→
드디어 풀숲에서 나와 가지고서,
坐盤石上(좌반석상)하나니→
반석위에 떡 앉았어요.
그러니까 慧明(혜명)이→
혜명이라고 하는 이 사람이,
作禮云(작례운),→
뭔가 법문을 한 마디 듣고 싶으니까
이렇게 그만 그 법력을 보고.
혜능의 법력을 보고 그만
거기에 감복을 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예배를 짓는다고 했는데,
예배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삼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법문을 청 할 때는 의례히 삼배를 하니까요.
作禮云 望行者,(망행자)는→
바라노니 행자께서는, 아직 행자지요뭐.
戒(계) 아직 안 받았어요.
15년 동안 행자로 지냈고,
여기서는 말 할 것도 없고요.
望行者, 爲我說法(위아설법)하소서→
바라노니 행자께서는 나를 위해서
설법을 좀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慧能曰(혜능왈),→
혜능이 말하기를
汝旣爲法而來(여기위법이래)어든→
그대가 이미 법을 위해서 이렇게 왔거든,
可屛息諸緣(가병식제연)하고
勿生一念(물생일념)하라→
정말 법을 위해서, 자네 말대로 법을 위해서
이렇게 왔다고 하니, 모든 인연을 병식.
병은 병풍 屛(병)자 이지요.
병풍으로 딱 가려 버리면
저쪽 것은 전혀 안 보이지요.
그처럼 다 쉬어 버려라.
온갖 인연들을 다 쉬어 버려라.
그리고 물생일념하라.
아무런 생각. 한 생각도 내지 마라.
생각이 많은데 한 생각도 내지 말고.
온갖 인연들을 다 쉬어 버려라.
속 비워라 이겁니다. 마음을 비워야
내 법문이 들어가지 마음을 안 비우면
내 법문이 들어가느냐?
법문 들을 때 제일 좋은 방법이
자기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제일 금물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아무리 좋은 고견이라 하더라도
그걸 다 비워 버리고, 깨끗한 백지 위에서
듣는 것이 제일 바람직합니다.
그렇게 들어야 제대로 들어오는 것이지요.
자기 생각을 가지고 들으면
법문이 절대로 그것이 바로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들어오다가 자기 생각과 합쳐가지고,
왜곡이 되거나, 상충 하거나,
거기에 뭐 색깔이 칠해지거나,
뭐 하여튼 묘 하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지식. 자기경험 그거하고 믹서를 해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거든요.
그거 참 문제지요.
그러니까 육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제발 여러 가지 인연들 다 쉬어 버려라.
그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그야 말로 마음 텅텅 비우고 내말 들어라.
吾爲汝說(오위여설)하리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겠다.
明(명)이 良久(양구)라→
혜명이라는 사람이 가만히 양구.
양구라고 하는 것은 선문에 자주 나옵니다.
가만히, 조용히 있었다 이겁니다.
말도 없고 생각도 없이 가만히 있는 상태를
양구. 그래요.
謂明曰(위명왈),→
혜명을 위해서 일러 가로대,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하라.
正與麽時(정여마시)에 (麽잘마)
那汝是明上座(나여시명상좌)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인가→
유명한 말입니다.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그러니까 그대가 지금까지 살아오고,
또 여기까지 이렇게 쫓아온 것은
선악의 문제다 이겁니다.
그대 나름대로 옳다 그르다 하는 문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는
당신 나름의 선악의 잣대를 가지고
여기까지 쫓아왔다 이것입니다.
불사선불사악하라.
그런 망상으로 사량 분별. 사변으로 결정해 놓은
그런 선이니 악이니 하는 그 따위 것을
다 집어치우자 이것이지요. 우리가...
그랬을 때, 그랬을 때 정여마시.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고,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을 다 배제한
그 때에 나여.
어느 것이 그대의 명상좌.
혜명상좌의 참 모습이냐?
진정한 얼굴이냐 이겁니다.
당신은 지금 선 아니면 악. 악 아니면 선.
순전히 그 상대적인 굴레 속에서 살았지 않느냐?
그거 다 제쳐놓고 당신의 모습이 뭐냐 이겁니다.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 뭐냐?
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
이거 아주 참, 큰 법문 이예요.
우리가 전부 선. 악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상대적인 것의 대표적인 표현이거든요.
善惡(선악). 男女(남녀). 是非(시비).
長短(장단).
전부가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 세상은 전부가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다보니 대개의 사람들은
거의 상대적인 것에 놀아나게 되어 있고,
그럼 그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해야 되느냐?
그리고 우리가 自性(자성), 자성하는
그 자성 자리는, 과연 그 상대적인 현상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 상대적인 것에 치우쳐도 좋으냐?
이 겁니다.
흑 아니면 백이고, 백 아니면 흑이고,
그래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상대적인 것을 잘 이해를 해야 되고,
이해를 해서, 그 다음에
상대적인 것을 잘 이해를 해야 된다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에서 초월해야 되는 것이지요.
초월한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 하는 것입니다.
수용 하는 것.
어떻게 보면,
얼른 들으면 줏대 없이 들릴 수도 있는 말인데,
말하자면 이것이 중도논리가 되는 것이지요.
中道(중도)!
그 중도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不思善不思惡 ←
이것이 중도예요.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고.
그런데
선도 배제하고. 악도 배제해요.
그것은 부정의 입장 이예요.
그러면 선도 받아들이고 악도 받아들여요.
선도 긍정하고 악도 긍정하는
이것은 긍정적인 입장. 부정적인 입장.
이것을 雙遮雙照 (雙둘쌍 遮막을차 照비출조)
그런 말을 해요
부정을 遮라고 하는 막는다고 하는 말을 쓰고,
긍정을 비친다 하는 照라고 하는 말을 쓰지요.
※
육조단경은 중도의 이야기.
제대로 깨치면 중도의 원리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도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래서 흔히 중도의 공식을
雙遮雙照
遮照同時
그런 표현을 합니다.
쌍차
상대적인 양쪽을 다 막아버린다는 뜻이고.
쌍조
상대적인 양쪽을 다 비춘다. 다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雙遮雙照. 선악을 다 부정. 선악을 다 긍정. 照→비출 조.
遮照同時 ←차와 조가 동시다. ←
이렇게 됐을 때 中道正見(중도정견)이라는 말을 씁니다.
불교에서는
저것은 구구단 보다도 더 잘 외워놔야 되는 겁니다.
불교를 이해한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쓰지만,
인생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로 이해하는 데는,
저 중도의 공식. 중도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雙이라고 하는 것은,
왜 쌍이라고 하는가?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善惡(선악)하면,
선만 이야기할 수 없거든요.
부정을 해도 선악을 같이 부정해야 되고,
긍정을 해도 선악을 같이 긍정해야 됩니다.
그 照는, 비춘다고 하는 말은,
긍정하는 뜻입니다.
선도 긍정해 주고
악도 긍정해 주는 겁니다.
쌍차는
선도 부정하고
악도 부정하고,
부정할 때는 다 부정하고,
긍정할 때는 다 긍정하고요.
그래서 차조동시.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그것은 부정할 경우 부정하고,
긍정할 경우 긍정하고.
부정과 긍정이 한 방안에 같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다 살아나는 것이지요.
선도 살고 악도 살고,
男(남)도 살고 女(여)도 살고,
東(동)도 살고 西(서)도 살고,
南(남)도 살고 北(북)도 살고, 다 살아나는 거예요.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한 방에 살면서 融和(융화)하는 거예요.
圓融無碍(원융무애)!
그것을 원융무애라고 그래요.
걸림 없이 아주 평화를 누리는
그런 融合(융합)한 그런 상태.
융합한 상태를 차조동시라고 합니다.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 상태다. 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남과 여가, 반대적인 그런 사람이지마는,
같이 사니까 제일 좋잖아요? 같이 사니까...
남자가 여자를 부정해 버리고,
여자가 남자를 부정해 버리고 이러면 안 되거든요.
부정하려면 같이 부정해야 되고,
긍정하려면 같이 긍정해야 되고
그래서 각자 자기의 임무를 다 하고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
가장 이상적인 삶이거든요.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예요.
불교는 전부 그런 식으로 돼있다고요. 예를 들어서
문수 보현이 그렇고,
體(체)와 用(용)이 그렇고,
線(선)과 上(상)이 그렇고
전부 그런 식으로 짜여져 있는데,
긴 이야기는 생략하고
우선 선악만 가지고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기준으로서의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 그것은 사실은 온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영 부정할 것도 아니고, 영 긍정할 것도 아니에요.
그래 동시에 존재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은 상대적인 것을 뛰어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 또 우리의 본성입니다.
本來面目(본래면목)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 동안 그대는, 왜 모든 사람들은 선과 악.
모든 상대적인 것에서 우리가 놀아났다.
그 상대적인 것을 초월했을 때,
그것을 다 놓아 버렸을 때,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
상대적인 것을 다 놓아 버렸을 때,
어떤 것이 정말 우리의 참 모습이냐?”
“명상좌의 본래면목이냐?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착한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런 모든 것에서부터 다 해방 되었을 때,
그것을 다 떠났을 때의 우리의 참 모습은 무엇이냐?”
이런 질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질문하는 그 말이 여기서는 곧 설명하는 말이거든요.
이 禪(선)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그렇습니다.
질문 그 대로 설명하는, 가르쳐주는 말이에요.
꼭 묻고 싶어서 문는 것이 아니고,
이 질문 속에 사실 대답이 다 있잖아요.
대답을 못해서 그렇지, 대답이 다 있어요.
그러니까 慧明(혜명)이
言下(언하)에→
그 말 아래에, 그 말 하자마자
大悟(대오)→
크게 깨달아 버렸지요.
大悟(대오)하고
復問云(부문운),→
또 떠나 보내야할 급박한 상황이지요.
사람들이 뒤에서 쫓아오면 들통이 나가지고
야단이 나니까 얼른 물을 것 더 있으면 묻고,
보내고, 뒤에 쫓아오는 사람 자기가 막아야 되고,
어떻게 하더라도 달래 가지고 데리고
다시 되돌아가야할 입장이니까요.
그래서 다시 묻는 거예요.
上來密言密意外(상래밀언밀의외)에→
위에서 내려온, 이것은 위에 금방 말한
불사선불사악.
정여마시
나여시명상좌
本來面目 ←
이것이 밀언밀의입니다.
가장 중요한 비밀스러운 말과
비밀스런 뜻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宗旨(종지)가 되는 뜻이지요.
宗旨! 으뜸이 되는 그런 뜻!
“위에서 말한 그것 외에
還更有密意否(환갱유밀의부)이까→
다시 또 다른 일러줄 것이,
密密(밀밀)한. 아주 중요한 뜻이
혹시 또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慧能(혜능)이 云(운),→
혜능이 대답하기를,
與汝說者(여여설자)는
非密(비밀)이라→
그대로 더불어 내가 말해주는 것.
이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卽非密也(즉비밀야)니라→
밀이 아니다 이겁니다.
중요한 것이 못 돼.
중요한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뭐가 진짜 살아있는 중요함인가?
汝若返照(여약반조)하면
密在汝邊(밀재여변)이니라→
법문이 참 간결하지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것이지요.
그대가 만약 돌이켜서 너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면. 너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본다.
반조라는 말은 그거예요.
우리가 전부 밖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말하는 대로 여러분들 말 쫓아가고,
저는 말한다고 바깥으로 내닫고,
전부 나 아닌 다른 쪽을 향해서 끝없이,
끝없이 내닫거든요.
그런데 반조 라고 하는 말은,
밖을 향해서 내닫는 우리의 관심을,
안으로 돌리는 것. 돌이켜서 비춘다.
내 자신. 말하는 그 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말을 듣는데, 듣는 그 내 자신은 무엇이냐?
듣는 그 자체는 무엇이냐 라고,
돌이켜서 생각해 보는 것을
반조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만약에 그렇게 네 자신을 돌이켜서
비추어볼 것 같으면, 중요함이라고 하는 것.
근본이라고 하는 것.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대에게 있다.
그것이 진짜 중요한 것이지요.
뭐 육조스님이 아무리 큰 법문 했다한들
그것이 무슨 중요한 것입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말에 불과한 것이지요.
진정 살아있는 중요함이란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거다.
나한테 있는 거다.
그 우리들 자신의 內面(내면)에 있는
그것을 살펴볼 줄 아는 것.
그거보다 더 살아있는 공부가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그거보다 더 생명력 넘치는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 최고의 일이다 이겁니다.
밀재여변이라는 말이 그 날입니다.
여약반조하면 밀재여변이라.
참 좋은 말 이예요.
우리들이 전부 우리 내면의 세계를.
내 자신을 찾는 일에 몰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密.
비밀스러운 것. 그것은 그대에게 있다.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明(명)이 曰(왈),→
혜명이 말하기를,
慧明(혜명)이
雖在黃梅(수재황매)나→
비록 황매에 있었으나
實未省自己面目(실미성자기면목)이러니→
실로 자기면목. 내 자신의 참 얼굴.
내 면목. 내 얼굴. 내 참모습은 실로 살피지 못했다
이겁니다.
그러다가,
今蒙指示(금몽지시)하오니→
지금에 스님의 지시를 입게 돼서,
금방 이제 불사선 불사악.
그런 지시를 입고는, 어떻게 됐느냐?
如人(여인)이 飮水(음수)에 冷暖(냉난)을
自知(자지)로소이다→
(여기에서 이 말이 나온 이후로 참 많은
조사스님들이 이 말을 따다가 써요.
수 천 수만 번 따다 쓰는 말이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시는데,
그 물이 찬지 더운지
물 마신 본인만 아는 거예요.
물 마신 사람만 아는 거예요.
얼마나 찬지 누가 알겁니까?
물 떠준 사람도 몰라요.
마신 사람만 아는 거예요.
여인이 음수에 냉난을 自知라.
이런 것을 한 마디 배워 놓으면
더러 재미로 써 먹어요. 맛있냐? 하면
여인이 음수에 냉난이 自知라.
먹어봐야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네 입 하고 내입 하고 같으냐 이겁니다.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음이로소이다.
今行者(금행자)는 卽慧明(즉혜명)의 師也(사야)니이다→
지금 행자이지만, 바로 저 자신, 사품장군 출신으로서
스님생활도 한참 오래하고, 법명도 혜명이고,
그런데 나의 스승입니다.
행자 때문에 깨달았으니까 뭐 행자면 어떻고
누구면 어때요?
스승 제자에는 그런 외적인 형식에는
아무 의미 없거든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행자 아니라 무슨 저기 청소하는 사람이든지,
어린아이든지 깨닫게 해준 사람이면
그 사람이 스승이지요. 그러니까
慧能曰(혜능왈),→
혜능이 말하기를,
汝若如是(여약여시)인덴→
그대가 꼭 그렇게 생각 한다면,
吾與汝(오여여)로→
나 하고 그대하고,
同師黃梅(동사황매)니→
같이 황매스님. 오조스님을 같이 스승으로 삼자.
자네하고 나하고 사형사제 하면 그것이 다 좋지 않으냐?
그랬어요.
행자의 입장에선 또 거북스럽지요.
아무리 자기한테 깨달았다 하더라도...
“아 그래 너는 내 제자야.”
뭐 이렇게 나오는 것은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아이 그럴 것 없이,
내가 뭐 행자처지에, 아직 가서 숨어 살아야할 처지에,
어떻게 제자니 뭐니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우리 모두 황매스님. 오조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형사제가 되자. 이렇게 했어요.
善自護持(선자호지)하라→
그러니, 잘 스스로 보호하고 지켜 드려라.
그 오조스님을 잘 지켜드리라. 이 말이지요.
明(명)이 又問(우문)→
또 묻기를,
慧明(혜명)이 今後(금후)에 向其處去(향기처거)리이까→
실은 앞으로, 스님을. 행자님을 통해서 내가 깨달았는데,
나는 이제 처신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하고 턱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慧能曰(혜능왈),→
혜능이 말하기를 오조스님이 자기에게 일러줬던
그런 식으로,
逢袁則止(봉원즉지)하고
遇蒙則居(우몽즉거)하라→
무슨 뭐 경상남도 어디어디의 어느 골짜기에 가서 숨어라
이런 식이 아니고, 서울에 뭐 무슨 동네에 가서
포교를 하라 이런 식이 아니고,
봉원즉지하고,
袁자가
들어가 있는 지명을 만나거든 거기서 그치고,
또 蒙자가
들어가 있는 지명을 만나거든 거기에서 살아라.
이렇게 예언을 해줬어요.
눈에 훤히 들어오니까요.
거기가 因緣地(인연지)예요.
앞에서: (11강) 오조스님도
육조스님에게 그렇게 말 했듯이,
육조스님도 혜명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왜 꼭 이런 말을 하느냐?
사람이 어디서 살고,
또 행세께나 하고 살려면,
다섯 가지 인연이 갖추어져야 된다. 그래요.
다섯 가지 인연...
다섯 가지 인연이 갖추어져야 되는데,
土地緣
(토지연)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 지방. 그 동네하고 인연이 있어야 돼요.
다 인연이 있어서 사는 겁니다.
거기 뭐 아이고 내가 뭐 아파트 잠간 전세로
들어가서 몇 달 산다. 그것도
그만한 인연이 있어서 사는 겁니다.
하루를 살든, 한 달을 살든 1년을 살든 일생을 살든,
그 지역하고 자기하고 인연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이런 글자가 들어있는 지명을
만나거든 거기서 거취하고, 거기에서 살아라.
하는 것이, 이 사람과의 토지 인연입니다.
그 다섯 가지 인연은 토지 연 외에는,
檀越緣(단월연)이 있어요.
그러니까 대개의 선지식이 자기가 공부를 해서,
어디 가서 포교활동을 한다. 아니면
법을 편다고 할 때 필요한 조건들인데,
단월이 있어야 되요.
단월.→
시주하는 사람.
시주하는 사람이 없으면 밥을 못 먹고 살잖아요.
대중들이 모여도 어떻게 먹여 살려요?
시주하는 사람이 꼭 있어야 되거든요.
그 다음에
外護緣(외호연)이라는 것이 있어요.
외호.→
밖에서 보호해 주는 사람.
이것은 지방장관이라든지,
지방관료라든지, 아니면
그 지방의 부호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지켜줘야 돼요.
시주는 단월들이 하더라도,
행정적인 것. 정치적인 것.
이런 것으로 보호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요. 당연히...
그런 보호가 없으면 안 된다고요.
단월연.
외호연.
道緣(도연). 사실은 이것이 제일첫째 조건입니다.
도가 있어야 돼요. 지가 도가 없으면
뭐 아무리 단월이 좋고, 외호하는 사람이 좋고,
토지가 맞다 하더라도 아무 할 일이 없잖아요.
지가 도가 없으면...
衲子緣(납자연).
그러니까 도도 있고, 외호해 주는 사람도 있고,
시주하는 사람도 있고, 토지도 맞고 그런데,
어느 놈 배우러 안 오면 소용없어요.
암만 뭐 지가 실력을 다 갖췄다 하더라도...
납자라고 하는 것은 수행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수행하는 사람들을 납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납자 인연이 있어야 된다.
도연.
토지연.
외호연.
단월연.
납자연.
이렇게 五種緣(5종연)을 이야기를 하지요.
그 순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어쨌든 그 중에서 하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뭐 거기 잘 살펴보세요.
하나라도 빠지면 되겠어요?
될 수가 없다고요.
그런데 제일 근본이 되는 것은 도연입니다.
어쨌든 실력은 있고봐야 되니까요.
逢袁則止(봉원즉지)하고
逢蒙則居(봉몽즉거)하라→
토지연을 뜻하는 것입니다.
明(명)이 禮師(예사)하니라→
혜명이 스님에게 “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예배를 딱 했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明(명)이 回至嶺下(회지령하)하야→
혜명이 고개 밑에까지 마침 돌아서 가니까
쫓아오는 대중들이 있어가지고, 그 쫓아오는
謂趁衆曰(위진중왈)→
대중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向陟(향척)이
崔嵬(최외)해서→
저 앞으로 내가 가보니까 아주 산이 높고,
그래 가지고서 도대체 찾을 길이 없더라.
竟無蹤跡(경무종적)이라→
마침내 종적이 없더라.
아 그 행자 어디로 갔는지 말이지,
아주 시침 딱 떼고 종적이 묘연하더라고
그렇게 일러주는 것이지요.
그러니
當別途尋之(당별도심지)라→
마땅히 다른 길로 우리 한 번 찾아보자.
하고 더듬 수를 놓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니까
趁衆(진중)이
咸以爲然(함이위연)이러라→
이 사람이 그 출중한 사람이니까,
이 사람이 앞질러서 가가지고 실컷 찾아보고
와서는 없다고 하니까 쫓아오던 대중들이
모두들 그렇게 여겼다.
[慧明(혜명)이
後改道明(후개도명)하니→
혜명은 그 후에 이름을 혜명이라 하지 않고,
道明(도명)이라고 고쳤어요.
왜냐? 慧能하고 慧자가 같아요.
그래서 같은 慧자를 쓰지 않고...
이러나저러나 스승이잖아요?
스승인데 스승이름 하고 글자가 같으면,
그건 제자로서 도리가 아니지요.
그래서 혜자를 고쳐서 도명이라고 그래요.
“도명 상좌” “도명 상좌” 그랬어요. 그래서
避師上字(피사상자)라→
스승의 윗 글자하고 피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요즈음 뭐 무식한 사람들 이름 짓는데,
손자 이름에 자기 할아버지 이름자도 들어가 있고,
심지어는 뭐 아버지 이름자까지도 막 들어가 있어요.
그거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 한자로 이름을 지으려면 그건 안 맞는 것이지요.
주변에 형제. 뭐 8촌까지는 안 살펴보더라도,
최소한도 친족으로 6촌정도 까지는 살펴봐야 됩니다.
그렇게 살펴보고
이름을 중복되게 지으면
그거는 안 되는 것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