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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峯先生文集附錄卷之七 / 祠院 / 宅里
一在金浦郡西五里坎井里。自祖考參判公始居焉。遺墟今爲牛渚書院。遺墟碑 見上碑表條
一在沃川郡安內面佳山里栗峙。先生伐木誅茅。營建草堂。名曰後栗精舍。
一在同郡栗峯 卽栗峙 下。有磐石。先生與群弟子講論春秋,朱子書于其地。尤庵書其石曰。重峯先生遊賞之石。
一在同郡正谷里道理洞遺址。有先生父子忠臣孝子旌門。子孫世居焉。
一在同郡西十里。有二止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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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附錄卷十一 / [年譜] / 年譜[十] / [崇禎六十一年戊辰]
六十一年戊辰 先生八十二歲
四月 癸卯。至二止堂。丙午。入華陽。
堂在沃川郡西。重峯趙先生遊賞之所也。先生曾次重峯韻。又作記文揭之。至是與叔季二公同來宿留。甲辰。由琴臺。乙巳。宿俗離僧舍。遂至華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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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憲 1544 1592 白川 汝式 重峯, 後栗, 陶原 文烈
宋時烈 1607 1689 宋聖賚 恩津 英甫 尤庵, 華陽洞主, 南澗老叟, 橋山老父, 尤齋 文正
金元行 1702 1772 安東 伯春 渼湖, 雲樓 文敬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1702년(숙종 28)~1772년(영조 48)
영조 47 1771 신묘 乾隆 36 70 同春 宋浚吉의 遺墟인 月城草堂, 沃川의 二止堂에 다녀오다.
영조 48 1772 임진 乾隆 37 71 7월 7일, 졸하다. ○ 9월, 楊州 陶山에 장사 지내다.
碑는 종조부 金昌翕의 永矢菴 遺墟碑, 玉川書院과 黔潭書院의 廟庭碑이다.
告文은 家廟, 泉洞祠의 李健命, 崧陽書院의 鄭夢周, 龍門影堂의 宋時烈 등에게 고한 글이다.
미호집 제1권 / 시(詩) / 이지당. 삼가 중봉과 우암 두 선생의 시에 차운하다〔二止堂 敬次重峰尤庵兩先生韻〕
명승지에 일찍이 두 분 대로가 계셔 / 名區曾二老
정학으로 천추토록 함께 하시네 / 正學共千秋
벼랑은 오래되어도 친필은 남았으니 / 崖古字猶在
텅 빈 산속에서 몇 해나 흘렀는가 / 山空歲幾周
안타까워라 이내 몸 뒤늦게 태어나 / 吾生嗟已後
이곳에서 함께 종유하지 못함이여 / 此地未同遊
참의 근원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서 / 欲泝眞源去
저물녘 물가에 배회하며 섰노라 / 徘徊立晩洲
[주-D001] 이지당(二止堂) :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으며, 송시열과 조헌(趙憲)이 지방의 영재를 모아 강론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 처음에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 하였으나, 뒤에 송시열이 《시경》의 “높은 산을 우러러봄이여, 큰길을 따라가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를 근거로 이지당이라 명명하였다. 현재 송시열이 친필로 쓴 이지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대청에는 조헌의 친필인 각신서당의 현판을 비롯하여 〈이지당기(二止堂記)〉, 〈이지당강학조약(二止堂講學條約)〉 등이 남아 있다.[주-D002] 중봉(重峰) : 조헌(趙憲, 1544~1592)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ㆍ도원(陶原)ㆍ후율(後栗),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67년(명종2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고, 이후 금산에서 700명의 의사와 함께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37)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주-D003] 중봉(重峰)과 …… 시 : 조헌의 시는 《중봉집(重峰集)》에 보이지 않고, 우암의 시는 《국역 송자대전》 제3권에 〈중봉(重峯) 선생의 이지당(二止堂) 운을 경차(敬次)하여 김 사군(金使君) 정평(正平)에게 보내다〉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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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재로는 옥천읍 교동리의 옥천향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청산면의 청산향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8호), 안남면의 덕양서당, 이원면의 삼계서원 등과 안내면의 옥천후율당(충청북도 기념물 제13호), 군북면의 옥천이지당(沃川二止堂: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안남면의 경률당(景栗堂) 등이 있다. 또한 이원면에 원덕사(遠德祠)·용문영당(龍門影堂), 옥천읍에 삼청사(三靑詞)가 있으며, 묘비로는 안남면에 조헌의 묘인 조중봉묘소와 신도비, 이원면에 송시열의 유허비인 송유암유허비 등이 있다. 그밖에 이원면 금강 상류에 어름치(천연기념물 제238호)가 서식한다. 이 지역은 금강의 맑은 물과 계곡,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경관과 문화유적지가 많으며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지로의 여건이 좋다. 동이면 조령리에 있는 금강유원지와 1991년에 개장한 안내면 장계리의 장계국민관광지에는 여름철에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옥천향교 /옥천향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
전통 교육기관으로는 옥천향교·청산향교·삼계서원·호탄서원·목담서원 등이 있었다.
옥천이지당(沃川二止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송시열(宋時烈)과 조헌(趙憲)이 지방의 영재를 모아 강론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
처음에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 하였으나, 뒤에 송시열이 《시전 詩傳》의 “고산앙지경행행지(高山仰止景行行止”라는 문구에서 이지당이라 하였다.
1901년(광무 5)옥천 옥각리(玉覺里) 금씨(琴氏)·이씨(李氏)·조씨(趙氏)·안씨(安氏)의 네 문중에서 이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체 규모가 건평 40평, 본채 1동과 누각건물 1동으로 되어 있다.
본채는 석축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 팔작집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쪽 2칸은 거실로 되어 있다. 본채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 팔작집으로 높은 단 위에 누마루를 두고 주변에 난간을 두른 층루건축물(層樓建築物)이다.
현재 이 건물에는 송시열의 친필인 이지당의 편액이 걸려 있고, 대청에는 조헌의 친필인 각신서당의 현판을 비롯하여 이지당기(二止堂記)·이지당강학조약(二止堂講學條約)·조헌의 친필운(親筆韻) 등이 남아 있다. 1966년 12월 정각(亭閣)을 보수한 바 있다.
경율당(景栗堂)
충북 옥천군 안남면 종미3길 120 (우)29010
지번안남면 종미리 523
조선 영조 12년에 경율 전후회가 마을입구에 서당을 짓고 자기의 호를 따서 경율당이라 지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옥천(沃川)
창주서원(滄洲書院) 만력 무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김집(金集)ㆍ송시열ㆍ송준길ㆍ곽은(郭垠) 호는 용촌(龍村)이며 승지를 지냈다. 효종 경인년에 따로 창주사우(滄洲祠宇)를 세워서 향사하였다.
원덕사 영건사실(遠德祠 營建事實)
신라기원 1975년 기미 1919)10월10일 정구(珽九)가 그 아우 만구(滿九)(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에 거주함)로 더불어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의 재실(密城君諱陟之后朴仁齡)묘아래서 세일사(歲一祀)를 지내매 어른과 젊은이가 모두 모여서 제사를 잘 모신 후에 정구가 좌석 가운데 나가서 탄식하며 말하되 근데 할아버지의 산소에는 세일사를 권할 적이 없는데 밀성대군에 이르러서는 우리 박씨의 본관을 받은 중조로 온 나라에 그 자손이 번성하여 그 숫자가 헤아릴 수가 없는데 오히려 (시달(豺獺)승냥이와 수달도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어 보본 할줄을 안다)의 보본을 권하였으니 이게 어찌 후손의 도리가 되겠는가 ?
친근 한데에 풍족함이 없으면 서경전사(書經典祀)에 무량간일(無量干일) 옛사람의 경계한 바이니 공덕이 있는 조상에는 사당의 제향도 가할 것이요 단소의 제향도 또한 가하므로 당연히 여러 백세에 제향을 지낼 것인데 지금 천년에 이르도록 향화(香火)를 전폐하게 되었으니 이게 우리 종족의 결함된 일로 선조 제현께서 뜻을 두고 펴지 못한지가 오래인데 옛 숭정 (崇禎:명의종 2년호)(明毅宗 二年號)갑술 (1634)년에 외손 이유달(李惟達 : 전주 이씨)이 본도(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매 본손 및 유림으로 더불어 영남루에 제향을 올리고 대군의 사우를 창건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 후 병진(1676)년에 전국군 후손인 군수(郡守)문호(文號 :밀양 하서에 있다)가 청도, 밀양의 여러 종족으로 더불어 사우(祀宇) 건립의 일을 상의하여 목재를 베고 주초를 운반 하였는데 마침 흉년을 만나서 건립하지 못하였으니 쉬운 일도 달하지 못하고 성의조차 미체 한 것이 아닌가 ?
통탄을 금하지 못하겠다.사우를 건립하는데 이르러서는 졸현히 시작할 수가 없고 먼저 설단하여 제향을 올리는 것이 의례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니 여러분의 의사는 어떻한가 하니"여러 일가들이 같은 소리로 옳다고 하므로 드디어 설단의 의논을 정하고 11월11일 동짓날이다.
만구로 하여금 일가 사람들을 인솔하고 드디어 재실 서쪽 언덕위에 설단하는데 반나절도 못되어 필역하고 맑은 술과 생육의 제수로 공손이 대군께 제향을 올리되 한 결 같이 정부자(程夫子)의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예절을 갖추었다.
이튼날이 동지인데 인구(仁九)가 호남으로 내려가 각처에 거주하는 종인들을 교섭하매 먼저 정읍에 박만환(朴晩煥)을 찾아 사우 건립의 의의를 말하니 만환이 또한 극구 찬성하며 즉시에 그 근방 종인들에게 선포하여 한소리로 협조하게 하고 만구(滿九),인구(仁九)는 또 어려움을 순방하면서 보본의 의거를 광포하니 두어달 사이에 뜻있는 종족들이 같은 소리로 협력하여 다시 사우 건립의 의논을 정하고 이날에 가장 먼저 참석한 자는 인구(仁九), 정구(情九), 경구(慶九), 내규(來奎), 내억(來檍), 승욱(承郁), 현겸(亨謙), 태훈(泰勳), 만환(晩煥), 태영(台永)여러 사람이다.
본소에 있는 종인이 호남을 왕래 할 때에 여러 번 승주(昇柱)를 심방하매 반드시 관대하고 후하게 예비도 주고 다소간에 금액을 보내어 본소에 군박함을 모면하게 했다.
경신(1920)6월달 어느 날에 구룡촌 제사에서 종회를 개최하였는데 회의 목적은 대군의 사우를 영견 할 떼에 임원 배정의 일이다. 공의로 추천하여 소장은 희명(喜明)이요 도유사는 내억(來檍)이오 부유사는 내규(來奎)요 재무유사는 만구(滿九)로 정하고 통문을 발간하여 각처 종족에게 발송하였다.
이해 11월 동지에 단소에서 제향을 올리고 같은 날 자시(子時)에 토지신위에 제사지내고 드디어 사우에 기지를 개척하여 목재 주초 기와를 운반했다.
사우의 제도는 정전이 四컨이오 반신문이 四칸이며 목수인즉 찬구(贊九):순천 사람)이요 부약장은 전 참판 남현(南鉉:진원 사람)이다.
옛날 발기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 현령 박희 , 유학 박수춘 , 첨지 박종서 , 봉사 박이문 , 주부 박사순 , 참의 박응성 , 봉사 박의룡 , 수문장 박승선 , 동지 박경만 , 주부 박천세 ,정로위 박사인 , 어모 박구 , 정로위 박항지 , 충찬 박담 , 충순 박복 , 봉사 박항의 , 봉사 박이눌 , 사복 박진남 , 사과 박정 , 유학 박영진 , 보인 박경립이요 유림에는 안패 김시성 , 이유 , 장희적 , 안호 , 신명희 , 손기양 , 안종한 , 조기창 ,조명주 , 권규 ,손창도 , 하윤성 등 여러 사람이다.
후손 정구(珽九)가 삼가 짓다.
내용
옥천 원덕사(遠德祠), 元德祠誌(원덕사지) |
밀성박씨 21현조를 배향하고 있는 원덕사의 자료입니다. 아래 앨범표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전자책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제목 : 元德祠誌(원덕사지) 이 원덕사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遠德祠誌重刊序(원덕사지 중간서) 遠德祠誌序(舊)(원덕사지 서(구)) 崇德殿全圖(숭덕전도) 慶州古都山川圖(경주고도 산천도) 遠德祠全圖(원덕사전도) 寫眞(사진) 遠德祠事實(원덕사 사실) 遠德祠常享祝文(원덕사 상향축문) 遠德祠祭享笏記(원덕사 향흘기) 遠德祠營建事實(원덕사 영건사실) 遠德祠開基祝文(원덕사 개기축문) 追配草菴公告由文(추배 초암공 고유문) 追配草菴公奉安文(추배 초암공 봉안문) 追配正郞公告由文(추배 정랑공 고유문) 追配正郞公奉安文(추배 정랑공 봉안문) 密城壇事實(밀성단사실) 密城壇碑陰記(밀성단음기) 景德壇三大祖碑文 新羅景明王子密城大君祭壇陰記(경덕단 삼대조 비문, 신라경명왕자 밀성대군제단 음기) 高麗三韓壁控都大將軍祭壇陰記(고려삼한벽공대장군 제단 음기) 遼東督捕使壇碑陰記(요동독포사단비 음기) 八大君分封序次(팔대군 분봉서차) 密城朴氏十二中祖(밀성박씨 12중조) 祠宇建立通論文(사우건립 통론문) 大同宗約所通論文(대동종약소 통론문) 遠德祠上樑文(원덕사 상량문) 聲討南樓宗會文(성토남루 종회문) 遠德祠記(원덕사기) 遠德祠重修記(원덕사 중수기) 追慕齋記(추모재기) 追慕齋重修記(추모재 중수기) 追遠齋記(추원재기) 追遠齋序(추원재서) 密城大君舊壙發見事實(밀성대군 구광 발견사실) 遠德祠笏記跋(원덕사 흘기발) 遠德祠誌跋(원덕사지발) 遠德祠誌重刊(원덕사지중간) 追記(추기) 各貫分派中祖顯祖略錄(각관 분파중조 약록) 新羅始祖王以下世系分派圖(신래시조왕이하 세계분파도) 歷代有司錄 歷代執事分定記(역대 유사록, 역대 집사분정기) 遠德祠財産目錄(원덕사재산록) 아래 앨범표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덕사의 모습을 전자책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제목 : 밀성박씨 밀성박씨 21顯祖의 사당 옥천 원덕사(遠德祀) 추모재(追慕齎), 유연당(油然堂) 遠德祠 事實 祠密城大君神位奉安之閣而十九中祖從享之所也. 在忠淸北道 沃川郡 伊院面 龍坊里 重九峯下卽承旨朴仁齡 密城君 諱 陟之后 墓下齋室之南也. 後有善山郭氏世居村前臨赤壁江其源南自茂州錦山等地東自尙州永同等郡發及至深川江合流入錦江南有月伊山輪囷磅磚勢甚雄俊北距龍門書堂數里祠下有宋睡翁甲祚遺墟碑宋尤庵時烈胚胎室西距沃川邑三十里伊院驛十里也. 新羅紀元千九百七十九年壬戌春承旨公後孫朴滿九與遠邇姓孫僉謀詢同建築祠宇同年冬南至奉安大君神位越明年癸亥六月五日從享十九中祖越四十九年壬子十一月七日追配一位又十二年甲子十一月冬至日復配一位而扁以遠德盖取愼終追遠民德歸厚之義也. 以每年春三月一日行合祭禮祝笏式與文廟釋奠儀略同而四季令節及朔望定有司焚香位版側大君爲主璧而當中廡兩分貫列中祖以年代序次從享于東西兩壁東壁十一位西壁十位如左耳. 원문출처 : 원덕사(박씨문화원) 원덕사는 밀성대군의 신위를 주벽으로 봉안한 사우로 19위를 종향한 곳이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중구봉 아래에 있으니 승지 박인령(밀성군 휘 척의 후)의 묘 아래요 재실의 남쪽이다. 뒤에는 선산 곽씨 거촌이 있고 앞에는 적벽강이 있으니. 그 근원은 남쪽 무주 금산 등지로부터 시작되고 동쪽은 상주 영동군으로부터 시작하여 심천강에 이르러 합류되어 금강으로 들어가니 남쪽에는 월이산이 있어 구부러지고팽박하여 심희 웅준하고 북으로부터 용문서당이 수리밖에 있고. 산 아래에는 송수옹 갑조의 유허비와 송우암 시열의 태여 난 집이 있다. 서로는 옥천읍이 30리 허에 있고 이원역이 10리 밖에 있다. 신라기원 1979(1922)년 임술년 봄에 승지공 후손 박만구가 멀고 가까운 성손과 같이 사우 지을것을 상의하고 같은 해 동짓날에 대군의 신위를 봉안하고 이듬해 계해 6월 5일에 19중조를 종향토록하고 월49년 임자 11월 7일 추배일위하고 또 12년에 갑자 11월 동지날에 다시 추배일위하여 원덕사라 액호를 걸으니 대개임종을 삼가히 하고 원대토록 추모하면 인심이 순후하게 돌아온다는 뜻을 취함이다. 매년 춘 3월 1일에 합하여 제례를 행하니 축홀과 제의 의식은 문묘의 석전 예의와 비슷하고 사계 명절이나 삭망에는 유사를 정하여 분향하고 위판은 대군이 주벽되고 무를 양쪽으로 나누어 중조를 차례로 모시고 년대 서차대로 종향토록 되어있으니 동벽이 11위이고 서벽이 10위이니 좌와 같다. 출처 : 원덕사지(元德祠誌) 25페이지 八大君分封序次 1. 밀성대군(密城大君) 휘 언침(諱彦枕) 밀성박씨(密城朴氏) 2. 고양대군(高陽大君) 휘 언성(諱彦成) 고령박씨(高靈朴氏) 3. 속함대군(速咸大君) 휘 언신(諱彦信) 함양박씨(咸陽朴氏) 4. 죽성대군(竹城大君) 휘 언립(諱彦立) 죽산박씨(竹山朴氏) 5. 사벌대군(沙伐大君) 휘 언창(諱彦昌) 상주박씨(尙州朴氏) 6. 완산대군(完山大君) 휘 언화(諱彦華) 전주박씨(全州朴氏) 7. 강남대군(江南大君) 휘 언지(諱彦智) 순천박씨(順天朴氏) 8. 월성대군(月城大君) 휘 언의(諱彦儀) 월성박씨(月城朴氏) 密城朴氏十二中祖 언부(彦孚)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언상(彦祥) 도평의사공(都評議事公) 언인(彦仁) 상서좌복야공 양언(良彦) 밀직부사공 천익(天翊) 판도판각공(版圖判閣公) 을재(乙材)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 원(元)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 척(陟) 밀성군충헌공(忠憲公) 원광(元光) 영동정공(令同 正公) 중미(中美)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위(葳) 정국군(靖國君) 현(鉉) 사헌규정공(司憲糾正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