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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집(勉菴集) 천왕봉(天王峰)
면암집(勉菴集) 최익현(崔益鉉)생년1833년(순조 33)몰년1906년(고종 43)자찬겸(贊謙)호면암(勉菴)본관경주(慶州)소자기남(奇男)특기사항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학자이자 의병장
勉菴先生文集卷之二 / 詩 / 天王峰
고종 | 39 | 1902 | 임인 | 光武 | 6 | 70 | 3월, 宮內府 特進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다. ○ 4월, 正憲大夫로 陞資되다. 頭流山을 유람하고 8월 초에 돌아오다. |
乾坤初闢在何年。準備頭流擎彼天。層崖陰織春無盡。下界雲蒸晝欲眠。
瞻依日月頻回首。管轄山河揔俯前。莫謂尋眞多別路。發源自有逝斯川。
면암선생문집 제2권 / 시(詩) / 천왕봉(天王峰)
하늘과 땅이 처음 어느 해 열렸던가 / 乾坤初闢在何年
저 하늘 받치려고 두류산을 준비했네 / 準備頭流擎彼天
층계 언덕엔 그늘 쌓여 봄이 다하지 않고 / 層崖陰織春無盡
아래 지계에 구름이 끼니 낮에 잠자고 싶네 / 下界雲蒸晝欲眠
일월을 보고 무단히 슬퍼하며 / 瞻依日月頻回首
산하를 관리하니 모두 내 앞에 구부리네 / 管轄山河摠俯前
진경을 찾는데 어디 다른 길이 있으랴 / 莫謂尋眞多別路
원류부터 본래 시내가 있다네 / 發源自有逝斯川
ⓒ 한국고전번역원 | 오양 (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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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증(雲蒸) : 구름이 일듯이 모여 듦.
조산(鳥散) : 새가 나는 듯이 흩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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勉菴先生文集卷之二 / 詩 / 次鄭雲弼 圭錫 尋眞亭韻
名山。古多寒棲幽舘高人逸士。余於頭流千萬疊。入中山而得尋眞亭。入其亭而得主人如鄭君雲弼。甚奇遇也。雲弼以箕裘業。出脚韎韋。位緋玉。一自世變來。遂絶意名韁。盡室入山。行住坐臥。不出於亭。而每泉聲嶽色之中。嘯詠自樂。不知老之將至。家甚淸素。而高朋滿座。樽酒不空。又往往多急人風。使我稀年衰脚。無事登頭流絶頂者。亦雲弼是賴。雲弼眞可謂今世之逸士也。亭卽其王考二幸窩雲峰公菟裘。而雲弼所肯構者。板上有原韻。願以老醜託名於玆。以備異時故事云。
千里南爲得此亭。于今始見玉壺形。秦漢迷蹤但雲白。唐虞舊物有山靑。
孤衷圓夜枕。悠悠殘夢入朝廷。君家心法傳來好。歸卧吾廬作肺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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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王峰(천왕봉).崔益鉉(최익현).本貫:慶州(경주).字:贊謙(찬겸).號:勉菴(면암).
朝鮮末期(조선말기)文臣(문신) 學者(학자) 愛國志士(애국지사).
純祖(순조) 33년 (1833∼1906.11.17).
乾坤初闢在何年(건곤초벽재하년)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 게 어느 해였던가?
準備頭流擎彼天(준비두류경피천) 두류산을 준비하여 저 하늘 떠 받쳤네.
層崖陰織春無盡(층애음직춘무진) 층계진 언덕엔 그늘 쌓여 봄이 다하지 않고
下界雲蒸晝欲眠(하계운증주욕면) 하계엔 구름이 끼어 낮에도 잠자려 하네.
瞻依日月頻回首(첨의일월빈회수) 해와 달을 보며 자주 고개 돌려보고
管轄山河摠俯前(관할산하총부전) 산하를 관할하니 모두 앞에서 구부리네.
莫謂尋眞多別路(막위심진다별로) 진경을 찾는데 다른 길이 많다고 하지 마라
發源自有逝斯川(발원자유서사천) 발원지가 절로 있어 이 시내 이루어 간다네.
[출처] 天王峰(천왕봉).崔益鉉(최익현).|작성자 ayjg0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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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조망공원
天王峰
勉菴 崔益鉉
乾坤草闢在何年(건곤초벽재하년) 하늘과 땅과 풀이 그 어느 해에 처음 열려서
準備頭流擎彼天(준비도류경피천) 두류산을 준비하여 저 하늘을 떠받치는가
層崖陰織春無盡(층애음직춘무진) 층계진 언덕 그늘에 봄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에
下界雲蒸晝欲眠(하계운증주욕면) 산 아래 구름 끼니 낮인데도 잠을 자고 싶구나
瞻依日月頻回首(첨의일월빈회수) 해와 달을 우러르며 고개 돌려 얼굴을 찡그림이여
管轄山河摠俯前(관할산하총부전) 산과 물을 관할하니 모두가 내 앞에 엎드리누나
莫謂尋眞多別路(막위심진다별로) 참 길을 찾고 있는데 어디 다른 길이 있을손가
發源自有逝斯川(발원자유서사천) 발원하는 데서 냇물이 떠나가게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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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면암(崔益鉉)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지리산 마실 2006. 7. 5. 21:42
■면암선생문집 제 2권
칠십에 방장산 오를 약속은 / 稀年方丈約
오직 그대들 있는 까닭일세 / 賴有二三公
원컨대 추진의 힘 더하여 / 願借推移力
최상봉 오르길 약속하세 / 期於最上峯
○천왕봉(天王峰)
하늘과 땅이 처음 어느 해 열렸던가 / 乾坤初闢在何年
저 하늘 받치려고 두류산을 준비했네 / 準備頭流擎彼天
층계 언덕엔 그늘 쌓여 봄이 다하지 않고 / 層崖陰織春無盡
아래 지계에 구름이 끼니 낮에 잠자고 싶네 / 下界雲蒸晝欲眠
일월을 보고 무단히 슬퍼하며 / 瞻依日月頻回首
산하를 관리하니 모두 내 앞에 구부리네 / 管轄山河摠俯前
진경을 찾는데 어디 다른 길이 있으랴 / 莫謂尋眞多別路
원류부터 본래 시내가 있다네 / 發源自有逝斯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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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선생문집 제 12권
○윤연여(尹淵如) 긍주(兢周) 에게 답함 - 경자년(1900, 광무 4) 9월 3일
높으신 인격을 우러러 사모하면서 만날 기회가 없어서 항상 한탄하였는데, 어자(御者)가 외람되게 먼저 누추한 집에 찾아 주었으니 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동쪽으로 여행하였기 때문에 사랑채를 청소하고 맞이하지 못하였으며, 또 한 장의 편지를 즉시 올려서 사례를 드리지도 못하였으니, 이렇게 태만하므로 무슨 말로 죄송함을 표현하겠습니까.
가을이 이미 깊었습니다. 영체(令體)께서 의(義)를 지키심이 더욱 왕성하실 줄 믿습니다. 성인이 말씀하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안다.’ 하였고, 또 ‘군자는 본래 가난하다.’ 하였는데, 지금 세상에서는 오직 영공만이 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잔약하고 졸렬한 익현도 일찍이 공경하며 영공과 같기를 생각한 지 오래입니다.
익현은 지난 5월에 집을 떠나서 원주(原州)ㆍ제천(堤川)으로부터 죽령(竹嶺)을 넘어, 퇴계 선생의 도산(陶山) 유사(遺祠)에 참배하고 계림(鷄林 경주(慶州))의 옛 도읍을 찾았습니다. 계속하여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독서대(讀書臺)에 올라 선조의 유적(遺蹟)을 관람하고 일족(一族)의 정의를 강론한 뒤에 8월에 이르서야 정산(定山)의 우거(寓居)로 돌아왔습니다. 평생의 유람을 거의 다하였으나 오직 두류산(頭流山)을 아직 보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남은 한이 될 뿐입니다. 봄이 되면 예전에 살던 마을로 돌아가서 차례로 찾을 계획입니다. 다만 더욱 도의(道義)를 강론하여 처음과 끝을 완전하게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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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선생문집 제 15권
○영조(永祚)에게 보냄 - 임인년(1902, 광무 6) 6월 7일
하동(河東)에서 인편에 부친 편지는 혹 지체없이 받아 보았느냐? 들으니 경기도 지방에 가뭄이 심해서 현재 사정이 작년보다 심하다고 한다. 근처의 농사 형편은 과연 어떠하며 고향 소식도 들을 수 있는 길이 있느냐? 이 밖의 사소한 이야기는 마음만 어지럽힐 뿐이니, 더 말할 것 없겠다.
나는 이미 이번 길에 힘을 다하여 두류산(頭流山) 꼭대기에 오르고 홍류동(紅流洞) 계곡을 건넜으므로 숙원을 조금 풀었지만, 너무 고단해서 가는 곳마다 쓰러져 누워 인사불성이 되기도 하나, 스스로 부른 고생이니 어떻게 하겠느냐.
예정으로는 초복(初伏) 전에 쌍계사까지 가서 심한 더위를 넘기고 처서(處暑) 전후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혹시 전주 감영(全州監營) 편이 있거든 편지를 부쳐 주면 좋겠다. 동행중인 남해(南海)의 종인(宗人) 행원(行源), 진주(晉州)의 소년(少年) 덕화(德化), 황산(黃山)의 신경지(愼敬之)는 아직 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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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선생문집 부록(정리자 미상)
○임인년(1902, 광무 6) 선생 70세
3월 다시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제배(除拜)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때에 상이 영조의 고사(故事)에 의해서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려는데 문관 정경(正卿)으로서 나이가 70이상인 자는 모두 참여하도록 허가한 까닭으로 이 명이 있었다. 선생은 연전에 공조 판서로 발탁되었을 때에 이미 의(義)를 지켜서 정경으로 자처하지 않았고, 그후 찬정(贊政)으로 제수되었으나 또한 한결같이 고신(告身 벼슬에 임용할 때 주던 직첩(職帖))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비록 우연히 나이가 칠순(七旬)이란 것으로서 버젓이 영수각(靈壽閣)에 숙배(肅拜)한다면 임금의 은택은 비록 크더라도 나의 의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여 드디어 짧은 상소로써 병을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더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런 드물게 있는 경사로운 기회를 만났으니 경의 도리에 있어서는 바삐 진참(進參)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4월 정헌대부로 승진(陞進)되었다.
노인을 우대하는 은명(恩命)이었다.
○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 여행을 떠났다.
한라산(漢拏山)ㆍ금강산(金剛山)ㆍ두류산(頭流山)을 우리나라 삼신산(三神山)이라 부르는데, 선생이 한라산과 금강산은 이미 한 차례 유람했으나 두류산은 아직 구경하지 못하였다. 이해 봄에 하동(河東)에 있는 종인(宗人) 최정현(崔廷鉉)이 횡천(橫川)에 문창후의 사당을 다시 설립하고 전에는 금천(琴川)에서 제향하였는데 이번에 옮겨 세웠다. 봉안(奉安)하는 날짜를 통고하면서 선생에게 참석하기를 굳이 청했다. 마침 문인 유기석(柳淇錫)ㆍ신종식(愼宗軾)과 종인 최기호(崔基鎬)가 와서 뵙고, 두류산을 관람하기에는 이번이 알맞은 시기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로 인해서 길을 떠났는데 문인 곽한소(郭漢紹)가 모시고 따랐다.
공주 공암(孔巖)을 방문하여 충현원(忠賢院) 옛터를 찾았고 옥천(沃川)을 방문하여서는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상공을 뵙고, 연재(淵齋) 송공을 방문하여, 8대조 상서공(尙書公)의 묘표(墓表)를 청하였다. 드디어 고개를 넘어 안의(安義) 수승대(搜勝臺)와 광풍루(光風樓)에 오르고 함양(咸陽)을 지나면서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례하였다. 돌아서 학사루(學士樓)에 올랐는데, 누(樓)는 곧 함양 인사가 문창후의 남긴 인애(仁愛)를 잊지 못해, 사모하는 뜻으로 창건한 것이었다. 앞에 울창한 숲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는 문창후가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단성(丹城) 신안 정사(新安精舍)에서 이틀을 유숙하였다. 그때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계남(溪南) 최숙민(崔淑民)이 함께 와서 모였다.
이에 적벽강(赤壁江)에서 배를 타고 진주(晉州) 청수(淸水)를 지나다가 포은 선생(圃隱先生)의 화상을 배알하고 하동 횡천에 이르니, 선생의 행차가 더디었기 때문에 영정을 봉안(奉安)하는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 공경스럽게 배알한 후에 많은 선비를 거느리고 습례(習禮)하였다. 대개 선생이 이르는 곳마다 많은 선비가 구름 모이듯 해서 혹 학문을 강론하고 혹 시율을 읊조렸는데 선비들의 모임이 거의 근고에 없던 일이었다.
드디어 두류산에 올랐다. 벽계암(碧溪巖)ㆍ문창대(文昌臺)를 거쳐, 천왕봉(天王峰)에 올라서 연구(聯句)를 짓고 거닐다가 내려왔다. 산천재(山天齋)를 지나면서 남명(南冥 조식(曺植)) 조 선생(曺先生) 묘소에 배알하고 삼가(三嘉)에 이르러 향옥재(香玉齋)를 방문했는데 즉 고(故) 처사(處士) 모려(茅廬) 최남두(崔南斗) 공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었다. 합천에 가서 가야산(伽倻山)을 유람하였다. 가야산은 곧 문창후가 숨어 살다가 일생을 마친 곳으로 봉우리 하나, 골짜기 하나 물 하나, 돌 하나라도 그의 발자취가 머문 곳이다. 이에 따라온 수백 명과 더불어 벽송정(碧松亭)ㆍ주학정(住鶴亭)을 거쳐, 물을 따라 들어가 청량재(淸凉齋)ㆍ칠성대(七星臺)ㆍ홍류동(紅流洞)을 지나서 문창후의 영당을 배알하고 농산정(籠山亭)에 올라 돌에 새겨진 것을 두루 구경하였다. 다음에 자필암(泚筆巖)ㆍ음풍뢰(吟風瀨)ㆍ취적봉(吹笛峯)ㆍ완재암(宛在巖)ㆍ광풍뢰(光風瀨)ㆍ제월담(霽月潭)ㆍ분옥폭(噴玉瀑)ㆍ낙화담(落花潭)ㆍ첩석대(疊石臺)ㆍ조산대(造山臺)ㆍ은선동(隱仙洞) 여러 명승을 지나 해인사(海印寺)에 이르러서 이틀을 유숙하면서 유람하였다.
다시 진주를 방문하여 촉석루(矗石樓)를 관람하면서,
사직에 대한 정충은 뭇 별이 복두를 옹위했고 / 社稷眞忠星北拱
천자께 조회하는 큰 의리는 물이 동으로 흐른다 / 朝宗大義水東流
라는 시구(詩句)를 짓고 인하여 창렬사(彰烈祠)를 배례하고 다시 하동에 들어가서 제문을 지어 영장(營將) 홍건(洪楗)의 빈소(殯所)에 제사하였다. 악양정(岳陽亭)을 지나,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가 학사당(學士堂)의 문창후 화상을 배알하고 인하여 진감 선사(眞鑑禪師)의 비(碑)를 관람했다. 청학루(靑鶴樓)에 모였다가 호남 경계로 들어갔다. 구례 화엄사(華嚴寺)ㆍ남원 천은사(泉隱寺)를 모두 유람하다가 8월 초순(初旬)에 집으로 돌아왔다.
대개 이번 여행에 선생이 70연세로, 산을 오르고 물에 굽어보는 천여 리 길에 다섯 달 동안 행역의 수고로움과 수답(酬答)하는 번거로움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선생은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면 너그럽게 대하였고, 모든 서신과 요청하는 문자를 모두 손수 짓고 남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9월 포천 선영(先塋)을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원 궐리사(闕里祠)를 배알하였다.
문인 조재학(曺在學)과 곽한소(郭漢紹)가 따랐다.
10월 상소하여 허물을 인혐하며 스스로 변명하였다.
지난 6월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으로 옮겨 제수하는 명이 있었으나 선생이 지방에 있었으므로 알지 못했다. 이때에 어떤 변변찮은 사람이 이 관직을 얻고 싶어서 선생의 사직소(辭職疏)를 위조하여 올렸는데, 아뢴대로 시행하라는 비답이 곧 내렸다. 선생이 이 사실을 듣고,
“말세에 염치가 도무지 없어서 별 변고가 다 생긴다.”하고는, 드디어 소장을 올려서 스스로 변명했으나 임금의 비답이 없었고 조정에서도 조사하는 일이 없었다.
[민족문화추진회 면암집 국역본 중 두류산 관련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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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崔益鉉, 1833.12.5~1906.11.17]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출생하였다.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