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정음시조문학상 수상작 보도자료
● 제5회 시상식
2023년 6월 24일 토요일 오후 4시 대구 한영아트홀.
● 수상작
별의 기록문
표문순
달 속에서 자라던 꽃잎이 떨어지면
엄마는 모달에서 채집한 별을 오려
열세 살 시트 위에다 감쪽같이 수를 놓았다
달이 필 때마다 늘어나던 붉은 별
먼 잠을 덮고 있던 촘촘한 실밥들이
미숙한 나의 우주를 경영하곤 했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한
공전하는 아이를
엄마의 기록으로
빛나게 일궈놓아
슈퍼문
그것이 와도 까딱없이 밤을 차렵했다
-《가히》2023, 창간호.
● 수상소감
내 인생을 바꿔놓은 결정적 사건 ‘시조’
표문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번 수상은 느닷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수상자를 선정하는지, 언제쯤 이루어지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그저 누군가가 수상자로 발표되면 이번에는 이런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았구나 하면서 축하의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정음시조문학상의 결과를 공유하곤 했습니다. 이정환 정음시조문학상 운영위원장님의 전화를 받으면서 덜컥 겁이 났던 건 제5호 정음시조 원고 마감이 임박해 있던 터라 원고독촉이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2023년 제5회 정음시조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발표한 시들, 나름대로 고민 끝에 내놓기는 하였으나 저보다 더 잘 쓰시는 선·후배 시인님들이 많았기에 혹시라도 하는 마음조차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졸작을 높이 평가해 주셨다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시조는 제 인생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부에서 시인으로 시인에서 문학 연구자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배움으로 인하여 제 삶은 가치가 커지고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3장 6구 45자 내외’ 였지만 이 짧은 글 속에 압축되어있는 무수한 세계를 인지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문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했고, 시·시조의 다양한 작품 읽기와 필사,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고뇌의 시간이 필수였습니다. 밑거름이 많아야 좋은 시를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잘 발효된 거름 만들기를 위한 학업의 시간이 길었습니다. 그만큼 저에게 있어서 시인이 되는 길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현대에는 멀티형 능력자들이 많아 다방면에서 재능을 드러내기도 한다지만 저는 늘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하나도 못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라는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곁눈질 없이 시조 쓰기에 매진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시 쓰기가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제게 주어진 사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 시조의 바탕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첫 시집 서문에 “먼 데 있는 시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주변이 모두 시였다”라고 적었던 것처럼 시를 찾기 위해 먼 곳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보면 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작고 대수롭지 않은 것에서 발견하는 의미가 더 깊이 들어올 때가 많습니다. 이번 수상작 ‘별의 기록문’의 경우도 특별하지 않았던 것에서의 발견이었습니다. 공전하는 딸아이가 이불 위에 남겨놓은 흔적을 감추기 위하여 별을 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달의 주기에 따라 하나씩 늘어나면서 기록처럼 남겨졌던 것입니다. 하마터면 버려질 뻔한 이불을 재생시키며 건강한 여성성에 미소 지었던 경험을 거기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다 커버린 딸아이가 남겨놓은 기록은 별을 달 때 느꼈던 과거의 심경을 현재로 소환시키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특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시가 사회 현상,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한 정서적 기능도 크기 때문에 저의 사소한 경험이 마음 따뜻하게 공유되기를 바랐습니다.
시조에 대한 표현의 욕구가 넘치지만 마음처럼 담아지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는데 졸작을 높이 평가해 주시고 수상자로 선정해 주신 문정희, 유성호, 이승은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진하여 좋은 글을 쓰라는 응원의 마음으로 받습니다. 일일이 거론하지 않지만 제 글이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랜 기간 학업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남편과 엄마를 자랑스럽게 보아준 딸아이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표문순 시인 약력
○ 1967년 경기도 파주 출생
○ 2014년《시조시학》등단
○ 열린시학상, 나혜석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제5회 정음시조문학상 수상.
○ 시조집『공복의 구성』
● 제5회 정음시조문학상 심사평
제5회 정음시조문학상 본심에는 등단 15년 아래의 시조시인들, 말하자면 우리 시조시단에 새로운 활력과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분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현대시조의 새로운 가능성과 오래된 위의(威儀)를 동시에 확인시켜주는 작품들이 예심 선고 과정을 통과해온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분들의 작품들을 천천히 윤독하면서, 오랜 토론의 결과, 표문순 시인의 다섯 작품을 수상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동안 표문순 시인은 첫 시조집 공복의 구성(2019) 이래 주체와 대상 간의 경험적 화음을 향한 순연한 열망을 담아왔다. 정형 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유와 감각을 풀어놓으면서도 시조 특유의 동일성을 지켜가는 그의 미학은 우리 시조시단을 향한 양식적 요구에 대한 그 나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균형과 정형의 양식적 결속과 미학적 세련화를 통해 표문순의 시조는 사물과 주체가 느끼는 동일성의 차원을 독자적인 서정적 격조로 노래해왔다고 할 것이다.
이번에 수상작이 된 「별의 기록문」에서는 우주적 상상력과 모성(母性)의 기억을 결합시켜 가장 아름답고 근원적인 순간을 잡아내었다. 근간 우리 시조시단을 밝힐 수작이라 생각된다. “달 속에서 자라던 꽃잎”과 “별을 오려/열세 살 시트 위에다 감쪽같이 수를” 놓으시는 엄마, 그리고 “달이 필 때마다 늘어나던 붉은 별”을 기록해가는 시인의 필치야말로 “나의 우주를 경영하곤” 했던 기억에 대한 빛나는 예우였을 것이다. “하마터면 잊을 뻔한/공전하는 아이”를 담아낸 “엄마의 기록”은 이때 서정시가 수행하는 기억의 현재형 복원 기능을 품격 있게 완성하고 있다. 「자화상」에서는 “노인의/주름 많은 웃음에서 환희를” 발견하면서 그 안에 담긴 “단단한 노동들” 그리고 “짙어서 더 깊어지는 오래된 곡선의 힘”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디그레이드Degrade」에 나타난 “아주 긴 방향을 타는 점멸적 모녀 사이”라든가 「네 이름은 ‘탱고’」에 보이는 외로움의 감각 그리고 「단 소금」이 노래하는 “든다는 건 기다리는 것 오래도록 버리는 것”의 의미 또한 표문순 시조의 성숙을 예고하고 있다 할 것이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그동안 표문순 시인은 절제와 함축을 본령으로 삼는 시조 양식과 현대적 감각의 복합성을 결합시키려는 지난한 노력을 보여왔다. 앞으로도 전통적 정서의 재확인보다는 현대성과의 교섭을 통해 시조 미학을 확충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두루 알다시피 정음시조문학상은 매우 개성적인 모습으로 출발하여 좋은 작품들을 균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쓰는 젊은 시인에게 주어지는 전통을 다섯 해째 세워가고 있다. 시조문학 발전에 더욱 기여하는 커다란 상으로 발전해가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본다.
심사위원: 문정희(위원장) 이승은 유성호(글)
2023. 5. 28
정음시조문학상 운영위원장 이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