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夏郊亦荐裸”的意思及全诗出处和翻译赏析“夏郊亦荐裸”出处
出自 宋代 苏轼 的《上巳日与二子迨过游涂山荆山记所见》
“夏郊亦荐裸”全诗
《上巳日与二子迨过游涂山荆山记所见》
此生终安归,还轸天下半。
朅来乘樏庙,复作微禹叹。
(昔自南河赴杭州过此,盖二十二年矣。
)従祠及彼呱,(有启庙。
)像设偶此粲。
(谓涂山氏。
)秦祖当侑坐,(庙有柏翳。
)夏郊亦荐裸。
(有鲧庙。
)可怜淮海人,尚记弧矢旦。
(淮南人谓禹以六日生,是日,数万人会山上。
虽传记不载,然相传如此。
)荆山碧相照,楚水清可乱。
刖人有余坑,美石肖温瓚。
(荆山下有卞氏采玉坑,石色如玉,不受镵刻。
取出山下,辄变色不复温莹。
)龟泉木杪出,牛乳石池漫。
(龟泉在荆山下色白而甘,真陆羽所谓石池漫流者。
有石记云:唐贞元中随白龟流出。
)小儿强好古,侍史笑流汗。
归时蝙蝠飞,炬火记远岸。
分类:
“夏郊亦荐裸”平仄韵脚
拼音:xià jiāo yì jiàn luǒ
平仄:仄平仄仄仄
韵脚:(仄韵) 上声二十哿 * 平仄拼音来自网络,仅供参考;诗句韵脚有多个的时候,对比全诗即可判断。
苏轼(1037-1101),北宋文学家、书画家、美食家。字子瞻,号东坡居士。汉族,四川人,葬于颍昌(今河南省平顶山市郏县)。一生仕途坎坷,学识渊博,天资极高,诗文书画皆精。其文汪洋恣肆,明白畅达,与欧阳修并称欧苏,为“唐宋八大家”之一;诗清新豪健,善用夸张、比喻,艺术表现独具风格,与黄庭坚并称苏黄;词开豪放一派,对后世有巨大影响,与辛弃疾并称苏辛;书法擅长行书、楷书,能自创新意,用笔丰腴跌宕,有天真烂漫之趣,与黄庭坚、米芾、蔡襄并称宋四家;画学文同,论画主张神似,提倡“士人画”。著有《苏东坡全集》和《东坡乐府》等。
“夏郊亦荐裸”的意思《上巳日与二子迨过游涂山荆山记所见》翻译、赏析和诗意
这产生最终何去何从,回到我天下一半。
归来乘樏庙,又作微邓禹叹息。
(从前从南河赴杭州过这,大约二十二年了。
)从祠和那个孩子,(有启庙。
)图像设置偶尔如此灿烂。
(对涂山氏。
)秦祖会侑坐下,(庙有柏遮蔽。
)夏郊也推荐裸体。
(有稣庙。
)可怜淮海人,还记得弧矢早晨。
(淮南人对禹用六日出生,这一天,数万人在山上。
虽然传记不记载,但相传这样。
)荆山碧相互照,楚水清可以扰乱。
砍人有多坑,美石像温公孙瓒。
(荆山下有卞氏采玉坑,石色如玉,不接受埋植刻。
取出山下,就变了脸色不复温莹。
)龟泉树梢上出,牛奶石池漫流。(龟泉在荆山下色白而甜,真陆羽所谓石池漫流的。
有石头记说:唐德宗贞元年间随白龟流出。
)小孩强好古,侍史笑流汗。
蝙蝠飞回家的时候,火炬记远岸。
* 此部分翻译来自百度,仅供参考
“夏郊亦荐裸”全诗拼音读音对照参考
shàng sì rì yǔ èr zi dài guò yóu tú shān jīng shān jì suǒ jiàn
上巳日与二子迨过游涂山荆山记所见
cǐ shēng zhōng ān guī, hái zhěn tiān xià bàn.
此生终安归,还轸天下半。
qiè lái chéng lěi miào, fù zuò wēi yǔ tàn.
朅来乘樏庙,复作微禹叹。
xī zì nán hé fù háng zhōu guò cǐ, gài èr shí èr nián yǐ.
(昔自南河赴杭州过此,盖二十二年矣。
cóng cí jí bǐ gū, yǒu qǐ miào.
)従祠及彼呱,(有启庙。
xiàng shè ǒu cǐ càn.
)像设偶此粲。
wèi tú shān shì.
(谓涂山氏。
qín zǔ dāng yòu zuò, miào yǒu bǎi yì.
)秦祖当侑坐,(庙有柏翳。
xià jiāo yì jiàn luǒ.
)夏郊亦荐裸。
yǒu gǔn miào.
(有鲧庙。
kě lián huái hǎi rén, shàng jì hú shǐ dàn.
)可怜淮海人,尚记弧矢旦。
huái nán rén wèi yǔ yǐ liù rì shēng, shì rì, shù wàn rén huì shān shàng.
(淮南人谓禹以六日生,是日,数万人会山上。
suī zhuàn jì bù zài, rán xiāng chuán rú cǐ.
虽传记不载,然相传如此。
jīng shān bì xiāng zhào, chǔ shuǐ qīng kě luàn.
)荆山碧相照,楚水清可乱。
yuè rén yǒu yú kēng, měi shí xiào wēn zàn.
刖人有余坑,美石肖温瓚。
jīng shān xià yǒu biàn shì cǎi yù kēng, shí sè rú yù, bù shòu chán kè.
(荆山下有卞氏采玉坑,石色如玉,不受镵刻。
qǔ chū shān xià, zhé biàn sè bù fù wēn yíng.
取出山下,辄变色不复温莹。
guī quán mù miǎo chū, niú rǔ shí chí màn.
)龟泉木杪出,牛乳石池漫。
guī quán zài jīng shān xià sè bái ér gān, zhēn lù yǔ suǒ wèi shí chí màn liú zhě.
(龟泉在荆山下色白而甘,真陆羽所谓石池漫流者。
yǒu shí jì yún: táng zhēn yuán zhōng suí bái guī liú chū.
有石记云:唐贞元中随白龟流出。
xiǎo ér qiáng hào gǔ, shì shǐ xiào liú hàn.
)小儿强好古,侍史笑流汗。
guī shí biān fú fēi, jù huǒ jì yuǎn àn.
归时蝙蝠飞,炬火记远岸。
古诗句网 ©2023 京ICP备12025735号-20
..............................................
上巳日与二子迨过游涂山荆山记所见
此生终安归,还轸天下半。
朅来乘樏庙,复作微禹叹。
从祀及彼呱,像设偶此粲。
秦祖当侑坐,夏郊亦荐裸。
可怜淮海人,尚记弧矢旦。
荆山碧相照,楚水清可乱。
刖人有余坑,美石肖温瓒。
龟泉木杪出,牛乳石池漫。
小儿强好古,侍史笑流汗。
归时蝙蝠飞,炬火记远岸。
拼音解读
cǐ shēng zhōng ān guī ,hái zhěn tiān xià bàn 。
qiè lái chéng léi miào ,fù zuò wēi yǔ tàn 。
cóng sì jí bǐ guā ,xiàng shè ǒu cǐ càn 。
qín zǔ dāng yòu zuò ,xià jiāo yì jiàn luǒ 。
kě lián huái hǎi rén ,shàng jì hú shǐ dàn 。
jīng shān bì xiàng zhào ,chǔ shuǐ qīng kě luàn 。
yuè rén yǒu yú kēng ,měi shí xiāo wēn zàn 。
guī quán mù miǎo chū ,niú rǔ shí chí màn 。
xiǎo ér qiáng hǎo gǔ ,shì shǐ xiào liú hàn 。
guī shí biān fú fēi ,jù huǒ jì yuǎn àn 。
※提示:拼音为程序生成,因此多音字的拼音可能不准确。
作者介绍
苏轼(1037─1101)宋代文学家、书画家。字子瞻,号东坡居士,世称苏东坡,眉州眉山人。苏洵子。仁宗嘉祐二年进士。再中制科。为凤翔府签书判官,召试得直史馆,摄开封府推官。神宗熙宁中上书论王安石新法之不便,出为杭州通判。徙知密、徐、湖三州。元丰中,因诗托讽,逮赴台狱,后以黄州团练副使安置。哲宗即位,起知登州,累官中书舍人、翰林学士兼侍读。以龙图阁学士知杭州,会大旱,饥疾并作,轼请免上供米,又减价粜常平米,存活甚众。杭近海,民患地泉咸苦,轼倡浚河通漕,又沿西湖东西三十里修长堤,民德之。元祐六年,召为翰林承旨,寻因谗出知颍州,徙扬州。后以端明殿翰林侍读两学士出知定州,后贬惠州。绍圣中累贬琼州别驾,居昌化。徽宗立,元符三年赦还,提举玉局观,复朝奉郎。寻病逝常州。谥文忠。所作诗文清新畅达,作词豪放,开拓内容,突破绮靡词风,工书善画。有《东坡七集》、《东坡志林》、《东坡乐府》、《仇池笔记》、《论语说》等。►3154篇诗文
诗词迷网提供《上巳日与二子迨过游涂山荆山记所见》的原文、翻译、注释、赏析等详细信息。《上巳日与二子迨过游涂山荆山记所见》出自苏轼的作品。
转载请注明:原文链接 | https://www.shicifans.com/shiwen/93113.html
Copyright © 2021-2023 诗词迷 | 免责声明 | 诗文 | 名句 | 作者 | 诗词查询 | 苏ICP备2021007733号
...........................
出处: 苏轼 《上巳日与二子迨过游涂山荆山记所见》
)夏郊亦荐裸。
")夏郊亦荐裸。"解释
诗句的写作背景
暂无
诗句的注释
)夏郊亦荐裸。上一句
夏郊亦荐裸。下一句
夏郊亦荐裸。全诗
)夏郊亦荐裸。作者
苏轼(1037-1101),北宋文学家、书画家、美食家。字子瞻,号东坡居士。汉族,四川人,葬于颍昌(今河南省平顶山市郏县)。一生仕途坎坷,学识渊博,天资极高,诗文书画皆精。其文汪洋恣肆,明白畅达,与欧阳修并称欧苏,为“唐宋八大家”之一;诗清新豪健,善用夸张、比喻,艺术表现独具风格,与黄庭坚并称苏黄;词开豪放一派,对后世有巨大影响,与辛弃疾并称苏辛;书法擅长行书、楷书,能自创新意,用笔丰腴跌宕,有天真烂漫之趣,与黄庭坚、米芾、蔡襄并称宋四家;画学文同,论画主张神似,提倡“士人画”。著有《苏东坡全集》和《东坡 ► 苏轼的诗
猜你喜欢
Copyright © 2019-2029 诗句大全 | 古诗词 | 诗句接龙 | 诗词起名 | 诗句分类 | 您的诗句摘抄本 | 浙ICP备20017648号-1
.........................
동춘당집 제17권 / 제문(祭文)
송생(宋生) 시승(時昇) 에게 고하는 제문 무인년(1638, 인조16)
[DCI]ITKC_BT_0366A_0170_010_0040_2011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아, 슬프다 / 嗚呼哀哉
사람의 행실에는 / 人有百行
효도가 근본이지 / 惟孝爲本
하지만 배워서 되는 것인가 / 豈學而能
양지를 잃지 않아야 하지 / 良知不泯
아, 자유여 / 嗟惟子猷
타고난 독실한 효성 / 篤孝天授
신명을 감동시키고 / 神明可通
금석도 뚫었지 / 金石爲透
유모하는 육 년 동안 / 六載孺慕
지극한 효성으로 / 寸草誠至
피눈물 흘리다가 / 泣盡以血
눈이 멀었지 / 爰失其視
친상에 눈먼 것은 / 喪親而聞
자하도 못한 일이었지 / 子夏所未
누군들 부모 없으랴 / 誰無父母
자식들 사랑 다 바치지만 / 子盡其愛
제사에 정성을 다해 / 烝嘗以虔
가난한 살림에도 예를 행하고 / 撥貧爲禮
배궤하고 천관하는 일을 / 拜跪薦祼
엎드려 친히 행한 사람 / 匍匐必親
고금을 통해서 / 屈指今古
몇이나 되겠는가 / 能有幾人
세덕에서 나왔으니 / 本其世德
근원이 흘러 여울되었네 / 有瀾必源
조상을 더욱 빛낸 것을 / 于光有耀
이 가문에서 볼 수 있네 / 盍觀其門
하늘이 복을 내려 / 謂天申休
보답할 줄 알았는데 / 報施匪舛
수명 짧게 주었으니 / 竟嗇其壽
착한 사람을 무엇으로 권하리 / 善者何勸
하지만 아이들 법도가 있어 / 猶有典刑
가문에 걸맞은 아이들이니 / 稱家之兒
하늘이 정한 운명을 / 天之有定
이에서 징험할 수 있네 / 或徵于玆
나와는 / 浚吉
동종으로 의리 중하였고 / 同宗義重
앞뒷집에 살며 정리 깊었지 / 對廬情深
그대 행실 존경하여 / 敬服至行
마음속에 새겼건만 / 夙佩于心
초상 때 조상도 못하였고 / 歿未憑棺
장사 때 회장(會葬)도 못했네 / 葬負臨穴
이 모두 병 때문이었지만 / 病不情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네 / 顔厚有忸
남의 손을 빌어 한 잔 술로 / 倩手一酹
영원한 작별을 고하네 / 百年長訣
아, 슬프네 / 嗚呼哀哉
[주-D001] 양지(良知) : 교육이나 경험에 의해서 아는 것이 아닌 타고난 지능을 말한다.[주-D002] 유모(孺慕) : 어린아이가 부모를 그리듯이 어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모하는 것을 말한다.[주-D003] 자하(子夏)도 못한 일이었지 : 자하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아들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눈이 멀었다. 이 말은 자하 같은 현자(賢者)도 어버이의 죽음 때문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눈이 멀었으니, 송생(宋生)의 효성이 자하보다 훌륭하다는 뜻이다.[주-D004] 천관(薦祼) : 천은 제수(祭需)를 올리는 것을 말하고, 관은 신의 강림(降臨)을 바라며 모사(茅沙)를 담은 그릇에 술을 조금씩 세 번 따르는 것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2001
.........................
연암집 제1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 안의현 사직단 신우기(安義縣社稷壇神宇記)
사직(社稷)을 집으로 짓지 아니하고 단(壇)으로 짓는 것은 예부터 내려온 제도이므로 군현(郡縣)의 사직은 모두 신주를 이청(吏廳)의 옆에 모셔 두었다가, 제삿날이 다가오면 기일(期日)에 앞서 신주를 받들고 단으로 나아가 거기서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신주를 모셔 놓은 곳이 저잣거리에 가깝고, 신주가 내왕하는 사이에 하인들이 함부로 다루며 바람과 이슬을 맞게 되니, 위대한 땅의 신에게 공경을 다하는 도리가 아니었다.
전임 안의 현감 김재순(金在淳)이 고을에 부임한 지 4년이 지난 경술년(1790, 정조 14)에 사직단의 왼쪽 동남향에 터를 닦아서 신우(神宇) 두 칸을 짓고, 고을에서 모시고 있는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의 위판을 옮겨 모시고 각종 술잔과 제기를 간수하게 했다. 그리고 단의 오른쪽 담장 북쪽에 전사청(典祀廳)과 집사방(執事房)을 세우니 격식이 갖추어지고 행사에 적합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고 안락하게 되었다.
성상(聖上) 16년 임자년(1792) 겨울에 교서(敎書)를 내려 지방 고을에서 제사 의식을 제대로 닦아 거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준절히 책망하고서, 모든 고을에 신단(神壇)과 신우(神宇)에 대한 의칙(儀則)을 반포하였다. 그리하여 산기슭이나 촌락 사이에 건물을 새로 짓고 단청을 칠하려는 고을들이 모두 아전을 보내어 이 고을의 신단과 신우를 본뜨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김 사또가 신을 섬기고 농사를 중시하는 데에 있어서도 일의 선후를 알았음을 볼 수 있다.
지원(趾源)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전임 사또가 누락된 제사 의식을 잘 닦아 놓은 것에 힘입어 다행히 파직되어 내쫓김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더 할 일이 없다 하여 일상적인 직책에 태만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전과 관노를 손수 감독하여 단을 더욱 잘 꾸미고 담을 증축하였으며 네 개의 영성문(欞星門)을 고쳐 세웠다. 그리고 고을의 젊은이 중에 총명하고 준수한 자를 가려 뽑아 등록하여 집사(執事)로 삼고 단 밖의 큰 나무 아래에 제기를 임시로 늘어놓게 하여
천관(薦祼), 흥부(興俯), 진퇴(進退), 추배(趨拜) 등의 제사 절차를 익히게 하였다.
이윽고 탄식을 하면서 유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릇 예는 제사 의식보다 중한 것이 없고 제사 의식은 사직보다 중한 것이 없다. 해마다 첫 번째 신일(辛日)을 맞으면 우리 성상께서는 반드시 몸소 태사(太社 사직 )에 풍년을 기원하였는데, 날씨가 아무리 추울지라도 남에게 대행케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일찍이 뭇 집사의 뒤를 쫓아 팔음(八音)이 조화롭게 연주되는 것을 구경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제사 하루 전날에 성상께서 희생을 살피고 제기를 씻는 절차를 친히 행하시고, 야고(夜鼓)가 세 번 울리고 뜰에 횃불이 지펴지면 성상께서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고 홀〔圭〕을 잡고 임종(林鍾)과 태주(太簇)의 제악(祭樂)으로 신주를 맞아 봉안하였는데, 백관들은 함께 참석하여 숨을 죽인 채 엎드려 감히 떠드는 자가 없고 패옥이 부딪치는 소리만 공중에서 들릴 뿐이었다. 이에 임금의 발걸음이 술잔과 제기, 층계와 섬돌 사이를 돌아다니며 오르내리심을 감히 속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온갖 신령들이 가득 내려와 흡족히 흠향하여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흠뻑 들고 돌아가매, 복을 낳고 상서를 잉태하여 지축(地軸)과 곤여(坤輿)가 만물을 더욱 무겁게 짊어지고 두텁게 실을 것이며 후토(后土)와 구룡(句龍)이 몰래 와서 도와주리니, 군왕은 만세를 누리고 온 누리는 풍년을 누리리라.
주격(奏假)의 연주를 마치고 악공이 호배(虎背)를 치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보매 별빛은 반짝이고 이슬은 두루 맺혔으니 함빡 찬 그 모습은 마치 제향에 만족하고 있음을 이처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성상께서는 오히려 농사를 짓는 때를 혹 어기거나 농사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할까 염려하시고, 물러나 재전(齋殿)으로 납시어 촛불을 켜고 권농(勸農)하는 윤음(綸音)을 받아쓰게 하여 팔도에 이를 반포해서 관리들을 독려하고 경계하셨으니, 만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다함이 이처럼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그런데 각 지방 수령들이 백성을 위한 근심을 함께 분담하라는 성상의 거룩한 뜻을 아무도 본받지 못하고, 왕왕 맡은 고을의 제사에 있어서도 도리어 오랜 습관에 젖어 혹 몸소 제사에 참례하지 않는 일까지 있으니, 이에 영선(靈墠)과 신주(神廚)는 계단이 무너지고 잡초가 우거지며, 목욕재계와 제사 절차에 있어서도 예법에 맞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성상이 엄한 하교를 내리시게 되어서야 비로소 부끄러워하고 반성하여, 허둥지둥 서둘러 오직 수리하는 일이 정해진 시기보다 늦을까만을 두려워한다. 이는 그저 조정의 명령을 따르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요, 정성이 속에 쌓이거나 예를 평소에 익혀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고을 원으로 나온 이래 하달된 윤음을 받들어 읽은 지가 지금 2년이 되었거니와, 일찍이 북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감격하여 눈물 흘리면서 성상의 위엄이 심히 가까이 있으며 어진 말씀이 사람들에게 깊이 사무치는 것을 탄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수령된 자로서 어찌 감히 깊이 두려워하고 맡은 바 직책에 삼가하여 성상의 걱정하고 근심하시는 마음을 만분지일이라도 받들어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유생 여러분은 먼 시골구석에서 생장하여 견문이 넓지 못하니 예의(禮儀)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다. 때문에 비록 때때로 고을의 부름에 응하여 마지못해 제사 의식의 반열에 선다 하더라도, 제사를 거행할 때가 되면 예전부터 내려온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여 대충 형식만 갖추는 데 그쳐 버린다. 이렇게 해 놓고 망녕되이 신명에게 복 받기를 바란다면 그 또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제부터는 백 리 이내에 비바람이 제때에 오지 않고 추위와 더위가 절후에 맞지 않을 것 같으면 ‘태수(太守)가 제사를 정성스레 지내지 않아 그렇다.’고 말하고, 오곡이 익지 않고 논밭이 정비되지 못하면 역시 ‘태수가 농사에 밝지 못해 그렇다.’고들 말하라. 《서경》에 이르기를, ‘서직(黍稷)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명덕(明德)이 향기로운 것이다.’ 하였으니, 감히 이 구절을 들어 고을에서 집사하는 이들에게 외워 주노라.”
전아(典雅)하다.
상반부는 사실을 서술하고 하반부는 유생들에게 자상하게 타이르는 말로 단숨에 끝까지 내려갔다. 법도와 규칙이 다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너그럽고도 엄격함을 갖추었으니, 질서 정연한 예악(禮樂)의 글월이다.
[주-D001] 사직(社稷)을 …… 제도이므로 :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사(社)는 토지의 신을 제사하고 음기를 주관한다. …… 천자의 태사(太社)에 반드시 서리ㆍ이슬ㆍ비ㆍ바람을 받게 하는 것은 천지의 기운을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망국(亡國)의 사(社)에는 지붕을 덮어 하늘의 양기를 받지 않게 한다.”고 하였다.[주-D002] 이청(吏廳) : 아전들이 집무를 보는 청사로, 길청 또는 질청이라고도 한다.[주-D003] 저잣거리 : 원문은 ‘闤闠’인데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백척오동각집》 등에는 ‘閭井’으로 되어 있다.[주-D004] 전사청(典祀廳)과 집사방(執事房) : 전사청은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건물이고 집사방은 집사들이 머무는 건물로서, 사직과 종묘에는 제사 전용의 전사청과 좌우의 집사방을 두었다.[주-D005] 성상(聖上) …… 반포하였다 : 《정조실록》 16년 11월 10일 조에 보인다. 각 도의 사직단ㆍ성황단ㆍ여단(厲壇)의 제사 의식을 정비하여 밝히라는 명령을 가장 먼저 수행한 강원 감사에게 가자(加資)하고, 반면 이를 등한시한 전라도 등 7도의 감사들에게 삭직과 감봉의 처벌을 내렸다.[주-D006] 영성문(欞星門) : 원래는 영성문(靈星門)으로, 영성(靈星)은 농사를 주관한다는 별인 천전성(天田星)이다. 문의 모양이 가는 살을 가로세로로 좁게 대어 짠 세살창과 흡사하여 영성문(欞星門)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주-D007]
천관(薦祼) …… 추배(趨拜) : 천관은 제물을 올리는 것과 강신주를 따르는 것이며, 흥부(興俯)는 제사 의식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과 부복(俯伏)하는 것이며, 진퇴(進退)는 초헌(初獻) 등의 의식을 거행하는 자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것이며, 추배는 종종걸음으로 제사에 나아가는 것과 절하는 것을 이른 것으로 모두 제사 의식을 거행할 때 행하는 절차이다.
[주-D008] 팔음(八音)이 …… 것 : 제사 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팔음이 조화를 이루어 서로의 음계를 빼앗지 않게 하면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룰 것이다.〔八音克諧 無相奪倫 神人以和〕” 하였다. 팔음은 여덟 가지 악기, 즉 금(金 : 종〈鍾〉), 석(石 : 경〈磬〉), 사(絲 : 현〈絃〉), 죽(竹 : 관〈管〉), 포(匏 : 생〈笙〉), 토(土 : 훈〈壎〉), 혁(革 : 고〈鼓〉), 목(木 : 축어〈柷敔〉)을 가리킨다.[주-D009] 야고(夜鼓) : 밤에 시각을 알리는 북이다. 야고가 세 번 울리면 3경(更)이다.[주-D010] 임종(林鍾)과 태주(太簇) : 임종은 육률(六律)의 하나이며, 태주는 육려(六呂)의 하나이다.[주-D011] 지축(地軸)과 곤여(坤輿) : 모두 대지를 가리킨다. 상고에는 대지에 서로 맞물린 360개의 축(軸)이 있다고 믿었다. 또한 대지는 큰 수레〔大輿〕에 비유되었다.[주-D012] 후토(后土)와 구룡(句龍) : 모두 땅의 신이다. 전설에서, 구룡은 공공(共工)의 아들이며 수토(水土)를 잘 다스려 땅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주-D013] 주격(奏假) : 제사에서 당(堂)에 오를 때에 연주하는 음악이다. 《毛詩 商頌 那》[주-D014] 호배(虎背) : 타악기인 어(敔)를 말한다. 모양이 엎드린 범의 형상이며, 등에 톱니가 있다. 견(籈)으로 범의 목덜미를 세 번 친 다음 톱니를 세 차례 긁어 곡이 끝남을 알린다.[주-D015] 영선(靈墠) : 제사를 지내는 단(壇)을 이른다.[주-D016] 신주(神廚) : 신주를 모셔 놓은 곳을 이른다.[주-D017] 어진 …… 것 : 원문은 ‘仁言之入人深’인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어진 말을 하는 것은 어질다는 명성이 사람들에게 깊이 사무치는 것만 못하다.〔仁言 不如仁聲之入人深也〕”고 한 데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주-D018] 예의(禮儀) : 원문은 ‘禮儀’인데, 일부 이본들에는 ‘禮意’로 되어 있다. 그러나 ‘禮意’는 예절에 맞추어 경의를 표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어서 문맥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주-D019] 서직(黍稷)이 …… 것이다 :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군진(君陳)을 동교(東郊)의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지극한 정치의 향기는 천지신명을 감동시킨다. 제상(祭床)에 올린 서직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치는 인간의 밝은 덕이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고 하였다. 《書經 君陳》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
입재집 제37권 / 갈명(碣銘) / 통훈대부 세자시강원 보덕 우헌 채공 묘갈명 병서〔通訓大夫世子侍講院輔德愚軒蔡公墓碣銘 並序〕
蔡獻徵 | 1648 | 1726 | 仁川 | 文叟 | 與物軒, 愚軒 |
고(故)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우헌(愚軒) 채공(蔡公)은 영묘(英廟) 병오년(1726, 영조2)에 졸(卒)하였으니 지금부터 77년 전인데 묘도(墓道)에 아직 비석이 없다. 그의 5세손 하규(夏圭)가 청대(淸臺) 권 희정공(權僖靖公)이 찬술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한마디 말을 청하기에,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삼가 다음과 같이 쓴다.
공은 휘가 헌징(獻徵)이고 자가 문수(文叟)이며 본관이 인천(仁川)으로, 고려 때 동지사(同知事) 선무(先茂)가 그 상조(上祖)이다. 조선에 들어와 휘 륜(倫)이 있었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필선(弼善) 벼슬을 하였다. 또 휘 수(壽)는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고 호는 나재(懶齋)로, 성묘(成廟 성종(成宗)) 때의 명신(名臣)인데 만년에 물러나 함창(咸昌)의 이안(利安) 마을에 살았으니, 이분이 공의 7대조가 된다. 양정(襄靖)의 손(孫)은 무일(無逸)이라 하니 헌납(獻納)을 지냈고 호는 휴암(休庵)이다. 이분이 휘 유광(有光)을 낳으니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천계(天啓)를 낳으니 참봉(參奉)을 지냈다. 이분이 휘 이복(以復)을 낳으니 생원(生員)이다. 이분이 휘 기종(起宗)을 낳으니 곧 공의 아버지로, 승평 김씨(昇平金氏) 좌의정(左議政) 양경공(襄景公) 김승주(金承霔)의 후손 학생(學生) 김경장(金慶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숭정(崇禎) 후 4년 무자년(1648, 인조26)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이미 장성하여서는 양자로 나가 승지(承旨)에 증직된 종조숙부(從祖叔父) 휘 지수(之洙)의 후사가 되었다. 승지공의 배(配)는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된 풍천 임씨(豐川任氏)이니 판서(判書) 임권(任權)의 현손(玄孫)이고 학생(學生) 임후(任
)의 따님이다.
공은 을묘년(1675, 숙종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무오년(1678)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여 국자(國子 성균관)에 들어갔고, 보안 승(保安丞)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신년(1680)에 창락 승(昌樂丞)에 제수되어 부임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사년(1689)에 기폐(起廢 면직된 사람을 다시 벼슬에 씀)할 적에 육품(六品)에 올라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가 되었다. 얼마 있다가 예조와 병조 정랑(正郞)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경오년(1690)에 사간원(司諫院)에 들어가 정언(正言)이 되었다. 계유년(1693)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는데, 부모님을 편히 봉양하기 위하여 군(郡)에 임명되기를 원하여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되었고, 겨울에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었지만 어버이가 늙었다는 것으로 사양하였다.
갑술년(1694)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묘년(1699)에 어머니 숙부인(淑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임오년(1702)에 인동 부사(仁同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었다. 정해년(1707)에 판교(判校)에 임명되었다. 무자년(1708)에 영해부(寧海府)를 맡아 다스렸으나, 4년 지나서 어떤 일 때문에 파직되었다.
기해년(1719)에 숙종께서 기로소에 들어가 나이 70살 된 시종신에게 은혜를 더하였는데, 공은 통정(通政)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하였다. 공은 성수(聖壽)가 무강(無彊)하다는 것으로써 서울에 들어가 하례를 드렸다. 그 뒤 8년 지난 병오년(1726, 영조2) 2월 19일에 집에서 고종(考終)하였다. 모월 모일 상주(尙州) 곡산동(曲山洞) 모향(某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어릴 적에 시원하고 빼어나 얽매임이 없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는 곧바로 스스로 책망하며 수학(受學)에 마음을 전일(專一)하였다. 그 후로는 학업이 날로 진보하여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를 모두 통달하였고 문사(文詞)가 풍부하고 민첩하여 공사(公私) 간의 시험에 문득 장원 급제하였다. 재기와 도량이 넉넉하고도 컸으며 얼굴과 모습은 우람하고 훤칠하였으니, 젊어서부터 어른스럽다고 일컬어졌다. 일찍이 대성(臺省)에서 주대(奏對)할 적에 임금의 뜻에 맞게 하여 《통감(通鑑)》 한 질을 하사받았다.
진주(晉州)에 충신사(忠臣祠)가 있는데 이서(吏胥)가 천관(薦祼)을 주관하던 것을, 공이 의논하여 병사(兵使)와 목사(牧使)가 헌관(獻官)이 되도록 정하였다. 인동(仁同) 관아가 오래도록 괴이한 일이 있어서 폐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공은 부임한 날 곧바로 들어가 살았다. 영해(寧海)에서 돌아올 때 고을의 백성들이 다들 애석하게 여겨 전별 자리를 마련하여 그 뜻을 다하였다.
공은 평소에 행실을 단속하여 시속(時俗)에서 모나거나 남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찍이 산택재(山澤齋)와 남악(南岳)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방도를 들을 수 있어서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나 관디(冠帶)를 갖추어 입고는 엄연(儼然)하게 처하였고, 암실(暗室)이라고 해서 혹 태만하지 않았다. 어버이 섬김에 기뻐하심을 극진하게 해 드렸다. 선조를 받듦에는 정성을 다하였으니, 매양 제사 때에는 반드시 재계하고 닭이 울기를 기다렸다가 제사를 올렸으며, 혹 병이 들어 참여할 수 없을 때는 상의(上衣)와 대대(大帶)를 몸에 걸치고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백형(伯兄)을 사랑하고 여러 조카를 어루만짐에 그 도리를 모두 극진히 하였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단표(簞瓢)조차도 혹 다하여 없더라도 처하기를 편안한 듯이 하였다. 구학(丘壑)에서 한가로이 살며 서사(書史)를 실컷 보았으니, 향린의 후생들이 의귀(依歸)하여 우러르며 물으러 오지 않는 이가 없었고, 유림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기다려 결정하였다. 이 당시에 영남 우도는 대개 공을 중하게 여겼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강씨(姜氏)이니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강시(姜蓍)의 후손이고 선교랑(宣敎郞) 강전(姜腆)의 따님이다. 2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명적(命廸),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 벼슬한 명운(命運)이고, 딸은 권완(權
), 강섬(姜暹), 김정하(金挺河), 남정삼(南鼎三)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의 딸이 있으니 송임(宋㶵)에게 시집갔다. 명적은 아들이 셋이니 형(瑩), 학(㼂), 옥(玉)이고, 딸이 넷이니 조중경(趙重經), 김미석(金眉錫), 강복서(姜復瑞), 정격(鄭格)에게 시집갔다. 명운은 아들이 하나이니 보(寶)이다. 내외 손자와 증손자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덕이 높은 선배가 묻힌 곳이니 / 是惟碩德先輩之藏
후세 사람들은 훼상하지 말지어다 / 後之人其無毁傷
[주-D001] 청대(淸臺) 권 희정공(權僖靖公) : 권상일(權相一, 1679~1759)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 시호는 희정이다. 저서로는 《청대집(淸臺集)》이 있다. 《청대집》 권13에 〈부사 여물헌 채공 행장(府使與物軒蔡公行狀)〉이 실려 있다.[주-D002] 김승주(金承霔) : 1354~1424. 호는 월담(月潭), 시호는 양경(襄景)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무반으로 입신하여 경상도 병마절제사(慶尙道兵馬節制使), 좌군 도총제(左軍都總制), 공조 판서,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방춘서원(芳春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03] 임권(任權) : 1486~1557.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사경(士經), 호는 정용(靜容),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계유년에 급제하였다. 기묘년 사화 때에 면직되었다가, 뒤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청류(淸流)로 내침을 당해 외관(外官)으로 있었다. 곧 파직되었으나 뒤에 다시 서용되었다.[주-D004] 고향으로 돌아왔다 : 원문은 ‘부귀(賦歸)’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향리로 돌아옴을 말한다.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현령(彭澤縣令)으로 있다가, 오두미 때문에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주-D005]
천관(薦祼) : 제사의 절차로 천은 제수(祭需)를 올리는 것을 말하고, 관은 신의 강림(降臨)을 바라며 모사(茅沙)를 담은 그릇에 술을 조금씩 세 번 따르는 것을 말한다.
[주-D006] 진주(晉州)에 …… 정하였다 : 〈부사 여물헌 채공 행장〉에 “진주 재임 시절 진주에 충신묘가 있는데 이서가 그 관천을 관장함에 매우 더럽고 게을리하였다. 공이 의논하여 병사를 초헌으로 삼고 목사를 아헌으로 삼기를 정하였다.[在晉州, 州有忠臣廟, 吏胥掌其灌薦, 甚褻而慢. 公議定兵使爲初獻, 牧使爲亞獻.]”라는 말이 있다.[주-D007] 인동(仁同) …… 살았다 : 〈부사 여물헌 채공 행장〉에 “인동 관사에 요괴한 설이 있음으로 인하여 폐한 지 오래되었지만, 수레에서 내린 날 곧 수리하라 명하고서 들어가 살았다.[在仁同衙舍, 因妖說廢久, 下車日, 卽命修理而入居.]”라는 말이 있다.[주-D008] 산택재(山澤齋)와 남악(南岳) : 산택재는 홍여하(洪汝河, 1621~1678)로, 본관은 부림(缶林),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ㆍ산택재이다. 1654년(효종5)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교, 병조 좌랑, 사간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목재집(木齋集)》이 있고, 편서로는 《동사제강(東史提綱)》이 있다. 남악은 이현일(李玄逸, 1627~1704)로,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葛庵)ㆍ남악(南嶽)이다. 대사헌,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갈암집(葛庵集)》이 있다.[주-D009] 재계하고 : 원문은 ‘제명(齊明)’으로, 《중용장구》 제16장에 “귀신의 덕이 성대하다.……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재계하고 옷을 잘 차려 입고서 제사를 받들게 하고, 뚜렷하게 그 위에 있는 듯하고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鬼神之爲德, 其盛矣.……使天下之人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는 말이 있다.[주-D010] 단표(簞瓢) :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가리킨다. 《논어》 〈옹야(雍也)〉에 “어질다, 안회(顔回)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물을 마시며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한 공자의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11] 강시(姜蓍) : 1339~1400. 본관은 진주(晉州),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1357년(공민왕5) 생원에 합격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후 유배되었다가 후에 상의 문하찬성사(商議門下贊成事)를 지냈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영옥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