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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용백사(龍柏祠) 치제문 윤계(尹棨, 1603~1636)
尹衡甲 1585 1618 南原 任之 忠康
윤계(尹棨, 1583~1636)->윤계(尹棨, 1603~1636)
*각주 8處 다 교정필요
尹棨 1603 1636 南原 信伯 薪谷 忠簡
宋子大全卷一百七十一 / 碑 / 南陽尹公碑
死時年三十四
竹泉集別 / 諡狀 / 弘文館應敎贈吏曹判書尹公諡狀
去其生三十四年矣
石門集卷之七 / 墓表 / 贈吏曹判書薪谷尹公墓表
是十二月二十八日也。時年三十四
윤계 부친 尹衡甲 1585 1618 南原 任之 忠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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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원(黃景源) 1709년(숙종 35)~1787년(정조 11)
江漢集卷之二十八 / 傳 / 明陪臣傳[二]
[序]
禮。大夫死衆。士死制。然所謂衆者。有諸侯之衆。有天子之衆。所謂制者。有諸侯之制。有天子之制。諸侯之大夫。苟爲其國死於衆。則不可謂爲天子死於衆也。諸侯之士。苟爲其國死於制。則不可謂爲天子死於制也。然自古諸侯之國。爲天子罹大難。則其大夫雖爲其國死於衆。與死於天子之衆。無以異也。其士雖爲其國死於制。與死於天子之制。無以異也。或曰。爲本國而死者。不當云爲天子而死。非也。江,黃二國。從齊侯以尊周室。與楚人絶。故經曰。齊侯,宋公,江人,黃人。會于陽穀。褒大義也。及江人不朝於楚。楚圍之。故經曰。楚人圍江。閔之也。黃人不貢於楚。楚伐之。故經曰。楚人伐黃。亦閔之也。夫江人被楚之圍。城守一年。終不下。而黃人被楚之伐。城守九月。卒不服。爲大夫者。誠死於衆。是爲天子死於衆也。爲士者。誠死於制。是爲天子死於制也。淸人改元。遣使者。移書王朝。請尊其主爲皇帝。王朝不受。淸人怒。遂圍南漢。是南漢爲明天子。罹大難也。故其大夫死於衆者。猶死於天子之衆也。其士死於制者。猶死於天子之制也。使江人被楚之圍。而大夫不死於衆。士不死於制。則終爲楚臣而已矣。使黃人。被楚之伐。而大夫不死於衆。士不死於制。則亦爲楚臣而已矣。安在其尊周室也。然則爲本國而死者。實爲天子死之也。方南漢被圍之際。於死節。則文忠公金尙容,忠肅公李尙吉,義烈公洪命亨等十有六人。於死事。則忠烈公洪命耈,貞武公崔震立,忠壯公李義培等六人。作陪臣傳。
尹棨
字信伯。朝鮮南原人也。大父暹。官至弘文館校理。死於王室。有大節。棨少擧及第。事仁廟。爲弘文館應敎。崇禎九年。出守南陽府。淸兵至。會棨以事如報恩縣。聞淸兵至。乃疾馳還南陽府。望行在。與衆慟哭。乃募人爲進膳羞。凡三往。卒不得抵南漢城。自是魚肉不入口。及南陽破。卽庭中。對立二旗。坐廳上。拱手不動。淸兵執之。迫令跪。棨罵曰。頭可截。膝不可跪。虜欲縛去。棨又罵曰。棨雖死。誓不汝從。虜愈怒。以鋋刺之。棨益罵。不絶於口。虜乃斷其舌而殺之。縣吏金澤,洪彥仁。官奴命吉。家僕鳳伊。皆從死。棨死時。年三十四。孝廟時。贈吏曹參判。旌其門。謚忠簡。弟集。亦以弘文館校理。爲虜所執。死瀋陽。
강한집 제28권 / 전(傳) / 명배신전2〔明陪臣傳二〕
윤계〔尹棨〕
자는 신백(信伯)으로 조선 남원(南原) 사람이다. 조부 윤섬(尹暹)은 관직이 홍문관 교리(校理)에 이르렀는데, 왕실을 위해서 죽어 큰 절개가 있었다. 계(棨)는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인조를 모시어 홍문관 응교를 하였다.
숭정 9년(1636)에 나가서 남양(南陽) 부사를 하던 중에 청병(淸兵)이 이르렀다. 마침 계가 어떤 일로 보은현(報恩縣)에 갔다가 청병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급히 말을 달려 남양부로 돌아와 행재소를 바라보며 군중과 더불어 통곡하였다. 이에 사람을 모집하여 선수(膳羞)를 올리기 위해 3번을 갔으나 끝내 남한산성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로부터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
남양이 무너지자, 뜰 가운데로 나아가 두 기(旗)를 마주 세우고 대청 위에 앉아 팔짱을 끼고 움직이지 않았다. 청병이 그를 잡아 무릎을 꿇라고 핍박하였다. 계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은 꿇을 수 없다.” 하였다. 오랑캐가 묶어서 가려고 하자 계가 또 꾸짖으며 “내가 비록 죽을지언정 맹세코 너를 따르지 않으리라.” 하니, 오랑캐가 더욱 화를 내어 창으로 찔렀다. 계가 더욱 꾸짖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으니, 오랑캐가 이에 그 혀를 자르고 죽였다. 현의 아전 김택(金澤), 홍언인(洪彥仁), 관노 명길(命吉), 집의 종 봉이(鳳伊)가 모두 따라서 죽었다. 윤계가 죽었을 때 나이 34세였다.
효종 때 이조 참판을 추증하고 그 여문(閭門)에 정표하였다.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우 윤집(尹集)도 또한 홍문관 교리로서 오랑캐에게 붙들려 가서 심양에서 죽었다.
[주-D146] 윤계(尹棨) : 1583~1636.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薪谷)이다.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윤집(尹集)이 아우이다. 11624년(인조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상소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해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 좌랑을 거쳐 남양 부사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다 청병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난도질을 당하여 죽었다. 뒤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주-D147] 윤섬(尹暹) : 1561~1592.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여진(如進), 호는 과재(果齋),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1583년(선조16)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587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이인임(李仁任)으로 오기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기록을 정정한 공으로 1590년 광국 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교리로 있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이 되어 싸우다가 상주성(尙州城)에서 전사하였다. 문집 《삼절유고(三節遺稿)》가 전한다.[주-D148] 선수(膳羞) : 왕의 수라를 위한 음식 재료를 말한 것이다.[주-D149]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숙종실록》 32년 2월 5일 기사에, 윤계에게 충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하였다.[주-D150] 윤집(尹集) : 1606~1637.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호는 임계(林溪)ㆍ고산(高山),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627년(인조5) 생원이 되었고, 1631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병자호란의 강화가 성립되면서 척화신으로 자청하여 심양에 끌려가 심양 서문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168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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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등록 / 효종(孝宗) / 효종(孝宗) 8년(1657) / 2월 16일
사액(賜額)하는 건
1. 전라도(全羅道) 고부(古阜)의 유생(儒生)들의 상소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증 이조 판서(贈吏曹判書) 송상현(宋象賢)이 임진년(壬辰年)에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일은 같은 충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서 사람들의 이목에 혁혁하게 전해졌습니다. 이에 국가에서 그가 목숨을 바친 것에 대하여 포장하고 존숭하는 특전(特典)을 거듭 가하고 충렬(忠烈)이라는 액호를 내렸으니, 지금 다시 논열(論列)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원(南原)에서 신호(申浩)가 죽은 것과 안주(安州)에서 김준(金俊)이 죽은 것 또한 모두 송상현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바친 일인데, 이 세 신하가 모두 고부 사람이기 때문에 본토의 유생들이 세 사람을 한 사우(祠宇)에 병향(並享)하고자 사액(祠額)을 청하는 것은 진실로 성의(誠意)에서 나왔습니다. 다만 이전부터 선대의 유생들이 족적을 남기신 곳이니, 한 곳에 사액(賜額)하는 것을 일찍이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정포(旌褒)하는 것은 마땅히 일체로 시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래사우(東萊祠宇)는 이미 사액을 받았으니, 신호와 김준 두 신하를 송상현과 병향하려는 까닭에 또 사액을 청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특별한 조처이고 일이 중대하여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들에게 물으라.’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領議政) 정태화(鄭太和), 좌의정(左議政) 심지원(沈之源), 우의정(右議政) 원두표(元斗杓),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육(金堉),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동래에 있는 송상현의 사우에 이미 액호를 내렸는데, 고부의 유생들이 신호와 김준이 모두 동향(同鄕)이라고 하여 새로운 사우를 건립하고, 세 신하를 한 곳에 병향하고자 하여, 이처럼 간청하는 것은 송상현 한 사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동래에 사액을 하였기 때문에 일을 미룬 것이며,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일이 절의(節義)를 존숭하고 권장하며, 은전(恩典)을 특별히 시행하는 것에 관련되니, 불가(不可)함이 없을 듯합니다. 생각하건대 임금께서 재결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는 병으로 인하여 그의 의견을 듣지 못하였고, 대신들의 의논은 이와 같습니다. 임금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신들의 논의에 따라 시행하라.”고 계하(啓下)하였다.
강화(江華)에 있는 김상용(金尙容)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기 위하여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내는 건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졸(卒) 우의정(右議政) 김상용(金尙容)을 위하여 강화(江華)에 사우(祠宇)가 세워진 곳에 사액(賜額)하고 치제(致祭)하는 일을 실록(實錄)에서 상고하여 낸 뒤에 거행하는 뜻을 정탈(定奪)하였다고 하여, 지금 춘추관(春秋館)의 계사(啓辭)를 보니, 그 사우에 사액한 한 가지 일이 실록에는 출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전례에 따라 계하(啓下)하되, 공사(公事)는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액호를 의논하여 정하고 치제하는 등의 일 또한 전례대로 거행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순치(順治) 14년(1657) 9월 18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이익한(李翊漢)이 담당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김상용(金尙容)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고 치제(致祭)하는 건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졸(卒) 우의정(右議政) 김상용(金尙容)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고 치제(致祭)하는 등의 일을 전례대로 거행하는 뜻을 복계(覆啓)하여 허락을 받았다고 하므로, 당초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올린 장계(狀啓)를 다시 가져다 상고해 보니, 같은 때에 김상용과 함께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판서(判書) 이상길(李尙吉), 도정(都正) 심현(沈誢), 정(正) 이시직(李時稷),
부사(府使) 윤계(尹棨), 주부(主簿) 송시영(宋時榮), 천총(千摠) 구원일(具元一) 등 6인을 함께 배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김상용에게 치제할 때에도 일체로 거행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순치(順治) 14년 10월 27일에 좌승지(左承旨) 신(臣) 권우(權堣)가 담당하였는데,
“부사 윤계는 본부(本府)에서 죽은 인물이 아닌데, 어찌 혼동하여 거론하는 것이며, 그때 본부의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이라는 자가 본토 사람으로서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데, 어찌 그를 거론하지 않는 것인가? 그 사람에 대한 정의의 후하고 박함에 따라 그러한 것인가? 막중한 은전을 이와 같이 경솔하게 할 수 없으니, 다시 강화부에 물어서 처리함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계하(啓下)하였다.
[주-D001] 강화(江華)에 …… 건 : 이 기사는 원래 《서원등록(書院謄錄)》 효종 7년(1656)조에 수록되어 있으나, 본 내용과 관련된 춘추관(春秋館)의 계사 날짜가 효종 8년(1657) 9월 13일자이고, 본문의 순치(順治) 14년이 효종 8년에 해당하므로 연대순으로 재배열하였음.[주-D002] 계사(啓辭) : 공사(公事)나 논죄(論罪)에 관하여 임금에게 아뢴 말이나 글을 말함.[주-D003] 김상용(金尙容)의 …… 건 : 이 기사는 원래 《서원등록(書院謄錄)》 효종 7년(1656)조에 수록되었으나, 본문의 순치(順治) 14년이 효종 8년(1657)에 해당하므로 연대순으로 재배열하였음.[주-D004] 중군(中軍) : 조선 시대 각 군영(軍營)에 속한 종2품관으로 군영의 대장 혹은 사(使)를 보좌하는 무관이다. 총리영(摠理營)ㆍ수어청(守禦廳)ㆍ진무영(鎭撫營)ㆍ관리영(管理營)과 각 도 감영(監營)의 순영중군(巡營中軍)은 정3품직이었음.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선이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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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11년 정미(1787) 4월 2일(기해)
11-04-02[06] 희정당(煕政堂)에서 대신, 이조와 병조의 판서, 유사 당상(有司堂上), 예조와 형조의 당상 및 어사 심진현(沈晉賢)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좌의정 이재협(李在協), 우의정 유언호(兪彦鎬), 이조 판서 윤시동(尹蓍東), 병조 판서 김이소(金履素), 유사 당상 서유린(徐有鄰)ㆍ이재간(李在簡)ㆍ이병모(李秉模), 형조 판서 이숭호(李崇祜), 참의 김이희(金履禧), 예조 참판 서회수(徐晦修), 참의 정존중(鄭存中)이 입시하였다.
○ 영의정 김치인이 아뢰기를,
“《국조보감(國朝寶鑑)》은 곧 백세토록 믿고 증거로 삼는 책입니다. 별편(別編)에 고 충신 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의 사실(事實)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 ‘강도(江都)에 사원(祠院)을 세웠다.’ 하였고, 또 ‘강도의 사민(士民)들이 병자년(1636, 인조14)에 사절(死節)한 김상용(金尙容), 이상길(李尙吉), 심현(沈誢), 이시직(李時稷), 윤계, 송시영(宋時榮), 윤전(尹烇), 구원일(具元一) 등을 위해 사원을 세워 제향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사원에 충간공만 끼지 않았으니 이상한 일입니다. 충간공이 적에게 욕하며 굽히지 않은 것이 당(唐) 나라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에 뒤지지 않는데, 그가 순절한 곳이 강도가 아니기 때문에 강도 사람들이 사원에서 제향할 때 혹 의론이 같지 않아 함께 제향하지 않는 듯합니다. 《국조보감》에 실린 내용이 이미 이렇게 명백하니 사리로 보아 마땅히 함께 제향해야 하겠으나, 충렬사(忠烈祠)에는 일찍이 다른 곳에서 순절한 사람을 함께 제향한 예가 없으므로 지금 갑자기 의논할 수 없습니다. 당초에 사민들의 의론이 나온 것은 충간공이 살고 벼슬한 곳이 모두 강도이고, 또 그 당시에 척화(斥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 또한 일찍이 강도에서 살아 유허비(遺墟碑)와 기적비(記跡碑)가 있으며, 그 처와 아들과 자부가 절의를 세운 곳이 모두 강도이기 때문에 정려(旌閭)의 은전을 입기까지 하였습니다. 충정공처럼 큰 절의를 세운 분에 대해 아직까지 이 땅에 사원(祠院) 한 칸도 없는 것은 실로 흠전(欠典)이 됩니다. 충정공과 충간공을 위해 별도로 사원 하나를 세워 함께 제향하고, 사림이 건물을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특별히 사액(賜額)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별도로 사원을 세우는 것도 참으로 좋겠으나, 일은 크고 역량은 모자라니 완공하기가 쉽지 않다. 충간공이 비록 본토에서 순절한 사람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나고 여기에서 자란 것은 충정공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본사(本祠)에 함께 제향한다는 것이 이미 《국조보감》에 실려 있으니, 두 충신을 충렬사에서 합향(合享)하게 하라.”
하였다.
[주-D001]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 당 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다른 성들은 모두 함락되었으나 장순, 요은(姚誾), 남제운(南霽雲), 허원 등은 수양(睢陽)을 굳게 지켜 2년을 버티다가 성이 고립되고 원군이 이르지 않아 결국 성이 함락되어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전에 장순이 전투를 독려하면서 눈을 부릅떠서 눈자위가 찢어져 피가 흘렀고 이를 악물어 이가 부서졌는데, 포로가 된 뒤에 안녹산의 당인 윤자기(尹子奇)가 장순의 입을 칼로 찢어서 보니 남아 있는 이가 서너 개뿐이었다. 장순이 죽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군부(君父)를 위해 의리로 죽지만 너희들은 역적에게 붙었으니 개돼지만도 못하다. 어찌 오래가겠느냐.” 하였다. 《舊唐書 卷187下 忠義列傳》
ⓒ 한국고전번역원 | 홍기은 (역)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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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세 분 절사(節士) 윤이건의 증조부 윤섬(尹暹)과 백부 윤계(尹棨), 그리고 숙부 윤집(尹集)을 가리킨다. 윤섬은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으로 상주성(尙州城)에서 전사하였고, 윤계는 병자호란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다 포로가 되어 순절하였으며, 윤집 또한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으로 끌려가 순절하였다. 농암집(農巖集)
13 세 사람 원문의 ‘삼절(三節)’은 병자호란 때 충정을 바친 증조부 윤섬(尹暹)과 부친 윤계(尹棨), 숙부 윤집(尹集)을 가리킨다. 윤섬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이 되어 싸우다가 상주성(尙州城)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손자인 윤계ㆍ윤집은 병자호란 때 절의를 지키다 죽었다. 남양 부사(南陽府使)였던 윤계는 강도(江都)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순국했다. 《국역 인조실록 16년 12월 30일》 윤집은 청나라에 끌려가 살해되었는데,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이들의 시문집을 모은 《삼절유고(三節遺稿)》가 전한다. 문곡집(文谷集)
숙묘조(肅廟朝)에는 …… 주셨습니다 이단하(李端夏)의 건의로 김포(金浦)에 있는 윤섬(尹暹), 윤계(尹棨), 윤집(尹集), 윤상(尹桑), 윤결(尹潔) 등 5인의 묘역에 묘지기 2인을 두어 복호(復戶)해 주고 수호하도록 하였다. 《肅宗實錄 7年 2月 3日》 정조(正祖)
섬 안에 임시로 매장하였으니 《포저집》 권25 병정기사(丙丁記事)에, 대부도(大阜島)에 들어가서 순국(殉國)한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의 시신을 섬의 북면(北面) 현종리(懸鍾里)에 임시로 매장하고 떠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포저집(浦渚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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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7권 / 시(詩) 3 / 남양(南陽)의 도중에서 읊다
땅이 옛 사당 때문에 중하거니와 / 地以遺祠重
산맥이 돌아들어 와룡이 나왔도다 / 山廻有臥龍
큰 명성을 천하에 드리웠어라 / 大名垂宇內
어느 곳에서 융중을 찾을 건고 / 何處訪隆中
관중이 아니면 다 오랑캐 되었으리 / 微管人其左
주 나라 따르니 도가 동으로 왔네 / 從周道遂東
길이 태평할 걸 일찍이 느꼈노니 / 永淸曾寄感
영웅호걸 세 충신이 엄연하여라 / 英爽儼三忠
[주-D001] 땅이 …… 찾을 건고 : 옛 사당이란 바로 남양부(南陽府)에 있는 용백사(龍柏祠)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충무후(忠武侯) 제갈량(諸葛亮), 송(宋) 나라의 명현(名賢) 호안국(胡安國),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순국한 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를 향사하고 있다. 와룡(臥龍)은 제갈량의 별호이고, 융중(隆中)은 제갈량이 일찍이 은거했던 산명(山名)이다.[주-D002] 관중(管仲)이 …… 되었으리 :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관중이 환공(桓公)을 도와서 제후(諸侯)의 으뜸이 되어 천하를 바로잡음으로써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은택을 입고 있으니, 관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憲問》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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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24권 / 제문(祭文) 6 / 용백사(龍柏祠) 치제문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맞먹는 인재로서 / 伊呂伯仲
물고기와 물이 합한 듯 군신이 만났으니 / 魚水之合
우리 사문을 돕기를 / 佑我斯文
담박(澹泊)으로 하였다네 / 維澹維泊
충성스러운 데 그치지 않고 / 匪直也忠
진실로 선각이었으니 / 戩玆先覺
그런 까닭에 주자(朱子)가 / 所以紫陽
누차 소학에 썼던 것일세 / 屢書小學
삼분과 팔진은 / 三分八陣
대개 말할 것이 못 되니 / 蓋不足云
열렬한 문정공(文定公)이여 / 烈烈文定
시대가 다르지만 함께 배향하였네 / 異代追芬
전기(傳記)는 역사에 드러나고 / 傳著陽秋
기상은 송백을 이기나니 / 氣凌松柏
좌해의 단충인 / 左海丹忠
충간공(忠簡公)을 함께 배향하였네 / 忠簡躋食
땅으로 인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 因地以祠
의를 짝하기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 配義無斁
일체로 제사를 드리며 / 一體侑之
내가 아득한 옛날을 생각하네 / 我感曠昔
[주-D001] 용백사(龍柏祠) : 제갈량(諸葛亮)과 호안국(胡安國)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윤계(尹棨)를 종향한 곳이다. 남양(南陽)에 있다.[주-D002] 담박(澹泊) : 이 부분은 제갈량(諸葛亮)을 기술한 것인데, 담박을 말한 것은 제갈량이 군자의 행실로써 아들을 경계한 글에 “담박이 아니면 뜻을 밝힐 수 없고, 영정(寧靜)이 아니면 멀리 이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小學 嘉言》[주-D003] 삼분(三分)과 팔진(八陣) : 두보(杜甫)가 제갈량을 두고 읊은 시 팔진도(八陣圖)에서 “공은 셋으로 나뉜 나라에 덮고, 이름은 팔진도로써 이루었네.”라고 하였는데, 삼분은 촉(蜀)이 위(魏), 오(吳)와 맞서 천하를 다툰 것을 말하며, 팔진은 제갈량의 팔진법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홍영 (역)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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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경 1597년(선조30)~1673년(현종14)
동명집 제11권 / 서(序) / 《삼절고》 서〔三節稿序〕
영산(靈山)의 사군(使君) 윤이명(尹以明)이 나에게 삼절(三節)의 유고(遺稿)를 보여 주면서 서문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삼절이란 과재공(果齋公)이 임진년의 난리에 죽고, 신곡공(薪谷公)과 임계공(林溪公) 두 공이 병자년의 난리에 죽은 것을 칭한 말이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형제가 모두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으니, 아아, 윤씨 집안은 어찌하여 절사(節士)가 이처럼 많단 말인가. 옛날에 안 태사(顔太師)가 이희열(李希烈)을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너는 안녹산(安祿山)을 꾸짖다가 죽은 사람인 안고경(顔杲卿)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하였는가? 바로 나의 형님이시다.” 하였다. 그 충언과 의열(義烈)은 지금까지도 늠연하기만 하여 생기가 돌게 한다. 지금 윤씨의 삼절 역시 옛사람들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내가 비록 미처 과재공을 뵙지는 못하였으나, 임계공은 한 번 안면이 있는 사이이며, 신백(信伯)의 경우는 바로 나와 정신으로 교제를 맺은 벗이었다. 일찍이 그의 집에 갔더니, 벽 위에 고정(考亭) 주희(朱熹)가 읊은 “천추토록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정위가 바로 나의 혼백이라네.〔千秋滄海上 精衛是吾魂〕”라는 시를 써 놓고 신백이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것을 보고는, 그 당시에는 그저 심상한 일로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어찌 느끼는 바가 깊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슬픈 일이다. 수립한 바가 이와 같이 우뚝하게 높으니 문장의 아름다움 따위는 도리어 여사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 글을 읽어 보니 역시 세 군자의 사람됨을 상상해 알 수가 있다. 이것으로 서문을 삼는다.
[주-D001] 삼절이란 …… 말이다 : 과재(果齋)는 윤섬(尹暹), 신곡(薪谷)은 윤계(尹棨), 임계(林溪)는 윤집(尹集)의 호이다. 윤섬은 자가 여진(如進)인데,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따라 상주(尙州)에 가서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일이 적의 형세가 치성한 것을 보고는 그곳을 떠나면서, “그대는 나를 따라 주기 바란다.” 하였으나, 꼼짝도 하지 않고 막차(幕次)에 그대로 앉아서 말하기를 “앞으로 다시는 주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남아 대장부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는 것으로 족하다.” 하고는 마침내 그곳에서 죽었다. 윤계는 자가 신백(信伯)인데, 병자호란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있으면서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장차 적(賊)을 토벌하려 하였는데, 적들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적에게 항거하여 욕설을 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윤집은 자가 성백(成伯)으로 윤계의 아우이다.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에 대해 극언(極言)하였는데, 남한산성(南漢山城)의 형세가 궁박해지자 조정에서 삼학사를 청나라에 보내어 사과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청나라에 잡혀 가 조금도 굴하지 않은 채, “나는 다만 황상(皇上)이 있는 줄 알 뿐이다.” 하고는 죽었다.[주-D002] 안 태사(顔太師)가 …… 하였다 : 안 태사는 당나라의 충신이자 서예가인 안진경(顔眞卿)이고, 안고경(顔杲卿)은 당나라의 충신으로, 안진경의 형이다. 안고경은 안녹산의 난 때 계책을 써서 안녹산의 양자인 이흠주(李欽湊)를 죽이고 부하인 고막(高邈) 등을 체포하는 등 공을 세웠으며, 안녹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자, 사지를 찢기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큰소리로 안녹산을 꾸짖다가 죽었다. 안진경은 안녹산의 난 때 평원 태수(平原太守)로서 그 지역을 온전히 지켰고, 의병을 모집하여 토벌하면서 하삭(河朔) 제군(諸郡)의 맹주(盟主)로 추대되었다. 당 덕종(唐德宗) 때 이희열(李希烈)이 반기를 들자 노기(盧杞)가 안진경을 제거할 목적으로 덕종에게 그를 보내 적을 회유해야 한다고 말하여 안진경이 가게 되었는데, 이희열의 회유를 듣지 않고 역적이라고 꾸짖다가 목이 졸려 죽었다. 《新唐書 卷192 顔杲卿列傳》 《舊唐書 卷128 顔眞卿列傳》[주-D003] 신백(信伯) : 신곡(薪谷) 윤계(尹棨)의 자이다.[주-D004] 정위(精衛) : 해변에 사는 작은 새이다.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에 빠져 죽었는데, 이 새로 환생하여 늘 서산(西山)의 나무와 돌을 물어다 동해를 메우려 했다고 한다. 《山海經 北海經》 후대에는 성공할 가망이 없는 일을 무모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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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38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