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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8년 무진(1808) 윤5월 11일(병자)
08-윤05-11[06]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의 사판(祠版)을 그 후손 조진억(趙鎭億)이 환봉(還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번 봄에 행행(幸行)하셨을 때 진산(珍山)의 유학(幼學) 조진억이 상언(上言)하여, 여러 대를 두고 계승해 온 그의 선조 문열공 조헌의 계통을 다시 받들게 하고, 조석복(趙錫福)이 지손(支孫)이면서도 종통(宗統)을 빼앗은 죄에서 감히 요행으로 벗어날 수 없게 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문열공의 종사(宗事)에 관한 일은 여러 번 쟁단(爭端)이 일어났을 때 번번이 조정에서 바로잡게 하였으나, 지금 사판이 조석복의 임소(任所)에 있으므로 사손(祀孫)이, 그 주사(主祀)가 옮아 간 것이 원통하여 이렇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양편에서 옛날부터 분쟁을 일으켜 온 것은 모두 근거할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조석복은 스스로 그 자신이 장자의 후손이며 조진억은 차파(次派)라 하고, 조진억은 스스로 그 자신이 양인의 후손이며 조석복은 천파(賤派)라 하고 있는데, 그 장차(長次)의 차서(次序)에서는 조진억이 주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고 그 양천(良賤)의 구별에서는 조석복이 감히 다툴 수가 없습니다. 주사하는 데에는 양(良)을 중하게 여기므로, 서자(庶子)인 장자(長子)는 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의 말씀을 기억하여 말하기를 ‘조완도(趙完堵)는 정주(定州) 기생의 소생이고 조완제(趙完堤)는 양첩(良妾)의 아들인 까닭에 조완제가 봉사(奉祀)하도록 정하였다.’ 하였으니, 조완도가 비록 연장(年長)이지만 봉사할 수 없었던 것은 예전부터 이미 그랬습니다.
선정신 송시열이 또 말하기를 ‘조명봉(趙鳴鳳)이 죽고 그 아버지가 폐질(廢疾)에 걸리자, 사당이 잡초가 우거져 덮여도 돌보지 않았다.’ 하였는데, 조명봉은 바로 조완제의 손자이니, 그 사판이 본래 조완제의 집에 있었던 것을 이로써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조명봉이 죽고 아들도 없으니 참으로 봉사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故) 판서 신 민진후(閔鎭厚)가 이런 사정을 연석에서 계품하자, 형이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아우가 계통을 잇는 예(禮)를 적용해서 조빈(趙鑌)의 아우인 조순(趙錞)의 아들 조서봉(趙瑞鳳)이 봉사하도록 입안(立案)을 작성해 주었는데, 이는 곁가지가 본줄기가 되는 것입니다. 조서봉 이후 적자(嫡子)에서 적손(嫡孫)으로 서로 계승하여 조진억에 이르렀으니, 이 일의 전말이 이와 같이 상세합니다. 조완도가 장자이지만 천첩(賤妾)의 소생이기 때문에 예율(禮律)에 의해 허락받지 못한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조석복은 조중국(趙重國)의 아들이고 조혁(趙㷜)의 손자인데, 조혁은 또 조완도의 차손(次孫)인 조광한(趙匡漢)의 둘째 손자이니, 지파(支派) 가운데 지파입니다. 비록 조완도의 계파로 하여금 문열공의 제사를 받들게 하더라도 조석복은 필시 마땅한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이 송사(訟事)가 처음 영묘(英廟) 무인년(1758, 영조34)에 일어났을 때 조혁을 무주(茂朱)에 찬배(竄配)하였고, 조진억의 할아버지 조종수(趙宗秀)가 도로 주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오년(1774)에 다시 문제가 되었을 때 조중국을 신녕(新寧)에 찬배하였으며, 조진억의 아버지 조주달(趙周達)이 또 사판을 도로 받들었습니다. 그 당시 신문고(申聞鼓)를 쳤던 과부(寡婦)가 아직도 살아 있고 영묘조(英廟朝) 당시의 처분이 일월처럼 명백하고 부월(鈇鉞)보다 엄중하였으므로, 옳고 그름은 베껴서 건네준 문권(文券)에 모두 실려 있고 또 그 사실이 사제(賜祭)한 제문(祭文)에 올라 있으니, 피차의 시비를 분별해서 의혹을 해소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위로 영묘조의 처분과 아래로 두 선정의 입론(立論)은 이미 금석(金石)과 같아 바꿀 수 없으므로 백세에 이르도록 준거(遵據)해야 하는데, 또 문득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 집안의 변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문(斯文)과 종사(宗事)의 중대한 문제와 관련이 됩니다.
설령 조석복이 조금이나마 말할 만한 단서가 있더라도 이제는 양쪽에서 자처(自處)하기를 다만 예전에 정한 대로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분쟁을 일으키니 참으로 심히 놀랍습니다. 마땅히 논감할 경우 예전에 내린 엄중한 처분을 준수하여, 후일에 의혹이 생길 염려를 미리 없애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선현(先賢)의 막중한 집안일을 본조(本曹)에서 함부로 결단하기 어려우니, 대신에게 문의(問議)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신에게 문의하니,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은 ‘선정신 집안에서 종통(宗統)을 다툰 송사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한쪽은 양인과 천인의 구별을 주장해 양인이 종통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다른 쪽은 맏이와 아우의 차서를 근거로 맏이가 종통이 되어야 한다고 서로 의견을 내세우며 승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체로 양인이 당연히 종통이 되어야 한다는 논의는, 선정신 김장생이 예경(禮經)을 살피고 근거해서 정론으로 삼은 것입니다. 더구나 영묘조 당시의 처분이 매우 엄중하여 이미 시왕(時王)의 제도가 되었으니, 이제 설사 다툴 만한 문제가 있더라도 이미 정한 단안(斷案)이 있으므로 아마도 다른 논의가 없을 듯합니다. 예조에서 복계(覆啓)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상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주-D001] 조석복(趙錫福) : 1785년(정조9) 6월 24일 전옥서 참봉을 시작으로 사옹원 봉사, 조지서 별제 등을 거쳐 1807년(순조7) 5월 29일 문의 현령(文義縣令)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1807년 9월 16일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건의하여 문열공 조헌의 제사를 주관하라고 명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9年 6月 24日, 純祖 7年 5月 29日ㆍ9月 16日》 조헌의 적자(嫡子)들이 같은 때에 순절(殉節)하여 서얼들이 봉사(奉祀)하기를 다투어 오랫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주-D002] 고(故) …… 계품하자 : 1708년(숙종34) 8월 20일 당시 판돈녕부사 민진후 등이 입시하여 조헌의 제사를 조서봉이 주관하도록 계품하여 윤허를 받았다. 《承政院日記 肅宗 34年 8月 20日》[주-D003] 선정신(先正臣) …… 상세합니다 : 1758년(영조34) 조헌을 위해 부조(不祧)의 명을 내렸으나 제사를 받들 사손(祀孫)을 정하지 못해 분란이 일자 대신들에게 하문하였고, 이에 영의정 유척기(俞拓基)가 헌의(獻議)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承政院日記 英祖 34年 10月 16日》[주-D004] 송사(訟事)가 …… 찬배(竄配)하였고 : 무인년(1758, 영조34) 조헌의 봉사손(奉祀孫) 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 영의정 유척기가 조혁의 잘못에 대해 헌의하였다. 즉 광해군 때 조혁의 할아버지가 천인(賤人)에서 면제된 허통 공문(許通公文)에서 ‘관노면천(官奴免賤)’ 등의 글자를 칼로 긁어내는 등 조헌의 봉사손이 되기 위해 온갖 부정한 짓을 벌였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조혁에게 편배(編配)의 형률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34年 10月 16日》[주-D005] 갑오년에 …… 찬배하였으며 : 이전에 조정에서는 조헌의 자손이 가난하여 제사를 잇지 못하였으므로 조혁 부자를 임용하는 것을 옳게 여겨 조혁을 단성(丹城) 수령으로 임명하였으며, 그의 아들 조중국 또한 대신들이 아뢰어 6품직으로 올려 연천(漣川) 수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갑오년(1774, 영조50) 11월 12일 조중국이 몰래 종가(宗家)를 빼앗을 계획을 품고 억지로 조헌의 사당을 임소(任所)에 두고 받든 것이 문제가 되어, 조중국의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고 이어 경상도 신녕현에 원찬(遠竄)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50年 11月 12日, 29日》[주-D006] 그 …… 있고 : 조헌의 봉사손은 나이가 겨우 13세였으므로 그의 어머니 오 조이(吳召史)가 휘양을 쓰고 궐문으로 들어와 신문고를 쳐서 사판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50年 11月 12日》[주-D007] 두 선정 : 송시열과 김장생을 가리킨다.[주-D008] 시왕(時王)의 제도 : 시왕은 당시의 왕이라는 뜻으로, 영조가 제정한 예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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