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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汝昌 | 1450 | 1504 | 河東 | 伯勖 | 一蠧 | 文獻 |
文獻公先生實紀 文獻公實紀 凡例大槩略倣景賢錄亦有未能盡然者盖彼此所聞所得旣有詳略之不同而亦不敢太拘拘於必同也云爾 [實紀] 事實大略 皇明恭宗景皇帝景泰元年 本朝世宗莊憲大王三十二年 庚午 某月日先生生于咸陽郡北德谷里介坪村舊宅 세종 32 1450 경오 景泰 1 1 咸陽 德谷里 介坪村에서 태어나다. 英宗睿皇帝天順四年 世祖惠莊大王六年 庚辰先生隨大 人左尹公赴義州府詔使張公寧見而名之 세조 6 1460 경진 天順 4 11 명 나라 사신 張寧이 보고 ‘汝昌’으로 이름을 지어 주다. 先生聘于宗室桃平君末生之門卽恭靖大王之 孫 先生婚禮歲月家不能傳姑附于此 憲宗純皇帝成化二年 世祖大王十二年 丙戌考左尹公卒於李施愛之亂先生奉返卜葬于咸陽郡昇安洞 세조 13 1467 정해 成化 3 18 5월, 李施愛의 난에 부친이 피살되다. ○ 程伊川의 ‘天地間一蠧’라는 말에서 뜻을 取하여 ‘一蠧’라 自號하다. 또 ‘睡翁’으로 호를 삼다. 先生師事佔畢齋亦嘗受學於李進士寬義與寒暄堂金先生爲道義之交與南秋江孝溫朱溪君深源 茂豊副正捴諸賢相推重若弟兄李宗尹克昌亦所絶喜也同時金季雲李仲雍許文炳諸賢以文章節義自高見先生則必改容起敬 佔畢齋金先生諱宗直字季昷善山人景泰癸酉進士天順己卯登第官至刑曹判書弘治壬子卒年六十二諡文簡學問精深文章高古爲一代 儒宗前後名士多出其門戊午史禍及於泉壤○李進士廣州人寓居利川經明行修屢擧不第退居鄕 曲精於性理之學一時學者多所推服成廟命召講論性理之源又問天地度數日月星辰歲差曆法 辨對不失年踰七十終焉後褒贈吏曹判書○秋江字伯恭冲澹典雅胷次灑落無一點塵氣成廟 朝上疏請復昭陵不報絶意斯世散漫爲事成化壬子年三十九而終燕山甲子追罪昭陵之疏不 保泉壤○朱溪字伯淵號醒狂太宗玄孫經明行飭忠孝正直先見任士洪不道極陳其必誤國成廟感悟竄士洪於外燕山政亂爲所搆誣倂二子見殺中廟朝特贈一品又旌其門○茂豊字伯源 太宗曾孫天資絶世詩語奇妙秋江稱其宏量結墅楊花渡口自號西湖主人戊午杖流巨濟仍賜死○ 克昌號竹溪工詩秋江稱其好賢○季雲名馹孫號濯纓金海人世居淸道受業佔畢齋能文章尙氣節 簡亢少許可登第仕至吏曹正郞燕山戊午遭史禍○仲雍名穆全州人能文章尙氣節在太學因天旱 極論尹弼商姦邪曰烹弼商天乃雨弼商遇諸途呼曰君必欲食老夫肉耶公昂然不顧而去燕山初擢 壯元拜北評事戊午禍作弼商搆殺之○文炳名磐陽川人師友寒暄堂志於性理恬於進取事事師古 寒暄先生服其端雅出於天性戊午登第旋遭史禍 ○先生取伊川程子天地 間一蠧之語自號一蠧亦號睡翁 成化十九年 成宗康靖大王十四年 癸卯進士試李瑺榜中二 等第二十人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34 진사시에 합격하여 成均館에 입학하다. 成化二十二年 成宗大王十七年 丙午妣貞夫人崔氏卒先 生廬墓三年不出山口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37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廬墓하다. ○先生曾入智異山養性讀 書至於三年之久旣遭內艱外除纔畢卽携二弟復 入山中體道益篤又就蟾津之口築室搆亭扁以岳陽之號有兪㵢溪詩幷序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39 蟾津江 어귀에 岳陽亭을 짓고 讀書, 講道하고 吟詠하며 생활하다. 㵢溪名好仁字克己高靈人世居咸陽壬午生員進 士甲午登第官至陜川郡守弘治甲寅年五十而卒忠孝淸儉沉重簡嚴詩文高古筆力遒勁人稱三絶 佔畢公文行冠一世公不讓焉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40 4월, 金馹孫과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 ○ 晉州의 姜渾을 방문하여 詩文을 논하고, 함께 密陽의 金宗直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다. 孝宗敬皇帝弘治三年 成宗大王二十一年 庚戌 同郡趙寺正孝仝與尹參議兢俱上疏薦先生學行除昭格署 參奉先生上疏辭之上優答不允○十一月文科別試宋軾榜先生登三等第七人選補藝文舘檢閱 遷侍講院說書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41 趙孝仝, 尹兢의 천거로 昭格署參奉에 제수되다.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12월, 文科 別試에 합격하다. 김일손의 천거로 예문관 검열이 되다. ○ 侍講院 說書가 되다. 弘治七年 成宗大王二十五年 甲寅拜安陰縣監時寒暄堂 金先生在陜川郡冶爐縣之末谷先生累與約會於 居昌加祚縣之山際洞頗有川石之勝而爲兩地之 中徜徉晤語從容講論而罷居昌之人至今傳以爲 故事 성종 25 1494 갑인 弘治 7 45 安陰縣監이 되다. 便宜科條 數十條를 만들어 시행하다. 弘治十一年 燕山四年 戊午秋七月史禍作先生决配鍾 城府 연산군 4 1498 무오 弘治 11 49 6월, 김일손이 來訪하여 함께 靑溪精舍에 머물다. ○ 7월, 史禍에 연루되어 鍾城府에 유배되다. 弘治十七年 燕山十年 甲子四月初一日先生卒返葬于咸陽郡昇安洞先塋之東麓艮坐坤向之原○是年秋史禍再作 연산군 10 1504 갑자 弘治 17 55 4월 1일, 謫所에서 卒하다. ○ 6월, 咸陽郡 昇安洞에 장사 지내다. ○ 9월, 다시 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되다. 武宗毅皇帝正德二年 中宗恭僖大王二年 丁卯夏六月 贈先生承政院都承旨 중종 2 1507 정묘 正德 2 - 6월, 金欽祖 등의 상소와 朴元宗 등의 論啓로 表沿沫 등과 함께 復官되다. 인하여 都承旨에 추증되다. 正德十二年 中宗大王十二年 丁丑秋八月贈先生議政府右議政 중종 12 1517 정축 正德 12 - 鄭光弼ㆍ申用漑 등이 加贈崇品과 子孫의 錄用을 啓請하여, 우의정에 추증되다.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 士林이 선생의 고향인 咸陽 蘫溪에 서원을 세우다. 명종 21 1566 병인 嘉靖 45 - 蘫溪書院으로 사액되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 館學儒生 趙憲 등이 先生과 金宏弼ㆍ趙光祖ㆍ李彥迪의 文廟從祀를 疏請하다. 이후로 해마다 疏가 올려지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 조정에서 先生과 金宏弼ㆍ趙光祖ㆍ李彥迪의 기록을 모아 「國朝儒先錄」을 印布하다. 神宗顯皇帝萬曆三年 宣祖昭敬大王八年 乙亥賜謚文獻公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 ‘文獻’(道德博聞曰文 聰明睿哲曰獻)의 시호를 받다. 선조 12 1579 기묘 萬曆 7 - 金誠一 등이 선생의 貫鄕인 河東에 永溪書院을 세우다. 선조 15 1582 임오 萬曆 10 - 현감으로 있었던 安陰縣에 祠堂과 碑(林薰 書)가 세워지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 羅州牧使 金誠一이 五賢(선생과 金宏弼ㆍ趙光祖ㆍ李彥迪ㆍ李滉)을 위하여 大谷洞에 景賢書院을 세우다. 마치지 못한 것을 任允臣이 이어 완성하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 姜大遂 등이 冶爐縣에 세운 서원에 김굉필과 함께 享祀되다. 萬曆三十八年 光海二年 庚戌九月初四日命列從祀孔子廟庭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 9월, 臺諫ㆍ政府ㆍ館學과 八道 儒生들의 疏請으로 五賢이 文廟에 從祀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 ○ 牙山의 선비들이 仁山書院을 세우고 五賢을 享祀하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 丁酉再亂 때 불탄 남계서원을 중건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 鄭經世 등이 尙州에 세운 서원에 정몽주 등과 함께 享祀되다. 효종 10 1659 기해 永曆 13 - 居昌 士林이 山際洞에 세운 서원에 김굉필과 함께 享祀되다. 현종 1 1660 경자 永曆 14 - 陜川 冶爐縣에 세워진 서원이 伊淵書院으로 사액되다. 현종 3 1662 임인 永曆 16 - 安陰縣에 세워진 書院이 龍門書院으로 사액되다. ○ 山際洞에 세워진 서원이 道山書院으로 사액되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 尙州에 세워진 서원이 道南書院으로 사액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 關北 士林이 涪溪에 세운 서원에 享祀되다. 숙종 12 1686 병인 康熙 25 - 金鼎昌 등의 上疏에 의해, 涪溪에 세워진 書院을 鍾山書院으로 賜額하고 禮官을 보내 致祭하다. 영조 19 1743 계해 乾隆 8 - 남계서원 院儒들이 李縡의 修正을 받아 「實紀」를 重刊하다. 고종 36 1899 기해 光武 3 - 岳陽亭이 중건되다. - - 1919 기미 - - - 남계서원 院儒들이 詩文, 諸賢讚述 등을 收拾ㆍ檢正하여 田愚의 校勘을 받아 遺集을 간행하다. | 一蠹先生遺集卷之二 / 附錄 / 事實大略 皇明代宗景皇帝景泰元年 我世宗大王三十二年 庚午某月某日。先生生于咸陽德谷里介坪村第。 세종 32 1450 경오 景泰 1 1 咸陽 德谷里 介坪村에서 태어나다. 英宗睿皇帝天順四年 世祖大王六年 庚辰。先生隨大人通判公。到義州府。天使張寧適到州。見先生而異之。撫弄移時。通判公仍請錫名。張公命之曰汝昌。遂著說而與之。其說曰。義州通判鄭六乙。有子甫八歲。穎悟善應對。過於常兒。眞韓文公所謂可念者也。余與副使武公 名忠 客邊。一見皆驚喜之。撫弄不忍舍去。明日。其父且求名曰。此兒尙有弟一人。今六期矣。如見念。竝賜之。因感其言之勤也。命長曰汝昌。命次曰汝裕。將期其能昌鄭氏之門。而克裕其後也。然人能貴名。名不貴人。爲父者須加敎養之。而昌裕他日知好學之年。其以吾言而顧名思義哉。毋棄毋忽。天順四年。奉勑正使浙西張寧書。按先生八歲時。乃天順元年也。而名說下。書以天順四年。未詳其由。 세조 6 1460 경진 天順 4 11 명 나라 사신 張寧이 보고 ‘汝昌’으로 이름을 지어 주다. 先生聘宗室桃平君末生之女。卽恭靖大王之孫。聘年未詳。姑付于此。 憲宗純皇帝成化三年 世祖大王十三年 丁亥夏五月。通判公立慬于施愛之亂。先生攀擗號呼。排入積尸中求遺體。返葬于郡東昇安洞丑坐之原。◑通判公嘗爲咸吉道虞侯。至是賊臣施愛以會寧府使反。據吉州。通判公與本州兵使康孝文,牧使薛丁臣。抗義而死之。國朝寶鑑 세조 13 1467 정해 成化 3 18 5월, 李施愛의 난에 부친이 피살되다. ○ 程伊川의 ‘天地間一蠧’라는 말에서 뜻을 取하여 ‘一蠧’라 自號하다. 또 ‘睡翁’으로 호를 삼다. 先生師事佔畢齋金先生。亦嘗受學於李進士寬義。與金寒暄堂爲道義之交。與南秋江孝溫,朱溪君深源,茂豐副正摠諸賢。相推重若弟兄。李宗,尹克昌。亦所絶喜也。同時金季雲,李仲雍,許文炳諸賢。以文章節義自高。見先生則必改容起敬。實紀。此下記諸賢氏名及事行。而移書爲師友錄。 先生取伊川程子天地間一蠹之語。自號一蠹。又號睡翁。 十四年 成宗大王九年 戊戌夏四月。被任士洪等彈劾。先是。朱溪君深源。上疏。以爲鄭汝昌,丁克仁,姜應貞,朴演。皆聖賢之徒也。孝子慶延。乃社稷之器也。蓋深源與南孝溫。欲議復昭陵。故斥世祖朝勳舊諸臣。而請進用林下儒賢。特爲此疏。由是勳舊韓明澮等。嗾都承旨任士洪,同副承旨李瓊同啓曰。復昭陵事。非臣子所敢言。且深源,孝溫與姜應貞,鄭汝昌,朴演等。別爲一群。創爲詭異之行。推應貞爲夫子。指演爲顏淵。戰國處士之橫議。復起於聖世。請鞫深源,孝溫。以遏其流弊。上曰。謂之朋黨則不可。且予旣求言。從而罪之。非來諫之道也。遂不問。下旨于議政府。俾韓上黨等諸勳臣。曉予不信之意。國朝寶鑑 성종 9 1478 무술 成化 14 29 4월, 李深源ㆍ南孝溫 등과 함께 昭陵에 대한 일로 任士洪 등의 탄핵을 받다. 十六年 成宗大王十一年 庚子。上諭成均館。求經明行修。館中擧先生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先生講經。辭不就。○是歲。金濯纓馹孫。始就金先生學。嘗謂同門知舊曰。予性本小許可。十七歲。始遊佔翁之門。得神交十有三人焉。道德。金大猷, 宏弼 鄭伯勖, 汝昌 李伯淵。深源 文章。姜士浩, 渾 李胄之, 胄 李浪翁, 黿 李仲雍。穆 遺逸。南伯恭, 孝溫 辛德優, 永僖 安子挺, 應世 洪餘慶。裕孫 音律。李伯源, 總 李正中。貞恩 ○濯纓年譜 성종 11 1480 경자 成化 16 31 성종이 성균관에 유지를 내려 ‘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선비’를 추천토록 하여, 이에 제일로 천거되다. 十八年 成宗大王十三年 壬寅秋。先生自花開。訪楸溪尹公有慶 孝孫 于南原之中方里。相與講論朱書。楸溪年譜 성종 13 1482 임인 成化 18 33 花開洞으로부터 南原 中方里로 尹孝孫을 방문하여 함께 「朱書」를 강론하다. 十九年 成宗大王十四年 癸卯。中進士試。李瑺榜中二等第二十人。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34 진사시에 합격하여 成均館에 입학하다. 二十二年 成宗大王十七年 丙午。丁母夫人崔氏憂。葬于昇安竹岡子坐。先生哭泣嘔血。幾至滅性。勺飮不入口。廬墓三年。不出山口。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37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廬墓하다. ○先生曾入智異山。養性讀書。至於三年之久。旣遭內艱。外除纔畢。卽携二弟。復入山中。體道益篤。又就蟾津之口。築室構亭。扁以岳陽之號。有兪㵢溪詩竝序。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39 蟾津江 어귀에 岳陽亭을 짓고 讀書, 講道하고 吟詠하며 생활하다. 孝宗敬皇帝弘治二年 成宗大王二十年 己酉夏四月庚子。與濯纓發頭流之行。丁巳。因泛舟下蟾津賦一絶。己未。至晉州訪姜木溪。木溪能文章。時以注書辭還已數日矣。夜論詩文。壬戌。謁畢齋先生于密陽。是行也。歷覽山川。講論不撤。因與木溪。共詣師門。時畢齋先生。以刑曹判書。辭病致仕。退臥鄕廬。四方學者益衆。遂留受敎。旬有五日而歸。戊寅。還雲溪。今紫溪 己卯。濯纓餞至昌寧。濯纓年譜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40 4월, 金馹孫과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 ○ 晉州의 姜渾을 방문하여 詩文을 논하고, 함께 密陽의 金宗直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다. 三年 成宗大王二十一年 庚戌。同郡趙寺正孝仝與尹參議兢。俱上疏薦先生學行。除昭格署參奉。先生上疏辭之。上優答不允。十二月。登文科別試。選補藝文館檢閱。遷侍講院說書。○時濯纓帶是職。聞先生釋褐曰。代我掌史者此人也。因薦以自代。上深納其言。陞濯纓爲待敎。以先生爲檢閱。濯纓年譜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41 趙孝仝, 尹兢의 천거로 昭格署參奉에 제수되다.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12월, 文科 別試에 합격하다. 김일손의 천거로 예문관 검열이 되다. ○ 侍講院 說書가 되다. 七年 成宗大王二十五年 甲寅。拜安陰縣監。時寒暄堂金先生。在陜川郡冶爐縣之末谷。先生屢與約會於居昌加祚縣之山際洞。頗有泉石之勝。而爲兩地之中。徜徉晤語。從容講論。 성종 25 1494 갑인 弘治 7 45 安陰縣監이 되다. 便宜科條 數十條를 만들어 시행하다. 十一年 燕山四年 戊午七月二十七日戊午。先生坐史禍。流配鍾城府。○六月。濯纓來訪。因共留靑溪精舍。濯纓樂與先生從遊。而又愛灆溪山水之勝。嘗遣人卜築此舍。使先生題其額。曰靑溪精舍。至是濯纓來訪。而適有疾。調養于精舍。七月五日丙申。濯纓以史事被逮。先生遂與之別。先生嘗與濯纓。日夕講磨于精舍。或語及時事。相對流涕。濯纓偶作聚星亭賦示之曰。昔朱夫子。作聚星亭贊。其意蓋有在也。此亦余之寓意也。先生曰。何過慮也。濯纓曰。子不聞大猷之言乎。大猷非無識人也。嘗謂德優曰。觀今士氣。正類東漢之末。伯源,伯恭,正中,文炳。皆有晉風。不出十年。禍在此輩。此言誠然。而余謂非獨士氣然也。先王。好賢如色。從諫如流。吾輩年少有志之士。自以爲身逢明主。展布所蘊。可使唐虞之治。復致於今日。盡言不諱。積忤權奸。不幸皇天不祚。仙御遽賓。時移事變。群壬得志。今禍已迫矣。烏得免乎。先生曰然。相與嗟嘆者久之。是日。使命至。逮捕濯纓。先生適在座。謂濯纓曰。士流之禍。自此始矣。濯纓曰。此必克墩發史事也。吾其不還矣。願伯勖。爲道自愛。先生曰。勿多言。吾亦從此逝矣。濯纓年譜 연산군 4 1498 무오 弘治 11 49 6월, 김일손이 來訪하여 함께 靑溪精舍에 머물다. ○ 7월, 史禍에 연루되어 鍾城府에 유배되다. 十七年 燕山十年 甲子夏四月一日。先生易簀于謫所。六月。返葬于郡東昇安洞艮坐之原。九月。史禍再作。禍及泉壤。○子光等。踵繼惡習。網罹賢類。見畢齋集 연산군 10 1504 갑자 弘治 17 55 4월 1일, 謫所에서 卒하다. ○ 6월, 咸陽郡 昇安洞에 장사 지내다. ○ 9월, 다시 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되다. |
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 3월 2일 기묘 1번째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년
명나라 사신 장녕과 무충이 유칙을 갖고 오니 모화관에서 맞이하다
○己卯/欽差正使禮科給事中張寧、副使錦衣衛都指揮武忠齎勑諭至, 上率百官迎于慕華館。 初, 寧等到黃海道 龍泉站, 使問禮官鄭忱啓: "世子年雖幼, 已受封, 禮當迎勑。" 上令忱往碧蹄驛回報明使曰: "聞大人欲使世子迎勑, 深謝大人指揮。 然世子年幼, 未習儀度, 且前日陳大人來時, 亦不得行禮, 故未得依大人之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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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獻公先生實紀 文獻公實紀 凡例大槩略倣景賢錄亦有未能盡然者盖彼此所聞所得旣有詳略之不同而亦不敢太拘拘於必同也云爾 [實紀] 褒贈祀典 中廟丁卯六月初十日藝文館奉敎金欽祖等上䟽 論戊午史禍政院亦論啓傳曰辭連被罪者果 有曖昧宜追贈其爵贈先生通政大夫承政院都 承旨兼經筵參贊官尙瑞院正 丁丑二月靜庵趙先生以經筵官啓曰士習頹 :: 0069 :: 靡莫大之患也變化之道豈無有其方如金宏弼鄭 汝昌褒奬則可以扶㨁斯文矣 八月初二日上以廟見節義等事延訪羣臣金安 老曰金宏弼鄭汝昌被罪於廢朝其子孫不可以被 誅人子孫例錄用也當以賢者之後而使其妻孥得 免於飢寒可也上顧謂鄭光弼申用漑曰於大臣 意何如光弼等同辭以對曰操守踐實之人褒奬可 也金詮曰其人所學醇正不趨名勢得其正派之人 也學者以爲宗師終以其學行而禍及之甚可痛惜 李耔曰金宏弼鄭汝昌學術醇正東國無如此人儒 :: 0070 :: 者知所向方專賴二人之功也古有贈職褒美之事 此何預於賢者乎然有國者所當爲也其子孫亦可 錄用傳于政院曰金宏弼等子孫錄用可也 同月初六日傳于政院曰金宏弼鄭汝昌皆賢者也 其子孫錄用不可如他被誅人子孫例當各別錄用 且褒贈官爵存恤妻子等事並捧承傳 同月初十日臣光弼臣用漑臣金詮臣荊山臣繼孟 臣安瑭臣繼商議金宏弼鄭汝昌學術醇正踐履篤 實一時學者所共推服廢朝以金宗直門徒被罪當 代愍其無辜例加贈爵已命錄用其後矣但此 :: 0071 :: 等人數世所罕出沒齒之後志於道學者尙多慕之 例贈未足表異加贈其爵歲廩其妻搜訪其子 孫錄用何如伏惟上裁 同月二十日鄭光弼申用漑高荊山南衮韓世桓議 儒臣鄭汝昌與金宏弼生於一時其相與切磋之益 如考亭之於南軒也今旣奬異宏弼而不及汝昌則 恐爲闕典伏惟上裁無批答 同月二十六日鄭光弼等議金宏弼鄭汝昌例贈 都承旨未足表異請依前議施行加贈崇品子孫 錄用歲廩其妻何如啓依允贈大匡輔國崇祿 :: 0072 :: 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 禮曹以所居鄕講道之處置立祠宇春秋仲月官爲 致祭事報議政府 十月二十八日議政府啓未有聚弟子講道之所 强指某處爲講道之所置立祠宇似非其實各於家 廟春秋仲月官爲致祭何如同副承旨柳雲次知 啓依允 金宏弼家在玄風鄭汝昌家在咸陽各其官鄕校及 境內窮村僻巷掛榜知委使學者盡知國家褒賢 重道之意一變舊習之陋專尙性理之學事本道移文 宣祖大王戊辰館學諸生請與金文敬公宏弼趙文 正公光祖李文元公彦迪幷從祀文廟累月陳䟽自 是之後每年控籲其後李先生卒之後請幷與李文 純公滉五賢從祀歲以爲常 光海二年庚戌館學及八道儒生㙜諫政府交章共 請從祀文廟七月十八日依允命先生與金宏弼趙 光祖李彦迪李滉並列從祀八月十三日到禮曹行 移本道關內去六月初一日兩司合啓臣等將五賢 從祀一事伏閤籲呼已踰旬月而兪音尙閟不勝憫 :: 0074 :: 鬱焉自在先朝館學儒生連章瀝血者今幾年乎 盖道學如天之有日星一日不明則將無以扶國家 精神命脉故先王深知道學之當尊公議之難遏 以待後日爲敎而今我聖上亦於三年之內答儒 生疏曰上下之間誠意旣通則先王未遑之典庶 見擧行於今日矣小大胥慶翹首以待而聖批一向 牢拒臣等竊惑焉從祀與否於五賢臣學問功德固 無損益而崇報之擧尙闕於拭目之日豈非明時之 一大欠乎尊尙之得失而斯文之盛衰係焉尤不可 少緩請先正臣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 0075 :: 並命從祀文廟以答輿望答曰議大臣以啓禮曹啓 曰傳敎云云議于大臣則完平府院君李元翼以爲 臣前於下問時已盡陳達今無他議唯在聖上斷然 行之更何待乎伏惟上裁領議政李德馨以爲吾東 方道學歷新羅高麗以來罕見爲士子矜式逮我 聖朝始有五賢臣者出而濂洛關閩之遺緖得大明 于世其尊尙崇報之擧當趁卽議施而遷延至今實 盛世之闕典也在昔薛聦崔致遠非醇於道德之學 而亦以一時之功與於從祀之列乃如五賢臣而尙 不擧論此士論之日激而國言之僉同者也今無他 :: 0076 :: 議惟在聖明斷然行之伏惟上裁左議政李恒福以 爲五臣之事臣甞於榻前適承聖問已盡陳之矣言 不必複雖申前說豈盡如面陳之詳乎今則士論已 定矣國言已同矣所未行者只是聖上一言耳聖上 旣知其然則尙誰俟乎伏惟上裁領中樞府事尹承 勳淸平府院君韓應寅以爲五賢臣從祀一事士論 已定國言亦同惟在聖上斷然行之而已伏惟上裁 右議政沈喜壽以爲朝家大小論議豈無皁白之異 同者而至於五賢臣從祀文廟之擧夫孰有異議之 人也臣等在聖上嗣服之初因草野陳䟽聯名獻議 :: 0077 :: 以不可不速行之意而臣於上年春並陳此事於箚 辭中矣今者中外韋布之士及耳目論思之官瀝血 封章不謀同辭此豈人力之所可致者哉殿下亦豈 不知五賢臣道德學問之懿不容無崇報矜式之典 而似若有遅難之意者非但愼重其莫大之事亦未 必不以五人一時並擧爲近於繁夥歟是則大不然 天之生大賢也踈數無常從祀文廟之擧亦隨以多 寡焉但觀其賢之當祀與否不問人數之多寡唐三 百年只有一韓愈從祀不爲寡宋三百年濂洛諸賢 荐行從祀亦不爲多吾東方邈在海外歷三國至麗 :: 0078 :: 季從祀者不過若干人而國朝二百餘年得此五 賢臣之輩出豈非以聖神化隆光岳氣全致有文 明之盛而然也宣宗大王崇儒重道之誠遠出尋 常萬萬特命儒臣撰出儒先錄而常賜觀省大加 歎賞則四臣之見遇於異世者可謂至幸矣其時士 林顒若咸謂從祀之擧不朝則夕而淹延至此豈不 可惜而亦必有待於今日也至於李滉則遭際先 朝最見尊信無所不用其極卽今見存之人亦多目 覩睟盎光輝或有親被薰染仰之若泰山北斗景星 慶雲者容有極哉後生末學雖未能測知其踐履之 :: 0079 :: 何許造詣之何許而觀於律身行道之緖餘著書立 言之大要亦可驗其粹然一出於正實非漢唐諸儒 各有一才一藝者之所可比並也有此五賢臣道德 之美學問之功而不得與於從祀之列則未知何人 方可得以從祀也歷先朝以及當宁而猶不行其 應行之典則又未知等待何日而得見盛事乎經亂 以來士學迷方道脉墜地其尊尙先哲扶植斯文作 新一代風敎聳動萬人瞻聆之意百倍平昔伏願聖 明亟命擧行士氣幸甚國典幸甚大臣之意如此敢 啓傳曰依議施行禮曹啓曰以本曹草記五賢從祀 :: 0080 :: 事大臣收議入啓傳曰依議施行事判下矣擧國羣 情積年顒望之擧始成於聖上嗣服之初中外相賀 士氣百倍此實扶植世道挽回至治之一大機會也 臣等待罪典禮之地適逢曠世之盛事懽欣感激不 知所達從祀之典今當急速擧行第其節目未有考 據之例似當別爲祭文遣禮官致祭於各其家廟且 設祭告由於文廟造作位板分配於東西兩廡而或 以爲依頃日功臣配享之例造作位板送於家廟行 祭然後奉來爲當云其他曲折今方査考古事而此 兩欵未能以臆意擅斷議大臣定奪何如傳曰允禮 :: 0081 :: 曹啓曰傳敎云云議于大臣則完平府院君李元翼 左議政李恒福以爲遣官致祭且告聖廟然矣至於 造位板送家廟情文恐不然也且從祀大禮古必有 可考之文博考行之爲宜伏惟上裁領議政李德馨 領中樞府事尹承勳淸平府院君韓應寅以爲當此 盛禮應有遣官祭告之事至於造位板行祭于其家 廟而奉來則未知其必如此否也第難以臆斷唯在 該曹博考古禮處之今此之擧斯文盛事千載一時 兩廡從祀之列馬融杜預等已被中朝釐正貶黜 之人猶且因舊襲謬尙未有處置則誠欠事也依倣 :: 0082 :: 中朝成憲使耳目一新此亦其機宜令禮官察而行 之伏惟上裁右議政沈喜壽以爲從祀文廟之擧實 係道統盛典我國大事應行禮節不容草草爲之而 無舊例明文之的據誠爲可慮姑以事理推之則如 另具敎書致祭於各其家廟祭告端由於聖廟等事 决不可已至於造送位板行祭後奉來如配享功臣 之爲則事例相懸恐不然也今此五賢臣之家皆在 嶺南而李彦迪之家最爲絶遠似當急急馳遣祭官 以及來月之初而自此一邊造神板分配東西廡亦 於來月上丁之前則似甚便當此在該官博問故事 :: 0083 :: 商度而審處之也伏惟上裁大臣之意如此敢啓傳 曰知道令儒臣博考古禮參商擧行弘文館啓曰因 禮曹啓辭五賢從祀儀節定奪事令儒臣博考參商 擧行事傳敎矣臣等取考諸書則大學衍義補理宗 淳祐元年詔曰朕惟孔子之道自孟子之沒不得其 傳至我朝周敦頤張載程顥程頤眞見力踐深探聖 域千載絶學始有指歸中興以來又得朱熹精思明 辨表裏混融使中庸大學語孟之書本末洞澈孔子 之道益以大明于世詔令學宮列諸從祀以示崇奬 之意大明集禮後漢明帝幸闕里以大牢祀孔子及七十弟子章帝安帝因之此弟子從祀之始也唐貞 觀二十一年詔以左丘明以下二十一人從祀廟庭 開元八年以十哲爲坐像享于堂上七十子及二十 一賢並圖于壁宋元豐間又以荀况楊雄韓愈從祀 于左丘明等之次理宗淳祐初以周敦頤張載程顥 程頤朱熹從祀景定中復以張栻呂祖謙度宗咸淳 初又以司馬光邵雍元武宗至大問復以許衡從祀 大學衍義補正統中以宋胡安國蔡沉眞德秀元吳 澂從祀自漢唐以來至于皇明先儒從祀之擧無代 無之而從祀儀節別無現出處無從可考矣敢啓傳 :: 0085 :: 曰知道此啓辭下禮曹禮曹啓曰從祀節目儒臣已 爲博考入啓而其位板送于家廟與否則未有所考 焉此是儀節間事似無著載之處大臣收議咸以爲 遣官具敎書致祭于其廟且祭告端由於文廟爲當 云本曹之意亦只如此若依此爲之則上丁之前可 以造作位板陞配於聖廟而然須待祭告之後方爲 入廟則道里甚遠日勢未及莫重之禮恐不可忙迫 擧行也今此從祀之典實二百年所未有之擧扶植 道脉振作斯文國家之慶無大於此昔宋理宗淳祐 初以周程張朱從祀聖廟黜王安石從祀因頒詔天 :: 0086 :: 下今亦似當陳賀頒敎布告中外然臣等不敢擅便 議大臣定奪何如傳曰允禮曹啓曰傳敎云云議于 大臣則完平府院君李元翼領議政李德馨左議政 李恒福領中樞府事尹承勳右議政沈喜壽淸平府 院君韓應寅以爲頒敎則可矣陳賀似不當爲伏惟 上裁大臣之意如此敢啓傳曰依議事啓下向前五 賢臣致祭事曹郞廳二員分左右道受香下去祭物 措備執事差定待候今此賜祭非尋常例行者比凡 祭物各別精潔措備事豫先知委急急擧行事本家 知委施行 :: 0087 :: 八月二十日命遣禮曹正郞琴愷致祭先告從祀文 廟事由王若曰維萬曆三十八年歲次庚戌八月癸 酉朔二十日壬辰遣禮曹正郞琴愷致祭于贈議政 府右議政文獻公鄭汝昌之靈昔我成宗大王用 三代胄敎染一世于是皇多之士咸染聖人化作于 下時則有若宏弼洎卿魚川鳥雲于宗直門卿穉齔 有茂質端緖便露張天使業著說奬之而如朱溪 孝溫先覺斯文者稱誦闡揚以爲華叩其實則親甞 病甞矢甜苦占吉㐫頭觸柱見血禱以身親喪苫墓 側歠糜飮以旣三霜毁甚於是乎孝矣女弟貧不能 :: 0088 :: 家撤己屋以瓦之罄己財若僕若田與之不色難於 是乎悌矣是則特一事可略之抑有大焉自孟氏而 濂而洛而關而閩似續夫子道嫡其傳而我東藉父 師疇繇斯羅屬麗末豈少其人而至夢周鼻祖東方 學迺今尙之後無聞踵厥武者卿能先得之曾思書 務於眞實地嚌胾造閫不借一縷飾平生秉志度身 正出處時仕止一追古聖賢繩律之而自遜禀資後 人用力百他人其誨人亦諄至在所種化獲效殆不 可選紀於是乎眞儒矣蓋其時卽燕山生死人不以 其人罪不罪矧同門煽禍文墨以逮哉卿雖死當含 :: 0089 :: 笑入地庸何痛哉越我先王惄然傷伸其寃不足 褒贈之有加唯大學四學八路之疏未及副多士願 究其事實在予不德雖所述三書已火不見世卽錄 中考厥言行所謂質鬼神無疑者非耶玆命先告卿 家廟次涓吉登之文廟倂四賢參卿聖師下嗚呼享 廟重禮也小而鄕先生祭社大而勛賢臣享宗廟 君子猶榮之况夫子何如人耶陪諸壇廡同犧牢樽 俎鍾鼓之享于百代後當之者又何如人耶卓哉卿 於是乎百代師儒矣故玆敎示想宜知悉 九月初四日命列從祀于文廟西廡頒敎中外敎文 :: 0090 :: 王若曰天之生大賢也不偶實係消長之機德必得 常祀而無疑宜擧崇報之典玆用播告俾有依歸稽 我東國之偏荒罕傳正學之宗旨箕疇布敎雖識禮 義之方羅代蜚英未免詞藻之陋迄至麗季千載僅 見圃隱一人洪惟祖宗煕洽之辰允屬文明振作 之運有若金鄭趙李五臣者出眞得濂洛關閩諸子 之傳格致誠正之功其揆一也讒諂媢嫉之輩誰使 參之窮通有時縱負一世之屈是非自定何待百年 而知惟滉也遭遇兩朝其志則挽回三代立言垂 訓實是海東之考亭格非献規不愧河南之程氏肆 :: 0091 :: 並隆爵謚之贈顧未遑俎豆之儀在正德紀元始有 儒臣之陳請自先王初服屢見多士之抗章惟其 擧措之難輕豈云尊尙之不至逮予纂緖恨不同時 尙有典刑奈九原之難作其誰與享庶百世而爲師 爰答四十載顒望之情擬啓千萬世太平之業盖有 待而然也庸非天而誰歟玆於本年九月初四日以 贈議政府右議政文敬公金宏弼贈議政府右議政 文獻公鄭汝昌贈議政府領議政文正公趙光祖贈 議政府領議政文元公李彦迪贈議政府領議政文 純公李滉等五賢臣從祀于文廟之東西廡於戱聳 :: 0092 :: 動觀贍作新氣象是邦大夫賢者孰無尙友之心吾 黨小子斐然永存矜式之地故玆敎示想宜知悉 | 一蠹先生遺集卷之二 / 附錄 / 褒贈祀典 武宗毅皇帝正德二年 中宗大王二年 丁卯夏六月初十日。藝文館奉敎金欽祖,鄭忠梁,待敎李希曾,金瑛,檢閱權橃,李沫,鄭熊,尹仁鏡,尹止衡等。上疏以爲戊午修史之官。徒以私嫌。不顧公議。陰囑大臣。使之挑怒。子光從而唱之。同議密啓。終致大禍。是則陰欲掩過。而卒不得掩。更使暴揚於後世。累及於先王。一以毀萬世史家之法。一以啓人主喜殺之心。罪當不原。賞反及焉。臣等不勝痛悒。比來。皆以戊午之禍爲戒。士氣摧折。臣等非以馹孫爲惜。恐史家之法。從此盡廢。而萬世之公論。泯泯云云。大臣朴元宗等亦論啓。上乃命還給金宗直,金馹孫等七人家產。追奪李克墩爵。收尹弼商,盧思愼,韓致亨,柳子光等賞賜田宅。敎曰。辭連被罪者。果是曖昧。宜追贈其爵。因復先生及表沿沫,洪瀚茂豐副正摠,姜景敍,李守恭,鄭希良,鄭承祖,李宗準,李仁亨,崔溥,李黿,李胄,金宏弼,康伯珍,朴漢柱,任煕載,李繼孟,姜渾等官爵。實紀所載頗疏略。故因國朝寶鑑間補。 贈先生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尙瑞院正。 十二年 中宗大王十二年 丁丑二月。經筵官趙光祖啓曰。士習頹靡。莫大之患也。變化之道。豈無其方。如金宏弼,鄭汝昌褒奬。則可以扶植斯文矣。八月二日。上以廟見節儀等事。延訪群臣。金安老曰。金宏弼,鄭汝昌。被罪於廢朝。其子孫。不可以被誅人子孫例錄用也。當以賢者之後。而使其妻孥。得免於飢寒。可也。上顧謂鄭光弼,申用漑曰。於大臣意何如。光弼等同辭以對曰。操守踐實之人。褒奬可也。金詮曰。其人所學醇正。不趨名勢。得其正派之人也。學者以爲宗師。終以其學行而禍及之。甚可痛惜。李耔曰。金宏弼,鄭汝昌。學術醇正。東國無如此人。儒者知所向方。專賴二人之功也。古有贈職褒美之事。此何預於賢者乎。然有國者所當爲也。其子孫亦可錄用。傳于政院曰。金宏弼等子孫。錄用可也。六日。傳于政院曰。鄭汝昌,金宏弼。皆賢者也。其子孫錄用。不可如他被誅人子孫例。當刻別錄用。且褒贈官爵。存恤妻子等事。竝捧承傳。十日。臣光弼,臣用漑,臣詮,臣荊山,臣繼孟,臣瑭,臣繼商議。金宏弼,鄭汝昌。學術醇正。踐履篤實。一時學者所共推服。廢朝。以金宗直門徒被罪。當代愍其無辜。例加贈爵。已命錄用其後矣。但此等人。數世所罕出。沒齒之後。志於道學者。尙多慕之。例贈未足表異。加贈其爵。歲廩其妻。搜訪其子孫。錄用何如。伏惟上裁。二十日。鄭光弼,申用漑,高荊山,南衮,韓世桓議。儒臣鄭汝昌與金宏弼。生於一時。其相與切磋之益。如考亭之於南軒也。今旣奬異宏弼。而不及汝昌。則恐爲闕典。伏惟上裁。二十六日。鄭光弼等議。金宏弼,鄭汝昌。例贈都承旨。未足表異。請依前議施行。加贈崇品。子孫錄用。歲廩其妻何如。啓依允。贈先生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 禮曹報議政府。金宏弼,鄭汝昌。所居鄕講道之處。置立祠宇。春秋仲月。官爲致祭何如。 十月二十八日。議政府啓金宏弼,鄭汝昌。未有聚弟子講道之所。強指某處爲講道之所。置立祠宇。似非其實。各於家廟。春秋仲月。官爲致祭何如。同副承旨柳雲。次知啓依允。金宏弼。家在玄風。鄭汝昌。家在咸陽。各其官鄕校及境內窮村僻巷。掛榜知委。使學者盡知國家褒賢重道之意。一變舊習之陋。專尙性理之學事。本道袳文。 世宗肅皇帝嘉靖三十一年 明宗大王七年 壬子。士林建書院于灆溪。姜介菴 翼,與朴公 承任,盧徙菴 祼,鄭梅村 復顯,林灆溪 希茂 議曰。吾鄕乃一蠹先生之鄕。而先生之歿。已至五十年。尙無建院立祠之擧。實吾鄕之羞。咸曰然。乃創立書院。是時也。我東方書院。惟周武陵設竹溪之外。無有焉。見聞未熟。不無異議。介庵毅然不動。決意擧役。鄕之儒士。爭致米穀。隣邑之來助者亦衆。郡守徐侯。盡心以助。旣立講堂。而徐侯遞去。時又不稔。故堂未瓦而遂停其役。殖餘財以待贍。而期訖功。姜介庵年譜。下同。 四十五年 明宗大王二十一年 丙寅秋七月。宣額灆溪。蓋自一蠹,寒暄被禍之後。雖有正德丁丑昭雪之典。而當時大臣議。以爲無立祠之地。令各於家廟。春秋致祭。今旣立祠。則當致祭於院。而擅陳俎豆。不合禮法。故陳疏丏請。不知其幾。而世罕好德之賢。未遇轉達之期。幸賴金侯宇弘來守。朴公啓賢觀風。始得上達宣額。令春秋致祭。其間周旋之際。玉溪盧公禛,九拙梁公喜,靑蓮李公後白。皆有誠焉。後肅宗元年乙卯。配鄭桐溪蘊于西序。十五年己巳。配姜介菴翼于東序。 穆宗莊皇帝隆慶二年 宣祖大王元年 戊辰。館學儒生趙憲等。疏請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彥迪從祀文廟。累月陳請。自是之後。每年陳疏。或新榜入泮之後。率新生員陳疏。逐榜籲懇。以爲常規。國朝寶鑑 六月。天使來問通事曰。汝國。乃文獻之邦。學術如程朱者有之乎。對曰。有之。問姓名爲誰。必有著文行於世矣。吾欲知人才之盛。學問之高。七月。臣希春與奇大升,盧守愼。特被選。議以東方十大儒爲對。卽禹倬,鄭夢周,吉再,金宗直,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彥迪,金安國,徐敬德也。柳眉岩經筵日記。下二條同。 四年 宣祖大王三年 庚午四月二十日。副提學柳希春。奉敎搜訪金,鄭,趙三先生著述。是時館學儒生等。累上疏章。乞崇奬儒賢。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彥迪從祀文廟。以爲明士趨養元氣之地。末云。國家自己卯斲喪之後。又經乙巳之禍。國是未定。士氣摧折。爲學尙懷於疑懼。檢身猶戒乎駭異。伏願殿下。更加重道之誠。益隆崇儒之禮。許以四臣從祀文廟。一以追報其功。一以勸勵斯世。則士林知有所宗。而學術皆出於正矣。辭懇意正。三復歎賞。仍有是敎。五月四日。進陳曰。頃承命搜訪金宏弼,鄭汝昌,趙光祖等著述。金宏弼疏則李忠綽得之。其他每人之作。臣各得數首。蓋此人等。皆遭史禍。故所著散亡零落。所得至小。臣於卷末。添錄行實行狀。所作雖小。記其行實雖略。觀此可知有德有學。興起斯文之功矣。八日。與李仲虎,申湛,宋應漑,柳成龍。同校正入啓。十五日。陳進曰。金鄭趙文字進入矣。請御覽後還降。臣略載李彥迪文。正書更入。自上命印出。頒賜公卿大夫。則人皆知四賢之實。 神宗顯皇帝萬曆二年 宣祖大王七年 甲戌正月二十三日。啓曰。儒先錄。久欲印進。而以金宏弼,鄭汝昌贈諡。然後竝錄爲計。金宏弼行狀則已呈於該曹。獨鄭汝昌則子孫一門。無能具行狀以呈者。其實汝昌之行狀事實。已具於儒先錄。乞命該曹。考儒先錄而爲之。不勝幸甚。二月二十四日。政院以昨日朝講。諸經筵官所建白事無發落。取稟。臣希春所啓。校書著作趙憲。質正官改差。使監校朱子語類鄭汝昌儒先錄所載行狀。遣奉常寺議諡。上特從之。 三年 宣祖大王八年 乙亥。賜諡文獻。道德博聞曰文。聰明睿哲曰獻。 七年 宣祖大王十二年 己卯。鶴峯金 誠一 以巡撫使。倡率多士。以爲河東。先生之貫鄕。創立永溪書院。設俎豆焉。後追配鶴峯。金鶴峯集 十年 宣祖大王十五年 壬午。安陰縣鄕祠堂成。葛川林薰書其碑。略曰。先生於弘治甲寅。出宰于縣。居五年而罹史禍。五年之間。施仁政。興文敎。使吾民心悅誠服。追慕先生而立祠。後配享林葛川,林瞻慕堂,鄭桐溪。顯廟朝。賜額龍門。林葛川集 十一年 宣祖大王十六年 癸未。鶴峯金 誠一 知羅州。追慕五賢。建景賢書院于州西大谷洞。未訖而任允臣來代踵成。設俎豆。以爲士子藏修之所。金鶴峯集 十四年 宣祖大王十九年 丙戌。寒沙姜 大遂 與陜川章甫。慕先生及寒暄而建書院于陜川冶爐縣。設俎豆焉。顯廟庚子。賜額伊淵。姜寒沙集 三十八年 光海二年 庚戌。館學及八道儒生。臺諫政府。交章共請從祀文廟。七月十八日。依允。命先生與金宏弼,趙光祖,李彥迪,李滉幷列從祀。八月十三日。到禮曹行移本道關內。去六月一日。兩司合啓。臣等將五賢從祀一事。伏閤籲呼。已踰旬月。而兪音尙閟。不勝悶鬱焉。自在先朝。館學儒生。連章瀝血者。今幾年乎。蓋道學如天之有日星。一日不明。則將無以扶國家精神命脈。故先王深知道學之當尊。公議之難遏。以待後日爲敎。而今我聖上。亦於三年之內。答儒生疏曰。上下之間。誠意旣通。則先王未遑之典。庶見擧行於今日矣。小大胥慶。翹首以待。而聖批一向牢拒。臣等切惑焉。從祀與否。於五賢臣學問功德。固無損益。而崇報之擧。尙闕於拭目之日。豈非明時之一大欠乎。尊尙之得失。而斯文之盛衰係焉。尤不可少緩。請先正臣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彥迪,李滉。竝命從祀文廟。以答輿望。答曰。議大臣以啓。禮曹啓曰。傳敎云云。議于大臣。則完平府院君李元翼。以爲臣前於下問時。已盡陳達。今無他議。惟在聖上斷然行之。更何待乎。伏惟上裁。領議政李德馨。以爲吾東方道學。歷新羅,高麗以來。罕見爲士子矜式。逮我聖朝。始有五賢臣者出。而濂洛關閩之遺緖。得大明于世。其尊尙崇報之擧。當趁卽議施。而遷延至今。實盛世之闕典也。在昔薛聰,崔致遠。非醇於道德之學。而亦以一時之功。與於從祀之列。乃如五賢臣。而尙不擧論。此士論之日激。而國言之僉同者也。今無他議。惟在聖明斷然行之。伏惟上裁。左議政李恒福。以爲五臣之事。臣嘗於榻前。適承聖問。已盡陳之矣。言不必複。雖申前說。豈盡如面陳之詳乎。今則士論已定矣。國言已同矣。所未行者。只是聖上一言耳。聖上旣知其然。則尙誰俟乎。伏惟上裁。領中樞府事尹承勳,淸平府院君韓應寅。以爲五賢臣從祀一事。士論已定。國言亦同。惟在聖上斷然行之而已。伏惟上裁。右議政沈喜壽。以爲朝家大小論議。豈無皁白之異同者。而至於五賢臣從祀文廟之擧。夫孰有異議之人也。臣等。在聖上嗣服之初。因草野陳疏。聯名獻議以不可不速行之意。而臣於上年春。幷陳此事於箚辭中矣。今者。中外韋布之士及耳目論思之官。瀝血封章。不謀同辭。此豈人力之所可致者哉。殿下亦豈不知五賢臣道德學問之懿。不容無崇報矜式之典。而似若有遲難之意者。非但愼重其莫大之事。亦未必不以五人一時幷擧。爲近於繁夥歟。是則大不然。天之生大賢也。疏數無常。從祀文廟之擧。亦隨以多寡焉。但觀其賢之當祀與否。不問人數之多寡。唐三百年。只有一韓愈從祀。不爲寡。宋三百年。濂洛諸賢。荐行從祀。亦不爲多。吾東方邈在海外。歷三國至麗季。從祀者不過若干人。而國朝二百餘年。得此五賢臣之輩出。豈非以聖神化隆。光岳氣全。致有文明之盛而然也。宣祖大王崇儒重道之誠。遠出尋常萬萬。特命儒臣。撰出儒先錄。而常賜觀省。大加歎賞。則四臣之見遇於異世者。可謂至幸矣。其時士林顒若。咸謂從祀之擧。不朝則夕。而淹延至此。豈不可惜。而亦必有待於今日也。至於李滉。則遭際先朝。最見尊信。無所不用其極。卽今見存之人。亦多目覩睟盎光輝。或有親被薰染。仰之若泰山北斗景星慶雲者。容有極哉。後生末學。雖未能測知其踐履之何許。造詣之何許。而觀於律身行道之緖餘。著書立言之大要。亦可驗其粹然一出於正。實非漢,唐諸儒各有一才一藝者之所可比幷也。有此五賢臣道德之美。學問之功。而不得與於從祀之列。則未知何人方可得以從祀也。歷先朝以及當宁。而猶不行其應行之典。則又未知等待何日而得見盛事乎。經亂以來。士學迷方。道脈墜地。其尊尙先哲。扶植斯文。作新一代風敎。聳動萬人瞻聆之意。百倍平昔。伏願聖明。亟命擧行。士氣幸甚。國典幸甚。大臣之意如此。敢啓。傳曰。依議施行。禮曹啓曰。以本曹草記五賢從祀事。大臣收議入啓。傳曰依議施行事判下矣。擧國群情積年顒望之擧。始成於聖上嗣服之初。中外相賀。士氣百倍。此實扶植世道。挽回至治之一大機會也。臣等待罪典禮之地。適逢曠世之盛事。歡欣感激。不知所達。從祀之典。今當急速擧行。第其節目。未有考據之例。似當別爲祭文。遣禮官致祭於各其家廟。且設祭告由於文廟。造作位板。分配於東西兩廡。而或以爲依頃日功臣配享之例。造作位板。送於家廟行祭。然後奉來爲當云。其他曲折。今方査考古事。而此兩款。未能以臆意擅斷。議大臣定奪何如。傳曰允。禮曹啓曰。傳敎云云。議于大臣。則完平府院君李元翼,左議政李恒福。以爲遣官致祭。且告聖廟。然矣。至於造位板送家廟。情文恐不然也。且從祀大禮。古必有可考之文。博考行之爲宜。伏惟上裁。領議政李德馨,領中樞府事尹承勳,淸平府院君韓應寅。以爲當此盛禮。應有遣官祭告之事。至於造位板。行祭于其家廟而奉來。則未知其必如此否也。第難以臆斷。惟在該曹博考古禮處之。今此之擧。斯文盛事。千載一時。兩廡從祀之列。馬融,杜預等。已被中朝釐正貶出之人。猶此因舊襲謬。尙未有處置則誠欠事也。依倣中朝成憲。使耳目一新。此亦其機。宜令禮官察而行之。伏惟上裁。右議政沈喜壽。以爲從祀文廟之擧。實係道統盛典。我國大事。應行禮節。不容草草爲之。而無舊例明文之的據。誠爲可慮。姑以事理推之。則如另具敎書。致祭於各其家廟。祭告端由於聖廟等事。決不可已。至於造送位板。行祭後奉來。如配享功臣之爲。則事例相懸。恐不然也。今且五賢臣之家。皆在嶺南。而李彥迪之家。最爲絶遠。似當急急馳遣祭官。以及來月之初。而自此一邊造神板。分配東西廡。亦於來月上丁之前。則似甚便當。此在該官博問古事。商度而審處之也。伏惟上裁。大臣之意如此。敢啓。傳曰。知道。令儒臣博考古禮。參商擧行。弘文館啓曰。因禮曹啓辭。五賢從祀儀節定奪事。令儒臣博考參商擧行事傳敎矣。臣等取考諸書。則大學衍義補。理宗淳祐元年。詔曰。朕惟孔子之道。自孟子之沒。不得其傳。至我朝周敦頤,張載,程顥,程頤。眞見力踐。深探聖域。千載絶學。始有指歸。中興以來。又得朱熹。精思明辨。表裏混融。使中庸,大學,語,孟之書。本末洞徹。孔子之道。益以大明于世。詔令學宮。列諸從祀。以示崇奬之意。大明集禮。後漢明帝幸闕里。以大牢。祀孔子及七十弟子。章帝,安帝因之。此弟子從祀之始也。唐貞觀二十一年。詔以左丘明以下二十一人從祀廟庭。開元八年。以十哲爲坐像。享于堂上。七十子及二十一賢。竝圖于壁。宋元豐間。又以荀況,揚雄,韓愈。從祀于左丘明等之次。理宗淳祐初。以周敦頤,張載,程顥,程頤,朱熹從祀。景定中。復以張栻,呂祖謙。度宗咸淳初。又以司馬光,邵雍。元武宗至大間。復以許衡從祀。大學衍義補。正統中。以宋胡安國,蔡沈,眞德秀。元吳澄從祀。自漢唐以來。至于皇明。先儒從祀之擧。無代無之。而從祀儀節。別無現出處。無從可考矣。敢啓。傳曰。知道。此啓辭下禮曹。禮曹啓曰。從祀節目。儒臣已爲博考入啓。而其位板送于家廟與否。則未有所考焉。此是儀節間事。似無著載之處。大臣收議。咸以爲遣官具敎書。致祭于其廟。且祭告端由於文廟爲當云。本曹之意。亦只如此。若依此爲之。則上丁之前。可以造作位板。升配於聖廡。而然須待祭告之後。方爲入廟。則道里甚遠。日勢未及。莫重之禮。恐不可忙迫擧行也。今此從祀之典。實二百年所未有之擧。扶植道脈。振作斯文。國家之慶。無大於此。昔宋理宗淳祐初。以周,程,張,朱。從祀聖廟。黜王安石從祀。因頒詔天下。今亦似當陳賀頒敎。布告中外。然臣等不敢擅便。議大臣定奪何如。傳曰允。禮曹啓曰。傳敎云云。議于大臣。則完平府院君李元翼,領議政李德馨,左議政李恒福,領中樞府事尹承勳,右議政沈喜壽,淸平府院君韓應寅。以爲頒敎則可矣。陳賀似不當爲。伏惟上裁。大臣之意如此。敢啓。傳曰。依議事啓下。嚮前五賢臣致祭事。曹郞廳二員。分左右道。受香下去。祭物措備。執事差定待候。今此賜祭。非尋常例行者比。凡祭物。各別精潔措備事預先知委。急急擧行事本家知委施行。 八月二十日。命遣禮曹正郞琴愷致祭。先告從祀文廟事由。 九月四日。命列從祀于文廟西廡。頒敎中外。 是歲。牙山章甫。爲五賢建仁山書院。配以奇服齋 遵,李土亭 之菡, 諸賢。牙山誌 四十年 光海四年 壬子。重建灆溪書院。先是。宣廟丁酉兵燹。鄕儒鄭慶雲與陳慶胤。懼禍將及院。移安位牌以免禍。越三年庚子四月。士林權奉祠宇于院北蓮花山。後六年乙巳三月。又移奉于羅村。至是還建舊址。鄭慶雲日記 四十四年 光海八年 丙辰。愚伏鄭 經世 與士林。創書院于尙州治東。幷享先生及鄭圃隱,金寒暄,李晦齋,李退溪。後配柳西厓,盧蘇齋,鄭愚伏。肅廟二年丙辰。賜額道南。鄭愚伏集 毅宗烈皇帝崇禎三十二年 孝宗大王十年 己亥。居昌士林。追慕先生及寒暄兩先生。建書院于山際洞。配鄭桐溪。顯廟朝。賜額道山。景賢錄 崇禎五十七年 肅宗大王十年 甲子。關北士林。追慕先生之德。建書院于涪溪。配以服齋奇 遵,淸陰金 尙憲,桐溪鄭 蘊,文節公柳 希春,文肅公鄭 曄,忠貞公鄭 弘翼,樂靜趙 錫胤,市南兪 棨 八賢。翌年丙寅。因院儒金鼎昌,朱榏等上疏。賜額鍾山。遣禮官致祭。 一百十六年 英宗大王十九年 癸亥。重刊實紀。 先生遺文。逸於史禍。寒岡鄭文穆公。甚惜其言行之無傳。與先生曾孫秀民。遂收拾亡失之餘。爲一卷。刊行于世。旅軒張文康公。跋其後。是年重刊。陶庵李文正公。又修正幷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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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鄭汝昌)
[문과] 성종(成宗) 21년(1490) 경술(庚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7위(10/10)
[인물요약]
UCI | G002+AKS-KHF_13C815C5ECCC3DB1450X0 |
자(字) | 백욱(伯勗) |
호(號) | 일두(一蠹) |
시호(諡號) | 문헌(文獻) |
생년 | 경오(庚午) 1450년 (세종 32) |
졸년 | 갑자(甲子) 1504년 (연산군 10) |
향년 | 55세 |
합격연령 | 41세 |
본인본관 | 하동(河東) |
거주지 | 미상(未詳) |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 10명 [甲1‧乙2‧丙7] |
전력 | 참봉(參奉) |
관직 | 한림(翰林) |
관직 | 현감(縣監) |
문과시제 | 책문(策問):북련야인남빈도이제적안민지책(北連野人南濱島夷制敵安民之策) |
타과 | 1483년(성종 14)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20위 |
기타 | 배문묘(配文廟) 오현지일(五賢之一) 점필문인(佔畢門人) 무오적 갑자화(戊午謫甲子禍) 동계찬갈(桐溪撰碣)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육을(鄭六乙)
[조부(祖父)]
성명 : 정복주(鄭復周)
[증조부(曾祖父)]
성명 : 정지의(鄭之義)
[외조부(外祖父)]
성명 : 최효손(崔孝孫)(주1)
본관 : 경주(慶州)【補】
[처부(妻父)]
성명 : 이말생(李末生)
봉호 : 도평군(桃平君)
본관 : 전주(全州)【補】
[안항(鴈行)]
제(弟) : 정여유(鄭汝裕)【補】
제(弟) : 정여관(鄭汝寬)[進]【補】(주2)
[주 1] | 외조부 : 『하동정씨문헌공파보(河東鄭氏文獻公派譜)』 卷之1, [5쪽]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 |
[주 2] | 안항 : 『하동정씨문헌공파보(河東鄭氏文獻公派譜)』 卷之1, [5~7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四(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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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대년 | 성종(成宗) 21 |
시험일 | 1490년 11월 08일 |
합격자발표일 | 1490년 11월 09일 |
시험종류 | 별시(別試) |
방목정보 | 방목명 : 경술21년별시방(庚戌二十一年別試榜) 표제명 : 國朝文科榜目 권수제 : 國朝文科榜目卷之四 |
시험장소 |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 |
시험문제 | 책문(策問) 북련야인남빈도이제적안민지책(北連野人南濱島夷制敵安民之策) |
문과장원 | 장원급제 : 송식(宋軾) 합격인원 : 10명 |
무과장원 | 장원급제 : 김근명(金近明) 합격인원 : 22명 |
시험실시이유 | 별시이다. 명나라 황태자(皇太子)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실시한 시험이다. |
특이사항 | 규백육본‧규귀중본‧장서각본에 시험 실시 이유가 “황태자탄생경(皇太子誕生慶)”으로 나와 있다. 명나라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이다. 무과는 8일에 모화관에서 실시하여 당일 합격자 발표를 하였고, 문과는 8일에 인정전에서 전시를 실시하고, 다음날인 9일에 출방하였다. 성종실록에 문과에서 송식(宋軾) 등 10명을 뽑았다고 나온다. |
출전방목명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 106]) |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太學社, 1984.)-[규백육본]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國會圖書館, 1971.)-[규귀중본]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국중도본] 『국조방목(國朝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38])-[장서각본] 『성종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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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47권, 성종 21년 11월 9일 정해 3번째기사 1490년 명 홍치(弘治) 3년
문과에서 송식 등을 선발하다
○取文科宋軾等十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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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57권, 성종 22년 9월 12일 을유 1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문신을 모아 ‘치국여팽소선(治國如烹小鮮)의 논(論)’을 제술하게 하다
○乙酉/命會文臣於仁政殿, 製治國如烹小鮮論。 弘文館博士金勘居首, 成均館典籍宋軾次之, 弘文館副修撰權五福又次之。 命賜勘馬一匹, 軾虎皮一張, 五福弓一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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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鄭汝昌)
[진사]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20위(25/100)
[인물요약]
UCI | G002+AKS-KHF_13C815C5ECCC3DB1450X0 |
자(字) | 백욱(伯勗)【補】(주1) |
호(號) | 일두(一蠹) |
시호(諡號) | 문헌(文獻)【補】(주2) |
생년 | 경오(庚午)【補】(주3) 1450년 (세종 32) |
졸년 | 갑자(甲子)【補】(주4) 1504년 (연산군 10) |
향년 | 55세 |
합격연령 | 34세 |
본인본관 | 하동(河東) |
거주지 | 미상(未詳) |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
전력 | 전력부위(展力副尉) |
타과 | 1490년(성종 21) 경술(庚戌) 별시(別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7위 |
기타 | 문묘배향(文廟配享) 오현(五賢)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육을(鄭六乙)
증직 : 증가정대부 한성부좌윤(贈嘉靖大夫漢城府左尹)
관직 : 행(行)
[처부(妻父)]
성명 : 이말생(李末生)【補】(주5)
봉호 : 도평군(桃平君)
본관 : 전주(全州)【補】
[안항(鴈行)]
형(兄) : 정여유(鄭汝裕)【補】(주6)
제(弟) : 정여관(鄭汝寬)[進]
[출전]
『성화19년계묘식2월○일생원진사방목(成化十九年癸卯式二月○日生員進士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 1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