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열차
홍진우 작사, 추가열 작곡, 김연자 노래
밤 열차는 미련 없이 떠나갑니다
뜨거운 눈물 흘려야 하는 사랑
빈 가슴 부여잡고 차창에 기대어
밤이슬 내리는 창밖을 보며
아쉬움에 자꾸만 뒤돌아보는데
기적소리 울음소리
나를 나를 나를 울리네
이제 가면 못 볼 사랑 보고플 사랑
다시 오면 안 됩니까 말을 해 줘요
밤 열차는 미련 없이 떠나가는데
~♩♪♬ ~ ♩♪♬ ~
밤 열차는 미련 없이 떠나갑니다
뜨거운 눈물 흘려야 하는 사랑
빈 가슴 부여잡고 차창에 기대어
밤이슬 내리는 창밖을 보며
아쉬움에 자꾸만 뒤돌아보는데
기적소리 울음소리
나를 나를 나를 울리네
이제 가면 못 볼 사랑 보고플 사랑
다시 오면 안 됩니까 말을 해 줘요
밤 열차는 미련 없이 떠나가는데
다시 오면 안 됩니까 말을 해 줘요
밤 열차는 미련 없이 떠나가는데
22시 47분!
오래전에 안동역에서 출발하는 청량리 행 밤 열차가 출발하는 시각이다.
[밤열차]에 관한 추억은 사람마다 다양할 것이다.
안동에서 동쪽으로 40여km 떨어진 곳이 청송군 진보면이다.
그곳은 교직 생활 첫 발령지였던 금릉군(김천)에 거주하기 전까지 내가 살던 곳이었다.
진보에서 서울로 가려면 당시에는 이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밤새 달려서 ‘청량리’에 도착하면 먼동이 터 온다.
내가 34개월간 군 생활을 한 곳은 강원도 화천이다.
휴가 후에 귀대를 하기 위하여 진보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버스를 타고 안동역에 도착한 후 대합실에서 밤 열차를 기다리던 일은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도로 교통이 발달한 지금이야 귀대를 하기 위하여 이틀씩이나 까먹는 일이 없어졌지만, 70년대 초반인 당시만 해도 귀대 하루 전에 출발하여 밤 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려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강원도 화천까지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밤열차]는 김연자가 2016년에 발표한 곡이다.
이별을 하는 장면을 그린 곡으로 21세기의 노래지만 50년대의 복고풍 곡조로 중·장년들의 많은 호응을 받은 곡이다.
제목은 50년대 느낌이지만 ‘추가열’의 젊은 감성이 녹아있는 이 노래는 ‘디스코 트로트’라는 멜로디가 흠뻑 녹아있다.
‘이별’이라는 모티브는 50년대와 다를 바 없지만 리듬은 딴 판이다.
노래 속 화자는 출발을 앞둔 밤 열차를 타고 연인과의 애절한 이별을 앞두고 있다.
차창밖에는 밤이슬이 내리고 있다.
이윽고 기적이 울리고 애타는 연인들의 사연을 뒤로 하고 무심한 열차는 플랫폼을 서서히 빠져나간다.
우리가요 중에서 열차를 배경으로 한 노래는 남인수의 ‘무정열차’, 손인호의 ‘호남선 밤열차’, 김월성의 ‘만포선 밤열차’, 최동준의 ‘밤열차’, 이인권의 ‘향수 열차’, 남강수의 ‘무정한 밤열차’, 남일해의 ‘밤열차’ 등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dLQRUdi4hQ
- '밤열차' 김연자 원곡노래 -
☞ 김연자는?
1959년 광주 출생이다.
1974년 TBC [전국가요 신인스타쇼]에서 우승을 한 후 김학송의 ‘말해줘요’라는 곡으로 데뷔를 한다.
이어서 1977년에는 ‘여자의 일생’이라는 곡으로 일본에서도 활동을 한다.
이 후 ‘수은등’, ‘진정인가요’등의 노래를 발표했으며 1988서울올림픽 주제가인 ‘아침의 나라’를 발표하여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아침의 나라에서'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dxbgtj2jJc
김연자는 20년 동안 일본에서 활동했다.
“일본에서는 관객들이 조용히 듣는 편이다.
그래서 예쁜 드레스를 입고 공연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오니까 다들 자기 노래처럼 즐기면서 흥겹게 따라서 불렀다!”
라며 한국과 일본 팬들의 다른 리액션을 방송에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결국
“흥겨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하여 예쁜 드레스에서 바지로 의상을 교체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스페인이다. 흥이 참으로 많은 국민이다!”
라고 말했다.
어릴 때는 큰집과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할머니가 한 집에서 아이가 두 명이 태어나면 안 된다며 둘째인 김연자의 엄마에게 밖에서 낳으라고 해서 마당에서 출산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했는데 5~6세 때부터 매일 손님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단골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연자야 노래한번 불러라!”
하고 시켰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발소 영업이 끝난 후에 가게 안에서 1시간 동안 전축으로 이미자 노래를 틀고 연습하라고 한 뒤 나갔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큰엄마가 ‘광주공원’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나가라며 참가금 3백 원을 줬는데 당시 그녀의 용돈은 10원이었다.
‘어린 나이에 유행가를 부르면 안 되겠지?’
라는 생각에서 동요를 불렀다.
결과는 떨어져서 참가 상으로 소주 1병을 받았다고 한다.
참가금으로 큰돈을 줬는데 상을 못 탔다고 큰엄마에게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요교실 학원에서 돈이 없다고 말하니 무료로 다니게 해줘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다녔다.
또래 친구들은 동요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트로트를 불렀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광주의 대표적인 노래 대회였던 <벚꽃 노래 자랑>에 친구 정우순과 함께 출전했다.
당시 유명한 ‘펄 시스터즈’가 둘이서 똑같은 옷을 입고 노래하니까 똑같은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시계를 전당포에 맡긴 돈으로 맞춰준 옷을 입고 출전해서 인기상을 탔다.
<벚꽃 노래 자랑>은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던 프로그램이라 많은 광주시민들이 시청을 했다.
수피아여자중학교에 입학을 하니 노래자랑에 나왔던 그녀를 알아보는 학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에는 오락 부장이었다.
선생님들이 자주 교단에 불러내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인 1973년에는 열흘 정도 공연장에 따라다니느라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다시 학교에 왔더니 정학을 당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차라리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가서 가수를 하는 게 어떠냐며 열차표를 사주었다.
엄한 아버지가 무서워 거역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김연자는 홀로 상경했다.
서울에 상경한 그녀는 미아리의 작은아버지 집에서 생활했다.
좁은 집에서 작은아버지 내외와 사촌동생 4명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주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가수 유망주였으나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작은 아버지와 오디션을 보러 다녔는데 모두 떨어졌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와 동생들이 상경하여 단칸방에서 사글세 살이를 시작했다.
옆집에는 형편이 넉넉한 수양엄마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매일 전축을 듣고 노래 연습을 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동향 출신의 선배 가수 ‘이영숙’의 소개로 청계천에 있던 <오아시스 레코드> 사장에게 오디션을 받았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부른 김연자는 드디어 합격한다.
그러나 합격은 했지만 수입이 없는 가난한 김연자의 처지를 안 사장은 회사 3층 공장에서 월급 2만 원에 카세트테이프 만드는 일을 시킨다.
일하다가 1시간은 연습실에서 연습을 했는데 작곡가 김학송에게 노래를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평론가가 어느 카바레에 신인가수가 필요하다며 오디션을 권했다.
낮에는 하던 일을 하면서 밤엔 나이를 18세로 속이고 비어홀과 카바레 등 3곳의 밤무대에서 월 6~7만 원을 받으며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손님이 많은 시간엔 유명 가수가 노래하고 무명인 그녀는 한가한 시간에 노래를 했다.
이렇게 해서 가장 역할을 하면서 두 동생을 대학에 다닐 수 있게 하였다.
어릴 때는 엄한 아버지를 원망도 했지만 오늘이 있게 해준 아버지께 항상 고마워한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 김연자 북한공연 에피소드
김연자는 ‘2001년’과 ‘2002년’ 2년 연속 북한으로 초청을 받았다.
1) 2001년 1차 방북 공연
<제19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악단을 포함해 30여명이 북한에 갔다.
4월 7일 평양 청년중앙회관(2,000명 수용)에서 첫 공연을 한 후 4월 9일 평양 국제영화제회관(2,500명수용)에서 2차 공연을 했다.
4월 11일에는 함흥에서 당 간부 500명과 김정일 앞에서 2시간 공연을 했으며 종료 후에는 김정일이 참여한 환영만찬회가 있었다.
이 공연은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원래 평양 공연을 3회 하기로 했다.
첫 공연과 두 번째 공연도 똑같은 회관에서 하기로 했다.
두 번째 공연 후 뒤풀이를 하는데 갑자기 높은 분이 나에게
‘열차를 타고 12시에 출발해야 한다.
공연하러 가야 하니 무거운 짐은 호텔에 두고 악기랑 의상 등 간단히 쇼를 할 짐만 빨리 챙기라!
이유를 묻거나 따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짐을 챙겨 4월 9일 밤 12시에 열차에 탔다.
탑승을 하니 커튼을 다 내리고 밖에는 절대로 보면 안 된다고 했다.
좋은 침대도 있고 시설이 엄청 좋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김정일 위원장 전용 열차였다.
밤새 달려 다음날 아침 8시 30분쯤에 도착해 보니 함흥이었다.”
도착한 곳은 대궐같이 엄청나게 큰 대문이 있는 해변 가 집이었다.
보초병들이 거대한 문을 열자 바로 거기에 김정일이 서 있었다.
엉겁결에 외쳤다.
“와! 진짜다! 진짜, 진짜가 계신다!”
김정일이 문 앞에서 5분이나 누구를 기다린 건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현관 앞에 서 있던 김정일은 손을 내밀며
“20년 동안 좋아했던 가수를 비로소 만나게 되어 기쁩네다!”
라고 말했다.
인민복 차림에 생각보다 건강해 보였고 말투는 TV에서 보던 대로 힘차고 카랑카랑했다.
11일 오후 3시쯤 공연을 위하여 함흥의 한 군부대 접견실로 갔다.
오후 5시부터 90분 동안 대회의장을 임시무대로 만든 곳에서 공연을 했다.
객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즉석인터뷰를 하는 등 북한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무대였다.
앞좌석에 앉은 김 위원장은 마치 심사위원 처럼 미동도 않은 채 그녀의 공연을 지켜봤다.
환갑인 김정일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더니 김정일이 몹시 부끄러워했다.
“굉장히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정하더군요.
공연 전에 40분 동안 같이 얘기를 나누다가 공연 후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함께 저녁을 먹었어요.
나는 김 위원장의 오른쪽에 앉았다.
내가 공연 후엔 너무 지쳐 잘 먹지 못한다고 하자 그는 천천히 먹으라며 음식을 하나하나 놓아 주기도 했어요!”
라고 한다.
김연자의 [메들리 테이프]를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옛 가요를 묶어 발표한 메들리는 '아버지(김일성)와의 추억이 담겨있다. 82년도쯤 아버지와 같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정일은 81년에 발매된 김연자의 '노래의 꽃다발' 메들리를 들은 후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 20년 동안 김연자의 노래를 사랑했다고 했다.
김정일이
“김연자가 노래를 잘 한다!”
는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북한공연을 결심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처음엔 무서웠다.”
그러나
“북한에도 어르신들이 많은데 그분들에게 효 콘서트를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방북을 결심했다!”
라고 했다.
그래서 공연할 곡으로 ‘타향살이’, ‘불효자는 웁니다’, ‘눈물젖은 두만강’, ‘홍도야 울지마라’, ‘대지의 항구’등 흘러간 노래를 선곡했다.
당시 북한에선 '눈물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이 전부 금지곡이었다.
그런데 김연자의 방북을 계기로 금지곡 60여곡이 해제되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숨어서 몰래 노래를 하고 그랬는데 이듬해 2차 방문을 해보니 해제된 금지곡 들이 동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선곡한 노래들은 북한에서도 몰래 부르든 노래여서인지 반응이 참 좋았다.
김연자의 공연은 김정일이 공개를 했다.
4월 12일 조선중앙TV, 라디오방송인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이 녹화를 하여 방송을 했다.
이전까지 남한 가수가 북한에서 공연한 것은 TV로 중계되지 않았다.
김정일은 농담을 잘했다.
“녹두부침 같은 맛있는 음식을 남한에서는 왜 이상하게 ‘빈대떡’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
라고 해서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그는 또한
“북한 노래는 성악식 발성으로 통일돼 있어 남한의 트롯과 같은 창법이 그리워!”
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이수미의 '두고온 고향',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 애창곡이고 '찔레꽃', '개나리처녀' 등도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남쪽 가수들 노래는 곡이 너무 빨라 뭘 노래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전자음악을 대중적으로 유행시킨 미국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판하면서 이젠 그것도 싫증났으니 생음악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고 했다.
2) 2002년 2차 방북 공연
4월 6일 4.25문화회관(6,000명 수용)에서 공연 후 4월 8일에는 봉화예술극장(2,000명 수용)에서 공연을 했다.
3차 공연은 4월 10일 만수대 예술극장(국립영빈관극장)에서 하였다.
김연자는 '반갑습니다’(북한가요)로 공연을 시작해서 여러 곡의 민요와 민요풍의 노래를 불렀다.
김정일은 김연자 일행과 만찬을 함께 했으며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용순 조선로동당 대남비서 등 고위간부들이 만수대예술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이 공연은 2002년 4월 10일에 북한에서 방송이 되었다.
“2001년에는 우리 노래 18곡과 북한 노래 7곡을 합쳐 25곡을 불렀다.
2002년에는 김정일이 처음으로 6곡을 신청했다.”
신청한 곡은 북한 가요 6곡이었다.
공연 후 북한 주민 10만여 명이 연출한 집체극 '아리랑'을 김연자 일행에게 관람시켰다.
공연 당시 객석에는 불과 30여 명만 있었다.
30여명을 위하여 북한 주민 10만 여 명이 동원된 것이다.
김정일은 처음에는 평양공연비용을 김연자 측이 부담하는 줄 몰랐다.
나중에 자선공연이었음을 알게 된 김정일이 김연자 일행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그러면서
“평양만 하지 말고 지방에도 공연해 달라! 다음엔 여름에 와서 몇 군데 다니며 좀 오래 공연을 했으면 좋겠다!”
는 제의를 했다.
그래서 2003년 한 달간의 북한 지방 도시 순회공연을 계획했는데 일본인 납치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그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김 위원장이 계속해서 북한 공연을 오라고 했지만 일본 내 반북 감정이 심해서 항의도 많이 오고 두 차례 공연을 한 것 때문에 나는 일본에서 '북한 가수'처럼 소문이 나는 바람에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NHK방송에 나가면 왜 북한 가수를 출연시키느냐고 하더라고 했다.”
공연 시 어떤 북한 간부는 공연 표를 잔뜩 사서 암표로 10배 비싸게 팔았다고 한다.
김정일과 같이 커피를 한잔 할 때 김연자가 북한에서 만든 한복을 입고
“평양에서 만든 한복이다.”
라고 말하니 김정일이
“남한 한복이 훨씬 이쁘다. 우리보다 남조선이 더 잘 만들죠.”
라며 음악 얘기도 하고 혈액형 얘기도 나누었다.
“얘기도중 김정일에게 혈액형을 물어보니 A형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싸해지며 모든 사람들이 제 눈치를 보더라. 나중에사 알았지만 북한에서는 최고지도자의 혈액형을 묻는 것이 금기였다!”
라고 말했다.
다른 간부들이 ‘기밀’이라고 말했지만, 김정일이 ‘A형’이라면서 혈액형을 묻는 질문은 처음 받아본다고 대답했다.
다음에 방문을 하면 가라오케에 가서 노래를 같이 부르자고 약속도 했다고 한다.
북한은 공연할 노래를 사전에 심의를 했는데 3명 정도가 리허설을 봤다.
심의 결과 <아침의 나라에서>의 가사 중에서 "서울 Korea"를 빼라고 해서 "Korea Korea"로 불렀다고 한다.
☘ '밤열차'에 탑승하신 얼굴 모르는 승객여러분 감사합니다.
승객 여러분의 탑승에 에너지를 받아 밤열차는 힘차게 달립니다!
‘칙칙푹푹 칙칙푹푹 뿌앙~~~’
찾아와 주신 모든 분들 새해에도 좋은 일들만 가득 하시길...
첫댓글 긴글 쓰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읽는데도 한시간 가량 걸리는데~
이 많은 정보를 어떻게 모았는지
존경스럽네요.
김연자를 더욱 잘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새해엔 더욱 건강하시고 행븍하시길 응원 합니다.
잘 계시지요?
숙제는 없는 방학이지만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올린 글입니다.
추위 조심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