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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누리길8구간(경기도8/강원1) (신탄리역-역고드름//-백마고지역-이길리 초소:통일이음길,금강산길, 두루미 머무는길)
◈ 일 자: 2023. 4. 16 / 4~14도(철원)
* 흐린후 맑음(황사가 많음)
◈ 위 치: 연천군,철원
◈ 누구와: 나홀로
◈ 경로: 신탄리역-역고드름//-백마고지역-소이산-노동당사-대위리검문소-양지리쉼터-이길리초소
◈ 거리: 30.01 ㎞
◈ 시간: 5시간52분
◈ 교통
- 갈 때: 일산 대곡에서 경의중앙선문산행06시03분차타고(문산까지35분소요)
문산역에서 06시45분택시타고 전곡역(36키로 30분, 32000)07시15분에 도착
전곡역앞 정유장에서 신탄리행 버스/ 경원선대체버스 이용(대체버스경로500원, 일반100원) 신탄리역에 도착(0800)
*참고 : 대중교통
문산역에서 한진1차 문산역승하차장에서 95번(문산에서 적성 1시간10분소요, 적성-전곡 30분소요)승차 전곡 하차
전곡역앞 정유장에서 신탄리행 버스 타거나 경원선대체버스 이용(대체버스경로500원, 일반100원)
* 문산에서-전곡(0600.0730,0900,1100,1200,1400,1530,1730,1900,2120 단휴일0730,1100,1400,1730 무배차)
* 전곡에서-문산(0700,0830,1000,1200,1300,1500,1630,1830,2000,2220 단휴일0830,1200,1500,1830 무배차)
- 올 때: 이길리초소에서 택시타고(25000원) 백마고지역-경원선대체버스 타고 소요산역-전철타고 집으로 복귀
전곡역앞 정유소에서 경원선 대체버스를07시18분 탑승해 신탄리역에0800에도착 간단한 답사준비후 08시06분에 답사 시작
*신탄리역 ; [ 新炭里驛 , Sintan-ri Station ]
경원선의 남한측 최북단 종착역으로 대광리역 다음에 위치한다.
1913년 7월 10일 영업을 시작하였다.
예전부터 이 마을은 고대산의 풍부한 임산자원을 숯으로 가공하여 생계를 유지했으며, '새숯막'이라 불렸다. '여지도서'에도 “新炭”이라 적혀 있으며, 철도가 부설된 뒤로는 숯가공이 더욱 번창했다 한다. 또, ‘새숯막’이라는 지명이 대광리와 철원 사이에 주막거리가 새로 생겼다 하여 '새술막(新酒幕)'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술' 을 ‘숯(炭)'자로 잘못 표기하였다는 설도 있다.
1945년 8 · 15 광복과 동시에 북한에 귀속되었다가 1951년 수복되었다. 1971년 철도중단점 표지판을 설치하였다.
통근열차가 운행되며 여객, 승차권발매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인근에 고대산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고드름 까지3.7키로 이정목
수준점 간판은 있는되 수준점은 없음
고대산 산촌 마을 안내 간판
경원선 건널목(백마고지역으로..)
금강산 길목 표시목
차탄천을 따라 계속 진행....
철도 중단점 푯말..
경원선과 차탄천
산벚꽃들이 만계하고...
백마고지역으로 가는 경원선철도 다라 (보수중)
낙석장애물은 다 무너 졌고.. 누굴 탓하려...
대전차 방벽도... 다무너지고...
산에는 산벚꽃이 만발...
인삼밭과 산벚꽃
역고드름가기 직전의 봉구네 매점(사진상하)
분위기는 좋으나 이른 아침이라 아직 개방을 않했내요
백마고지역으로 가는 경원선철도 다리... 보수중
역고드름 지역 입구(50미터)
역고드름 지역
*연천 역고드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의 경계에 있는 3번 국도, 철원군을 알리는 경계 표지판을 앞두고 차탄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교량을 건너면 역고드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평화누리길 12코스가 끝나는 곳, 평화누리길 자전거길 7코스로도 연결되는 역고드름은 군남홍수조절지~역고드름까지 28.2km 구간에 있다. 역고드름(승빙)은 고대산 자락의 폐터널 속에 열리는데 낙숫물이 지면에 있는 빙주에 떨어지며 자라거나, 열 분자 압력으로 지하수가 상승하여 지상의 빙주 속에 들어가며 자라는 원리로 생긴다. 12월 중순부터 자라서 3월까지만 볼 수 있으며, 안전 문제로 외부 관람을 하는 것이 좋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고드름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역고드름 지역 입구(옛 경원선 철로 터널...)
2023.4.16사진(위사진) 아직 얼음이 있내요
2020년12월24일 사진(아래)
구 경원선 철도교량
**평화누리길 개요(강원도 편)
강원도에서 약360km거리를 약23코스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을 경유하는 코스로 구성해 놓았고
고성의 일부는 동해안 해파랑 길과 중복되는 곳도 있으며
현재 전 코스의 트렉이 거의 완공된 상태이지만 각 지자체에서 공식적으로 공표는 하지않은 상태인데
그리하다보니 전 코스의 트랙 등이 아직 완성이 안 되어 있어 강원도청 평화지역 발전본부 기획과에서
만들어놓은 약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일부 산악회에서는 안내 등반을 시작 한 곳도 있다,
강원도의 평화누리길에 대하여 강원도청 평화지역 발전 본부 총괄 기획과 에서는 안내지도 와 안내서를
제작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배포를 하고 있는 상태라
누구나 필요하면 033-249-3874로 연락하면 안내지도와 등을 보내준다,
경기도와 이별... 여기서 부터 강원도 철원
각종 안내 간판...
끓어진 다리
역고드름2.1키로 대위리 검문소 11.7키로 이정목
백마고지역
백마고지역[ 白馬高地驛 ]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 철도역이며 2007년에 착공되어 2012년 11월 20일 개장되었다. 역 승강장의 구조는 1면 1선으로 단선으로 이루어진 역이다. 역사 앞으로 3번 국도가 지나며 주변에는 농경지가 대부분으로 이용객이 많지 않다. 백마고지역은 현재 경원선의 종착역이자 출발역이지만 백마고지역에서 북쪽으로 철로를 연장하여 철원역과 월정리역이 개설될 예정이며, 2017년 11월에 완공후 잠시 운영하다가 경원선 전반적 인 재보수를 위해 현재는 운행중단 하고 대체 버스 동두천에서 백마고지 역까지 운행하고 있다
백마고지역은 한국전쟁 중 철원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당시 치열했던 공방전을 기념하기 위해 역이름으로 명명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북한군과 중공군 약 1만 명, 국군과 연합군 약 3,500명이 전사하였다. 백마고지역 주변에 백마고지 기념탑이 있으며 철원 노동당사도 인근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1950. 6·25 ~ 53. 7. 27) 기간인
1952년 10월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3km 북방에 위치한 무명의 한 작은 고지를 놓고
한국군 보병 제9사단(사단장 김종오)과 중공 제38군 3개 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을 벌인 끝에 우리 국군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해발이 불과 395m 밖에 되지 않는
고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아군과 적군 2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전투기간 중 발사한 포탄은 적측 5만 5천 발, 아군 측 22만 발이며,
12차례의 공방전으로 24회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혈전사투로 처절하게 변모한 산용(山容)이 흡사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 위령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 등
17,535명(아군 3,146명, 중공군 14,389명)의 영혼을 진혼 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회고의 장 · 기념의 장 · 다짐의 장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을 기억하고자 건립되었다.
'회고의장'에는 전사자를 추도하는 위령비와 분향소가,
'기념의 장'에는 통일의 염원과 전승을 기념하는 전적비와 함께
당시 백마부대장이었던 김종오(金鍾五) 장군의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도
자유의 종각이 건립되어 현재 국민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출처 : 다음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백마고지역을 지나고 소이산을 향해.....
소이산까지... 2.5키로 라내요
좌측에보이는 고지가 소이산
소이산 입구
소이산 오르는 등로는 완전 포장되어 있고
또 노동당사에서 소이산 정상까지 모노레일을 설 치 운용하고 있음
소이산을 오로다보면 금낭화도 활짝...
소이산
* 소이산
소이산(所伊山)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있는 해발고도 362m의 산이다. 고려 시대부터 외적의 출연을 알리던 제1로 봉수대가 있는 공간으로, 해방 이전 철원 역사의 중심이다. 고도는 높지 않아도 소이산 정상에 서면 백마고지,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6·25전쟁과 관련된 사연이 많이 있는 곳이며, 민간인 통행이 금지되었던 군사지역으로 곳곳에서 군사시설을 볼 수 있다.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에 정상까지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으면서도 정상의 전망이 빼어난 곳이다.
소이산(所伊山)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소이산은 산정에 고려 시대부터 통신수단으로 이용된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함경도 경흥·회령·길주·함흥·영흥·안변·철원·서울[남산]과 연결되는 경흥선 봉수로에 속하여 있던 산이다.
1253년(고종 40) 고려 몽고군이 동주[철원]을 침입할 때 방호별감이었던 백돈명의 지시에 따라 군민들이 소이산으로 들어갔으며 출입이 금지되었다. 추수기에 군민들이 교대로 추수할 것을 건의하였다가 방호별감에 의하여 처형되면서 혼란이 발생하였고 그 틈에 몽고군이 침입하였다. 이후 소이산의 성이 함락되고 김화와 금성까지 몽고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소이산은 산의 높이는 낮지만 철원평야가 잘 조망되는 곳이다. 소이산의 지질은 백악기의 화산암이며, 주변은 용암대지로 둘러싸여 있다. 6·25전쟁 이후에 지뢰지대가 설치되고, 민간인출입통제선 구역 안에 있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생태계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강원도 철원군은 2012년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라는 총 4.8㎞의 탐방 길을 조성하였다. 이들은 각각 지뢰꽃길[1.3㎞], 생태숲길[2.7㎞], 봉수대 오름길[0.8㎞]로 구성되어 있다. 해발고도가 낮아 정상까지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으며, 정상에서는 백마고지,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지뢰지대가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 표시가 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소이산 [所伊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곳에는 한때 미군과 한국군이 주둔...
지역역사 해설가가 방문객들에서 지형을 설명중..
철원평야... 오늘 시계가 불량해... 잘안보임
철원역사 문화 공원... 노동당사
철원 노동당사
국가등록문화재 |
2002년 5월 31일 |
문화재청 |
철원군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금강산로 265, 외 3필지 (관전리) 지도 |
1936년 |
등록문화재 / 기타 / 업무시설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1,850㎡의 면적에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으나, 2층은 3층이 내려앉는 바람에 허물어져 골조만 남아 있다. 1층 구조를 보면 몇 개의 방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 1~2명이 사용하였거나 취조실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 리(里)당 쌀 200가마씩 거두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제 모금과 노동력 동원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내부 작업은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하였으며, KBS 열린음악회가 녹화되기도 하였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3-2번지 외 3필지에 있다. 철원 노동당사 지도 [네이버 지식백과] 철원 노동당사 [Korean Workers' Party Headquarters, Cheorwon, 鐵原 勞動黨舍]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오늘 길이 계속 포장되어 있어 뒤산을 답사할까 해서 간판뒤 계단으로 오르니 등로가 없어 산을 넘어 원 누리길에 접소.. 길없음..
노동당사뒤 산넘어 한참만에 누리길에 접속
(노동당사뒤 월하리혹 은:하지리 뒷산을 타려고 올라가보니 길이 없음.. 산을 넘어왔음)
금강산로 위치한 한다리 도착(다리지나 앞에 보이는 야산전면에는 천연 고찰 도피안사 절이 있음)
도피안사
*도피안사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화개산(花開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이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865년(경문왕 5)에 도선(道詵)이 향도(香徒) 1,000명과 함께 이 절을 창건하고 삼층석탑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였다.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수록되어 있는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이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고 하였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았더니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으므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도선은 이 절을 800의 비보국찰(裨補國刹) 중의 하나로 삼았으며, 화개산이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약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석탑과 철불로 산세의 약점을 보완하여 국가의 내실을 굳게 다지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오래도록 국가의 비보사찰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898년 봄에 큰 화재로 전소된 뒤 주지 월운(月運)이 강대용(姜大容)의 도움을 받아 법당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승료(僧寮)와 누헌(樓軒) 등을 중수하였다.
6·25 때 소실된 뒤 주지 김상기(金相基)가 중건하였으며, 1959년에는 15사단 장병들이 법당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요사채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창건 당시 조성된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이 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도피안사 [到彼岸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은 강원도 철원군, 도피안사에 있는 남북국 시대에 철로 만든 비로자나불 좌상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63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신라 48대 경문왕 5년(865년)에 제작되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나 뚜렷하지 않고 불상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높고 안정된 이중 대좌(二重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91cm이다.
개요[편집]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같이 보기
3층 석조 불탑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도피안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건립된 3층 석조 불탑. 보물.내용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4.1m. 도피안사는 6·25전쟁 때 격전지였는데, 석탑의 상태는 상륜부(相輪部)와 3층 지붕돌 일부만 손상되었을 뿐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리고, 그 위에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놓은 일반형 신라 석탑이다. 단면이 8각인 아래층 받침돌은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아래 부분에는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윗부분에는 같은 돌에 새겨 만든 덮개가 있다.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 위에는 1장의 돌로 만든 높직한 8각의 연화대(蓮花臺)가 놓였다. 연꽃 무늬를 새긴 연화대는 홑잎〔單葉〕인 꽃잎 16장을 아래로 향하게 놓은 복련(覆蓮)으로 둘렀으며, 꼭대기에는 낮고 각진 2단의 굄을 새겨 두었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아무런 조각이 없다. 다만 덮개돌의 아랫면에는 아래층 덮개돌 위에 있는 연화대와 대칭을 이루도록 홑잎인 꽃잎 16장을 위로 향하게 놓은 앙련(仰蓮)을 조각하였고, 낮고 각진 2단의 받침을 새겼다. 윗면에는 네모난 3단의 굄을 반전(反轉)으로 높직하게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대체로 9세기 경에 건립된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탑신부(塔身部)는 일반적인 석탑처럼 단면이 네모난 모습인데,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몸돌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만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 받침이 1층은 4단이지만, 2층과 3층은 3단이다. 윗면의 낙수면은 평박(平薄)한데, 밑면 받침이 낮아서 다소 둔중하게 보이지만,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 반전이 많아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만 놓여 있을 뿐 다른 석재는 없다.
이 석탑은 받침 부분인 기단부(基壇部)가 특이한 모습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지붕돌 밑면 받침이 4단과 3단으로 뒤섞여, 양식상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건립 시기는 석탑의 양식은 물론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2년 지정)에 ‘함통육년을유(咸通六年乙酉)’라고 새겨진 글자로 보아, 865년(경문왕 5)에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 [鐵原到彼岸寺三層石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대위리 검문소3.4키로 역고드름10.4키로 이정목(관우리)
대위교
대위리 검문소
도창검문소15키로 역고드럼13.8키로 이정목(대위리 검문소앞)
여기서부터 한탄강을 따라 간다....
* 한탄강
길이 136km. 강원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김화 ·철원 ·포천 일부, 연천(漣川)을 지나 연천군 미산면(嵋山面)·전곡읍(全谷邑)의 경계에서 임진강(臨津江)으로 흘러든다. 화산폭발로 형성된 추가령구조곡의 좁고 긴 골짜기를 지나는데, 유역에는 절벽과 협곡이 발달하여 있다. 남대천(南大川)·영평천(永平川)·차탄천(車灘川) 등의 지류가 있으며, 하류인 전곡 부근은 6·25전쟁 때의 격전지이기도 한데 강변이 아름다워 한탄강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탄강 [漢灘江]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분단의 탄식이 흐르는 한탄강
분단의 한을 안고 흐르는 한탄강우리나라 어느 강보다 변화가 많고 풍광이 수려하다.
강원도 평강의 추가령곡에서 발원하여 철원과 연천을 거쳐 전곡에서 임진강과 합류하는 한탄강, 민족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가로질러 흐르기에 이름조차 한탄일까? 그러나 한탄(漢灘)이란 ‘한여울’ 곧 큰 여울을 뜻하는 말이다. 고유어로 불러 주어야 할 이름을 굳이 한역하다 보니 그만 한숨 쉬며 탄식한다는 한탄(恨歎)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한탄강은 우리나라 어느 강보다도 변화무쌍하고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이 강은 발원지에서 임진강의 합류점까지 현무암으로 된 용암지대를 관류하기 때문에 곳곳에 수직절벽과 협곡이 형성되어 절경을 이룬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대개 절경에는 슬픈 전설이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더구나 이 강은 분단의 장벽과 연결됨으로써 더욱 그런 인식을 굳게 한 것 같다.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서 물살이 급한 개울을 ‘여울’이라 한다. 한자어로 쓴다면 천탄(淺灘)이 되겠으나 어울리지 않게 고유어 ‘한’을 섞어 한탄이 되었다. 지명어가 주는 주술성 때문인지 이 강은 오늘에 와서 한민족 비극의 대명사가 된 느낌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 왜 그와 같은 한자말을 써야 하는지, 그래서 탄식 서린 비극의 강이 되어야 하는지 바로 그 점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한탄강 주변의 지명은 대개 여울〔灘〕이나 시내〔川〕와 같은, 물과 연관된 이름이 대부분이다. 한탄은 물론 차탄, 신탄, 포천, 회천, 연천, 동두천, 운천 등이 그러한데 이와 같은 거센소리 지명들은 한결같이 슬픈 전설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철저히 폐허가 된 옛 철원벌은 이 슬픈 전설의 증거품이라고나 할까.
한탄강 위에 세워진 승일교‘콰이강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남북의 합작품이다. 통일이 된 후에는 분단시대의 전설을 대변해 줄 것이다.
괴물처럼 웅크리고 선 옛 노동당사, 격전의 현장이라는 백마고지, 녹슨 열차의 철골만 덩그렇게 남은 월정역사 등등 이들은 한결같이 망각의 피안에 버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한탄강의 협곡 사이로 위태롭게 걸려 있는 승일교(昇日橋)란 다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마치 영화 속 ‘콰이 강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이 아치형 다리는 광복 직후 김일성 치하에서 시공되어 휴전 직후 이승만 치하에서 완공되었다고 한다. 승일교란 이름은 이 다리를 건설한 박승일(朴承日) 대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붙인 것인데, 항간에는 이승만과 김일성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남북 합작품 다리로서 둘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 다름아닌 통일의 염원을 담은 또 하나의 전설이라고 할까.
절벽을 타고 다리 밑으로 내려와 멀리서 보면 분명 다리의 구조가 절반을 경계로 하여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남북 분단이 낳은 비극의 산물, 훗날 한반도가 하나가 되었을 때 이 승일교도 지난날의 아픔을 증언하는 유물이 될 것이다.
한탄강
한탄강은 곳곳에 수직으로 된 절벽과 협곡이 형성되어 절경을 이루는, 우리나라 어느 강보다 변화무쌍하고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 있는 강이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광복 직후 김일성 치하에서 시공되었다가 휴전 직후 이승만 치하에서 완공되었다는, 남북 합작의 아치형 다리 승일교(昇日橋)가 남북 분단이 낳은 비극의 산물로 자리잡고 있다.
승일교 부근에 고석정(孤石亭)이란 작은 바위섬이 있다. 몇 그루 소나무를 머리에 이고 강 가운데 우뚝 선 이 바위섬이 한탄강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섬을 보기 위해, 신라의 진평왕이 다녀갔으며 고려의 충숙왕도 다녀갔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그 어떤 왕보다도 한 시대의 영웅 임꺽정의 은신처였다는 전설을 마음속에 더 깊이 새기는 듯하다.
철원 부근의 고석정이 바위섬이 임꺽정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임꺽정 기념관이라도 들어서야 할 이 자리에 지금은 ‘철의 삼각지’ 전투를 기념하는 전적관이 들어서 있다.
양주 땅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눕힐 정도의 장사였다고 하고, 또 인정이 많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라고 했다. 의적이라 불리던 그가 재령 땅에서 관군에 붙잡혀 만고의 역적으로 참수 당하기까지 이곳 외돌괴 바위 틈에 자란 소나무 밑동에 밧줄을 걸고 오르내리며 고석정을 농민봉기의 근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임꺽정의 이야기를 두고 어떤 이는 창조되는 전설이라고도 했다. 그의 산채가 있었기에 임꺽정 기념관이라도 세웠어야 할, 그 자리에 6·25 때 철의 삼각지전투를 기념하는 거대한 전적관만이 들어서 있다. 고석정 부근에서 그의 족적을 찾을 수 있는 흔적이라고는 ‘임꺽정 가든’이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식당 간판이 고작이다. 그 대신 유엔군 사령관이 명명했다는 ‘철의 삼각지’란 군사용어만이 ‘임꺽정 산채’를 장식하고 있다.
연천(漣川)이라는 지명의 앞글자 ‘연(漣)’이 눈물 흘린다는 뜻이어서 그럴까. 차탄천이 끝나는 군남면 남계리에 눈물과 관련된 삼형제바위가 있어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옛날 세 아들을 키우던 홀어머니가 아들들을 모두 차탄천 급류에 잃었다고 한다. 아들을 잃은 어미는 매일 이 냇가에 나와 울다가 자신도 세 아들의 뒤를 따르고 만다. 그래서인가 최근 수년간 이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피해를 보았다는 소식이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연천읍 고문리의 재인폭포에 얽힌 이야기도 슬프기는 매한가지다. 재인(才人)이란 재주 부리는 광대를 일컫는다. 옛날 외줄타기를 장기로 하는 어떤 재인이 예쁜 아내와 함께 이 고을에 살았다. 그런데 재인 아내의 미모를 탐낸 이 고을 수령이 재인으로 하여금 폭포 위에서 줄을 타게 하고 그 줄을 끊어 떨어져 죽게 하였다.
재인이 죽은 후 수령은 재인의 아내에게 다가가 욕심을 채우고자 하였으나 그 일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용모 못지않게 행실과 절개도 곧았던 모양이다. 겁탈하러 덤비는 수령의 코를 깨물어 저항하고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 폭포에 재인의 한이 서렸다 하여 재인폭포라 이름하고, 그 마을 역시 수령의 코를 깨문 여인이 살았다 하여 ‘코문리’ 즉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
연천의 재인폭포
이 고을 수령이 재인의 아내를 취하고자 재인으로 하여금 이 폭포에서 줄을 타게 하고 줄을 끊어 그를 죽게했다. 아직도 광대(재인)의 한이 풀리지 않았는지 물빛은 여전히 푸르다.
한탄강이 긴 탄식을 그치고 임진강의 품에 안기는 전곡 쪽으로 나가면 차탄리(車灘里)란 냇가 마을에 이르게 된다. 냇물이 수레바퀴처럼 빙빙 돈다 하여 ‘수레여울’ 곧 차탄리라 부르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이 고을 원님이 수레를 타고 민정을 살피다가 태봉 앞 넓은 여울에서 수레와 함께 빠져 죽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선정을 베풀던 원님의 덕을 기려 고을 이름조차 차탄리라 불렀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어떻든 이 고을 주민들은 인정이 많은 탓인지 울기를 잘했던 모양이다. 고을 원님이 순직했을 때도 여울가에 나와 울었고,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고종과 순종이 승하했을 때도 마을 뒷산에 올라 한양을 향하여 목놓아 울었으니 그 산 이름마저 망곡산(望哭山)이라 한다. 지금은 체육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이 산등성이에 오르면 그 당시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분단의 탄식이 흐르는 한탄강 (물의 전설, 2000. 10. 30., 천소영, 김동현)
통행 흔적이 별로 없는 구간.... 대위리 검문소에서 직진하면 얼마 안가 이길리 초소가 나옴
논농사 준비가..곧 벼를 심겠다.
온산에 산벚꽃들이 만발하고...
한탄강....
대위리 검문소1.6키로.. 도창리검문소13.4키로(양지리)
전원주택도...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
양지리 구검문소 앞
양지리 구검문소도 지나고....
다시 한탄강변으로...
한탄강변을 따라 진행...
대위리 검문소5.1키로, 도창리검문소9.9키로 이정목(양지리)
산벚꽃과 한탄강...
한탄강변을 버서나고 다시 철원 평야지대로 진행...
철원평야
저앞 숲만 지나면 이길리 초소
이길리 검문소
이곳에서 답사 종료하고 택시 콜해서 백마고지역(25800원)으로 이동
백마고지역에서 경원선 대체 버스(14시47분 지행) 타고 소요산역에서 하차 전철 타고 집으로 복귀
이길리 검문소
이곳에서 답사 종료하고 택시 콜해서 백마고지역(25800원)으로 이동
백마고지역에서 경원선 대체 버스(14시47분 지행) 타고 소요산역에서 하차 전철 타고 집으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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