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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악령의 분별(4)
< 네가 거듭나야만 하겠다 >
2016년 3월 20일 / 대예배 / 요한복음 3:1-8
요 3:1-8 / [니고데모와의 대화] 어느 날 밤이 이슥할 무렵 바리새파에 속한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회견을 청해 왔다. “선생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선생님을 보내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신 표적이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말하였다. “무슨 뜻입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7) 그러니 내가 네게 새롭게 다시 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8) 마치 네가 바람 소리는 듣지만 그것이 어디서 불어온 것이며 또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와 같다.”
우리가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이라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마 12:50).
몇 년 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전국목사장로대회(목장대회)에서 사뭇 뜻 깊은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 원로목사가 목장대회 둘째 날 ‘교회를 세우는 장로상’이라는 주제 강연에서 “한국교회에 거듭나지 못한 목사ㆍ장로가 많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절대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도 없다. 마귀의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최우선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을 무시한 채 교회에 다니고 직분을 맡고 봉사를 한다 해도 결국 하나님 심판에서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쇄신(刷新 - 나쁜 폐단이나 묵은 것을 없애고 새롭게 함)의 개념으로 성경에서 도용해 쓰는 ‘거듭남’이라는 용어가 아닌 매우 심오하고 중대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수두룩한 목사, 장로들, 집사들’이 바로 불 못에 들어가게 되는 저주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인즉, 그들은 그야말로 거듭나지 않고 교회놀이나 하다가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목사와 장로들뿐일까요? 그 밑의 집사들, 권사들, 또 일반 교인들 역시나 그 밥에 그 반찬이기에 거듭나지 않는 한 『지옥의 저주』(마 23:33)를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장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경고를 하였습니다.
마 3:7-10 /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사람들(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과 사두개파(유대인의 정치 지도자들))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독사의 자식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었느냐? 8) 침례를 받기 전에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라. 9)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을라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여기 있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10) 하나님께서 내리치실 심판의 도끼가 이미 열매 없는 모든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그런 나무는 다 찍혀 불속에 던져질 것이다.
▶ 예수님도 요한복음 8장에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폭탄과 같은 충격적인 지적을 하셨습니다.
요 8:3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께서 자신을 믿는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가르침을 따라 산다면 너희는 참된 내 제자가 될 수 있다. 32)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물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 땅 위에서 살며 어느 누구의 노예도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하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3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는 하나같이 죄의 노예다. … 37)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줄은 나도 안다. 그러나 그런 너희들 가운데 나를 죽이려고 하는 자가 있지 않느냐? 그것은 내 말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을 정도로 너희 마음이 죄로 꽉 차 있는 탓이다. … 39) [너희의 아비는 악마다] 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입니다.”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너희 아버지였다면 너희는 그의 믿음을 본받았을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그와 반대로 내가 아버지께 들은 진리를 말하였다 해서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런 짓을 한 적이 없다. 41) 너희는 지금 너희의 아비가 행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서자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 43) 그런데도 너희가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방해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므로 악마가 하는 악한 일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악마는 처음부터 살인자이며 진리를 미워한다. 그 속에 진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으로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유대 민족의 창시자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수 천 년간의 혼돈이 흐른 후 맨 처음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계시한 것이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 그리고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룩한 약속에 근거를 삼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세상 크리스천과 하늘에 속한 크리스천 즉 거듭나지 못한 크리스천과 거듭난 크리스천에 대하여 잘 설명을 하였습니다.
갈 4:22-26 / 율법서에 보면 아브라함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하나는 여종의 몸에서 낳고 또 하나는 부인의 몸에서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여종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은 인간의 육신이 맺어져 낳았지만, 부인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에 따라 난 아들입니다. 24-25)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우시려고 열어 놓으신 두 길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율법을 주시어 이 율법에 복종하라고 하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어 이 길을 보이셨습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이 시내산을 ‘하갈산’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의 여종인 하갈은 유대인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계명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를 따라 가는 유대인들은 모두 다 하갈이 낳은 노예의 자식들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로 율법에 전혀 구애받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은 유대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것 같이 믿고, 그가 순종한 것같이 순종하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을 생각할 때에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가릴 것 없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갈 3:29 /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지금 우리는 참다운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한 아브라함에게 속했다고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두 후손이 있습니다. 진짜 후손과 가짜 후손이 있습니다. 가짜는 육체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는 상징적이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그렇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두 사람 모두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태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계집종으로서 애굽 출신의 아브라함의 하녀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하는 여자로서 아브라함의 아내였습니다. 두 아이는 자연히 그 어머니의 신분을 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노예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또한 그 둘은 각각 다른 방법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잉태와 출생의 생물학적 과정이 달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낳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자연을 좇아 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초월해 났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는 99세의 노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원래 수태할 수 없는 여자요, 이미 89세를 넘어 있었습니다.
히 11:11 /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믿음이 깊은 여자였습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아기를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인간의 방법으로 낳았으나 이삭은 그것을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하신 약속을 따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않은 크리스천을 유대인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거듭난 크리스천을 하늘 도성인 약속의 자녀들이 거하는 영적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거듭남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요 1:10-13 /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는데도 그분이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12)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3)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다.
▶ 그래서 우리 교단 헌장에는 이렇게 교회에 대하여 정의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헬라 원어로 ‘에클레시아’이니, ‘부르심을 받은 무리들’이라는 뜻이다. 즉 애굽에서 구출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 함과 같이(행 7:38) 교회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어, 죄악세상과 분리 되어,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속받은 성도들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엡 1:23),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례전을 거행하는 성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여 모든 영혼으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며(딤전 3:15), 모든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격을 갖추고 「주」의 재림을 대망하는 거룩한 공회이다.
교회는 유형적 교회와 무형적 교회 두 가지로 나눠진다.
① 유형적 교회
유형적 교회는 「성경」에 따라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받아 입회한 사람들로서 조직되고, 이러한 교회들이 모여 교파를 구성하는 것이다.
② 무형적 교회
무형적 교회는 각 교파 각 교회 중에서 신생(新生)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로서 조직되는 오직 하나의 교회로 신령한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교회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신 하나의 교회는 이러한 교회이니(요 17:11, 21-23), 이러한 무형적 교회는 어떤 교파 어떤 교회에 속하였든지 현재도 하나이며, 주님 재림하실 때에는 구체적으로 완전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인들은 모름지기 이러한 영적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힘쓸 것이며, 유형적 교회는 이러한 영적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즉(눅 2:49, 딤전 3:15), 삼가서 세속적 행사나 거룩하지 않은 일을 행하지 말고, 성별되게 보전하여야 한다(고전 3:16-17).
■ 휫필드는 청년 시절에 죄악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마음이 온통 시꺼먼 죄악으로 물들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부정을 애썼습니다. 모든 사치를 마음으로부터 거부했습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가장 조야(粗野)한 음식을 먹었으며, 일주일에 이틀간은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었으며, 밤마다 기도로 지새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헛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마음의 평안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한 웨슬레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영혼 속의 하나님 생명」이란 책자를 얻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휫필드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매달렸고 성령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훗날 휫필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서인도제도의 유색 인종들, 스코틀랜드의 광부들과 런던의 부유한 귀족들의 접견 등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많은 지역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네가 거듭나야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본문으로 들어가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니고데모라는 고위층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의 신앙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예수님은 해결시켜 주실 것 같았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젊은 목수청년을 고위층 관원이 낮에 찾아가기가 곤란하여 밤에 찾아 왔습니다. 아니면 시간이 없다보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인사 겸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선생님을 보내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신 표적이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말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니고데모의 질문에 다시 대답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그러니 내가 네게 새롭게 다시 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마치 네가 바람 소리는 듣지만 그것이 어디서 불어온 것이며 또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와 같다.”
니고데모가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의 영적으로 둔함을 책망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나는 내가 아는 것과 본 것을 네게 말하고 있는데 너는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내가 여기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해도 믿지 않으면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귀한 말씀을 이어서 해 주셨습니다.
요 3:14-17 /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사람들 위에 쳐든 것 같이 인자도 나무 위에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보내셨다.
니고데모라는 훌륭한 유대인의 지도자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 달리 기도도 많이 했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니고데모는 “선생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선생님을 보내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신 표적이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듯이, 예수님이 베푸신 많은 표적에 놀라면서 무엇인가 가르침을 받으려고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 인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 3:3-6 /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말하였다. “무슨 뜻입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지식적으로 도덕적으로 세상적으로 능력이 있어서 완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니고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생각과 가치관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변화는 도덕적이나 지식적이거나 교양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추구하는 목표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에 붙잡혀 세상 사람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야 합니다. 어머니의 임신과 해산의 고통으로 태어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듭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20세기말 미국 기독교의 통계에 45%는 “자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 통계를 믿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듭난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럼 한국교인들에게 ‘자신은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을 들라면 몇 %나 들까요? 눈치를 보면서 30%-40%가 손을 들었습니다(남이 드니 나도). 열심이 있는 교회에서는 70-80%가 손을 들을 것입니다(남에게 질 세라). 고양시에 있는 ◯◯교회에서는 90%가 손을 들었습니다(거듭난다는 것 자체도 모르고). 과연 그럴까요?
▶ 거듭남에 관해 신약에 여러 구절이 있지만, 나름대로 이해하도록 쓴 곳이 요한복음 3:1-15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 3번(3절, 5절, 11절) 나옵니다.
3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11절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거듭남이 무엇이며, 어떻게 거듭나는 것이며, 왜 거듭나야 하는지? 3가지 질문에 대해서 이 3번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이 대답을 해준다. “왜 거듭나야 되는 것이고, 거듭남은 도대체 무엇이며, 거듭남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라는 거듭남에 대한 중요한 3가지 질문을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3가지 단락으로 나눕니다.
1. 사람들이 꼭 거듭나야 하느냐?(1-3절)
이 질문에 대해서 본문 1-3절이 대답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가 무엇인지, 수요공급의 법칙이 어떻게 되는지,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되는지, 형법 1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큰일 나지는 않습니다. 그로 인해 지옥갈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거듭남은 무엇이며, 어떻게 거듭나는 것이며, 거듭남은 왜 필요한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4가지 근거로 거듭남의 필요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① 7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하겠다는 이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라고 하는 한 사람과의 말씀하지만, 7절에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라고 할 때에 원어인 헬라어는 단수가 아닌 2인칭 복수로 기록되어 있고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즉 자력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거듭나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곁에는 니고데모 그리고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니고데모야! 너뿐 아니라 말씀을 듣는 사람 아니 모든 사람들이 다 거듭나야 하겠다.”라는 의미로 하신 것입니다.
② 3절 전반에서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서두로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truly truly)”라고 말씀하실 때는 특별히 중요한 말씀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말씀이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말씀은 극도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③ 3절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cannot see the kingdom of God)”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좀 더 강하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 마태ㆍ마가ㆍ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거의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3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다 보니 ‘하나님 나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 대신에 ‘영생’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요한이 사용할 때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살아생전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죽은 후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 중에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본문을 볼 때에 가장 큰 기적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거니와 천국에도 못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거듭나야 됩니다.
④ 예수님이 말씀하신 상대는 니고데모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나라의 모든 문제를 통치하는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에는 70인의 관원이 있었는데, 니고데모는 그 70인 관원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국회의원쯤 되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도 니고데모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셨는데, 여러 선생 가운데 한 선생인 “a teacher”가 아니라 정관사를 사용한 “the teacher”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수많은 선생이 있어도 니고데모는 ‘탁월한 선생이요 최고의 선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앞에 두고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감히 나이도 훨씬 많은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무섭도록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4-8절)
이 질문에 대해서 4절과 8절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시자 니고데모가 4절에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3:5-6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는 다른 말로 하면 ‘중생(重生)’이란 말인데, 디도서 3:4-5에 “그러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실 때가 오자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께서 5)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우리 속에 살게 하여 새로운 기쁨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중생이란 명사인데, 서술형으로는 거듭난다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3에 보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시고”라고 하셨고, 베드로전서 1:23에 보면 “여러분은 새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여러분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생명은 곧 썩어 버리지만 거듭난 이 새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새 생명은 인간 가운데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듭’이란 ‘아노덴’이란 말은 ‘처음부터, 완전하게, 근본적으로’이라는 말이요, ‘다시, 두 번째로,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처럼 다시 태어나는 것이요, 장소적으로는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남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남으로 한 인격체로 살아가는 것처럼 그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고,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 것입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생명 이외에 또 다른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모님으로부터 육신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 이외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갖는다. 거듭나는 것이나 다시 태어나는 것은 자신을 고치거나 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부모님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고(요 1:13),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요 3:15-16)을 갖는 것이다.
▶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타락한 후에는 사탄적인 본성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죄를 집니다. 사람은 외적인 행동 때문이 아니라 내적인 요소 때문에 본성상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된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17절).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은 사탄인 뱀에 속아 그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6절).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음으로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모든 인류가 부패하고,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고, 사탄의 죄악된 본성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롬 5:12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의 현재 상태를 향상(向上)시키려는 의도가 없으십니다. 대신에 그분은 우리의 본성을 변화(變化)시키기를 갈망하십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 뿌리는 이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뿌리는 씨를 받아야지 만일 마귀가 주는 가라지를 받는다면 계속 타락한 인간으로 있을 뿐입니다.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은 그 분 자신을 우리 안에 더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고(벧후 1:4) 그분의 생명으로 재조성 시키십니다(골 3:4, 갈 2:20). 사람의 유일한 희망은 타락한 옛 본성을 죽음에 넘기고 장사지낸 후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롬 6:3-9).
3. 우리는 어떻게(how) 거듭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 9-15절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요 3:9-15 / 니고데모가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되물었다. 10-11)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나는 내가 아는 것과 본 것을 네게 말하고 있는데 너는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12) 내가 여기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해도 믿지 않으면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사람들 위에 쳐든 것 같이 인자도 나무 위에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고백하라(1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우리 스스로 생명을 부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본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물을 길어다 돌항아리에 부을 수는 있으나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저것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안 됩니다. 우리 힘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라고 하신 것입니다.
슥 4:6 / …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요, 위대한 신비의 역사요,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는 참으로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이미 말씀되었습니다.
요 1:11-12 /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3)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도 인간이 만들지 못하거늘 어찌 새로운 본성을 인간이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니고데모도 처음에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우리 또한 그 말씀을 이해조차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사악하고 엉터리이지만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지만 죄 씻음을 받아야합니다. 나는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제게 필요합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회개조차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마음조차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롬 8:26 /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실한 감정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눅 18:13-14 /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렇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겔 36:25-26 / 그런 다음에 너희 몸에 정한 물을 뿌려 그동안 온갖 우상을 섬기면서 더러워진 오물을 깨끗이 씻어 주고 26) 너희 속에 새 마음과 새 정신을 넣어 주겠다. 너희 가슴속에서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드러내고 나의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을 넣어 주겠다.
뒤 이어서 계속 이렇게 약속해 주셨다.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과의 약속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이다.
겔 36:27-32 / 내가 이렇게 내 영으로 너희를 가득 채워 놓아 너희가 내 뜻에 따라 생활하고, 내가 준 모든 계명을 지키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게 만들겠다. 28) 그렇게 되면 내가 옛날에 너희 조상들에게 주었던 땅에서 다시는 쫓겨나는 일 없이 너희는 영원히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29) 내가 이렇게 깨끗이 씻어 주면 너희가 다시는 과거의 더러운 행실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30) 너희가 다시 깨끗해지는 그날에는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흉년이나 굶주림을 보내지 않겠다. … 31) 그날이 오면 너희도 지난날에 저질렀던 수치스러운 행실들을 돌이켜 보고 그 행실이 너무나 비열하고 더러운 데 놀라 자신이 밉고 부끄러워질 것이다.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아, 똑똑히 알아 두어라. 내가 너희를 고국 땅으로 데려다가 이렇게 살리는 것은 너희에게 그만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너희는 어느 한군데 부끄럽지 않은 데가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까지 살아온 죄악에 빠진 인생을 스스로 수치스럽게 여겨라!
주전 7세기에 이사야 선지자도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언하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사 53:4-6 / 그러나 사실은 여호와의 종이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될 고통을 대신 당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우리가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가 무서운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진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고서도 무사하게 넘긴 것은 그가 대신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대신에 채찍을 맞아 우리 몸이 성하게 되었다. 6) 우리는 모두 목자를 떠난 양들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돌아다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모두 그에게 지워 놓으셨다.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에 강력하게 외친 말씀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주어지는 죄 사함과 더불어 거룩한 삶을 살게 된 복된 소식입니다.
행 2:38-39 /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여러분 모두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받아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주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자녀들과 또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하신 약속입니다.”
벧전 2:22-24 /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3. 약속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믿어드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라.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렇게까지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원하셨지만 거역하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 예수님은 이를 설명하시기 위하여 민수기 21:4-9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애굽을 떠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기 위해 무서운 불뱀의 재앙을 보냈습니다. 이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던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서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애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잘못하였다고 하오니 살 길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구리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장대 위에 달린 뱀을 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쳐다본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9절). 그냥 장막 안에 앉아서 “구리뱀에 무슨 독을 해독하는 해독제가 있냐?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따지는 사람과 “구리뱀이 과연 죽은 나를 살릴 것인가?”라며 의심하는 사람은 독으로 인해 다 죽었습니다. 죽게 된 상황에서 구리뱀만 쳐다보기만 하면 산다는데, 무엇이 이해가 안 간다고 따지고 의심할까? 그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말씀을 예로 들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당신을 믿어줄 것을 부탁하셨다.
요 3:14-17 /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사람들 위에 쳐든 것 같이 인자도 나무 위에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보내셨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옛뱀 마귀에게 물려 죄의 독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죽을 자가 살아난 것처럼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쳐다보면 죄의 독이 사라지고 죄악에서 벗어나서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도덕, 선행으로 안 되고 다른 어떤 종교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3일 만에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 찬송입니다.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아멘
2.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3. 나의 죄속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으니 예수의 피 밖에 없네
4. 평안함과 평안함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 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 밖에 없네
4. 거듭 났으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21-23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요 14:23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아버지와 나는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약 2:20-24 /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을 작정입니까?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참다운 신앙이 아닙니다.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까지도 아들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기쁨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22) 아브라함은 조그마한 의심도 없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기쁨으로 복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가 실제로 취한 행동과 선행으로 완전해진 것입니다. 23) 이로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주께서는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셨다’고 되어 있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까지 불렸던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 두어야 합니다.
▶ 기독교의 기초 진리이며 천국에 가는 첫 걸음인 ‘거듭남’ 즉 중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중생의 체험을 확인함을 물론 성결의 은혜를 사모하고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권면합니다. 많은 분들이 ‘나는 거듭났다, 나는 성결하다, 나는 성령충만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소원하지만 예수님 재림 때에 기름이 떨어져 함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는 의미에서 ‘내 자신들이 어디에까지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혹은 우리 모습을 보여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약 1:5-6 /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알고 싶거든 하나님께 여쭈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후하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결코 여러분을 꾸짖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께 구할 때는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구하십시오. … .
■ 빌리 그레함은 이러한 지적을 한 적이 있습니다. / 나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위험은 거짓된 종교문제라고 생각한다. 교회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지만 마음은 그 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고 거듭나지 못하였고 회개도 하지 아니하였다.
■ 독수리의 환골탈태(換骨奪胎) / 독수리하면 까마득한 창공까지 차고 오르는 그 날개 짓과 눈부신 태양마저 직시할 수 있는 눈매라고 할 것입니다. 그야 말로 모든 날짐승의 왕, 공중의 제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수리의 수명은 사람과 비슷하여 평균 70년을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어진 수명을 다 살려면 한번은 완전히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독수리가 40년을 살고 나면 먹이를 사냥하는데 필수요소인 부리와 발톱이 길어지고 안으로 굽어진 채로 굳어져서 먹이를 잡기조차 어려워집니다. 길고 휘어진 부리는 독수리의 가슴 쪽으로 구부러집니다. 거기에다, 그 멋있던 날개조차 약해지고 무거워지며 깃털은 두꺼워집니다. 나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짐이 되어 버립니다. 이 때 독수리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대로 사냥을 못하고 굶어 죽느냐 아니면 새롭게 변화하여 거듭나느냐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가운데 일부는 40년을 수명으로 삶을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 있는 독수리는 아무도 미치지 못하는 까마득한 절벽 꼭대기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절벽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150일간을 전혀 날지 않고 둥지에 머무릅니다.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절벽의 바위벽에 부리를 부비고 부딪쳐 길어지고 휘어진 부리를 다 부셔 버립니다. 그리고는 새롭고 날카로운 부리가 돋아날 때까지 절벽위에서 기다린 후 일단 부리가 돋아나면 그 부리로 무딘 발톱을 모두 잡아 뽑는다 합니다. 그리고 부리로 날개 깃털까지 모두 뽑아 버린 후 그 곳에서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그리고 일단 새 발톱과 새 깃털이 다 나면 온전히 새롭게 된 몸으로 창공을 박차 올라 새 삶을 시작합니다. 제대로 먹이도 취하지 못하고 고통을 이겨내는 그 기간이 무려 5개월이 걸립니다. 이 인고의 기간을 견디지 못하는 독수리는 40년으로 생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견디는 독수리는 남은 30년의 삶을 새로운 부리, 새로운 발톱, 새로운 날개로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신앙생활에도, 특히 교회에도 이런 변화의 계기가 한번은 있어야 합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타성(惰性 - 오래되어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에 젖게 되고 영성도 둔해지고 늘어나는 것은 영적교만과 나태함 밖에 없습니다. 꼭 독수리가 40년이면 그 부리와 발톱과 날개가 제 구실을 못하는 모습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 부딪쳤을 때 용기를 내어 결단해야 합니다. 그대로 침륜에 빠져서 헤맬 것이냐? 아니면 독수리처럼 길어지고 무디어진 영적인 부리를 다 부셔 버리는 고통을 거쳐서 새롭게 거듭날 것이냐? 결정해야 합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려놓음과 기다림입니다. 독수리가 부리를 다 부시고, 발톱과 날개를 다 뽑아 버리듯이 우리도 지금까지 우리가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신앙의 지식이나 습관일 수도 있고, 애지중지하던 고정관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소중히 여겼던 자기의 의까지 과감하게 바위에 부딪쳐 부셔 버리기 전에는 새로운 부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새로 돋은 부리로 과감하게 발톱과 날개를 뽑아버리는 인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진정한 혁신을 기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부리가 날 때가지, 새 발톱이 나올 때까지, 새 날개가 돋을 때까지 고난의 과정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요셉이나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렇게 내려놓음과 기다림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부리와 발톱과 날개를 허락하셔서 다시 창공을 박차고 날아오를 수 있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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