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십자가의 전달자가 된 아브라함
창세기 22:1-18
십자가의 전달자 / 전영훈 작사‧작곡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 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벤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내 사랑 나의 십자가
▶ 예수님의 십자가 전달자였던 사도 바울
갈 2:20 / 그리스도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그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덕분에 지금 내가 참생명을 얻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옛사람인 사울을 죽게 하시고 거듭난 새사람인 바울로 태어나게 하시고 사도로 불러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신 것은 오직 자기 마음 뿐 아니라 몸까지 내어주신 100% 아니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다면 쓸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다.
♬ 찬송가 / The Love Of God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1절 / The love of God is greater fa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 하나님의 사랑은 혀와 펜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큽니다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l ; 그것은 가장 높은 별보다 더 높고, 가장 낮은 지옥에까지 미칩니다 ;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The guilty pair, bowed down with care, God gave His Son to win ; 근심으로 짓눌린 죄 많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His erring child He reconciled, And pardoned from his sin. 하나님은 그의 범죄하는 자녀를 화목하게 하시고,그리고 그의 죄에서 용서하셨습니다 ;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후렴> Oh, love of God, how rich and pure! How measureless and strong! ; 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풍성하고 순수한가! 얼마나 무한하고 강한가! ;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It shall forevermore endure The saints’ and angels’ song ; 그것은 영원히 계속하리 성도들과 천사들의 찬송일세 ;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2절 When hoary time shall pass away, And earthly thrones and kingdoms fall ; 괴로운(백발의) 시절이 지나가고, 땅의 왕위와 왕국이 무너질 때 ;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When men who here refuse to pray, on rocks and hills and mountains call ; 여기서 기도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바위와 언덕과 산들에서 부를 때 ; 주 믿지 않던 영혼 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God’s love so sure, shall still endure, All measureless and strong ; 모든 것이 무한하고 강한 하나님의 확실한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 되리 ;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Redeeming grace to Adam’s race The saints’ and angels’ song ; 아담의 종족을 구원하는 은혜 성도들과 천사들의 찬송일세 ;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절 Could we with ink the ocean fill, And were the skies of parchment made ; 우리가 잉크로서 바다를 채우고, 하늘을 두루마리로 만들 수 있어도 ;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Were every stalk on earth a quill, And every man a scribe by trade ; 땅에 있는 모든 줄기가 펜촉이 되고 모든 사람이 서기관이 되어도 ;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To write the love of God above Would drain the ocean dry ; 높은 하나님의 사랑을 쓸려면 (잉크의)바다가 말라 없어지며 ;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Nor could the scroll contain the whole, Though stretched from sky to sky ;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펼치더라도. 두루마리가 (하나님의) 전 사랑을 못담네 ;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당부하고 있다.
갈 6:11-16 / [마지막 권고와 인사] 나는 이 끝맺는 말을 내 손으로 쓰려고 합니다. 얼마나 큰 글자로 쓰는가를 잘 보십시오. 12) 그 교사들이 여러분을 설득해서 할례를 받게 하려는 이유는 단하나, 인기를 얻고 박해를 면하려는 심사에서 그러는 겁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했다가 박해를 받을까봐 겁이 난 것입니다. 13) 할례를 주장하는 교사들도 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을 자기들의 제자로 삼아 큰소리 치려고 할례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십자가 때문에 나는 오래 전에 이 세상의 온갖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이 세상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15) …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으로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16) 이 원리를 따라 사는 여러분과 또 참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각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이어서 자랑할 게 십자가 밖에 없다고 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자랑거리가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유대인들 뿐 아니라 지금의 크리스천들 그 어떤 누구와 비교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야 말로 최고 중에 최고였다.
빌 3:5-6 / 나는 순수한 유대인 혈통을 이어받아 오랜 전통의 베냐민 가문에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유대인의 표지를 받기 위해 할례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는 진짜 유대인입니다. 게다가 유대교의 모든 율법과 관습을 지키기를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는 바리새파 회원이었습니다. 6) 얼마나 그악스러웠던지 교회를 모조리 핍박했고 유대교의 모든 규칙과 규정을 빠짐없이 지키려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된 사울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심으로 지금까지 잘못된 신념과 추구했던 모든 것을 과감히 내던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념과 성도로서 추구해야 할 보화와 같은 것들을 얻기 위해 힘쓴다고 빌립보 교우들에 말했다.
빌 3:7-8 / 그러나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8)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하며 이 세상 부귀와 영예, 행복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이 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는다고 고백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주시면서 새로운 임무를 맡기실 때에 그는 생명을 다 받쳐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 뿐 아니라 세상 자랑꺼리조차 쓰레기처럼 여기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위에서 맞은 그분의 죽음 외에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었습니다.’(고전 2:2)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이다.
빌 3:9-11 / 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거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을 집어치우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0)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다 내던졌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11)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분이 가지는 신선하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확실한 십자가의 전달자가 되기 위하여 이렇게 표현했다.
갈 6:14 / 그러나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십자가 때문에 나는 오래 전에 이 세상의 온갖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이 세상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전달자로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자비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이 일을 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행 20:24)라고 하며 ‘나는 주님을 위해 오랫동안 어려운 싸움을 치러 오면서 주께 한결같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월계관이 하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내게 줄 월계관 말입니다. 이것은 내게만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열심히 기다리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딤후 4:7-8)라고 하였다. 즉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십자가의 전달자가 되기를 부탁까지 했다.
▶ 믿음의 선진들의 뒤를 따르는 우리도 얼마나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를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논쟁들을 버리고 믿음의 선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지켜 행하고 순종하기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쓰레기와 같이 가로막는 것이 없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에 보혜사 성령님께 임재하시며 도우실 것이다.
누구보다 무서운 고난을 받으며 잘 견디어 낸 욥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그 어느 누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비교조차 할 수 있겠는가? 욥기 38-41장에서 욥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욥이 마지막에 한 말은 우리의 평생에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높은 별보다 더 높고, 가장 낮은 지옥에까지 미쳐 우리가 잉크로서 바다를 채우고, 하늘을 두루마리로 만들 수 있어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욥과 같이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는 것만이 상책이다.
욥 42:1-6 / [하나님께 꿇어 엎드리다]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이렇게 아뢰었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을 나는 잘 압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3)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알지도 못하면서 내 계획을 가리는 자 그 누구냐고 말입니다.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 댔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일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해댔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듣고만 있으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해 보라고 말입니다. 5)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6) 이렇게 내가 꿇어 엎드립니다. 먼지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욥이 많은 고난을 겪은 것도 사실로 정금과 같이 나오기 위한 한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100%의 정금이라고 할지라도 감히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어느 누구도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약 5:10-11 /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로 이겨 낸 주님의 예언자들을 본받으십시오. 11) 그들은 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내 주께 진실했으므로 지금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욥은 슬픔을 이기며 끝까지 주님을 믿은 사람의 모범입니다. 욥이 겪어 낸 일을 보고 우리는 주님의 계획이 축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는 한없는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스펄전(C. Spurgeon)목사가 어느 날 눈물을 막 흘렸다.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목사님, 왜 눈물을 흘리십니까?” 이때 스펄전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서도 감동이 없기에 울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감동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던 스펄전 목사는 십자가를 생각하면서도 감동이 없자 안타까운 눈물을 흘린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감사의 눈물과 더불어 형제를 위하여서도 긍휼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요일 3:16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 십자가의 전달자가 된 아브라함
하나님을 알아갈 때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하나님에 관해서 깊이 생각을 한다든지 책이나 글을 통해서 사변적(思辨的)으로 이해하면서 알아 가는 방법으로 신학적 지식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인생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아 가는 방법으로 신앙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적 지식은 하나님을 보다 폭넓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주며, 이런 지식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리고 신학공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신학적 지식의 치명적인 약점은 그 지식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 것을 버리고 나서는 헌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더더욱 환란과 박해를 견디고 순교의 자리에까지 가도록 해 주지 못한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충성과 헌신과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힘은 신앙적 지식에서 나온다.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인생의 사건 속에서 체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 진정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이끌어 준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적 지식이 필요하다. 물론 신학적 지식도 필요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완적이요 보조적일 뿐이다.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믿음으로의 행함 또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우리들에게도 아브라함은 그런 진실한 믿음의 조상으로 강하게 인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전하는 것에는 야고보 사도가 외쳤던 말씀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과연 몇 %의 믿음이 있는지? 믿음의 선진들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100%의 순수한 신앙생활(믿음+사랑)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약 2:17-24 /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한 행실로 증명해 보이십시오. 증명해 내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죽은 것입니다. 18)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믿음만 있으면 될 뿐 아무 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선한 행동도 동시에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선한 행동이 없이는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동을 보여야만 사람들이 내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19)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런 당신도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믿겠지요? 맞습니다. 악마도 그걸 알고 있기에 공포에 떨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20)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을 작정입니까?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참다운 신앙이 아닙니다.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까지도 아들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기쁨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22) 아브라함은 조그마한 의심도 없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기쁨으로 복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가 실제로 취한 행동과 선행으로 완전해진 것입니다. 23) 이로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주께서는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셨다'고 되어 있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까지 불렸던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 두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산 믿음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처럼 복을 받는 것은 행함이 있기 때문이요 행함이 없음에도 복이 주어졌다면 참된 복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허공만 바라보며 복만 받고자 하는 거짓 복음이요 죽은 믿음일 뿐이다.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믿음의 후예들에게 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대로 순종하였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순종함으로 인하여 실제로 주어지는 은혜와 복을 받았다. 그러기에 ‘나는 아브라함의 후예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나도 받기 싶다.’고 말하기보다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간 길을 동서남북으로 행하여 주리라고 약속하신 은혜와 복을 받아야 할 것이다(창 13:17).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하여 주어질 복도 아니요, 복을 받을 수 있는 마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주실 하나님도 아니시며, 행함이 없는 사람에게 주실 하나님도 아니시다.
1. 동일한 약속을 계속 하시는 하나님
성경에는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이 참 많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약 1/3, 히브리서 11장의 3/10이 아브라함을 이야기 한다. 창세기 22장 16-18은 새로운 약속이 아니다. 창세기 22장 이전에 네 번이나 더 약속되었다. 그 약속이 창세기 22장에서 재확인되고 확증된 뿐이다. 그 내용을 읽어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확인해 주시는 것 자체도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아브라함 역시 믿음의 여정(旅程)에서 나약함을 여러 번 보여 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런 나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지속적으로 그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직접 확인해 주셨다. 사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초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을 소개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고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 아브라함을 들어 예로 쓰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럴지라도 아브라함의 순종은 본받아야 한다.
▶ 하란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던 아브람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➊ 창 12:1-3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➀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➁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➂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3) 네게 복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네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저주를 퍼부으리라. 무릇 땅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가족과 터전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➋ 창 12:7 / 이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 땅을 내가 네 후손들에게 주겠다.” 그러자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것을 기념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아 올렸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아브람에게 큰 민족의 시작이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이 땅 곧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순조로운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듯하지만 그 약속의 땅에 큰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다. 기근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떠나 인간적인 눈에 보이는 안전한 곳을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아내 사라로 인해 애굽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 걱정되어 누이로 속이는 행동까지 보인 아브람에게서 믿음의 조상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브람을 지켜주셨고 오히려 재정적인 복까지 허락하셨다.
자신의 울타리였던 친척들을 떠나 하란을 나올 때 자그마한 인간적인 의지의 대상이 되었을 롯을 떠나보낸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약속의 격려말씀을 해주셨다.
➌ 창 13:14-17 / 아브람아,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아라. 15) 네가 지금 둘러보고 있는 땅을 내가 모두 너와 너희 후손에게 주겠다. 앞으로 영원토록 이 땅이 너희의 차지가 될 것이다. 16) 또 내가 네 후손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하겠다. 땅의 티끌만큼이나 많게 할 것이다. 사람이 땅의 티끌을 모두 셀 수 있다면 네 후손이 얼마나 되는지도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겠다. 17) 그리고 온 땅을 사방으로 왔다갔다 해보아라. 내가 그 땅을 모두 네게 주겠다.
그 이후에도 자신에게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힘들어 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약속의 말씀을 하셨다.
➍ 창 15:3-5 / 아브람이 말을 이었다. “보십시오, 내게 자식이 없기에 우리 집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엘리에셀이란 종이 내 재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내게 자식을 허락하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4) 그러자 여호와의 말씀이 또 아브람에게 내렸다 “아니다. 네 종이 네 재산을 물려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몸에서 난 자식이 네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다. 걱정 말아라.” 5) 그리고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을 이으셨다. “아브람아, 보거라. 저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하늘에 저렇게 총총히 반짝이는 별을 다 셀 수가 있겠느냐? 네 후손이 하늘에 떠 있는 저 무수한 별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세월이 어언간 10년이 될 무렵,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조급함으로 인하여 애굽 출신의 하갈이라는 몸종을 소실로 맞아들이도록 아브람에게 종용한다. “여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자식 하나 주지 않으시는군요. 그러니 당신이 내 몸종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게 어떻겠어요? 그러면 혹시라도 내 대신 그녀가 우리에게 자식을 안겨줄지 누가 알아요?” 이렇게 하여 아브람의 아내 사라는 몸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남편에게 데려와 소실로 맞아들이게 하였다(창 16:1-3).
아람이 86세에 소실 하갈이 잉태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고, 이후에 성경에 별 다른 기록이 없이 13년이란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아브람이 나이 99세가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➎ 창 17:1-6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언제나 내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도록 하여라.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라. 그리고 바른 길만 걷도록 하여라. 2) 나는 너와 계약을 맺어 네 후손이 수도 없이 불어나게 하리라.”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르셨다. 4)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이제 너는 수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리라. 내가 분명히 약속하마. 5)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다. ‘수많은 무리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라고 부를 것이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아브라함이다. 6) 나는 네 후손이 수도 없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 가운데에서는 여러 왕도 나올 것이다.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여러 나라를 이룰 것이다.”
▶ 이렇듯 지속적인 약속의 말씀이 있었지만, 자식이 없는 현실 상황을 바라보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그 약속의 말씀을 굳건히 믿을만한 믿음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앞에서 불신과 실수를 보이던 아브라함과 사라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 믿음의 단련의 시기를 순종으로 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말도 안 된다고 웃기도 했을 것이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믿음으로 밀어붙이기도 했을 것이고, 하나님께 정말 하나님의 약속이 맞는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에서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믿음에 기초한 순종이었다. 100% 확신(온전한 믿음)은 아닐지라도 “Yes. Lord!”라고 대답하며 따르고자 애썼던 믿음과 행함(순종)!!
여기에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고향을 떠나온 지 25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제 100세나 되었다. 그러나 약속을 믿는 그 믿음은 그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믿음이 깊은 여자였습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아기를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개정개역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히 11:11)
아브라함이나 사라 역시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다. 인간적으로 상황은 끝났을지라도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었다. 처음 약속을 주신 때나 25년이 지난 지금이나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은 동일하다고 믿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실 것을 믿었다. 사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전 보다 훨씬 늙었다. 성경은 사라가 나이 늙어 단산하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의 말씀만은 놓지 않았다. 로마서 4장 19절에서 21절은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사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과 사라의 몸이 죽은 자와 방불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현실적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그들의 남은 생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것을 의심치 않았다.
창세기 18:1-15에 지나가는 나그네까지 대접한 사례를 보자.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으로 손님 접대를 직접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 볼 때에 저들이 믿음이 식어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지금까지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을지라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기네들과 함께 하심을 믿었으며 하나님 뜻대로 사는 일에는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히 13:2 / 잊지 말고 나그네에게 친절히 대하십시오. 늘 나그네를 잘 대접하던 어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일도 있었습니다.
옛날 말에 고목나무에서도 꽃이 핀다고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는 그들이 살아있지만 잉태할 수는 없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순응한 것처럼 이들 역시 천사의 말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표현한다면 웃음도 아니요 비웃음도 아닌 웃음 –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의 웃음을 확실한 웃음 ‘이삭’으로 바꾸어주셨다.
창 18:9-15 / 식사를 하면서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그대 부인 사라는 어디에 계시오?' `예, 지금 저 천막 안에 있습니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10) 그 손님들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내년 이맘때쯤에 내가 다시 이 집으로 찾아올 것이오 그때쯤 되면 그대의 부인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때 사라는 아브라함의 뒤 천막 문간에 서서 이렇게 오가는 말을 들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 늙었고 사리는 달거리가 끊긴 지 오래되었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이리도 늙었고 내 남편도 저렇게 나이 많이 먹었는데 잠자리를 같이 한다고 무슨 낙이 있겠나' 하고 중얼거렸다. 13) 그러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아니, 사라가 나의 말을 듣고 비웃기만 하는구나 그러고는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자식을 낳으랴' 하는구나. 14) 아니, 그래 나 여호와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느냐? 내가 조금 전에도 말하였다만 내년 이맘때쯤이면 내가 반드시 이 집에 다시 찾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가 분명히 아들을 낳을 것이다.' 15) 그러자 사라는 무서워하면서 `난 비웃지 않았어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아니다. 너는 분명히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웃었다.' 하고 나무라셨다.
사라가 속으로 웃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 차이가 너무 켰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이가 많아 생리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 내년 이맘 때에 아이를 낳는다고 하니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왜 말씀하시나? 주시려면 일찍 주시지.’라고 비웃는 듯이 웃었다. 당치도 않는 말씀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하셨다. 이때 사라는 굉장히 두려웠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속으로 웃는 것까지 꿰뚫어보신다는 것을 알고, 사라는 하나님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웃었느니라’라고 하셨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 사라와 하나님께서 말다툼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여유로움과 친근함을 느낀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정의 문제에 대해 느긋하셨다. 창세기 18편을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장막 문 뒤에서 속으로 웃은 것을 가지고 계속 말씀하셨을까?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데 …. 왜 계속 말씀하셨을까? 계속해서 확인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묻어있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약속했으니, 너는 기뻐하고 웃으며,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의미이다. 기쁨으로 받아주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은 50%가 아니라 90%도 아니라 100%라는 말이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사라가 겉으로 드러내고 웃지 못했다. 속으로 웃었을 뿐이다. 그런데 창세기 21장에 보면, 사라가 기쁨으로 웃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웃게 하셨다. 늦었지만 사라는 자신을 웃게 하신 하나님께 제대로 반응했다. 사라는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짓고,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절망을 보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미래를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상처와 아픔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다. 성도들이 무엇 때문에 절망하는가를 잘 아신다. 내가 나의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하다.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웃을 수 있다. 하나님은 웃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냥 웃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웃게 하신다.
2. 창세기 21장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었다.
약속대로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난 세월 ‘너를 통해 많은 민족이 일어날 것’이라는 약속과 씨름하며 순종과 불순종, 믿음과 불신을 반복했던 과거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불신으로 인한 불순종에 대한 기억에서 아브라함은 많은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느꼈으며, 자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솔직히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십자가의 전달자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싸움은 22장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르게 되었다.
창 22:1-2 / 이삭이 점점 자라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기로 하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2) “네가 무척 아끼는 외아들 이삭이 있지 않느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그리로 가면 내가 네게 산 하나를 일러 줄 터인데 그 산으로 올라가거라. 거기서 네 아들을 내게 번제물로 바치거라.”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는 없다. 단지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떠나는 순종의 모습만이 나올 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그 순간부터 아마도 아브라함의 머릿속은 한동안 멍했으며, 이어서 갖가지 질문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이삭이 태어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한 그 기쁨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던 75세의 시기까지 백업이 되며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매 장면마다 물음표를 단 채 말이다.
창 22:10-12 / 그리고 칼을 들어 아들을 제물로 잡으려고 하는 순간 11)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 왔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아브라함을 급히 부르는 것이었다. “예, 듣고 있습니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12) “멈추어라.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내가 분명히 알았다. 네가 그렇게도 아끼는 외아들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내게 바치는 걸 보니 네가 얼마만큼 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지 또 네가 얼마나 나를 신뢰하고 섬기는지 내가 잘 알게 되었다.”
얼마나 다급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인가! 그 순간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로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에게도 드러나는 순간이다. 다시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셨다.
창 22:16-18 / “나 여호와가 말한다.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두고 분명히 맹세하노라.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게 바쳤으니 17) 내가 네게 복을 내리리라. 한없이 복을 내리리라. 내가 분명하게 약속한다만 네 후손이 하늘에서 총총히 빛내는 별처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지리라. 네 후손들이 그 원수들을 쳐부수고 원수들의 성을 정복해 버리리라. 18) 또한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뭇백성들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네가 내 말을 잘 따랐기 때문이다.”
▶ 얼핏 보면 지금껏 앞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곳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조건적인 말씀을 덧붙여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이 조건적인 이유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이런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내가 너로 수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고, 그 기다림 끝에 얻은 아들을 내게 번제로 내 놓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내 약속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브라함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믿음의 단련’이다. 아브라함은 과거 뿐 아니라 지금도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에 몰랐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는 우리만이 아닌 아브라함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통해 일어날 일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선택과 순종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연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고, 조금만 더 믿어 보아라.’ 이런 응원의 말씀으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응원하신다. 지쳐 포기할까봐 계속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말이다.
♬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1절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들어쓰리라 천지는 변해도 나의 약속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낙심하며 실망치 말라 낙심하며 실망치 말라 실망치 말라 네 소원 이루는 날 속히 오리니 내게 영광돌리리 영광의 그날이 속히 오리니 내게 찬양하리라
2절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들어쓰리라 세상의 소망이 사라졌어도 온전히 나를 믿으라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인내하며 부르짖으라 인내하며 부르짖으라 부르짖으라 네 소원 이루는 날 속히 오리니 내게 영광돌리리 영광의 그날이 속히 오리니 내게 찬양하리라
▣ 아브라함의 심정 대하여 이렇게 표현해 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아브라함이 있는 곳 낙원은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낙원에서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눅 16장).
아브라함은 어떤 고난도 피하지 않고 전진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그곳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아니 무슨 청천 병력인가? 100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지금 성경에서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를 알고 있으니까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르나 아브라함은 얼마나 놀라며 마음이 떨렸겠는가? “주여 당신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이삭을 통하여 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마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명령입니까?” 아브라함은 온 밤을 눈물로 모순과 씨름하며 밤을 꼬박 새우며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했을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체념했을까? 요나처럼 도망갔던가? 끝까지 원망하고 복종하지 않았던가? 아니다. 밤이 맞도록 고민한 아브라함이었지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사환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마련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으로 갔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다만 그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한데 있다. 아브라함은 이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인내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3일 동안 모리아 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주실 때는 언제이고 달라고 하실 때는 언제인가?’라는 모순과 자기의 순종과 싸움을 했을 것이다. 고통을 씹으며 걸어가는 모습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시던 예수님의 고난을 연상케 한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음마다 핏자국이었듯이 아브라함의 걸음마다 눈물이 고였을 것이다. 자기가 제물이 되어 바쳐질 것도 모르고 순진스럽게 잠든 이삭을 바라볼 때 아브라함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났을 것이다.
창세기 22:2을 보면 ‘네가 무척 아끼는 외아들 이삭이 있지 않느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그리로 가면 내가 네게 산 하나를 일러 줄 터인데 그 산으로 올라가거라. 거기서 네 아들을 내게 번제물로 바치거라.’고 하셨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셨다. 100세에 낳은 아들이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외아들을 바치라니 순종하기가 어렵다. 번제란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이다. 가죽을 벗기고, 고기는 각을 뜨고 번제단에 올려놓은 후 불로 태워드린다. 내장도 씻어서 불에 태우고, 피는 번제단 주변에 뿌린다. 자신이 기른 양이나 송아지일지라도 가슴이 아프건만 외아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바칠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 자신을 번제로 바치는 것이라면 자신이 결단하고 자신이 결행하면 된다. 그러나 독립된 인격과 생각을 가진 이삭을 어떻게 아버지 마음대로 바칠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잡으려면 서로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삭을 바치기엔 너무나 어려운 조건들이 가로막혀 있었다.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에 이삭이 갑자기 물었다. “아버지! 여기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초대 교부 오리겐은 ‘진정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이 기사를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고 토로하였다. 우리 같으면 이때 울음을 터뜨리며 ‘하나님!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이삭아! 돌아가자. 나는 더 이상 순종하지 못하겠다’고 항명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복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막연한 믿음 아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믿음을 가졌기에 결국 놀랍게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아브라함은 고통을 인내로 참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전진했다. 아브라함은 버릴 것을 버리는 믿음을 가졌다. 아브라함이 위대했던 것은 버릴 때 버릴 줄 아는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버려야 했다.
이삭을 바칠 시간이 왔다. 이삭을 단 위에 묶어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는 순간 아브라함은 자기를 죽이는 것 같았고,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종의 손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들 이삭에게 너는 제물이 되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순종하라고 할 때처럼 그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삭의 몸부림 속에 아브라함의 마음은 찢어질 대로 찢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도 놀랍지만 33세(?)된 이삭의 순종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그 심정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사야가 기록한 어린양을 보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라고 했다. 이삭은 어린양 예수님의 그림자였다. 사실 이삭의 순종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범과 교육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요한 일도 윽박지른 일도 없었지만, 이삭은 아버지의 순종과 믿음을 보고 배웠기에 순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삭은 훌륭한 교사 아브라함 때문에 위대한 순종의 사람이 되었다. 내가 순종하면 자식도 순종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모두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르짖던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괴로워하시던 하나님과 예수님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아픔의 부르짖음은 더 큰 은혜 더 큰 축복을 낳기 위한 진통의 소리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땅히 있어야할 소리였다.
히 11:17-19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을 때도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아 제단 위에서 그를 죽여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18)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삭을 통해서 그의 자손이 퍼져 나가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하였습니다. 19) 만일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죽을 운명에 놓여 있던 이삭이 살아 있는 그대로 다시 아브라함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 영문밖의 길 / 1.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
2. 한 발자욱 두 발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병정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욱마다 가진 포악 지셨구나
3.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4. 아픈 다리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사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할지라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5. 십자가에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가오랴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하나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거기에다 제단을 쌓아 올리고 그 제단 위에 장작을 포개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삭을 꽁꽁 묶어서는 제단 위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만약 그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였더라면 기독교는 영원히 비윤리적인 종교가 되어 인류에게 외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여호와 이레 / 창 22:10-18 / 그리고 칼을 들어 아들을 제물로 잡으려고 하는 순간 11)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 왔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아브라함을 급히 부르는 것이었다. `예, 듣고 있습니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12) `멈추어라.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내가 분명히 알았다. 네가 그렇게도 아끼는 외아들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내게 바치는 걸 보니 네가 얼마만큼 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지, 또 네가 얼마나 나를 신뢰하고 섬기는지 내가 잘 알게 되었다.' 13) 아브라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그런데 숫양 한 마리가 가시덤불에 뿔이 걸려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브라함은 그곳으로 가서 숫양을 끌고 와서는 이삭 대신에 그 숫양을 번제물로 잡아 드렸다. 14) 그래서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다'는 뜻으로 그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의 산에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주신다'고 말하게 되었다. 15) 여호와의 심부름꾼이 두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셨다. 16) `나 여호와가 말한다.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두고 분명히 맹세하노라.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게 바쳤으니 17) 내가 네게 복을 내리리라. 한없이 복을 내리리라. 내가 분명하게 약속한다만 네 후손이 하늘에서 총총히 빛내는 별처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지리라. 네 후손들이 그 원수들을 쳐부수고 원수들의 성을 정복해 버리리라. 18) 또한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뭇백성들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네가 내 말을 잘 따랐기 때문이다.'
▶ 그런데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친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다. 죄악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구속을 위한 희생의 피가 요구되었다. 하나님은 그 구속을 위한 희생의 피를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흘리실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시고자 하신 것이 아브라함의 번제 사건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은 살려 주셨으나,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 제물로 희생시키셨다. 그러니까 가장 큰 희생과 헌신은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셨다.
이삭은 번제물이 되려다가 그만 두었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 희생 제물이 되셨다. 자식을 죽도록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의 아픔, 그것은 곧 독생자를 사랑하시되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을 죽게 하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아픔이었다. 아브라함의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독생자를 너희의 죄 때문에 죽여야 하는 내 아픔과 슬픔을, 그리고 사랑을 너희가 깨달아 알기를 원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럴지라도 자식까지 번제물로 드린 아브라함의 순종은 순종의 극치요 순종과 약속하신 축복의 꼭짓점이었다. 우리 또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면서 그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늘의 별과 같은 경건한 의인들 즉 십자가의 전달자일 것이다.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모세의 뒤를 잇는 수많은 십자가의 전달자가 있었다. 이에 히브리서 11:32-40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히 11:32-40 / 이제 얼마나 더 말해야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 밖에 다른 예언자들의 신앙에 대해서 다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이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였으며 자기 백성들을 정의로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해를 받지 않았고 34) 맹렬히 타는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나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죽음의 칼날을 피해서 위험을 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들고 연약하였으나 믿음으로 다시 건강하게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전쟁터에서 믿음으로 큰 힘을 얻어 적군을 전부 격퇴시키고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35) 그리고 어떤 여자들은 믿음이 있었으므로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차 더 나은 생명의 부활을 얻으려고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신 매 맞고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유의 몸이 되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36) 어떤 사람들은 조소당하고 매맞고, 다른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37-38) 어떤 사람들은 돌에 맞아 죽고, 어떤 사람은 톱에 두 동강으로 잘려 죽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버리고 풀려나기 보다는 칼에 맞아 죽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변장을 하고 광야와 산을 방황하였고 동굴이나 토굴에서 숨어 살며 굶주림과 병과 학대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39) 이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것을 전부 다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4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두신 것을 그들에게도 주시려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수많은 십자가의 전달자가 있었기에 십자가는 우리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에 히브리서 10:32-11:2과 12:1-3을 마감의 말씀으로 삼고자 한다. 이들의 뒤를 이어 우리도 십자가의 전달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히 10:32-11:2 /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던 때의 아름다운 날들을 언제까지나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또 무서운 고난을 겪으면서도 주님과 함께 이겨 낸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33) 어떤 때 여러분은 조소를 당하고 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때는 그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34) 감옥에 갇힌 자들과 아픔을 함께 하고 또 여러분의 재산을 다 빼앗긴다 해도 기쁨으로 견디어 낸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있는 더 좋은 것이 영원히 여러분의 것이 되어 기다리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35)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장차 여러분이 받을 보상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36)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이 그다지 많이 지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38)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주께 대한 믿음과 신뢰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뒷걸음질 쳐 물러서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39)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거나 비참한 운명에 처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히 11:1)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2) 예전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도 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히 12:1-3 /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둘러앉아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속도를 늦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다리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를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2)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3) 만일 여러분이 지치거나 낙심케 되거든 죄인들의 무서운 만행을 참고 견디신 예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