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의 노래, 정태춘> 극장 개봉 전 특별 상영회가 숲속작은책방에서 열렸습니다.
4월의 마지막 밤....봄꽃향기 맡으며 야외에서 감상하는 영화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로망으로 야심차게 야외 상영회를 준비했지요. 한동안 너무나 따뜻해서 밤에 정원에 나서면 밤의 느낌이 너무나 좋았는데 하필 며칠 전부터 비가 오고 날씨가 쌀쌀해졌지 뭐예요....오시는 분들이 겨울 패딩 준비해 오셨어야 할텐데, 생각하며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책방에서 처음 시도해 본 야외 상영회....과연 스크린이며 장비가 제대로 기능할까에 대한 고민을 안고 날이 밝았습니다. 우리가 한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성사가 되었어요.
괴산 이웃인 오정훈 감독님이 애쓰셔서 충북시청자미디어센터랑 연결이 되었습니다. 고광연 센터장님께서는 너무나 친절하게 장비들을 싣고 직원과 책방으로 출장을 나와 주셨어요. 가로 4미터 30cm의 엄청난 대형 스크린을 뚝딱뚝딱 조립해서 세워 올리는 순간....감동했지 뭐예요.
책방 정원에 의자들을 펴고, 본격적인 영화 상영 준비가 시작됩니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오후의 햇빛이 스크린에 투과되면서 너무나 멋진 설치예술을 만들어내고 있었어요. 살구나무 그림자가 붉은 노을 사이로 빛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어떤 화가도 그려낼 수 없는 자연이 만들어낸 순간의 예술이었습니다.
6시부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일찌감치 관객들이 찾아 오셨어요...날씨가 쌀쌀해 뜨거운 물을 끓여 차를 준비했습니다. 차가운 밤바람에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책방에 있는 온갖 무릎담요들을 찾아내놓았습니다.
감독님께서 가져오신 영화 팸플릿과 5,18 노래 악보....여기 더해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책도 챙겨두었습니다.
아...그런데 6시가 되어 해는 떨어졌어도, 아직 주변은 환해요.
영상을 켜보았더니 스크린에 비치는 그림이 너무나 희미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영화 상영 이후에 하기로 했던 감독과의 대화를 앞으로 옮깁니다. 시간을 끌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감독님은 긴 시간 동안,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 작업 과정 이야기, 이미 십 수년 이상 인연을 맺어온 사이지만 새삼스럽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수 년간 촬영하며 만난 정태춘 박은옥 두 분의 진솔한 삶의 모습, 그리고 지금 이 시대 정태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묵직한 이야기들까지 많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출장을 마치고 곧장 괴산으로 오셔서 많이 피곤하셨을텐데,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애써주셨습니다.
드디어 어둑어둑 해가 지고, 희미하게 시작된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가 청년 시절부터 너무나 사랑했던 음악들이 마치 공연처럼 울려 퍼집니다.....
영화는 주저리주저리 긴 사설들을 모두 덜어내고 마치 110분 동안 정태춘 박은옥 특별 콘서트처럼 아주 담백하게 그의 음악들을 풀어 놓습니다. 음악을 짧게 끊지않고 되도록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한 게 음악 다큐멘터리의 감동을 더해주었습니다.
어두워갈수록 영상은 더욱더 또렷해져가고, 음악 다큐멘터리의 힘을 살리기 위해 악기 하나하나 다 따로 녹음을 했다는 감독님의 수고의 결과, 사운드가 너무나 좋아서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 현장 라이브 공연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곡이 끝날 때면 영화 속 관객들처럼 우리도 함께 박수를 치고,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같이 떼창도 불러보고요. 공연을 마치고 퇴장할 때는 열렬히 앙코르를 외쳐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스크린 뒤에서 두 분이 곧 걸어 나오실 듯한 환상을 가져보게 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어요.
어두워갈수록 바람이 불고, 막 뒤의 살구나무가 바스스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마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처럼 적절히 새 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가 섞여들어 추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영화와 몰아일체가 되었습니다. 주최자의 입장에서 계속 걱정이 되었으나 앞 좌석에 앉은 분들은 미동도 없이 두 시간을 자리를 지키시더군요.
춥고 쌀쌀했어도 이 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영화가 주는 감동과 몰입도가 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발이 시렵도록 추웠던 4월의 마지막 날, 봄밤의 이 싸늘함이 영화의 감동과 맞물려 더욱 이 날을 잊지 못하게 했던 추억의 한자락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뭐든 너무 순조롭기만 하고, 사연없는 날은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니까요.
전문 단체이니 만큼 충북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들고 온 장비들의 위용은 엄청났습니다. 주말을 꼬박 반납해야 했던 젊은 직원은, 오늘 이 자리에서 정태춘의 음악을 처음으로 들어본다고 했는데....아마도 이 사람이 뭐길래 나는 이 자리에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불평으로 시작했을지도 모를 그의 토요일 밤은 그러나 따뜻한 감동과 새로운 음악의 발견으로 끝이 났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영화 속에 보면 '청계피복노조' 일일찻집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회적 발언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서정적인 히트가요를 부르는 대중가수였던 정태춘 님께 처음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단체.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분이 과연 와줄까 반신반의하며 그래도 섭외전화를 했던 이들에게 한 마디로 좋다고 응답하고 단숨에 달려와서 무료로 공연을 해주었고, 덕분에 일일찻집은 성황을 이루어서 힘겹던 노조투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정태춘 님은 이렇게 집회 시위의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곤 하셨는데요....
바로 그때 섭외를 하셨던 청계피복노조 김한영 조합원 님이 이날 영화의 자리에 함께하셨습니다. 감독님은 깜짝 놀라셨어요. 이 분을 찾으려고 많이 애를 썼다고 하셨고 어쩌면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하며 반가운 웃음을 나누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건 바로 이분이 얼마 전 괴산으로 이주하셨기 때문이지요....
영화를 마치고, 모두들 추위에 떨며 얼른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으나....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많은 분들께서 감독님 사인과 사진찍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감독님이 <워낭소리>의 제작자인 걸 알았던 분은 그 영화를 보며 얼마나 감동했었는지 이야기하며 울컥해서 눈물까지 보이셨어요. 바로 이런 관객들을 현장에서 만나는 게 감독으로서 제작자로서 큰 기쁨과 보람이 아닐까요...그러고 싶어서 관객과의 대화, GV 를 하는 것이겠지요.
늦은 밤, 막은 내리고....주최자들은 아쉬움에 돌아가지 못해 책방에 남았습니다.
감독님과 실무자들은 새벽까지 못다한 이야기, 영화 이야기, 만남과 인연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끝내는 노래 한 자락까지 나눈 후에야 흩어지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책방 정원에서 야외 영화 보기....책방지기의 오랜 로망이 이렇게 참 우연하게도 이루어졌습니다.
어쩌면 이 멋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씬 스틸러가 될 뻔하기도 했던 숲속작은책방은, 마지막 편집에서 잘려나갔지만....그래도 엔딩 크레딧에 이름 한 줄로 살아남았고 오늘의 특별 상영회로 그 인연의 끈을 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정태춘이라는 음악인과 작은 인연으로 함께했던 그 시간들은 제 맘속에 추억 한 장으로 박제되어 남았습니다.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