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
신라 33대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형 효소왕이 702년 17살의 나이로 죽자 성덕왕 또한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은 35년간 왕위에 있었다. 전쟁이 없어 신라 중기의 가장 평화로운 시대로 평가되는 시기에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개발했다. 그러나 형 효소왕이 17세에 사망하고, 성덕왕도 세자 책봉의 과정 없이 어린 나이에 국인들의 추천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는 귀족들의 권력다툼에 의한 왕손들이 자리에 오르고 내렸던 것으로 국정이 귀족들에 의해 움직여 왕권은 약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성덕왕이 첫 번째 왕비를 내치고 김순원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고, 성덕왕의 아들 34대 효성왕도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아야 했다. 김순원의 권력이 조정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중국의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김교각은 성덕왕의 큰아들이라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김교각 지장의 본래 이름이 중경이었다는 기록과 성덕왕의 첫 번째 세자 중경이라는 이름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김교각이 성덕왕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 김교각의 새옹지마
김교각은 통일신라가 가장 평화로운 시기에 성덕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의 복이란 복은 모두 타고난 행운아로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화려한 시대는 짧았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잠잠해 백성들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농업과 상업 등의 생업에 몰두할 수 있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권을 둘러싸고 권력다툼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효소왕을 17세에 몰아내고 성덕왕을 왕위에 올린 세력들은 다시 주도권 싸움을 시작했다. 이찬 김순원은 일찍이 자신의 딸 소덕을 후궁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성덕왕 15년에 중경과 수충을 낳은 성정왕후를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잠재운다는 등의 이유로 궁에서 내보냈다. 다음해인 717년 태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덕왕은 집권 7년을 넘어서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보다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군으로 소임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지역을 직접 돌아보는 행보를 자주 가졌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궁내의 일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결국, 왕비를 내쳐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서 태자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성덕왕은 김순원 세력의 정치적 압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태자인 아들 중경의 생명이 위험함을 직감하고, 왕은 중경을 내실로 불러 눈물의 이별을 고했다. “아들아, 아비가 못나 네 신병을 편하게 돌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비밀호위 일곱을 각자 너로 분장해 중국으로 피신하게 할 터이니 그중 하나와 승려로 위장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라. 다시는 신라로 돌아올 생각도 말고.”
어머니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본 중경은 왕인 아버지의 늘어진 어깨를 힘없이 바라보다 엎드려 절을 올리고는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산소에 절을 올린 중경은 호위무사 김진과 함께 유람하듯 오히려 추적자의 뒤를 밟으며 중국으로 도망가는 유학의 길에 올랐다.
중경의 뒤를 추적하던 김순원의 살수들은 하나같이 중국 경계지역에서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더이상 추적하지 마시오. 나는 살아서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중경’이라는 목간을 받아들었다. 김순원도 일곱 갈래로 추적했던 대원들이 같은 소식을 들고 돌아오자 추적을 포기했다.
성덕왕은 거짓 신분을 위장한 시신을 화장하고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김순원 세력도 태자에 대한 의혹을 추궁하지 않고 태자의 사망 소식을 공식화 하는데 동의했다. 이어 자신의 딸을 소덕왕후로 삼게 했다. 김순원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갈수록 심해져 성덕왕이 죽자 소덕왕후의 아들이 34대 효성왕에 오르게 했다. 또 그는 다른 딸을 효성왕에게 시집보내 왕후로 삼게 했다. 효성왕은 결국 이모와 결혼해 왕비로 삼아야 했다.
중경은 이름을 김교각으로 바꾸어 도망할 때 입었던 승복을 그대로 걸치고 수도에 정진했다. 그는 구화산에서 화성사를 지어 불법을 전파하는데 열중했다. 김교각의 명성이 지장보살로 널리 퍼지면서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신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김교각은 794년 99세 되는 어느 날 마지막 설법을 하고 참선하면서 조용히 입적했다. 그의 시신이 3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아 등신불이 되었다. 구화산 지장보전에는 아직도 그의 등신불이 봉안되어 있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소재가 되어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그는 죽어 등신불이 되었고, 중국의 신도들이 제작한 입상으로 고향 땅 경주로 돌아와 대중을 만나고 있다.
첫댓글 김교각의 본래 이름은 중경
성덕왕의 세자 이름이 중경
김교각이 성덕왕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직접적인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