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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인류의 문명은 찬란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요. (천둥 낙뢰 그리고 산불 동영상), 그것은 아주 우연한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 찬란한 탄생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불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빛과 어둠, 창조와 혼돈,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갈랐습니다. 인류의 문명이 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문자도 바퀴도 농업도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석상, 기원전 1만년 전 세워진 미스터리한 고대 유적입니다, (괴베클리 테페/터키 샨리우르파), 터키 중남부에서 발굴된 괴베클리 테페는 동굴 밖으로 나온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건축물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신전, 괴베클리 테페), 아마도 약육강식의 시대였을 것입니다. 수렵으로 연명하던 시절, 인류는 왜 이런 거대한 유적을 만들었을까요. (BC 2500 Stonehenge), 영국의 스톤헨지, (BC 2600 Pyramid), 이집트의 피라미드, (BC 4000 Ziggurat),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BC 10000 Gobekli Tepe), 괴베클리 테페는 인류 최초의 신전인지 모릅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거대한 존재에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폭력과 야만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단 하나 불이었습니다. 문자도 바퀴도 없던 시절 인간의 공동체는 불의 온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몇천년이 흘렀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불 속에서 전혀 다른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과/일본), 자전거를 타던 아이도,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가던 중학생도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떨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은 총23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섭씨 3900도의 뜨거운 불에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녹아 내렸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불은 인류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잔인한 힘이라는 사실을, 불은 사물을 태울 수 있는 선물이었지만 그의 끝없는 고통도 함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중국 선천성 둔황 윈깡 눈 먼 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 중 하나라고 불리는 다쭈 석굴 (중국 쓰촨성) 입니다. 돌산을 깎아 정교하게 만들어진 5만여 개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당나라 초기부터 시작하여 연 나라와 청 나라에 이르기까지 천년에 걸쳐 제작된 예술작품입니다. 불교 도교 유교의 사상에 어우러진 암각화들, 1985년 어느날 이곳에서 좀 특이한 부조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많은 역사 학자들은 이것을 화약무기의 한 종류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항아리, 하얗게 폭발력을 이용한 화염이 앞으로 발사되는 부조가 무기 같았습니다. 흡사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둔황 석굴에서 발견된 그림 한 점 (부처를 방해하는 귀신들/10세기 둔황), 그 그림에 나온 아나가 사용한 무기와 비슷했습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화약무기일까요.
토니오 안드라데/미국 에모리대학 역사학과 교수: 그것은 화약무기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확정짓는 증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은 증거들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증거는 우리가 이는 최초의 화약 배합법이 중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문헌상에도 화창(fire lance), 화약을 넣은 화살 화약 폭탄 등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나타납니다. 그러한 증거는 어느 곳보다도 먼저 중국에서 최초로 등장합니다.
리이첸 순/미국 캘리포니아주립 풀러톤대학 역사학과 교수: 제 생각에는 1128년 만들어진 다쭈 석각이 화약 무기를 묘사한다는 조세프 니덤과 중국인 전문가 판지싱의 주장은 너무 멀리 갔습니다. 저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중국인 학자들도 그 부조가 화약 무기를 든 군인이 아니라 바람의 신, 풍신(風神)이라고 주장합니다.
내레이션: 물론 화약 이전에도 중국인들은 전쟁 무기로 불을 사용했습니다. (무경총요(1044년)에 모사된 화공법), 불을 짊어진 사람은 꼬리에 불이 붙은 새들을 적진에 들여 보냈습니다. 적진 이곳 저곳에 불이 났습니다. 단쭈 석굴에 대한 논쟁은 뜨겁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중국의 화약 무기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126년 화약을 대규모로 사용한 전투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1126년 카이펑 전투(송나라 대 금나라)),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거란과 서안을 차례로 격파한 금나라는 파죽지세로 송나라로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벌판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벽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공성전이었습니다. 불꽃이 달린 돌덩어리가 날아 다니고 불화살이 창공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화약 무기가 전면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화력전이었습니다.
안드라데: 송나라, 가령 카이펑 전투에서는 대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폭탄이 있었습니다. 철과 다른 물질이 혼합되어 터지는 폭탄들의 크기가 커졌습니다. 그들은 투석기(catapult)로 그것들을 발사했습니다.
내레이션: 화약 폭탄은 전쟁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투석기는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이제는 돌덩어리 대신 화약 폭탄을 날려 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드라데: 대포와 총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커다란 대포가 벽과 문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있었던 건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투석기가 쏘아 올린 폭탄이 성 안에서 터지는 식이었습니다. 대포 자체는 나중에 등장했지만 많은 이들이 투석기를 대포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죠.
내레이션: 그렇다면 유럽에서의 화약 무기 역사는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이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크라이스처치 도서관에는 1326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화약에 불을 부쳐 화약을 발사하는 이 무기는 중국의 화약 무기와 거의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보다는 200년이 늦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 200년의 차이가 중국이 유럽에 화약무기를 전달해 주었다는 강력한 증거일까요? 전문가들도 흔히 중국과 유럽 사이에 있는 이슬람 국가나 몽골제국이 화약을 전래하는 통로가 되었다고 추측합니다. 가능성은 높습니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근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안드라데: 아마 (화약무기는)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곳에서 확산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명확한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전파의 확실한 증거가 없는 거죠.
라이첸: 화약무기 기술의 전래에 관해서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한국인 최무선입니다. 그가 유일하죠. 1374년 최무선이 중국인 상인을 초청해서 화약 무기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화약이 어떻게 나머지 지역으로 전파되었는지는 안타깝게도 알 수 없습니다.
내레이션: 화약 무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 중세유럽의 전쟁 무기는 주로 창과 칼이었습니다. (왕실 무기박물관/영국 리즈), 화살은 쉴새 없이 날아들었고 적의 창과 칼은 갑옷에 빈틈을 노렸습니다. 직접 맞붙어서 베고 찔러야 하는 근접전이었습니다. 몸과 몸이 부딪쳐야 했습니다. 적의 함성과 신음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어야 했습니다. 유럽의 벌판에서 이런 백병전은 수천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5세기 프랑스와 영국이 맞붙은 100년 전쟁까지도 말입니다.
켈리 드브리스/미국 메릴랜드 로욜라대학 역사학과 교수: 대검을 주 사용했습니다. 군대에 있는 모든 사람은 대검과 단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검은 찌르는 용도이고 단검은 죽이는 용도입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단검으로 눈을 찌르거나 목을 찌르거나 급소를 찔렀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죽였습니다. 죽일 목적이 아니라면 아무 무기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대검이나 죽창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단검, 망치 등 사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사용했습니다.
내레이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열 아홉,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기 그녀를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열 아홉 살하고도 네 다섯 달 미천한 삶을 살았고, 육신이 남긴 재는 바람에 흩어졌네. 그녀의 이름은 잔 다르크입니다. (잔 다르크 부조/프랑스 오를레앙),----------1429년 동맹인의 처녀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습니다.
켈리: 왕은 며칠 동안 그녀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죠. 마침내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결정을 했을 때 왕은 그녀를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내 부하에게 내 옷을 입히고 나는 뒤에 서 있겠다. 만약 그녀가 부하에게 간다면 그녀는 신의 명령을 받은 게 아니다. 하지만 왕의 옷을 입지 않은 내게 와서 내가 왕임을 알아 본다면 그녀가 신의 임무를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내레이션: 잔 다르크는 그렇게 시험에 들었습니다. 성 안에 모든 이들이 프랑스를 구하겠다고 찾아온 16살 소녀의 처지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잔 다르크는 가짜 왕을 지나쳐 300명의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샤를 7세 앞으로 다가 갔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의 왕입니다. 왜 이런 옷을 입고 계십니까. 당신과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신이 저를 보냈습니다. 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 보았습니다. 잔 다르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날이었습니다. 백년전쟁이 남긴 영웅 중에는 프랑스의 19살 소녀 잔 다르크가 있습니다. 조국 프랑스를 구한 소녀, 성녀인지 마녀인지 역사에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에서 대포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오를레앙 대성당/프랑스 오를레앙), 잉글랜드군에서 일곱 달 이상 포위되어 있었던 오를레앙, 잔 다르크는 단 9일만에 그 포위망을 깨버립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녀가 나타나면 용이 불을 뿜는다고 사람들은 수근거렸습니다. 그 불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다름 아닌 대포였습니다.
안드라데: 잔 다르크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지만 아주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대포를 배치하는 전술에 있어서요. 기록에 특히 대포 배치에 라는 용어가 아주 확실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잔 다르크가 포수(artillerist)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잔 다르크를 검을 든 채 군대를 이끈 처녀로 생각하지만 실제 그녀는 아니, 거기에 놓지 말고 여기에 대포를 놓으세요 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켈리: 대포는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 모두 사용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 장군들이 귀족출신이었던 데 반해 잔 다르크는 귀족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층민 출신 포병들과 말이 잘 통했습니다. 귀족이나 장군은 하층민에게 절대 말을 걸지 않았거든요. 귀족들은 오직 다른 귀족들 하고만 말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포병들에게 어떻게 발사하는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어디를 쏘아야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잔 다르크는 당시 어느 장군들 보다도 화약 무기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레이션: 대포가 처음으로 유럽전쟁터에 등장했을 때 대포는 평민들의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대포의 화력은 화약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가공할 살상무기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당시 프랑스 귀족이나 장군들은 대포를 멀리했던 것일까요.
크리스토프 뽀미에/프랑스 군사박물관 큐레이터: 멀리서 사람을 해치는 대포는 기사의 위엄을 갖추지 못한 노동자나 하층민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포는 신비로운 무기였고 심리적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말과 사람들은 대포가 뿜어내는 굉음과 검은 포연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지옥의 불덩이와 연관지어 생각했습니다. 멀리서 쏘아 사람을 죽이고 화약 냄새를 풍기는 것을 비겁자의 행동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오를레앙 전투, 1429),
내레이션: 대포는 비겁한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대포를 비겁한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대포의 파괴력을 믿었습니다. 오를레앙 전투에서 잔 다르크가 세운 대포는 단 세 대, 하지만 그 세대의 대포만으로 백년전쟁의 향방은 바뀌었습니다.
켈리: 1440년이 되면 대포가 매우 커집니다. 300~400 파운드의 포탄으로 쏠 수 있었습니다.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성벽이 다 무너지기도 전에 겁에 질려 항복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대포와 전투방식이 생겨났습니다. 한번은 성벽 바로 밑에 포탄이 떨어졌는데 땅이 너무 흔들려서 성 안의 사람들이 항복한 적도 있습니다.
내레이션: 15세기 중반 유럽은 바야흐로 대포의 시대였습니다. 문제는 누가 더 큰 대포를 가지느냐 였습니다. (몬스 멕(Mons Meg)/스코틀랜드 에든버러성), 길이 4미터, 무게 7톤, 1454년에 제작된 이 거대한 대포는 무려 200킬로그램의 포탄을 날릴 수 있었습니다. 빅건의 시대, 초대형 대포가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시대가 왔습니다. 서기 330년 로마제국은 로마를 버리고 이 도시로 왔습니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Istanbul)입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인들에게도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반드시 다시 되찾아야 하는 성스러운 땅이었습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도시와 맞서 싸우다가 3분의 1은 도주할 것이고, 3분의 1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3분의 1은 승리를 거둘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건물의 지붕은 땅 위에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황금사슬로 하늘에 매달려있는 것 같다.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물은 아야 소피아입니다 (하기야 소피아/아야 소피아/터키 이스탄불), 1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곳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900년은 하기아 소피아라는 동로마 제국의 성당이었고 500년은 아야 소피아라는 이름의 이슬람 사원이었습니다. 서기 537년에 지어진 이래 천년 동안 무려 스물 세번의 외침을 견뎌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중세 기독교의 마지막 보석이었습니다.
로저 크롤리/역사학자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저자: 콘스탄티노플의 또 다른 특징은 엄청난 명성이었습니다. 굉장히 부유해서 물질적인 측면에서 아주 가치 있는 곳이었죠. 투르크족은 이곳을 ‘빨간 사과’ 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탐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로마 제국의 위신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를 함락하는 것은 카이사르의 명성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천혜의 요새 콘스탄티노플 사진),
내레이션: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남쪽 바다는 물살이 너무 세서 상륙이 불가능했습니다. 북쪽 바다는 길이 800미터의 쇠사슬 장벽이 있어 어떠한 배도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터키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의 서쪽 테오도시우스 성벽입니다. 총 길이 6.5킬로미터, 내벽과 외벽 그리고 깊은 해자의 3중 구조로 이루어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방어무기였습니다.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거나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올라가는 방식으로는 콘스탄티노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단 수천 명의 군사만으로도 10만 명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하지만 천년 제국 동로마 제국을 지켜주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메흐메트 (1432~1481년) 2세가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에 8만명의 이슬람 군을 집결시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라는 무하마드의 유언이 800년만에 이루어지는 듯 했습니다. 이슬람군은 막강했습니다. 소규모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콘스탄티노플 안으로는 침입할 수 없었습니다. 사상자들이 속출했습니다. 메흐메트 2세는 드디어 비장의 무기를 끌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황소 600마리가 끌고온 초대형 대포였습니다.
로저: (메흐메트가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실리카, 위대한 대포다. 바로 이것이 너희들에게 가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인 무기이면서 심리적 무기였습니다. “이 위대한 기계가 너희들의 성벽을 부수러 가고 있다”
켈리: 모든 대포들이 특히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린 대포는 벽 바로 옆에서 발포되었습니다. 30미터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비잔티움은 성벽 위에서 대포를 공격할 무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대포를 망가뜨릴 만한 무기는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내레이션: 신의 거룩한 이름이 새겨진 초대형 대포 바실리카는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습니다. (당시 제작된 초대형 대포/영국 포트 넬슨), 600킬로그램 이상의 돌덩어리를 1.5키로미터 이상 날릴 수 있었습니다. 포신이 분리될 수 있어 이동하는데도 유리했습니다. 이런 초대형 대포 여러 대가 성 벽 앞에 배치됐습니다. 메흐메트 2세는 모두 5천발 이상의 포탄을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이미 퍼부었습니다. 1453년 5월 29일새벽 메흐메트 2세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구멍이 뚫린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들어오는 메흐메트 2세의 대군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성 안에는 고작 2000명의 방어군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1453년 5월 29일), 전투 개시 57일만에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됐습니다. 무너져 내린 성벽은 그대로 서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이 도시의 이름은 바뀌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블이 되었고 하기야 소피아는 아야 소피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포 때문이었습니다.
켈리: 1453년의 두 사건,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백년전쟁의 끝이라는 두 사건은 우연입니다. 흥미롭게도 두 사건 모두 대포가 사용되었습니다.
내레이션: 화약무기는 점점 우월한 전쟁 무기가 되었습니다. 중세의 기사는 몰락했습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영국 왕실박물관), 총과 대포를 가진 자가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화약이라는 새로운 불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중세 시대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중세가 저물고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국적인 상품들이 유럽으로 쏟아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유럽인들이 가질 수는 있지만 만들 수는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중국 도자기), 중국의 도자기였습니다. 최초로 중국 도자기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싶었던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독일 마이센 도자기), 하지만 아무리 모방해도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도자기 굽는 고온의 불 기술이 유럽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Wedgwood England 1759), (웨지우드 박물관/영국 스토크온 트렌드), 1759년 영국의 조 사이어 웨지우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자기 브랜드를 만듭니다. 유럽 최초로 영국은 스스로의 기술력으로 도자기를 굽는데 성공합니다. 화약의 불은 아시아에서 왔지만 도자기의 불은 유럽인 스스로 지펴 올렸습니다. 고급 도자기 브랜드, 재스퍼웨어 (Jasperware)도 만들어냈습니다. 조 사이어 웨지우드는 재료공학자에 가까웠습니다. 고온계를 만들어 가마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습니다. (웨지우드가 만든 고온계), 완벽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샘플을 수집했고 비교 했습니다. (웨지우드가 실험했던 도자기 샘플), 이런 그의 끝없는 노력의 정점은 전혀 새로운 도자기를 탄생시킵니다. 동물의 뼛가루를 섞어 만든 도자기, 본 차이나, 본 차이나는 중국이 아닌 영국의 웨지우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본 차이나는 뼈라는 뜻의 본과 도자기라는 뜻의 차이나가 합쳐진 이름입니다. (본 차이나=본(bone)+차이나 (china)), 동물의 뼛가루를 섞음으로서 점토의 점성을 높이고 낮은 온도에서도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었습니다.
게이 블레이크/영국 웨지우드사 큐레이터: 극적으로 다른 점은 (본 차이나에는) 50% 이상의 뼛가루가 함유된다는 사실입니다. 동물의 뼛가루를 갈면 아주 질 좋은 흰색 가루가 되는데 점토에 섞을 수도 있고 불에 구우면 엄청난 강도와 반투명성을 갖게 됩니다.
내레이션: 하얀 영국산 도자기는 색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검고 어두운 벽돌 집에서 살고 있던 영국인들에게 그것은 새로운 국가적 자부심이었습니다. 본 차이나는 영국 여왕에게도 바쳐졌습니다. 하지만 런던 시내 매장에서도 대중들에게 큰 인기였습니다. 이제 누구나 자기를 가질 수 있고 누구나 차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마크 미오도닉/영국 UCL 기계공학과 교수: 영국에는 천년 넘게 아주 정교한 도자기가 없었습니다. 도자기는 한국, 중국 같은 곳에서 배로 실려 왔습니다. 사람들은 반투명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도자기 특히 자기를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모방하고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내고자 노력했지만 500년 동안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그토록 아름답고 반투명한 흰색의 도자기를 만든 것은 위대한 국가적 자부심의 표시였습니다.
내레이션: 왜 하필 영국이 전 유럽의 도자기 강국이 되었을까요. 그 답은 바로 석탄에 있습니다. 석탄이 새로운 불, 새로운 에너지를 영국에 안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게이: 웨지우드는 석탄이 도자기 산업에 가지는 중요성 뿐만 아니라 석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도 깨달았습니다. 웨지우드는 실제로 증기 엔진을 이용한 최초의 도자기 제작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볼튼이나 와트처럼 좋은 친구들과 루나 소사이어티의 회원들이 있었고 그들이 개발한 증기 엔진은 웨지우드의 에트루리아 공장에 도입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열과 불입니다. 실제로는 기술이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레이션: 중국과 인도가 전 세계 GDP의 3분의 2를 차지할 때가 있었습니다. (원명원/중국 베이징), 원명원은 바로크와 로코코, 동양의 누각들, 유럽과 중국의 건축 양식을 혼합하여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강국을 꿈꾸던 청나라 건륭제의 야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끝내 이룰 수 없었습니다. 초목은 사라지고 분수의 물도 말라버렸습니다. 무너진 기둥은 이름 모를 비석이 되었습니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이곳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로버트 마르크스/미국 휘티어대학 역사학과 교수: 원명원은 아름다운 건물이었습니다. 그곳을 만든 이는 건륭제였습니다. 그곳은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컸습니다. 주로 유럽식 대리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내레이션: 이제 대포는 커지고 강해졌습니다. (포트 넬슨/영국 페어햄), 철판도 쉽게 뚫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포트 넬슨 요새, 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영국군들을 기리는 꽃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꽃의 다른 이름은 양귀비입니다. 아편전쟁의 양귀비들이 버려진 대포들 사이에 있습니다. 화약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대포가 되어 다시 아시아로 돌아왔습니다. 화약이라는 물질이 거대한 역사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화약이 아시아의 불이었다면 석탄과 도자기 대포와 증기 기관차는 유럽의 불이었습니다. 그 불의 경쟁에서 아시아가 패배했던 것입니다. 세계의 중심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시기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윈저성입니다. 중국인들에게 원명원이 있다면 영국인들에게는 이곳 윈저성이 있습니다. 대영제국을 완성한 이는 빅토리아 여왕이었습니다. 151센티미터의 키 작은 여왕이었지만 64년 재위기간 동안 전 세계를 호령했습니다. 빅토리아 제국의 해는 지지 않았습니다. 인도를 정복하고 중국을 굴복시킨 것도 그녀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동물을 좋아했습니다. 아편전쟁 당시 원명원에서 약탈해온 다섯 마리의 중국 황실 개 중 한 마리가 여왕에게 바쳐집니;다. 루티 라는 이름의 패키니지였습니다. (루티 (Looty): 훔쳐온 개라는 뜻), 이 개의 이름 루티는 훔쳐온 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훔쳐온 개 루티는 중국 황실에서 자랐지만 영국 왕실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독일 나치는 라이안 민족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흰색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독일 알라흐(Allach) 도자기), 새로운 도자기는 새로운 문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고급 도자기들은 나치 대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었고 일상생활 용품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도자기를 구워낸 사람들은 다름 아닌 독일 강제수용소 안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독일 뮌헨),
안드레아스 킬/알라흐 도자기 수집가: 도자기 공장을 알라흐에서 다하우로 옮긴 이유는 생산량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장소가 협소 했거든요. 강제수용소 옆 예전 밀가루 공장터로 알라흐 도자기 공장을 옮겨왔습니다.
내레이션: 백여 명의 수감자들이 도자기를 굽는 강제 노역에 투입되었습니다. 아리안 민족의 영혼을 위해 유대인들의 육신이 필요했습니다. 도자기 공장과 바로 이웃한 다하우 강제수용소, (다하우 강제수용소/독일 뮌헨), 이 수용소 안에는 또 다른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포로들의 시체를 태운 소각로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하라’ 도자기를 굽던 그 불이 수많은 인간을 재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야만적인 불이었습니다. 문명의 아름다움을 만든 불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자취를 태워버린 야만의 물이었습니다. 문명과 야만의 두 얼굴, 그것은 불의 얼굴일까요. 아니면 우리 인간의 얼굴이었을까요. 아주 오래된 약속을 기억해 봅니다. 불은 우리의 아름다움이었고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었습니다. 20세기, 우리는 불의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문명의 온기를 전해준 불, 이 야만의 시대를 넘어 꿈과 신화의 시절로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끝. (EBS 다큐프라임 1458회 5부 불, 문명과 야만의 두 얼굴에서 정리).
① 인류의 문명은 찬란하다.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 그것은 아주 우연한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리 찬란한 탄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다. 빛과 어둠, 창조와 혼돈,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갈랐다. 인류의 문명이 불에서 시작되었다. 문자도 바퀴도 농업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석상, 기원전 1만년 전 세워진 미스터리한 고대 유적이 있다, 터키 중남부에서 발굴된 괴베클리 테페는 동굴 밖으로 나온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건축물이었다. 아마도 약육강식의 시대였을 것이다. 수렵으로 연명하던 시절, 인류는 왜 이런 거대한 유적을 만들었을까. (BC 2500 Stonehenge), 영국의 스톤헨지, (BC 2600 Pyramid), 이집트의 피라미드, (BC 4000 Ziggurat),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BC 10000 Gobekli Tepe), 괴베클리 테페는 인류 최초의 신전인지 모른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거대한 존재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폭력과 야만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단 하나 불이었다. 문자도 바퀴도 없던 시절 인간의 공동체는 불의 온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몇천년이 흘렀다.
② 어느날 우리는 불 속에서 전혀 다른 힘을 발견하였다. 자전거를 타던 아이도,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가던 중학생도 모두 불에 타버렸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떨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은 총23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섭씨 3900도의 뜨거운 불에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녹아 내렸다.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불은 인류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잔인한 힘이라는 사실을, 불은 사물을 태울 수 있는 선물이었지만 그의 끝없는 고통도 함께 가지게 된 것이다.
중국 선천성 둔황 윈깡 눈 먼 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 중 하나라고 불리는 다쭈 석굴이다. 돌산을 깎아 정교하게 만들어진 5만여 개의 조각상이 있다. 당나라 초기부터 시작하여 연 나라와 청 나라에 이르기까지 천년에 걸쳐 제작된 예술작품이다. 불교 도교 유교의 사상에 어우러진 암각화들, 1985년 어느날 이곳에서 좀 특이한 부조 하나가 발견되었다. 많은 역사 학자들은 이것을 화약무기의 한 종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항아리, 하얗게 폭발력을 이용한 화염이 앞으로 발사되는 부조가 무기 같았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화약무기일까.
③ 그것은 화약무기일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것을 확정짓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작은 증거들은 많이 있다. 우리가 이는 최초의 화약 배합법은 중국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문헌상에도 화창(fire lance), 화약을 넣은 화살 화약 폭탄 등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나타난다. 그러한 증거는 어느 곳보다도 먼저 중국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물론 화약 이전에도 중국인들은 전쟁 무기로 불을 사용했다. 1126년 화약을 대규모로 사용한 전투가 실제로 있었다.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거란과 서안을 차례로 격파한 금나라는 파죽지세로 송나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벌판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벽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공성전이었다. 불꽃이 달린 돌덩어리가 날아 다니고 불화살이 창공을 가르고 있었다. 세계 최초로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화약 무기가 전면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화력전이었다. 송나라, 가령 카이펑 전투에서는 대포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폭탄이 있었다. 철과 다른 물질이 혼합되어 터지는 폭탄들의 크기가 커졌다. 그들은 투석기(catapult)로 그것들을 발사했다. 화약 폭탄은 전쟁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투석기는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이제는 돌덩어리 대신 화약 폭탄을 날려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④ 대포와 총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커다란 대포가 벽과 문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 있었던 건 그런게 아니었다. 당시에는 투석기가 쏘아 올린 폭탄이 성 안에서 터지는 식이었다. 대포 자체는 나중에 등장했지만 많은 이들이 투석기를 대포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유럽에서의 화약 무기 역사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크라이스처치 도서관에는 1326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다. 화약에 불을 부쳐 화약을 발사하는 이 무기는 중국의 화약 무기와 거의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중국보다는 200년이 늦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 200년의 차이가 중국이 유럽에 화약무기를 전달해 주었다는 강력한 증거일까. 전문가들도 흔히 중국과 유럽 사이에 있는 이슬람 국가나 몽골제국이 화약을 전래하는 통로가 되었다고 추측한다.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근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⑤ 화약무기 기술의 전래에 관해서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한국인 최무선이다. 1374년 최무선이 중국인 상인을 초청해서 화약 무기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중국의 화약이 어떻게 나머지 지역으로 전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화약 무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 중세유럽의 전쟁 무기는 주로 창과 칼이었다. 화살은 쉴새 없이 날아들었고 적의 창과 칼은 갑옷에 빈틈을 노렸다. 직접 맞붙어서 베고 찔러야 하는 근접전이었다. 몸과 몸이 부딪쳐야 했다. 적의 함성과 신음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어야 했다. 유럽의 벌판에서 이런 백병전은 수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15세기 프랑스와 영국이 맞붙은 100년 전쟁까지도 그랬다.
⑥ 1429년 시골 농촌의 19살 처녀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를 만나러 왔다. 당신과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신이 저를 보냈다. 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 보았다. 잔 다르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날이었다. 백년전쟁이 남긴 영웅 중에는 프랑스의 19살 소녀 잔 다르크가 있다. 조국 프랑스를 구한 소녀, 역사에 남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에서 대포를 사용했다. 잉글랜드군에서 일곱 달 이상 포위되어 있었던 오를레앙, 잔 다르크는 단 9일만에 그 포위망을 깨버린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녀가 나타나면 용이 불을 뿜는다고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그 불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대포였다.
⑦ 잔 다르크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지만 아주 훌륭한 지도자였다. 특히 대포를 배치하는 전술에 있어서다. 잔 다르크는 포수(artillerist)였다. 잔 다르크를 검을 든 채 군대를 이끈 처녀가 아니라 그녀는 대포 사격에 익숙한 평범한 처녀였다. 대포는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 모두 사용했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 장군들이 귀족출신이었던 데 반해 잔 다르크는 귀족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층민 출신 포병들과 말이 잘 통했다. 귀족이나 장군은 하층민에게 절대 말을 걸지 않았다. 귀족들은 오직 다른 귀족들 하고만 말했다. 잔 다르크는 포병들에게 어떻게 발사하는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어디를 쏘아야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마도 잔 다르크는 당시 어느 장군들 보다도 화약 무기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었다.
⑧ 대포가 처음으로 유럽전쟁터에 등장했을 때 대포는 평민들의 무기였다. 하지만 대포의 화력은 화약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가공할 살상무기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당시 프랑스 귀족이나 장군들은 대포를 멀리했던 것일까. 멀리서 사람을 해치는 대포는 기사의 위엄을 갖추지 못한 노동자나 하층민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포는 신비로운 무기였고 심리적 공포를 심어주었다. 말과 사람들은 대포가 뿜어내는 굉음과 검은 포연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그것을 지옥의 불덩이와 연관지어 생각했다. 멀리서 쏘아 사람을 죽이고 화약 냄새를 풍기는 것을 비겁자의 행동으로 생각하였다. 대포는 비겁한 무기였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대포를 비겁한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포의 파괴력을 믿었다. 오를레앙 전투에서 잔 다르크가 세운 대포는 단 세 대, 하지만 그 세대의 대포만으로 백년전쟁의 향방은 바뀌었다.
⑨ 1440년이 되면 대포가 매우 커진다. 300~400 파운드의 포탄으로 쏠 수 있었다.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때는 성벽이 다 무너지기도 전에 겁에 질려 항복하기도 했다. 한번은 성벽 바로 밑에 포탄이 떨어졌는데 땅이 너무 흔들려서 성 안의 사람들이 항복한 적도 있다. 15세기 중반 유럽은 대포의 시대였다. 문제는 누가 더 큰 대포를 가지느냐. 길이 4미터, 무게 7톤, 1454년에 제작된 이 거대한 대포는 무려 200킬로그램의 포탄을 날릴 수 있었다. 빅건의 시대, 초대형 대포가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시대가 왔다. 서기 330년 로마제국은 로마를 버리고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Istanbul)로 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인들에게도 소중한 곳이었다. 반드시 다시 되찾아야 하는 성스러운 땅이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콘스탄티노플 점령 유언을 남겼다. 서기 537년에 지어진 이래 천년 동안 무려 스물 세번의 외침을 견뎌냈다. 콘스탄티노플은 중세 기독교의 마지막 보석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단 수천 명의 군사만으로도 10만 명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천년 제국 동로마 제국을 지켜주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⑩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메흐메트 (1432~1481년) 2세가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에 8만명의 이슬람 군을 집결시킨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라는 무하마드의 유언이 800년만에 이루어지는 듯 했다. 이슬람군은 막강했다. 소규모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콘스탄티노플 안으로는 침입할 수 없었다.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메흐메트 2세는 드디어 비장의 무기를 끌고 나왔다. 그것은 황소 600마리가 끌고온 초대형 대포였다. 위대한 바실리카 대포다. 모든 대포들이 특히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린 대포는 벽 바로 옆에서 발포되었다. 30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비잔티움은 성벽 위에서 대포를 공격할 무기가 없었다. 적어도 대포를 망가뜨릴 만한 무기는 그들에게는 없었다. 신의 거룩한 이름이 새겨진 초대형 대포 바실리카는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600킬로그램 이상의 돌덩어리를 1.5키로미터 이상 날릴 수 있었다. 포신이 분리될 수 있어 이동하는데도 유리했다. 이런 초대형 대포 여러 대가 성 벽 앞에 배치됐다. 메흐메트 2세는 모두 5천발 이상의 포탄을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이미 퍼부었다.
⑪ 1453년 5월 29일새벽 메흐메트 2세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미 구멍이 뚫린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들어오는 메흐메트 2세의 대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 안에는 고작 2000명의 방어군이 있었다. 전투 개시 57일만에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5월 29일 함락됐다. 무너져 내린 성벽은 그대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이 도시의 이름은 바뀌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블이 되었고 하기야 소피아는 아야 소피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대포 때문이었다. 1453년의 두 사건,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백년전쟁의 끝이라는 두 사건은 우연이다. 흥미롭게도 두 사건 모두 대포가 사용되었다. 화약무기는 점점 우월한 전쟁 무기가 되었다. 이로서 중세의 기사는 몰락했다. 총과 대포를 가진 자가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화약이라는 새로운 불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중세 시대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덧 중세가 저물고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대항해 시대, 이국적인 상품들이 유럽으로 쏟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유럽인들이 가질 수는 있지만 만들 수는 없는 것이 있었다. 중국의 도자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모방해도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자기 굽는 고온의 불 기술이 유럽인들에게는 없었다.
⑫ 1759년 영국의 조 사이어 웨지우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자기 브랜드를 만든다. 유럽 최초로 영국은 스스로의 기술력으로 도자기를 굽는데 성공한다. 화약의 불은 아시아에서 왔지만 도자기의 불은 유럽인 스스로 지펴 올렸다. 고급 도자기 브랜드, 재스퍼웨어 (Jasperware)도 만들어냈다. 조 사이어 웨지우드는 재료공학자에 가까웠다. 고온계를 만들어 가마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완벽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샘플을 수집했고 비교했다. 이런 그의 끝없는 노력의 정점은 전혀 새로운 도자기를 탄생시킨다. 동물의 뼛가루를 섞어 만든 도자기, 본 차이나, 본 차이나는 중국이 아닌 영국의 웨지우드가 만들어낸 것이다. 본 차이나는 뼈라는 뜻의 본과 도자기라는 뜻의 차이나가 합쳐진 이름이다. 동물의 뼛가루를 섞음으로서 점토의 점성을 높이고 낮은 온도에서도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⑬ 하얀 영국산 도자기는 색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검고 어두운 벽돌 집에서 살고 있던 영국인들에게 그것은 새로운 국가적 자부심이었다. 본 차이나는 영국 여왕에게도 바쳐졌다. 누구나 자기를 가질 수 있고 누구나 차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영국에는 천년 넘게 아주 정교한 도자기가 없었다. 도자기는 한국, 중국 같은 곳에서 배로 실려 왔다. 사람들은 반투명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도자기 특히 자기를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모방하고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내고자 노력했지만 500년 동안 실패했다. 그러다가 그토록 아름답고 반투명한 흰색의 도자기를 만든 것은 위대한 국가적 자부심의 표시였다. 왜 하필 영국이 전 유럽의 도자기 강국이 되었을까. 그 답은 바로 석탄에 있다. 석탄이 새로운 불, 새로운 열을 영국에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열과 불이다.
⑭ 중국과 인도가 전 세계 GDP의 3분의 2를 차지할 때가 있었다. 원명원에는 세계 최강국을 꿈꾸던 청나라 건륭제의 야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끝내 이룰 수 없었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이곳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고 대포로 쏘았다. 화약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불이었다. 그리고 그 불은 대포가 되어 다시 아시아로 돌아왔다. 화약이라는 물질이 거대한 역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화약이 아시아의 불이었다면 석탄과 도자기 대포와 증기 기관차는 유럽의 불이었다. 그 불의 경쟁에서 아시아가 패배했다. 세계의 중심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윈저성, 중국인들에게 원명원이 있다면 영국인들에게는 윈저성이 있다. 대영제국을 완성한 이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재위 64년 동안 전 세계를 호령했다. 빅토리아 제국의 해는 지지 않았다. 인도를 정복하고 중국을 굴복시킨 것도 그녀였다.
⑮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독일 나치는 라이안 민족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흰색 도자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도자기는 새로운 문명의 상징이었다. 이 도자기를 구워낸 사람들은 다름 아닌 독일 강제수용소 안에 유대인들이었다. 도자기 공장 다하우에서 백여 명의 수감자들이 도자기를 굽는 강제 노역에 투입되었다. 도자기 공장과 바로 이웃한 다하우 강제수용소 안에서는 또 다른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유대인 포로들의 시체를 태운 소각로다. ‘우리가 이곳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하라’ 라는 정규와 유언, 도자기를 굽던 그 불이 수많은 인간을 재로 만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야만적인 불이었다. 문명의 아름다움을 만든 불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자취를 태워버린 야만의 물이었다. 문명과 야만의 두 얼굴, 불은 우리의 아름다움이었고 믿음이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었다. 20세기, 우리는 불의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넘어 꿈과 신화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