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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종한 안드레아(5.29) 기본정보
성인명 김종한 안드레아 (金宗漢 Andrew)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양반,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6년
같은이름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신자들 사이에서 ‘계원’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Andreas)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할아버지이다.
김 안드레아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뒤, 맏형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에 앞서 그의 맏형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도움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한편 김 안드레아의 부친인 김진후 비오는 처음에 입교를 거부하였으나, 계속되는 자식들의 권유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부친 김 비오가 박해를 받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의 자녀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도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김 안드레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끊임없는 기도 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는 거의 일상이 되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또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안드레아는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감영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김 안드레아가 신앙을 증언할 차례였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권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여러 차례의 형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김 안드레아는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게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김종한은 마음 깊이 천주교를 좋아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도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혀 왔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김 안드레아는 옥중에서 두 통의 편지를 형에게 보내고, 교우들에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 영혼 구원의 세 가지 원수. 곧 육신, 세속, 마귀를 이른다)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종한 안드레아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되어서야 임금은 사형을 윤허하였다. 그러자 대구 감사는 즉시 천주교 신자들을 옥에서 끌어내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 안드레아가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는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안드레아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2. 김희성 · 김종한
복자 124위 열전.
순교한 아버지의 신앙 이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 살다 기쁘게 순교
경북 동북부 봉화ㆍ영양ㆍ청송군은 조선 후기에도 3대 오지로 꼽혔다. 그랬기에 천주교 신자들, 특히 충청도 내포 출신 신자들이 험준한 낙동정맥(태백산맥) 내륙에 몰려들어 교우촌을 이뤘다.
현재의 경북 봉화군 재산면 새골길(갈산리) 일대 봉화 ‘우련밭’이나 새골길에서 영양군 수비면 남회룡로(신암리) 경계에 걸쳐 있는 영양 ‘곧은정’도 숱한 경상도 교우촌 가운데 일부였다. 지금도 봉화군은 1읍 9면에 인구 3만 4000여 명이 사는 작은 지방 자치 단체이고, 1읍 5면의 영양군은 지금도 군 전체 인구가 1만 8000여 명에 그쳐 읍 설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오지다.
이처럼 험준한 산악 지역의 척박한 풍토 속에서도 신자들은 굳게 신앙 공동체를 이뤘다. 그렇지만 1815년에 일어난 을해박해로 우련밭이나 곧은정 교우촌은 와해되다시피 한다.
- 복자 김희성.
당시 곧은정 교우촌에서 살다가 잡혀가 순교한 복자로는 내포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출신의 김희성(프란치스코, 1765∼181)이 있다.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김광옥(안드레아) 복자가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후엔 유학을 버리고 교리를 배우는데 힘썼다. 교리 공부를 통해 열심한 신자가 된 그는 기도와 자선 실천에 앞장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그의 열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의지 또한 더 굳어졌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경북 영양군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바로 영양현 곧은정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하고 육신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삶을 살았고, 급한 성격을 극복했으며, 오래지 않아 ‘인내의 모범’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10여 년간에 걸친 신앙 생활도 을해박해가 일어나면서 막을 내린다. 밀고자가 포졸을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산에 올라가 있던 그는 아들 문악에게 “나는 천주님의 명을 따라 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거라” 하고 말하고는 기쁜 낯으로 포졸과 밀고자를 따라 나섰다.
안동 진영에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그는 결코 굴하지 않았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후에도 감영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항구한 신앙심을 보였다. 이후 동료들과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하던 그는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내려져 181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복자 김종한.
영양현 우련밭(현재 봉화군)에서 오랫동안 숨어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김종한(안드레아, ?∼1816) 역시 내포 출신이다. 충청도 면천 솔뫼(현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에서 태어난 그는 김진후(비오) 복자의 아들이자 성 김 데레사의 아버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다. 족보에는 이름이 ‘한현’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신자들 사이에서는 ‘계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785년 이전에 입교한 맏형 김종현에게 교리를 배워 몇 년 뒤 입교했다. 그의 부친 김진후는 체포와 석방, 형벌, 유배를 번갈아 당하다가 1814년 해미옥에서 옥사했는데, 그동안 김종한의 신앙은 오히려 굳건해져 언제든지 시련을 이겨낼 덕행을 갖추게 됐다.
김진후가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김종한은 자신의 가족과 함께 홍주(현 홍성)를 거쳐 영양현 우련밭에서 살았다. 그는 특히 교리 실천에 열심이었다. 끊임없는 기도생활과 이웃을 위한 자선 실천, 신심을 함양을 위한 극기행위는 일상이었다. 낮에는 교회 서적을 필사해 교우들에게 나눠주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놓고 가르쳤다. 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해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체포돼 안동을 거쳐 대구로 이송돼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옥에 갇힌 지 1년 6개월 가량 지나 181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초대 교회 이후 그리스도교에 나타나는 영성의 특징 중 하나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희성이나 김종한 등 을해박해 순교 복자들의 삶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적 삶’이라는 영성이 공통으로 드러난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종한은 “무슨 일이든지 예수를 위하여 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삶의 최종 목적인 천국은 예수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힘줘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들 순교 복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행복한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1월 11일, 오세택 기자]
3. 대구지역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1816)의 순교 이야기
왜 사느냐 묻거든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 물으면 ‘마지못해 산다.’, ‘그냥 산다.’, ‘아무 생각이 없다.’고 답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 때는 잊고 지내다가 장례미사에 참여할 때면 더 느끼게 된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그런 때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가 남긴 편지를 읽어 보면 어떨까?
“실로 누구라도 한 번 죽는 것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 중요한 것은 선종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겠습니까? 사람이 할 일 중에 가장 큰 일은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천국을 얻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이라, 그것을 잘 사용하면 선한 것이고 나쁘게 사용하면 나쁜 것입니다. 마치 사다리와 같아서 그것을 타고 올라갈 수도 내려올 수도 있는 것이지요. … 모든 게 지향을 선하게 두었느냐 악하게 두었느냐에 달린 것이므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 감내하면, 그것이 영혼 구원에 작용하고 천국을 얻게 해 줍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고통의 현실이 그의 영혼을 흔들었지만 그의 신앙과 일상의 삶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을 향한 그의 노력과 힘들 때 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교우들의 기도를 청할 줄 아는 겸손한 영혼이었기 때문이리라. 김종한 안드레아는 충청도 솔뫼에서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경상도 영양 산골에서 살았다. 1815년 포졸들에게 잡힐 때까지 17년 동안 끊임없는 기도와 자선 그리고 극기로 덕행을 쌓으며 복음을 전하다 대구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님! 저희 삶의 목적도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빌어주소서!
[2014년 7월 6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대구주보 4면, 글 대구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그림 김효애 크리스티나]
4. 김진후 비오ㆍ종한 안드레아 부자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28)
대를 이은 빛나는 순교 가문 김대건 신부에서 꽃 피우다
- 신앙 선조 김진후와 김종한 부자, 김대건 신부 등이 대를 이어 살았던 신앙의 터전 솔뫼성지에 2004년 복원한 생가. 1998년 7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 생가터 1587.60㎡(450평) 대지에 정부 지원금 4억 2000여만 원을 들여 세워졌다. 생가는 전통 한옥 구조로, 당시 내포 양반층이 살던 집 형태를 근거로 건립했다. 최근엔 생가 일부를 성체조배실로 꾸며 순례자들이 성체신심을 다지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믿음은 대를 잇고 복음의 씨앗은 세상에 퍼져나간다. 김진후(족보명 운조, 비오, 1739~1814), 아들 김종한(일명 한현, 안드레아, ?~1816), 손녀 성 김 데레사(1779~1840), 손자뻘인 첫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안드레아, 1821~46) 신부…. 훗날 믿음의 뿌리가 된 내포평야 한 가운데에 자리한 충청도 면천 솔뫼(현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를 터전으로 살아온 김해김씨 일가는 숱한 순교자를 냈고, 빛나는 영광의 가문이 된다. 그들 순교자 생가는 이제 솔뫼성지로 복원돼 내포교회(대전교구)에서 신앙의 모범이 됐다.
김대건 신부에서 꽃을 피운 솔뫼 김해김씨 집안의 첫 신앙인은 그러나 김진후가 아니라 그의 맏아들 종현이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이냐시오)이 훗날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린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운 '종현'이었다.(「일성록」 기해 8월7일 ; 「추안급국안」 기해 8월 13일) 그로부터 김대건 신부의 할아버지인 둘째 택현, 셋째 종한 등 가족들이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 탁희성 작 제111도 '김진후 비오의 옥중신공'.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그는 10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면서도 기쁨 속에서 기도로 옥중생활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지천명의 나이에 신앙 받아들여
그렇지만 김진후는 입교를 거부하다가 자식들의 계속된 권유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훗날에는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됐다.
이후 박해 때마다 솔뫼 김씨 집안은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특히 김진후는 체포와 석방, 형벌, 유배를 번갈아 당하다가 1814년에 옥사로 순교한다. 그럼에도 집안의 신앙은 오히려 굳건해졌고, 언제든 시련을 이겨낼 덕행을 갖춘다.
물론 김진후가 처음부터 신앙에 열심이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평소 미신 행위와 풍수지리에 몰두했다. 은총의 길에는 마음을 닫고 오직 세상 영예만을 갈망했다. 지방 군수 곁에서 작은 관직도 얻었다. 가톨릭 신앙에 귀의할 것을 권하는 아들 종현의 간청도 계속 뿌리쳤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영예를 버리고 천주교에 입교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한다. '하느님 은총'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1791년 신해박해 당시 관아에 불려나가 신앙을 고백한 이후 그는 풀려났다가 잡혀가기를 거듭했다. 끌려간 곳도 한두 곳이 아니다. 홍주(현 홍성)와 청주, 공주 관아에 끌려가 신문과 형벌을 감내해야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엔 체포돼 유배를 갔는데, 그 와중에 한 번 배교해 목숨을 보존했던 듯하다.
유배에서 돌아왔지만 1805년 다시 체포돼 해미 진영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가 천주교 신자로서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로 알려져 있다.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박해는 공식 박해가 아니었기에 사형선고를 받지 못한 채 재판이 무한정 길어졌고,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서 그는 옥중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신중한 성품과 품위 넘치는 처신으로 주위 사람들, 특히 해미 아전이나 옥리들에게서 존중을 받았으며, 드러내놓고 신앙을 실천하고 신앙의 본분을 지켰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모범적이면서도 끝없이 인내하는 옥중생활 끝에 그는 1814년 12월 1일 해미읍성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 76살이었다. 아무리 신앙에 따른 인내가 강하다고 할지라도 그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딜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가 숨을 거둔 이유가 지병 때문이었는지, 굶주림 때문이었는지, 혹독한 심문과 매질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당한 고난과 옥중에서의 신앙과 삶으로 온 교회가 그를 기리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또 그의 신앙고백으로 그의 후손들 가운데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가 나왔다.
- 탁희성 작 제136도 '옥중에서 서한을 쓰는 김종한 안드레아'. 옥고를 치르면서도 그는 형과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을 권면하고 순교의지를 다졌다.
"순교의 은혜 받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김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은 아버지와는 또 다른 신앙적 삶의 양상을 보인다. 솔뫼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체포와 석방을 거듭했던 것과는 달리 가족과 함께 충청도 홍주(홍성)를 거쳐 경상도 영양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이주, 오랫동안 숨어살며 신앙 실천에 열심이었다.
그의 삶은 그러나 수덕적 삶에 그치지 않았다. 우련밭에서의 삶은 그래서 '덕행 실천'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심을 보였다.
끊임없는 기도생활과 이웃을 향한 애긍 실천,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가 그의 일상이었다. 낮이면 천주교 서적을 필사해 교우들에게 나눠주고 밤이면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놓고 가르쳤다. 또 미신자들에겐 복음을 전하는 데 전심전력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산속에 있게 된 이후로 그의 식사는 익힌 조와 소금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부족하면 산나물과 나무뿌리, 도토리 등으로 생존했다. 이처럼 가난한 삶에도 그는 늘 항구한 기쁨을 보였지 조금도 고생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도 쌉싸래하고 행복했던 우련밭에서의 17년은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면서 막을 내린다. 그해 5월 그는 관헌들에게 붙잡혀 안동으로 끌려간다. 끌려가는 와중에서도 그는 신앙살이를 멈추지 않는다.
우연히 배교한 뒤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던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을 만난 그는 짧은 시간이지만 적극적으로 신앙을 권면했고, 그의 말에 감동된 김윤덕은 군수에게 되돌아가 배교를 취소하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신앙을 증거한다. 그의 언사와 열심, 평소 삶이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동에서 한 차례 신문을 받은 뒤 경상도 수부(首府) 대구에 이송된 그는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지만 그 고문이 그의 신앙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다.
감옥에서의 삶도 신앙을 증거하는 여정이 됐다. 수감 중에도 아전들은 그가 천주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찾아왔고, 그는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기꺼이 토론을 벌였다. 그의 신앙적 증거가 얼마나 명료했는지 관헌들은 "제아무리 이름이 높은 자라 할지라도 그(김종한)에게 대적할 수 있는 학자는 없다. 그의 언사는 조선에서 가장 저명한 사람들의 언사에나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처럼 토론을 벌이는 와중에 2년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임금의 회신이 도착했고, 또 다른 순교자 6명과 함께 대구감영에서 참형을 받는다. 1816년 12월 19일의 일이다. 순교 뒤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됐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들과 교우들에 의해 이장됐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따르면, 그가 옥중에서 형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 중 한 통에 그의 한 생애 믿음살이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육신과 세속과 마귀)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육신이 나약할 때 영혼은 강해집니다. 그러나 영혼이 나약하면 육신이 영혼을 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육신이 안온하니 제가 영원한 죽음의 희생자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기에 저는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또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총 안에서, 그리고 모든 교우들의 기도 안에서 순교하기를 바랍니다. 그러하니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순교의) 결실을 맺도록 온 마음을 다해서, 온 힘을 다해서 날마다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감히 형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전적으로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3년 3월 10일, 오세택 기자]
5. 김종한 안드레아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78)
옥중에서의 편지(제136도)
- 김종한이 옥중에서 형에게 순교의 은혜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있다. 그림 탁희성 화백.
신자들 사이에서 '계원'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종한(안드레아, ?~1816)은 충청도 면천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출신이다. 족보에는 '한현'(漢鉉)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비오)의 아들로, 성 김 데레사의 아버지이자 성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다.
김종한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후 맏형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의 맏형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가족들에게 전했다.
부친 김진후는 체포와 석방, 형벌과 유배를 번갈아 당하다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했는데, 부친이 옥중에 있는 동안 형제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종한은 가족과 함께 경상도 영양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살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고 전교에도 힘썼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김종한은 영양에서 체포돼 안동을 거쳐 대구로 이송됐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권했으나,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다. 관장은 할 수 없이 조정에 보고하고 사형 판결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종한이 옥에 갇힌 지 1년 6개월 정도가 돼서야 임금은 사형을 윤허했다. 종한은 지도층 신자로 지목돼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했으니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평화신문, 2011년 1월 16일]
6. 예수의 삶을 몸으로 산 김종한 안드레아 (1)
김종한이라 하면 알 만한 사람이 드물 것이고, 성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라고 해야 그런가 싶다 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그를 두고 교우들의 영혼에 미치는 성령의 신기한 행적을 남긴 사람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교적 인종(忍從)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초자연적인 말을 남긴 사람이라 하여 극찬하고 있다. 그 까닭은 그가 무슨 신통한 기적을 보이거나 성령의 능력을 빌어다가 깜짝 놀랄 일들을 벌여서가 아니었다.
그는 옥중에서 자기의 큰형에게 두 통의 편지를, 그리고 이씨와 유씨 성을 가진 교우에게 한 통의 펀지를 보낸 바 있다. 이 편지의 내용은 교우들에게 금구 목설(金口木舌)인 목탁 소리여서 거기에 감복한 나머지 그런 극찬을 보낸 것이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신부도 없는 한국에서 신부에게 종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한국인이 깊은 영성(靈性)의 말을 했다는 것이 기막혔던 것이다. 하기야 서양 신학을 제대로 소화하여 우리의 것으로 실현시키지도 못하고, 서양 일변도의 문화적 신앙 유행에 넋 빼놓고 사는 오늘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희한한 느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며 감정적 충동으로 믿지 않고 믿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 탐구하고 노력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가를 알면 오히려 그 노력 과정에 찬탄을 보냈을 것이다. 또한 신앙과 이성의 노력이 책상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몸으로 살아가면서 이룬 것이라면 그의 삶을 경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신기한 능력을 도움 받아 남긴 목탁 소리가 그의 삶의 결실이었다면 그가 살아왔던 생애를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김종한이 일생에 남긴 것은 신앙의 발자국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그의 신심을 강조한 나머지 신상(身上)에 대해서는 밝혀 주지 않는다. 또한 그의 족보도 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아버지 김진후(비오, 譜名 運?)와 어머니 기계 유씨에게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족보에 따르면 종현(淙鉉, 字 希顔 1764-1824), 택현(澤鉉, 字 宗元 1766-1830), 한현(漢鉉, 字 宗漢). 희현(僖鉉, 字 季元 1785-1827) 사 형제가 있었다. 그중에서 택현은 성 김대건 신부의 조부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족보의 기록마저 종한만은 보병 외에 다른 기록이 없고 후사마저 부실하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이 된 것이다.
김종한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였다. 같은 내포 사람인 이존창이 한국 교회 창설 무렵에 입교하여 고향에 돌아와 전교할 때 종한의 맏형인 종현이 맨 먼저 입교한 듯하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천주교를 권했지만 들은 척도 안했다. 김진후는 본래 양반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대에 와서는 몰락해 가고 있었다. 그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며 술수를 익히고 풍수를 배워 지관(地官)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는 양반의 생리대로 출세와 영달이 소망이었다. 그러던 중 충청 감사의 주선으로 벼슬을 한자리 얻어 지내던 터였으니, 아들의 입교 권고가 귀에 들릴리 만무했다. 그러다가 1789년경에 와서야 천주교에 입교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세속과 일체의 인연을 끊고 사주 구령(事主救靈)에 몰입했다.
철이 든 종한은 아버지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791년 진산 사건이 일어나자 양반의 신분으로 천주교를 믿던 아버지가 무사할 리 만무했다. 그는 관가로 끌려가 신앙 고백을 했는데 어찌어찌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후 붙들렸다 놓였다 하기를 네댓 차례 하며 홍주 전주 공주 등지로 끌려 다니면서 문초와 고문을 수없이 당하다가는 유배되었다. 그가 귀양에서 풀려나 별일 없으려니 했는데 다시 체포되어 1805년에는 해미 진영으로 끌려가 영영 갇히는 몸이 되더니 1814년 10월 20일 옥사하게 된다.
가장이 천주학의 죄수로 코가 꿰어 살고 있는 집안이 오죽했겠는가. 김종한은 소년 시절 수난을 옷으로 입고 컸다. 옷처럼 벗어 던지면 그만인 신앙이 무엇이길래 고통을 선택하여 살아가는가. 사 형제 중에서 김종한은 유독 신앙과 삶의 참뜻을 골똘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성장 과정은 피정하는 세월과 진배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유배되자 그의 가정은 마을에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세거지(世居地)와 선영을 버리고 부지 소향(不知所向)하다가 태백 산맥으로 향했다. 태백 산맥의 봉화 땅 일월산이 오죽 깊은 산인가. 청년 김종한은 1789년경 일월산 우련밭(봉황군 재산면 갈릴리 우련전)이라는 심산 궁곡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 화전을 이루어서 살며 교우촌을 형성했다. 그는 우련밭에서 17년 동안 살며 예수의 모범을 따라 고행 생활을 했다. 그는 자기 삶의 목적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한 사주 구령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중단 없는 기도와 성서를 읽는 일과 신도의 본분을 지키는 것을 자기 생활의 전부로 삼았다.
그리고 그 가난한 처지에서도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애긍 생활에 힘써 형제적 사랑을 실천했다. 그가 교리서와 성서에 몰두한 것은 지식을 축적하려는 뜻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신으로 하느님을 깊이 깨닫고 일상 생활을 신앙을 실천하는 생활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앙의 지식과 성서의 말씀을 살로 만들고 뼈에 새겼다.
그는 예수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 밑도 끝도 없는 세속적 욕망과 환각적인 육신의 욕정을 불 끄기 위해 고신 극기로 살았다. 그러한 실행은 사순절의 행사가 아니라 매일의 생활이 그랬었다. 매일 대재(단식재)를 지키고 일상 양식이라야 조밥에 소금이거나 나뭇잎과 도토리나 풀 뿌리와 산채가 고작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무엇인들 못하랴. 그는 그렇게 고된 고행 생활에도 기쁨과 평화의 안색을 결코 잃지 않았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순(和順)한 기운을 잃지 않아야 하듯이 하느님을 대부모(大父母)로 모시고 사는 그의 신덕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그는 자기 구령에 도취되어 사는 이기주의의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는 낮이면 교리서를 필사해서 사방에 나눠 주고, 밤이면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토론하다가 삼경(三更)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한 열정으로 전교하여 입교시킨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가장 큰 전교 활동은 그의 말보다 그가 보여 준 기도 생활과 행동으로 보여 준 표양이었다. 그는 세속 공부에 열중할 만한 환경을 가져 본 적이 없어 학식이 그렇게 두덮지는 못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 현세에서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내세의 문제에 대하여 몰입하여 그 해답을 얻기에 전신을 갈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기 신앙을 정리하고 이론을 내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역사가 그를 극찬하는 것은 성직자가 일일이 제시해 주어야 행동하는 유아적인 신앙이 아니라 스스로 연구 노력하고 예수의 삶을 몸으로 살아가면서 체득한 신심을 정리하고 이론을 세웠던 점이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편지의 내용은 그의 영성을 역설한 것이다. 그는 그 시대의 영성가였다. [경향잡지, 1989년 6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부)]
7. 예수의 삶을 몸으로 산 김종한 안드레아 (2)
김종한은 옥중에서 큰형과 이씨 유씨 성을 가진 친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그의 신심이 표출되어 있다. 그 편지에 표현된 그의 신심을 들어 보기로 한다. 그는 가장 중요하고 요긴한 일을 착하게 죽는 것,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선하고 바르게 살다가 복되게 죽는 선종(善終)을 말한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천주를 공경하고 자가 영혼을 구하고 천국을 얻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바로 “요리 문답” 첫 조목의 교리였다.
이 말은 언뜻 듣기에는 그가 엔간히 이기적인 개인 구령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7년 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성서 읽기에 살았고 수도자와 같은 생활 양식을 수행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하신 말씀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하신 말씀을 쫀득쫀득하게 씹으며 맛들였고, 이 세상을 떠나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고 싶은 염원으로 살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는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을 이렇게 말했다. 짐승은 죽으면 허무로 돌아가지만 사람은 영원히 살게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사람의 종말은 영원한 지옥과 영원한 천당에 결정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에 떨어지면 영원한 죽음에 빠지므로 살기는 살되 진정으로 살지 못하고 죽되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말한 죽음과 지유, 영생과 천국은 어떤 곳인가. 옛 사람이 지옥을 두고 부른 “지옥가”(地獄歌)는 끔찍했다. “맹호독룡(猛虎毒龍) 잔해(殘害)하고, 화해빙해(火海永海) 끔찍하다./ 악즙독즙(惡汁毒汁) 입에가득 악성독성(惡聲毒聲) 귀에가득/ 흉형악형(凶形惡刑) 눈에가득. 악취독취(惡臭毒臭) 코에가득/ 사지백체 어느곳에 화침독형(火針毒形) 면할손가/ 억억만년 지나도록 새록새록 고(苦)로워라.
이 노래에 묘사된 지옥은 영상을 보듯 사실적이다. 그러나 김종한은 지옥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늘과 해의 광명을 볼 수 없다는 것, 언제나 캄캄한 심연 속에 빠져 있다는 것, 이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빛과 어둠, 희망과 좌절, 죽음과 생명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지옥은 하느님과 분리된 곧, 죽음이 지배하는 곳, 희망이 좌절된 곳이었다. 또한 캄캄한 어둠만이 덮인 곳, 깊은 암흑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그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어도 천당만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옥의 괴로움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게 여겼으며 병과 재난을 고생스럽게 생각지 않았다. 김종한은 루가 복음에 기록된 ‘약은 청지기의 비유’(루가 16,1-9) 말씀을 연상케 하는 말을 했다. 지옥의 괴로움을 생각해서라도 이 세상의 고통을 잘 견뎌 종말을 예비하라고 권고했다. 육신도 생명을 오래 연장할 방법을 찾는데, 영원한 생명인 영혼은 당연히 영생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재물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의 물건은 본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그 쓰기에 따라 선용하면 좋은 것이 되고 악용하면 나쁜 것이 된다. 그것은 마치 올라가는 데도 쓰고 내려가는 데도 쓰는 사다리와 같다. 어떤 물건이든 죄를 피하고 공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사용하는 사람의 지향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지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무슨 일이든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위하여 하라고 권고했다.
사랑하는 대상의 생애를 선택하여 그와 같은 운명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은혜였다. 김종한이 안동과 대구 진영에서 그를 회유시키려는 갖은 감언 이설과 모진 고문에 시달리면서 정작 두렵고 떨리는 것은 순교의 결실을 맺지 못할까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라 해도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다면 견딜 만했다. 그래서 어떤 고통과 고뇌도 그에게는 버릴 게 없었다. 그는 긴 세월 동안 금욕과 내핍과 고행의 생활로 매일을 살았다. 그는 한 번의 죽음인 순교가 있기 전 매일의 죽음으로 매일의 순교를 하고 있었다. 그가 교만과 육욕과 분노의 산을 무너뜨리고 영원한 행복을 향해 날아가라고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세속적인 욕망들에 대해 죽음을 감행하는 동안 서서히 곰삭아 형성한 신심의 표현이었다. 그는 매일의 육체적 욕망을 죽이는 체험에서 육신이 약할 때 영혼이 강해지고, 영혼이 약해지면 육신이 성하게 됨을 체험했다. 그에게 이 세상은 천국을 준비하는 방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세상은 천국에 비하여 상대적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보배였다. 구원의 결정은 이 세상의 행업으로 결정되고, 시간은 일회기적인 것이므로 이 시간에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기회가 없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러하듯 구령 사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무서우리만큼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했고 강인한 의지를 가졌다 해서 정에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옥중에서 그리운 형제와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을 생각하며 불망(不忘)의 정을 슬퍼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형수 진주 강씨가 1814년 초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겼고, 옥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종신을 모시지 못한 불효와 소상(小祥)에마저 참례할 수 없는 옥중 신세를 호곡했다.
그는 친지인 이씨와 유씨에게 의지가지없는 자기 아내의 신세를 괴로워하며 아내를 돌봐 달라고 살을 에는 비통한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인정에 목 매다는 게 아니라 애주 애인(愛主愛人)의 신앙에 호소한 것이다. 그의 호소는 어느 시대에도 들려줄 수 있는 목탁 소리 같은 교회상(敎會像)이었다. 그의 말을 첨삭 없이 그대로 들어 본다. “애덕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천주께서도 이 세상을 애덕 위에 세우셨습니다. 만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보존되겠습니까. 성교회는 오직 한 몸을 이룰 뿐이고, 하늘과 땅이 하나의 전체를 이룰 뿐이며, 세상도 또한 하나의 전체를 이룰 뿐입니다. 합심과 사랑 위에 자리잡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한 육체는 많은 지체가 있는데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지체가 어디 있으며, 우리가 떼어버리고 싶은 지체는 어떤 지체입니까. 사람은 서로서로 도움으로만 사는 것이니 육신은 영혼을, 영혼은 육신을 도와야 합니다. 생명을 보존하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비록 각 사람이 각기 떨어져 한 지체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은, 성교회의 머리는 천주님이요, 목은 동정 성모 마리아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 지체입니다. 머리를 직접 해치지 않는다 해도 결국 머리를 해치는 것이요, 이처럼 지체를 사랑하는 것은 곧 머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천주를 사랑하면 사람들을 사랑하기 마련이고 사람을 사랑하면 천주를 또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20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대구의 형장에서 1816년 12월 26일 망나니의 칼을 두 번 맞고서야 목이 땅에 떨어졌다. 그의 목숨은 그렇게 강하였다. [경향잡지, 1989년 7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부)]
8. 김진후 비오와 김종한 안드레아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7월 5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1925년 7월 5일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한국교회 순교자 79위가 시복되었고, 1949년 11월,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하시며 7월 5일을 축일로 반포하셨습니다. 교황청에서 있은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참석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님은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승리와 영광의 날이다. 하느님께 찬미! … 힘차고 또렷한 목소리로 시복 소칙서의 낭독이 있었다. 이어 (순교자들의) 영광이 드러났다. 그것은 감탄이었다.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승리와 영광의 날을 기다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이십니다.
지천명의 나이에 신앙을 받아들여 관직을 버린 김진후
순교자 김진후 비오는 김종한 안드레아 순교자의 부친이며, 성 김제준 이냐시오의 조부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입니다. 1739년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난 그는 50세가 되었을 무렵 자식들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관직생활을 하던 그는 처음에는 신앙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관직을 버리고 신자의 본분을 열심히 지켜나갔습니다.
1791년 진산사건(신해박해) 때에 처음으로 체포되었고, 이후에도 1801년까지 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05년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때 관장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는 등 신자답게 행동하였습니다.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었기에 사형판결을 받지 못한 채 1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점잖고 품위 있는 성격으로 관리들과 옥리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았습니다.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생활의 고통을 참아낸 그는 1814년 10월 20일 7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감옥을 덕을 배우는 학교로 만든 김종한
김진후 비오의 셋째 아들인 김종한 안드레아는 부친의 신앙생활과 순교를 직접 체험하면서 신앙이 굳건해졌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시련을 이겨낼 덕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홍주를 거쳐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 있는 우련전(雨蓮田)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연꽃이 물에 떠있는 듯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17년 동안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면서 끊임없는 기도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를 실천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열정적이어서, 말과 더불어 기도와 모범적인 생활로 많은 이를 입교시켰습니다. 교회서적을 필사하여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저녁에는 신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쳤습니다.
1815년(을해) 4월 23일 체포되어 안동으로, 다시 대구로 이송되었습니다. 대구 감영에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게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하였습니다. 2년 남짓 감옥에서 지내면서 신자들(김화춘 야고보, 고성대 베드로, 고성운 요셉, 이시임 안나, 김희성 프란치스코, 구성열 바르바라)과 함께 감옥을 덕을 배우는 학교로 여기고, 모든 말과 행동에 규율이 잘 잡힌 가족처럼 모범적이고 화목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서로 열심히 인내하자고 격려하고, 고난의 도가니 속에서 덕을 단련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형에게 이런 서한을 보냈습니다. “육신은 몹시 약하므로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 받기는 어렵습니다. 저와 같은 불쌍한 죄인은 순교의 영광을 누릴 만한 공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다만 여러 교우들의 도의심만 믿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빌고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제 소원이 채워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 만일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교우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나는 지금 신앙을 위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훌륭한 처지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아직 내 죄 때문에 아리따운 순교의 문턱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온갖 희생을 당합니다. 우리는 역경이거나 순경이거나 모든 것을 천주의 섭리로 생각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는 대구에서 1816년 11월 1일 열 번가량의 칼을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런 형벌을 아주 조용히 당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의 순교는 자식에게로 이어져, 딸 성 김 데레사는 기해박해 때 포도청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얼마 전 경북 영양군과 봉화군 경계에 있는 일월산 산중의 우련전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마을을 찾아가면서 여러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길을 헤매는 순례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안내해 준 경찰, 마을 위치를 가르쳐준 미잠 마을에서 아름답게 사시는 분, 바쁜 일손을 뒤로하고 교우촌에 대한 유래와 교우촌 복원을 위한 교회의 노력들을 말씀해 주신 동네 어르신 등, 마치 순교자께서 안배해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교우촌과 남아있는 신자들은 없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온전히 믿고 사셨던 김종한 순교자의 얼은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였습니다.
[경향잡지, 2007년 7월호, 여진천 폰시아노(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신부)]
9. 성 김대건 신부 집안의 순교 신앙 이끈 순교자 김종한(안드레아) [신 순교혈사]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신앙의 명가이다. 그러면 이 집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기록에는 김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현이 집안 식구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어 김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를 비롯하여 조부인 김택현 등이 입교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딸 멜라니아와 김택현이 혼인을 하게 되었다.
김종한(안드레아)은 「계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족보에는「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친 비오를 따라 형제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한 그는 이내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 주님으로부터 받은 덕행의 씨앗이 싹을 틔웠고,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시련을 참아낼 수 있는 신심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안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1791년의 박해와 1801년의 박해로 인해 부친 비오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가족들도 모두 박해자들로부터 감시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에 김종한 안드레아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물론 일가친척을 떠나 재산을 버리고 새 삶을 개척한다는 일은 스스로 고난에 뛰어드는 격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그에게는 모든 것이 희망으로만 생각되었다.
이렇게 안드레아가 가족과 함께 고향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를 떠난 것은 1801년의 박해가 일어나기 얼마 전이었다. 당시 그는 어렴풋하게 경상도 북부의 산간지대의 어느 곳에서 교우들이 함께 모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우촌 소재지가 워낙 비밀에 부쳐져 있었으므로 그곳 교우들을 찾지 못하였고, 영양 땅의 우련밭(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이라는 산간지대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게 되었다. 그가 찾고자 했던 교우촌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청송 노래산과 진보 머루산에 있었다.
이후 17년동안 안드레아는 가족들과 함께 오직 애긍에 힘쓰며, 기도와 극기생활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조밥에 소금을 얹어 먹는 조잡한 식사를 하면서도 마음에는 늘 거룩한 기쁨이 충만하였다.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천주교 서적을 베껴 사방에 전파하는 일도 안드레아에게는 더없는 보람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박해자들이 그 행복을 빼앗아 가고 말았다. 1815년의 을해박해로 노래산ㆍ머루산 교우촌이 파괴되고, 이어 4월 23일에는 우련밭에 살던 안드레아가 체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안드레아는 안동 진영에서 가혹한 문초를 받았지만, 김희성(프란치스코), 김화준(야고보) 등과 함께 이를 잘 참아낸 뒤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 감영 문 앞에 이르러 배교하고 석방되어 나오는 김윤덕(아가다 막달레나)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안드레아는 그녀에게 『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십니까? 지금 착하게 죽는 것이 고통 속에 사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권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가다 막달레나는 이러한 권면에 따라 다시 관아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고, 마침내는 무수한 형벌을 받아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은 안드레아의 차례였다. 감사는 신앙으로 배교자의 마음을 되돌린 그를 보고는 분에 못 이겨 다른 사람보다 더 가혹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순교자의 항구한 신앙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소용이 없었다. 진리를 설명하는 그의 마음은 감사의 권위를 능가하고도 남았고, 형벌과 회유는 오히려 순교에 대한 욕구를 크게 해줄 뿐이었다.
마침내 감사는 조정에 보고를 올려 처형을 재가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나지 않았으므로 동료들과 함께 순교할 때를 기다리면서 옥 중에 있게 되었다.
[가톨릭신문, 1997년 8월 24일, 차기진(한국교회사연 연구실장)]
성인명 김종한 안드레아 (金宗漢 Andrew)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양반,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6년
같은이름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신자들 사이에서 ‘계원’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Andreas)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할아버지이다.
김 안드레아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뒤, 맏형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에 앞서 그의 맏형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도움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한편 김 안드레아의 부친인 김진후 비오는 처음에 입교를 거부하였으나, 계속되는 자식들의 권유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부친 김 비오가 박해를 받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의 자녀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도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김 안드레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끊임없는 기도 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는 거의 일상이 되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또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안드레아는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감영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김 안드레아가 신앙을 증언할 차례였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권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여러 차례의 형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김 안드레아는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게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김종한은 마음 깊이 천주교를 좋아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도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혀 왔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김 안드레아는 옥중에서 두 통의 편지를 형에게 보내고, 교우들에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 영혼 구원의 세 가지 원수. 곧 육신, 세속, 마귀를 이른다)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종한 안드레아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되어서야 임금은 사형을 윤허하였다. 그러자 대구 감사는 즉시 천주교 신자들을 옥에서 끌어내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 안드레아가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는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안드레아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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