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

김현숙  아침 잠을 깨서 거실에 나오면 맨 먼저 창을 연다. 묵직한 이중창에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바람이 제집인 양 밀어든다.드맑은 하늘에 상쾌한 가을 아침이다.매일 아침 저녁 즐겨 찾는 신천은 신천대로와 신천동로를 사이에 두고 금호강과 만날 때까지 펼쳐져 있다. 강변 둔치에는 사철 아름다운 조경과 각종 운동시설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구 도심을 남북으로 이어주는 신천 교각 사이에는 각기 다른 구조로 이루어진 대형 분수도 설치되어, 무더운 여름 더위에 지친 시민들의 볼거리는 물론 심신의 휴식을 도와준다. 신천 바람은 달성군 비슬산 기슭에서 내려온다. 산기슭에서 내려온 꽃바람 소식에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신천 바람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강변에 키재기하 듯 들어선 아파트 사이사이, 숨어있는 바람과는 달리 계절마다 다른 바람이 분다.  봄마중 길에 만난 신천 바람은 엄마품 속에 포근히 잠든 아가 볼살같이 부드러웠다.봄바람 불어오는 텃밭에 씨를 뿌린다. 겨우내 움켜쥔 땅바닥이 토닥이며 일어난다.  움추린 가지가 기지개를 켜고, 재잘재잘 새싹이 돋아나고, 거친 숨 한바탕 토해놓고 다독이는 손길 따라 냉이며 쑥을 캐면서 봄을 맞이한다. 무성한 잎들이 하늘을 향해 춤을 춘다. 텃밭에 주저앉아 풀뽑기에 여념이 없다. 이마에 땀이 보석처럼 빛난다. 부드러운 봄바람도 벚꽃 흩날림에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지고, 유월 하늘 한복판에서 이글거리던 햇살은 느티나무 그늘로 모여들더니 산과 들로 소풍 다녔다. 뜨거운 햇볕 무더위를 앞두고 매년 찾아오던 북태평양 고기압이 태평양 고갯마루에서 어정거리다 한반도를 주시하더니 장마전선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물폭탄 바가지를 여기저기 쏟아내기도 했다. 바람창을 열면 열기가 더해져 더 덥다. 해마다 더해지는 더위를 감당할 재간이 없다. 그늘막을 치고 선풍기에 허덕이다 에어컨을 켰다 꼈다를 반복하며 지친 여름을 달래기도 한다. 기나긴 여름은 태양의 축제다. 더위를 피해 떠나간 사람들로 거리가 한산해진다. 더위에 지친 꽃과 나무들이 목말라 숨을 죽이고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으로 찾아온 태풍은 순식간에 더위를 몰고 간다. 변화무쌍한 자연은 늘 그러하듯 큰 풍파를 만난 인간의 최첨단 대비책도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예전과 달리 기후변화와 이상기온으로 세력을 키운 태풍과 폭우로 모든 것을 잃고 인간의 나약함을 일깨운다. 절대자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도 때로는 애절한 기도를 하게 된다.무더위, 장마, 폭염, 폭우, 태풍이란 이름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여름이지만 한숨 속에 주저앉을 수 없기에 재건의 꿈을 가지고 내일을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따뜻한 봄과 뜨겁던 여름도 들녘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따라 저마다 무용담을 쌓으며 살아간다. 가을볕에 말려둔 알곡과 분주한 손놀림으로 내 품을 떠난 자식들의 행복한 웃음으로 풍성한 가을 상차림을 한다.어느새 신천 물길 위로 스치는 가을바람은 온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나긋나긋 속삭이는 연인의 발걸음이 되어 무딘 가슴에도 안긴다. 마주친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어 발걸음을 더디게 하지만 돌아올 때는 등 뒤로 밀어내는 바람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