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천지공사
제46호(1992년 8월호) ~ 제 호에 실린 글로 원문은
이용찬씨의 건국대 석사학위 논문
(원문을 구하지 못해 일단 일부 요약합니다. 추후 논문을 구하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제목 : 현무경 부와 후천개벽사상에 대한 연구
이 글은 건국대 대학원생인 이용찬씨가 증산대성의 친필경전인 현무경을 연구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논문이다. 현무경을 학계에서 정식으로 연구하여 학위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학계의 현무경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전망이다.
- 편집자주-
( ~ : 생략기호)
~ 앞부분 생략
제47호
이상의 기사를 위주로 다른 기록들과 검토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점이 발견된다.
첫째,
증산천사공사기에는 차경석에게 현무경을 맡겼다고 되어 있고 대순전경 초판과 7판은 현무경을 지은 장소가 안내성의 집과 차경석의 집으로 각각 다르다. 그런데 천지개벽경에는 이를 뭉뚱거려 대흥리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이상호 형제와 이중성이 당시 경전 편찬을 위해 종도들의 구술을 채집하면서 생긴 차이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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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증산이 차경석의 집에서 현무경을 저술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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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무경이 차경석의 집에서 저술되었음은 확실하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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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증산이 현무경을 저술한 장소가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임에는 틀림이 없음에 비추어
증산이 현무경을 저술한 후 이를 옮겨
구릿골 조화궤에 비치하였었고 차경석이 증산의 사후 이를 다시
자신의 집으로 옮겼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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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대순전경 초판에는 현무경이 상하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후의 판에는 현무경과 별도로 병세문이 병마개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고 천지개벽경에서는 현무경과 병세문을 별도의 책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순천도에서 내려오는 현무경은 한권으로 되어 있으며 병세문이 합본되어 있다.
그리고 현무경의 출처를 순천도의 입장에서 정리한 장사수장행적 및 순천도연혁에도 두권이라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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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법사에서 전해내려오는 현무경에는 벙세문이 없는데 이것은 원래 현무경이 병세문과 나위어진 것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 장기준이
현무경을 말하면서 증산의 원본에서 몇 부분을 삭제하고 글의 순서를 바꾸었으을 시인한 적이 있음을 감안하면 장기준이 처음으로 사본을 할 때에 현무경과 병세문을 합본시켰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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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
2. 현무경에 대한 고증
전래경위에 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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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경의 전래경위는 현무경이 전해져 오는 순천도와 대법사의 주장이 조금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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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먼저 순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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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준이 계축(1913) 9월 중순에 ~~~ 장기준이 현무경 사본을 한권 만들어 가졌으면 한다는 뜻을 고부인에게 간절히 말하여 허락을 얻고 즉시 만들어 간직하니 때는 9월 24일이었다.
한편 대법사는 이정립이 증산교사와 현무경지에서 이와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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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가을에 장기동 장기준 두사람이 성적순례의 길을 떠나 ~~
1913년인 계축년 봄에 고부인을 가보고 현무경을 등본하여 와서 그 법을 잠심추구하던 중 장기동, 장기준이 찾아오므로 두 사람과 더불어 본소에 와서 고부인을 찾아보고 이로부터 교단에 협력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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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정립의 주장을 보면 스스로의 두 기록임에도 김형렬이 현무경을 등사하여 간 시기가 계축년 봄과 임자년 가을로 각각 틀리다. 이것은 원래 이정립의 형인 이상호가 대순전경의 초고를 작성할 당시 전경편찬에 찬동한 김형렬의 도움을 제일 먼저 크게 받았던 관계로 이정립도 현무경에 관한 기록에 거의 김형렬의 주장을 그때 그때 그대로 차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순천도에서 주장하는 장기준의 현무경 입수경위와 이정립의 기록을 통해서 본 김형렬의 입수경위, 그리고 이들의 이후 행적에 대략 다음과 같은 약간의 의혹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장기준의 입수경위와 그 후의 행적을 검토해 보면여기에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
만약 현무경지의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면, 즉 자신의 사본이 유의경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면 김형렬의 사본과 자신의 사본을 비교하여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을 것이 상식인데 아무데도 이러한 것은 없다.
둘째,
더욱 이상한 것은 등사한 이후 수년간 김형렬을 추종한 것은 사실인데 이 동안에 김형렬의 사본과 자신의 사본 중 보다 확실을 가져야 할 자신의 사본은 제쳐두고 김형렬의 사본과 가르침에 따랐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김형렬이 주장하는 장기준에의 전래경위에도 다음의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첫째,
유의경이 위와 같은 경로로 현무경의 사본을 습득하였다면 밖에 알려져 절도의 사실이 탄로날 가능성이 있음에도 두 사람 (장기동, 장기준)에게 이를 사출토록 하였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고
둘째,
지금 전해져 오는 순천도와 대법사의 현무경을 비교하여 보면 누가 보더라도 수넌도의 것이 대법사의 것보다는 체계적이고 부의 모양이 증산의 다른 필적과 유사하다. 만약 장기준이 유의경의 사본을 다시 사출하였다면 어떻게 여러번 필사한 것이 원사본보다 근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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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대표적 사본을 가지고 있는 순천도와 대법사의 현무경의 뿌리가 거의 일치되어 있다는 점만은 분명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위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장기준과 김형렬은 당시로서는 단 몇개만 있는 사본의 소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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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자가 부의 모양과 필적에 있어서만은 순천도의 현무경이 좀더 원본에 가까우리라고 믿은 것은 다음의 이유에서 이다.
첫째,
김형렬의 사본보다 좀 더 정확한 사본을 얻고자 장기준이 노력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것은 병진(1916년)년 그가 김형렬에게 실망하고 자신이 도리를 터득하기 전에는 남의 말을 믿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구덱 하고 고향으로 내려 갈때 과연 부정확한 사본을 갖고 갔겠느냐는 데에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김형렬이 현무경 용사에 실패함을 목격하고 자기 자신이 그 도리를 직접 밝혀보겠다고 결심했다면 적어도 증산의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하고 이를 자신하지 않고는 이를 근거로 몇년씩이나 도를 닦는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장기준이 현무경을 복사할때에 한지를 겹쳐대고 그대로 본을 떴기 때문에 원본과 거의 같으리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하여 김형렬이 어떻게 사본하였는가는 전해져 오는 바가 없어 원본과의 오차를 계량하기 매우 어렵다.
실제로 순천도 본은 앞서의 지적과 같이 증산이 남긴 다른 필적과 매우 유사하지만 대법사 본은 중산이 붓으로 서화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획의 굵기가 일정하며 글자의 크기. 부의 모양 등이 체계적이지 못하다.
세째,
순천도는 현무경의 후천도와 부의 사용법 - 일기법 관한한 장기준 및 그 제자들이 연구하고 발전시킨 바가 질과 양적인 면에서 매우 크다. 이것은 사실 타 교단에서 따르기 어려운 중산사상의 발전적인 부분이기도 한데 이것을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높이기 위하여 는 자신들의 사본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검토해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중간의 친필인분이 세 장에 나올으로서 명확한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 친필 원본은 소멸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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