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만나게 해준 그 실낱같던 인연 - How I met the love of my life.
1983년에 아내를 처음 만났으니 벌써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기념으로 글을 올릴까 하는데 사연이 조금 길지만 되돌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당시 저는 졸업을 앞두고 80년대의 암울한 현실에 숨이 막혀 유학을 결심하고 집 근처 미국 목사님부부님 댁에서 몇몇 젊은 친구들과 함께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이 공부방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아내는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 그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던 미국인 교회에서 일요일이면 피아노 반주자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죠. 키가 늘씬하고 성격이 명랑 쾌활하여 같은 클래스메이트로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 당시 저의 우선 순위는 미국유학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 저는 졸업을 하고 여름에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낯선곳에서의 학업과 생활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어 무료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국에서 같이 영어공부를 하던 그녀가 떠올랐지만 아는거라고는 학교 이름과 학년 , 그리고 전공뿐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이메일이나 카톡 이런게 없던 시절이라 그녀의 학교 과사무실로 안부 편지를 보냈습니다. 물론 답장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라 집에서 놀던 아내가 시내 나온김에 왠일인지 학교에 가보고 싶었답니다. 간김에 과 사무실에도 들렀는데 마침 퇴근하려던 과사무실 직원 언니가 아내에게 미국에서 왔다며 편지 한통을 내 주었습니다. (여기서 첫번째 인연의 끈이 맺어졌나봅니다. )
한편 미국에 있던 저는 편지를 보냈지만 역시나 하고 원래 별 기대 하지 않았던데다 곧 학기가 시작되어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어달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제가 살던 아파트의 문을 두드리더군요. 나가보니 6-7세 정도 되어보이는 작은 미국 아이가 한손에 편지봉투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건 그녀가 제게 보낸 답장이었고 어떻게 그 편지가 그 아이의 손에까지 들어갔는지, 시간은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고맙다고 하고 문을 닫으려 하는데 그 꼬마가 수줍게 말을 건네더군요. “ 제가 우표수집이 취미인데요 , 그 봉투에 붙어 있는 우표 제가 가져도 될까요 ?” 물론 저는 기꺼이 떼어주고 다시한번 고맙다고 말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아마 우표를 갖고싶어 근처 우체통에 넣어도 되는데 일부러 갖고 온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 아이로 인하여 끊어질것만 같았던 저와 아내의 인연이 다시 맺어졌습니다.
이렇게 실낱같이 가늘었던 인연이 두번의 우연으로 다시 이어지고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편지가 오고가기 시작했고 그 사이 아내는 졸업을 하고 뜬금없이 전공과는 전혀 다른 국적 항공사의 flight attendant로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경쟁률이 200:1 이었었다고 본인이 얘기한 기억이 나는데 아마 미국인 교회에서 일하며 익힌 영어실력, 유서 깊은 모 여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제법 큰 키에 붙임성있는 명랑 쾌활한 성격 이런게 모두 한몫한듯 싶습니다. 본인 셩격에도 잘 맞았을겁니다.
한번은 이런일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탄 비행기가 뉴욕에 오면 승무원들은 당시 맨하튼에 있는 호텔에 묵곤 했었습니다. 어느날 아내에게서 뉴욕으로 온다는 전화가왔었는데 당시 저는 학위가 끝나가는 학생이었고 final exam 기간이었습니다. 그때 처음 미국와서 타던 말썽부리던 차를 처분하고 제게 뭐가 씌였는지 빨간색 컨버터블 2인승 스포츠 카를 지도교수님의 코사인까지 받아서 사게되었습니다. (교수님께 코사인해달라고 서류를 내밀었는데 그때 교수님께서 “저 미친놈” 이러셨을거 같습니다. ㅎㅎ)
어쨌거나 아내에게 새로 산 차를 자랑하고 싶어 final 시험도 제끼고 아내를 만나러 가다가 필라델피아 어디선가 과속으로 단속에 걸려 그 당시에는 거금인 140불정도 현찰로 벌금을 내기도 했었습니다. 우여곡절끝에 그날 밤 10시쯤 맨하튼에 입성 , 아내를 만나 제 차에 태우고 시내를 몇바퀴도는 짧은 만남을 가진다음 숙소에 내려주고 저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 이미 시험은 끝났더군요. 그래서 교수님께 이실직고하고 약혼자가 미국에 와있는데 너무 보고싶어 얼굴만 보고 밤을 새워 지금 돌아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시험지를 내주시며 저쪽가서 시험보고 끝나면 제출하라고 하시더군요. 그 교수님과는 제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30여년간 해마다 연락을 주고 받다가 몇 년전 작고하시고 지금은 부인과 안부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후 시간이 흘러 저도 졸업을 하고 바로 직장을 잡았고 아내와도 약혼을 하고 일단 서류상으로 결혼을 하여 이민수속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아내가 오면 무슨일을 해야할까 서로 상의를 한끝에 다니던 항공사에 사표를 내고 종로에 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88 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도 칼기 폭파사건이 터졌습니다. 아마 사표를 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겁니다. 지금도 저는 제가 아내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얘기합니다.
1988년 6월 결혼식을 끝내고 둘이 미국으로 온 다음 일주일후에 아내를 데리고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에 컴퓨터 사이언스과에 등록을 시켰습니다. 제 직장이 아내의 학교와 가까와서 점심시간이면 서로 만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미국온지 두어달이 지난후 , 제 경험으로 볼때 학교다니며 파트타임으로 미리 경력과 인맥을 쌓는게 나중에 취업에 유리할거라고 아내에게 조언을 해주었더니 그 다음날부터 제 직장과 가까이 있는 주 정부에 잡 오프닝이 있는 사무실마다 혼자 직접 찾아다니며 이력서와 응모원서를 돌리더군요. 그런지 얼마후에 한곳에서 연락이 오고 졸업할 때 까지 그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다가 졸업을 하고 정식으로 풀 타임 포지션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운전면허를 따기위해 제가 데리고 다니며 운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부부사이에 운전을 가르쳐주다보면 부부싸움이 종종 생기곤 한다는데 기계치인 아내를 가르치다보면 저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지고 속터질일이 많았습니다. 속터지는 운전교육을 간신히 끝냈던 어느 무더웠던 여름날. 아내도 속이타고 힘들었던지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하더군요. 화가 제법 났던터에 속편하게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하길래 제 입에서 별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오고 결국 아내는 서러움에 눈물을 펑펑쏟고 말았습니다.미국와서 시차적응도 하지 못한채 학교를 시작했고 제발로 관공서 문을 두드리며 취직을 했을 정도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아내에게 그깟 아이스크림이 뭐라고 그랬던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때 아내의 눈물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1990년 여름 가족들의 권유로 워싱턴주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저는 미리 취직이 되었지만 아내는 이제 막 졸업을 하고 풀타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저 때문에 아쉽게도 직장을 포기하게 되었고 얼마전 구입한 집도 팔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무 불평없이 잘 따라와 주었고 첫아이를 임신했던터라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산후 첫 아이가 돌이 채 지나지 않았던 12월의 어느날 아내는 다시 직장을 잡고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어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내가 첫 출근을 하던날 자고 있는 아이를 보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지 눈물을 흘리며 나가더라고 하시더군요. 그말을 전해들은 제 마음도 무척이나 아프고 미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어느새 3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저와 아내도 은퇴를 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참 여러가지로 감사하고 고마운일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그 실낱같이 가늘게 끊어질듯한 인연을 맺게해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참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저와 아내는 지금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겠지요. 긴 세월을 저와 함께 같은길을 걸어온 아내가 새삼 고맙게 느껴집니다.
글을쓰다보니 옛기억이 주마등 처럼 떠 올라 회고 투의 글이 되어버렸네요. 평안한 밤 되세요.
첫댓글 두분은 정말 비슷하시고 잘어울리십니다. 평생 친구이자 동반자~~~ 글 질읽었습니다. ㅎ
두분의 인연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우연 + 인연 = 필연
사랑의 힘!!!!!!!!
앞으로도 지금처럼 알콩달콩 사시며 산, 바다 어디든 가실때 우리도 끼워 주시어요.
😁😁😁😁😁😁😁😁
피천득 <인연>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청산님의 글을 읽으며 정말 인연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하나님께서 맺어주시면 절대로 떨어질수 없다는것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피천득씨의 인연은 저도 참으로 좋아하는 글인데 부부의 연이란 참으로 귀하고 귀한것 같아요 청산 청아님 서로가 정말로 없어서는 안될 잉꼬새( 사랑새) 입니다 요번 백팩킹 갔을때도 한시라도 청산님이 보이지 않으면 발을 동동 구르던 청아님을 보며 부부란 나이가 들수록 서로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고 괜히 안쓰럽고 불쌍하지도 않는데 괜히 불쌍하고 그러면서 40년이란 세월이 부모와 함께 지낸 세월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내 짝꿍~ 지금까지 함께 한 그 시간들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수 없지요 두분 늘 건강하시고 하늘나라에 갈때까지 그사랑 영원불멸할거라고 확신합니다
꾾어질듯하며 맺어진 부부의 인연
30년을 서로 아끼며 사랑하며 지내오신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ㅎㅎㅎ 연애얘기 사랑얘기는 만 번을 들어도 흥미롭고 스릴있고 두근거리는 명작이지요~^^ 청산님 청아님 늘 청순한 청년의 느낌이셨는 데 꼭꼭 숨겨 둔 아름다운 사랑이 그 비밀이었군요 ㅎ 청아님께서 아기 놓고 출근하시며 눈물을 흘렸단 대목에서 저도 코 끝이 시큰했네요.. 내일도 두 분 오늘처럼 행복하셔요💕그럼 다음은 어느 분의 연애 보따리 푸실라나!??^^욯ㅎ
이제서 긴글을 보면서 두분의 인연과 삶이 한편의
영화처럼 상상이 가네요
참 긴시간 변화에 잘 적응하시고 아름답게 사시는 청산 청아님께 더 크고 아른름다운 나날이 보입니다
행복의 표본이신 두분이
하이호산악회 계심이 자랑스럽습니다.
두분 더 행복하시고
건강 하세요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에 감듕입니다. 항상 그러듯이 더욱 더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시는 두분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청산님...
글을 주욱 읽어 가면서 그때의 상황들이 그려지네요. 인연이란게 참 묘하거든요.
40여년의 세월동안 서로을 아끼고 보듬으며 사랑으로 살아 오신 두분..하나님의 큰 축복이 있으셨을줄 믿습니다. 앞으로도 주안에서 두분 강건 하시고 즐거움 넘치는 평안 삶을 누리시길 바랩니다.